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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문학의 향방: ‘창비시선 200’ 기념 대토론회

 

21세기 한국 비평문학의 과제

 

 

김병익 金炳翼

문학평론가. 평론집 『숨은 진실과 문학』 『새로운 글쓰기와 문학의 진정성』 외 다수.

 

 

정확히 20년 전 김현은 “문학비평은 문학비평이 정말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과도 싸워야 한다”고 쓴 바 있다. 그는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서울의 봄’을 맞이하는 감회 속에서 이제 문학비평은 문학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소망을 이 글에서 비추고 있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달리, 이후의 근 10년 동안의 우리 문학비평은 문학의 한정된 자리로부터 더욱 벗어나 문학외적인 현실에 대한 비평으로 치달았다. 그것은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를 흡수하면서 정치경제적 체제의 변혁을 위한 논리의 개발에 앞장섰고 문학이 사회개혁에 직접적으로 봉사할 길을 마련하는 데 노력해왔다. 문학비평이 문학의 자리 안으로 돌아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문학에 대한 내재적 비평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90년대초 그가 타계한 이후부터였는데, 그것은 안으로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평등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어느정도 보장되고 밖으로는 진보주의의 현실적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념적 긴장이 와해된 데서 연유한 것이었다.

나는 근래의 한 글에서 우리의 문학비평이 ‘문학비평’으로부터 ‘비평문학’으로 새로이 접근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는데, 그 생각 속에는 지난 20년 동안의 우리 문학비평이 경험하고 수행한 문학의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의 두 작업이 포괄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숨어 있었다. 어떤 문학비평도 그것의 존재를 조건짓는 현실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그것의 내적 실체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나의 이런 희망이란 어쩌면 동어반복의 췌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학과 문학비평, 현실세계와 문학비평이 좀더 적극적인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그 두 방향의 작업이 하나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세기 속에서 문학비평은 그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간곡한 집념에 젖어든다. 이 시기에 유달리 나의 그런 집념을 키워주는 것은 세기의 전환에 즈음해서 세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치르고 있는 중이고,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전시대와의 획을 그으며 기존의 척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삶과 사유를 펼칠 것이며, 그러는 가운데 전통적인 문화와 문학은 근원적인 존재 전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럴 때 문학비평은 남아 있는 마지막 인문주의적 덕성으로 기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한편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지식정보 사회화와 세계화로 치닫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전자공학을 통해 생명디자인 사회로 급속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이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로지르며 자본은 생산요소로서의 전래의 역할에서 그 자체에 의한 자기증식의 활발한 운동체로 변질하고 있다. 나는 이런 변모를 ‘자본─과학 복합체’란 말로 규정한 바 있지만, 전세기 마지막 10년대로부터 그것의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낸 이 움직임은 우리의 전통적인 전래의 삶을 급변시키면서 가치관과 사유, 윤리와 풍속, 개인과 사회, 사물과 인간 간의 양태와 관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그래서 삶의 질과 양상, 문화와 예술, 상상력과 감수성의 변화를 유도하고 근대주의의 덕성들을 희석시키면서 기존의 것들에 대한 의미론적 재해석과 존재론적 이유의 폐기까지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류사적 변화는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들에게 비관과 낙관의 상반된 전망을 나누어 제공하겠지만,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 우리는 삶에 대한 반성과 전망을 더불어 갖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문학이 이 변화의 세계에 어떻게 대응하고 문학비평이 인문주의적 관점에서 그 변화를 어떻게 검토하고 평가할 것인가를 질문하고 응답할 새로운 과제를 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앞서 문학비평이 마지막 남은 인문주의적 덕성이라고 했지만 근대성이 물려준 귀중한 자산으로서의 인문주의의 가치를 우리가 여전히 존중한다면 이 말은 좀더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언어에 그 존재를 걸고 있는 예술로서의 문학인 동시에 그 문학에 대한 메타비평적 기능을 갖기 때문에 어떤 예술보다도 문자적 사유와 상상력을 담보하고 있으며 말을 사용하는 어떤 인간적 행위보다 세계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정신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근대적 휴머니즘은 비인간화·탈인간화의 추세로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과 기제들에 대해 저항하고 참된 인간적 가치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힘이고, 비평이기 때문에 맡아야 할 과제인 것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에 문학비평이 대항할 우선적인 항목은 과학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가져다줄 갖가지 변화에 대해 그 의미를 천착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반인간주의적 악덕을 폭로하며 새로운 사유와 윤리를 개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인공지능의 컴퓨터문명이든 유전자공학의 인위적 인간개조이든 새로운 과학기술은, 숱하게 지적·강조되어온 것처럼 기존의 삶의 형태와 그것의 안팎의 형상을 바꾸어놓을 것이며, 그 변화의 대부분은 기성의 것과 심각한 충돌과 갈등을 초래할 것이다. 가령 지식정보화 사회는 인간의 인격적 품성에 대한 존경보다는 기능적 모험에 더 큰 무게를 줄 것이며, 정보조작 능력과 유전공학에 의한 우성인자의 선호는 새로운 계급구조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은 빈부의 격차와 기술적 마찰로 사회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며, 피조물에서 조물주로의 인간존재의 전환은 마치 『멋진 신세계』의 세계처럼 윤리관계의 전복을 초래할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더 편하고 부유하고 다양해지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경쟁으로 억압받을 것이며 생명과 환경의 훼손은 심각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의 근원적인 인간다움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사회와 개인이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어떻게 획득될 수 있는가, 새로운 문명과 전래의 문화 간의 갈등과 충돌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여기서 인간의 내면적 가치란 무엇인가라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한 사유와 대응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문학비평은, 그것이 반성적 체계로서의 문자예술이기에, 그리고 현상에 대한 메타비판적 정신작업이기에, 그러한 요구들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문학비평가는 과학의 인문주의화, 기술의 인간화를 위한 지식과 통찰이 필요할 것이며 새로운 윤리의 구성과 새로운 밀레니엄적 삶과 사회에 정합성을 가질 세계관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때의 문학비평가는 단순한 문학해석자가 아니라 문명사가이고, 사상가인 동시에 미학자이며, 과학적 이해력을 가짐과 동시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철학자여야 할 것이다.

탈산업화 시대의 비속한 자본논리가 우리의 전통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는 데 대한 문학비평의 도전도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은 한편으로 상품생산의 요소적 기능에서 금융자본과 헤지펀드로 변질됨으로써 인터넷을 통한 그 자체의 무한증식 운동의 수단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에 투자됨으로써 자본과 과학의 유착을 강화하여 더 큰 자본수익을 도모하고 있다. 이 유착은 과학과 자본의 만능주의를 유포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내면적 가치를 왜곡하고 진정한 것과 현상적인 것, 진지한 것과 키치적인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참된 인간적 삶의 진의를 파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물신화되며 교환가치가 지배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허상을 키우고 허위의 삶에 대한 반성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어떻든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전시대의 자본주의가 가질 수 있었던 근대주의적 덕성을 외면하며 실질적인 자유와 개성, 이상주의적인 박애와 평등의 이념을 밀어낼 것이다.

문학비평은 이러한 추세에 대항해야 할 것이다. 문자행위란 인간행위 중 가장 비경제적인 것이며, 바로 그 비경제성이야말로 추악한 자본주의의 경제성 논리에 저항할 자산을 이루고 금융자본주의와 자본의 무한 탐욕이 우리 삶의 곳곳에 내면화되는 가짜 현실을 폭로할 기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탐욕은 불가사리처럼 모든 것을 삼키는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비판하는 문학까지도 자신의 증대를 위한 환금적 수단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른바 상업주의적 문학이 자본주의적 마성을 보여주는 예가 되겠거니와, 문학 바깥에서 위협하고 그 안에서 동조를 얻어내는 이 자본의 운동에 문학과 문학비평이 어떻게 저항하고 싸울 것인가는 결코 쉬운 전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싸움은 회피해서는 안될 싸움이고 비평가는 본질과 현상, 사회와 문학, 작품과 비평의 혼란스러운 뒤엉킴에서 진실과 진정을 추적하여 드러내는 싸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천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본과 과학이 유착하여 이루는 복합사회에서 문학비평이 착목하여 분석·비판할 현실적 문제는 더 있다. 가령 유입된 소수인종의 권리 문제로부터 신체적·성적·지적 취약자 등의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 문제, 새로운 기술체계로부터의 낙오자, 과학기술과 정보사회화로 말미암은 새로운 불평등과 인권침해 문제, 선·후진국 간의 남북격차 문제, 특히 자연과 환경파괴 등 새로운 세기의 세계는 지난 세기의 그것이 안고 있는 것 이상의 더 많은 문제성을 품고 있다. 문학이 이런 문제와 갈등 들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기대보다 많지 않을 것이고 다른 예술보다 그 영향력이 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인간주의적·이상주의적 주제들에 대해 소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지난 세기의 정치·경제에 대한 급진적 이념들이 자랑한 이상주의의 전통을 그 내용을 바꾸어 되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문학비평이 좀더 자유롭고 좀더 인간적이며 더욱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일이며, 문학비평가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전망의 모색을 발전시켜야 할 임무를 갖는다는 것은 세기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그것의 존재이유를 확인시켜준다.

 

문학비평이 생활세계에 대한 이러한 관찰과 비판, 분석과 모색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은 80년대의 우리 문학비평이 수행해온 문학외적 비판과 그 주제는 다르지만 태도에서는 공통된 작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을 넘어, 그러나 문학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천착하며 그 의미를 검토하고 저항과 대안 추구를 문학비평이 수행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 작업은 그러니까 문학의 내재적 비평을 오히려 강화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동정과 자본운동의 현실에 대한 주목이 비평가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하지만 그 주목은, 그가 문학의 비평가이니까, 문학과 그 작품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것이며, 그래서 문학외적 비평에는 문학내적 분석이 우선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문학의 외재적 비평과 내재적 분석은 현실에 대한 반성의 자료로서 혼융되어야 할 것이다.

이 혼융에서 우선 고려할 것은 새로운 과학기술과 자본운동에 의해 문학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미 컴퓨터기술과 그 보급은 모든 분야에 현저한 기술적·감각적 변화를 일구어가고 있는데, 문학 역시 문자의 형태는 유지하면서 창작과 유통, 수용과 소비에서 커다란 변모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변모는 종이책으로부터 온라인 도서로의 진전, 리얼리즘의 퇴조, 문체의 변화, 그리고 문학시장에서의 서점과 출판사의 약화 등 문학사회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자예술로서의 문학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동요되어 영화와 영상의 이미지 문화에 밀려 주변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같은 문학의 조건과 제도, 위상과 기능의 변화는 앞으로의 문학의 운명에 대한 비관을 자아내고 있다. 이때 문학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삶의 조건과 새로운 문명체계가 문학 속에 어떻게 내재화하며 그 변화를 수용 또는 저항하는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작업과 함께, 더 큰 틀에서 기존 문학의 보수를 도모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명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도록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 또는 더 나아가 문학의 죽음까지를 수락하며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문학의 부활을 희망해야 할 것인가의 어려운 문제가 동반될 것이다. 앞으로의 문학비평은 그 역할을 최소한으로 축소한다 하더라도 이 착잡한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적 상황의 변화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문학적 감동, 미적 감수성, 그러니까 문학의 문학다움에 대한 반성을 요구할 것이다. 이미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젊은 세대의 상상력은 역사와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육체적 감각과 전자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진지한 인간적인 주제는 욕망과 쾌락의 주제로 바뀌고 있고, 리얼리즘의 문학세계는 환상의 세계로 움직이고 있다. 작가는 창조자로부터 제작자로 전이하고 작품은 독자의 참여에서 일회적 소비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그러는 대신 기존의 문학에서 거두어들인 정서적 감동은 이제 오히려 영화와 만화 혹은 게임과 문화상품에서 길어내고 있다. 미적 감수성의 변화, 그 감동의 연원의 이동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중세와 거대한 구분의 획을 그었던 근대문학의 당초보다 더 큰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이 전환을 문학의 위기 혹은 죽음으로 받아들이든 새로운 문학씨스템의 태동으로 기대하든지간에, 문학비평은 그 문학개념의 혼란을 감당하며 그에 대한 의미화와 평가의 작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는 전통적인 문학개념을 보수하면서 그 문학사적 전통에서 새로운 문학형태를 접합하며 그럼으로써 문학의 영속성을 지켜내는 과제를 싸안는 일을 포함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적인 과제 하나를 더 우리 문학비평에 첨가해야 한다. 8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북한문학의 연구를 확장하여 우리 한민족문학사 속으로 흡수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그동안의 성과로 분단 반세기 동안 감춰져왔던 북한문학의 대강은 우리에게 전시되고 있지만, 이제의 작업은 그것의 본격적인 연구와 수용,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지향의 문학과 통일 이후의 한국문학 편성이라는 새로운 일로 진전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한국문학의 부피를 키우며 문학적 다양성을 일구어줄 뿐 아니라 분단민족의 화해를 위한 매우 의미깊은 성과를 마련해줄 것이다.

 

나는 문학비평가에게 너무 많은 과제를 떠안기고 현재와 장래를 향한 문학비평의 작업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문학비평가가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고 평가하며 문학사를 구성하고 문학이론을 전개하는 전래의 기본작업으로부터 세계를 통찰하고 인류의 미래를 예상하며 문화와 문명에 대해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르네쌍스적 석학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비평가가 이런 거대한 작업을 하기 힘들 뿐 아니라, 더욱 불행하게도, 문학비평의 영향력은 점점 더 쇠약해져가고 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문학비평 무용론이 대두할지도 모른다. 문학의 힘과 덕성은 변두리로 밀려나고 작가의 위신은 추락하고 있으며 ‘비평’이란 작업은 문화나 영상 분야의 비평이 문학을 선점해서 그 장기를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현상 자체를 검토하고 대응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문학비평에 주어질 우선적인 과제가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의 퇴조를 바라보며 비관하는 나의 태도는 역설적이다. 나는 시대가 진전하고 문명이 풍요해질수록 문학비평이 감당해야 할 과제는 더욱 크고 무겁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과제 담당자의 위신과 영향력은 더 쇠락해질 것이라고 우울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역설에서 문학비평의 새로운 출발을 발견하고 싶다. 그것은 반성인 동시에 기약이며, 자기확인인 동시에 세계에 대한 직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명사적 전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의 존재전이에 따른 문학비평의 혁신을 의미하며, 나는 그 문학비평에 자본-과학 복합체 시대의 허위와 허상에 저항할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그 새로운 문학비평의 출발을 위해 문학비평을 위한 작은 제의를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문학비평이 의미화의 작업으로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화는 작가와 작품의 의미를 해명하며 그것을 시대와 세계에 대조하여 인간다움의 의미로 발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작가와 작품이 진술하는 현실과 인간의 실상을 비판하고 반인간주의적인 메커니즘과 문명을 폭로하며 삶의 진의와 정신의 고귀함을 일구어내는 진정성과 진지성으로 실제화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의미화를 통해 문학비평이 비평문학으로 승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문학비평은 창작문학에 부연되어 그것의 성과를 가름하는 작업이지만, 비평문학은 그 자체 시와 소설의 창작과 같은 위상에서 문학의 창조적 위신을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평은 이렇게 문학이 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세계를 비판하는 예술적 임무를 창조의 문학과 함께 떠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에만, 자본과 과학이 지배하는 비인간적인 세계를 문학의 인문주의적 속성으로 관찰하고 해부하며, 언어예술의 이름으로 폭력과 왜곡의 세계를 비판하고 저항할 힘든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