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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허혜정 許惠貞
1966년 경남 산청 출생. 1987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가 있음.
밤의 고속도로
톨게이트 불빛이 등뒤로 사라지고
실내등은 꺼졌다. 먼지 쌓인 차 안에서
손가락은 더듬더듬 테이프를 꽂는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광적인 찌고이네르바이젠
피로 속에 다가오는 이상한 광휘처럼 서늘하게 젖어드는 음악
까물까물 별들이 돋아오는 그 길을 따라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다. 불빛은 그토록 낯익은 간격으로
120Km를 늘어서 있고, 청주 진입로를 지나 밤의 아파트단지
아침의 신문지가 마구 어질러져 있는 탁자
개수대에 그대로 쌓여 있는 접시들
끈덕지게 다 마쳐야만 하는 하루하루들
그 끝엔 바람이 뜨겁게 두 눈을 들이미는 나의 노트가 있다
침묵하는 폭탄처럼 쌓여 있는 낡은 종이박스들
머릿속의 프린터에 가득가득 종이를 채우면
욕망은 육체의 건전지다. 머리가 냄비처럼 폭발하고
뇌수는 사이다처럼 거품지며 흘러나온다
벌써 창은 비밀스런 어둠으로 열려 있다
서늘한 바람이 텅 빈 빌딩과 크레인을 넘어온다
탁한 매연과 암모니아 배기를 지우며
유리컵 속에 가늘게 흘러든 스탠드 불빛 아래
고치고 출력하고 다시 쓰고
밤새도록 트레일러를 끈 화물기사처럼 피로에 젖어
달려가고 있을 뿐
앞차를 바짝 따라붙고 때로는 추월하며
청주, 서울, 학교와 무수한 거리를 거쳐
나지막한 산야와 구부러진 등성이들을 지나
머나먼 우주에서 날아오는 투명한 전자들의 소나기처럼
이마를 씻어주는 푸른 은빛의 공기
언젠가는 쉴 수도 있으리라
의식하지 않고도 미끄럼치게 하는 힘
감춰진 근원에서 고요히 솟구치는 간헐천처럼
울퉁불퉁한 바위를 뛰어넘어 튕겨오르는 냇물 폭포에서 날아오르는 거품
한줄 한줄 힘차게 터뜨리며 밀려가는 물방울의 한판 춤사위
미친 듯이 곤두박질치던 내리막길을 지나
견고한 뿌리처럼 들판을 움켜쥐고 있는 강줄기들
속속들이 눈물을 간직한 갯벌에 서서히 잦아드는 파도
겨울 썰물가로 가득히 날아드는 바닷새 무리
파도가 무섭게 쓰러지며 열어놓은 하늘
서서히 물결치는 손가락은 다시 모르는 육지를 더듬고
그렇게 슬프고 대담한 몸짓으로 육탄공격을 하는 물살
곡괭이로 벼랑을 찍어 오르는 파도처럼
음악은 계속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낀 순간 시작되었던 음악
그 한없는 격류의 그림자가 하나의 이미지로 고여들고
더이상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괴로움만이 확실한 이정표였으니
더 달려야 한다. 나 혼자서 더 멀리
나의 목소리는 빗물 속에 자란다
빗소리에 나의 말을 빼앗겼다
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눈물의 작은 비
타자기의 검은 침이 잉크테이프에 박혀갈 때마다
흐린 구멍이 뚫려가고 있었다. 힘드니? 아니요
무슨 말을 했었는지 바람에 날리던 책장
들어가 주무세요, 쳐놓을게요. 녀석
무엇이 그토록 그 시간을 빛나게 했는지 나는 모른다
거기 당신이 ‘어머니의 눈물’이라 불렀던 묵주가 있었다
갈색의 향합, 낡은 장서들, 거기 나의 무덤
나의 뿌리가 있다. 눈물, 하염없는 눈물!
어느덧 바람의 손가락이 되어 유리창을 두드린다
저예요, 저예요, 아버지가 창문을 닫으신다
당신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삶이 다 가도록, 죽을 때까지 그럴 수도 있겠지
잊을 수가 없었다. 오직 당신의 딸애를 만나기 위해
차가운 빗물의 터널을 뚫고 어떻게 고속도로를 달려왔는지
상처에 시리게 덮여오는 거즈처럼 다가오던 손
그렇게 비통한 얼굴로 내 슬픔이 멎기만을 기다리던 눈
눈망울 전체가 눈물이 되어버린 눈
꿈꾸며 외로웠던 날들처럼 기억의 반딧불이 어지럽고
희미한 빛에도 감광되고 마는 아픔. 나는 알고 있었다
당신이 축복한 아이는 내가 아니라는 걸
아버지 제게 주실 축복은 어디 있나요
그럼 왜 우릴 같이 키우셨나요
죽도록 취한 채 새벽의 현관에 기대 서 있었다
저한테 기대하실 게 뭐가 있겠어요
이년이! 순간 귓가로 멍멍히 몰려들던 따가운 피톨들
너무나 닮아 내 손처럼 느껴지던 손
차라리 절 죽여버리지 그러셨어요
작은 어깨가 와들와들 떨릴 때 상처를 가득 채운 검고 끈끈한 피
갑자기 하늘은 기억의 빛으로 가득해진다
온세상을 당신의 눈빛으로 채우면서 하얗게 흩날리는 비
저 빗물은 자신이 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
나무에게 부어주는 사랑을. 기억하나 느끼고 있나
저 빗물 속에 어린 목소리가 자랐다
번민을 모르고 흐르던 말들
어서 달려가봐. 그가 쓰러졌잖아
오랜 고통이 녹아가는 순간 나는 흐느꼈다
저 소리, 가슴까지 서럽게 부딪쳐오는 소리
길고 아름다운 불꽃을 달고 유리창을 스치는 빗물의 문장
푸른 밤
썰물이 벌거벗은 갯벌에 남겨놓은 여윈 조개껍데기의 얼굴
차갑게 식어버린 바닷물이 그곳에 담겨 있다
탁한 먼지가 날아드는 남산터널 끝에서
저 달을 본 적이 있다. 복사지를 잔뜩 안고 나오던
도서관 밖에서. 자 빨리 걸어, 저녁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아이를 재촉하며 돌아오던 아파트 소로에서
그리고 그날
파란 시약을 달빛에 비춰보며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우와, 아기다!
얼마나 오래도록 그들은 껴안고 춤추었던가
침대 위에서 뛰노는 아이처럼
기꺼이 따랐다. 저 달의 명령을
금속의 저울과 몸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기계
로켓에 쌤플을 채취당한 달처럼 수많은 채혈과 검진
자 가는 거야. 공포와 싸우며 걸어들어갔던
그 하얀 고통의 방
더 가까이 오라
도시의 안테나에 얼굴이 엉망으로 찢기며
유리창 가까이 볼이 닿도록
느낄 수 있다. 네 속에 서서히 몰아치는 우박
너는 무수한 소혹성이 때리고 간 두창 걸린 계집이다
네 몸이 깨어지고 깨어지고 깨어질 때
거만한 도시와 기계와 이념과 모든 것을 삼키며
시바의 춤처럼 소용돌이치는 바다
하지만 지금 너는
지독한 밤훈련을 요구하는 엄격한 코치다
마지막 옷이 서랍으로 들어가고, 아이가 가까스로 잠들고
밤드리 노닐던 네 남편이 창녀를 찾아갈 때
저 달의 고통을 말 속으로 모아라
식어 있던 몸이 다시 뜨거워지고, 모든 잡념이 깨져나가는 시간
얼음 위에 난폭하게 긁혀나간 스케이트 자국처럼
어지러운 노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