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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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인석 崔仁碩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1980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희곡 당선. 1986년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 당선. 소설집으로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나를 사랑한 폐인』 『아름다운 나의 귀신』 등이 있음.

 

 

 

모든 나무는 얘기를 한다

 

 

1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장수호는 유능한 카피라이터였다. 내가 회사에 입사하여 인사를 하러 가서 만난 그의 몰골은 참으로 기괴했다. 머리를 감은 지 얼마나 된 것인지 기름때가 낀 산발에, 기르는 것은 분명 아닌데 면도를 몇주일이나 하지 않은 건지 코밑이고 턱이고 비죽비죽 함부로 비어져나온 수염에다가, 눈에는 눈곱이 끼고 길게 자라난 손톱 밑에는 때가 끼여 있었다. 더러운 운동화를 한쪽은 신고 한쪽은 벗은 채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원고를 읽던 그는 내가 들어서자 말했다. 김중호씨 자신을 소개해봐요. 내가 무슨 학교를 다녔고, 전공이 뭐고, 취미가 뭐고…… 하고 늘어놓자 그는 구경하는 것 같은 시선으로 멀거니 나를 쳐다보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말고. 광고회사에 들어왔으면 광고처럼 소개를 해야지. 20초 안에. 얼마짜리 시간인지 알아? 삼천만원짜리야.”

내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그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쟀고, 20초가 지나자 회전의자를 빙글 돌려 나를 외면하고 책상을 향해 돌아앉았다.

“됐어. 잘 들었어.”

장수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다 하여 그가 건방진 사람이라거나 남을 쉽게 무시해버리는 사람이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카피팀의 장(長)이었던 그는 오히려 나를 포함한 신입사원들에게 가장 친절한 고참이었다. 아니, 어쩌면 무심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가 나에게 세심하게 일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팀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였을 뿐일 수도 있다. 업무 외의 일에 대해, 특히 사적인 일에 대해 그와 깊은 얘기를 나눠본 기억은 별로 없다.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그에게서 돈을 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언제나 텁수룩한 머리칼에 들쭉날쭉한 수염에다가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 청바지에 낡은 코르덴양복 윗도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는 그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 자신감에 찬 자유주의자로 보였다. 그래서 그가 대학 다니던 시절 학생운동 과격파였으며, 그로 인해 감옥살이까지 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장취업을 했던 공장에서 만난 여공과 결혼하여 아직까지도 금실좋게 같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그에게 은근히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한때 맑스주의자였다면서요?”

그는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도 그래.”

광고회사에서 카피팀을 이끄는 연봉 일억의 맑스주의자라, 하고 내가 혼자 그의 대답을 음미하고 있을 때 그가 덧붙였다.

“타락한.”

나는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음을 터뜨렸으나, 그는 웃지 않았다. 술잔을 비워내고 내게 내밀며 말했다. 내 카피를 잘 들여다봐. 선전선동이라구. 빨리 소비하고 많이 소비하고, 빨리 망해버리고 많이 망해버리자, 그런 내용의. 그러나 그것은 일억원의 사적 이익이 생기는 선전선동이었다.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한 얼굴의 나에게 그는 말했다. 웃어. 그러면 돼. 비로소 그의 입술에 미소가 언뜻 떠올랐고, 나는 다시 웃었다. 그는 웃는 나에게 역시 웃는 얼굴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맑스가 살아 있을 때 자신은 이미 맑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난 맑스주의자 아닌 맑스주의자야. 타락한 맑스주의자. 맑스주의자들은 날 맑스주의자로 쳐주지 않을 거야, 아마. 그러니까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맑스의 마자도 모르는 놈이라고 망신이나 당할 거야.

그는 야근을 하거나 밤을 새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집들이나 엠티를 갔을 때는 직원들과 술이나 도박으로 밤을 새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브레인스토밍을 위하여 엠티를 갔을 때는 탁자에 마주앉아 30분간의 명상, 또는 잡념, 또는 침묵으로 회의를 시작하여, 한 시간 회의에 20분 휴식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아무리 바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가끔 연락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는데도, 회사에서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으레 오후 늦게 그가 전화를 했다.

“여기 홍콩이다. 골머리 아파 놀러 왔다. 그렇게 알고 있어.”

홍콩일 때도 있고 홋까이도오일 때도 있었다. 월출산이기도 했고 울릉도이기도 했다. 가끔 그런 곳에서 팩스로 카피가 날아들어온 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그의 일에 별로 간섭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간섭하지 않는 것이 그를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길임을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2

 

엠티를 나선 길이었다. 회의를 겸한 엠티가 아니라 날밤을 새우고 일에 매달려 좋은 성과를 얻어낸 카피팀 전원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겸한 사실상의 단체 휴가여행이었다. 장수호의 말대로 많이 소비하고 많이 망해버리자는 짓인 듯, 속초에서 배터지게 회를 먹고 술을 마시고, 설악산에는 삭도(索道)를 타고 권금성까지만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전원이 벌거숭이로 온천에 들어가 땀을 빼며 고스톱을 치며 간밤의 취기와 피로를 풀고 나와서, 다시 회와 술을 배터지게 먹고 마시고, 그 다음날은 차를 몰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풍광 좋은 도로 가운데 하나라는 7번 국도를 타고 한쪽으로는 바다를, 반대쪽으로는 산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치달려 강릉까지 내려간 다음 경포대 바닷가에서 다시 회와 술을 배터지게 먹고 마시고, 그 다음날 온종일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이 울진의 불영사 앞이었다. 술과 포식의 강행군에 지친 일행은 민박집에 숙소를 정하자마자 절에 올라가는 것도 다음날로 미루고 저녁도 뜨는 둥 마는 둥 여기저기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 뒤척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절에나 올라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숙소를 나섰다. 길고 긴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나는 장수호를 발견했다. 그는 도로 한쪽에 콘크리트로 만들어놓은 벤치에 앉아 고개를 꺾어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는 반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응, 하고 대답할 뿐, 여전히 허공에 던진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넋을 놓고 앉아 있거나 생각에 잠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허공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슨 충격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라가는 길이세요, 내려가는 길이세요? 내가 묻자 그는 여전히 허공에 던진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반문했다. 응, 왜? 내가 대답했다. 올라가는 길이면 같이 가자구요. 그는 내려가는 길이라고 말했고, 나는 다시 혼자서 절을 향해 발을 옮겼다.

새벽의 절간은 엷은 안개와 정적에 잠겨 신비스러웠다. 호수에 비치는 불상의 영상이 아니라 해도, 절 자체가 오래되어 잊혀진 꿈의 자취 같았다. 희미하게 기억은 나지만 그 실감은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조차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그런 꿈, 또는 기억. 절 안을 혼자 느린 걸음으로 한바퀴 돌아보는 동안 나는 시원한 물 속을 벌거벗은 몸으로 힘들이지 않고 헤어다니는 기분이었다. 물, 물 속처럼 절은 고요했고, 가끔 풍경이 울리면 그 소리의 물결이 정말 보이는 듯했다.

절에서 내려오다가 나는 다시 장수호와 마주쳤다. 그는 아까 내가 본 바로 그 자리, 그 벤치에 앉아 있었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맞은편 허공에 던져져 있었다. 아직 안 내려가셨어요? 뭐 하세요? 그의 얼굴이 공포에라도 질린 사람처럼 먹먹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려갈 수가 없어.”

그의 음성이 떨렸으므로, 나는 놀라 한걸음 그를 향해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나는 왜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할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것이 몇차례나 반복되었다. 마치 갑자기 말을 잃은 사람 같은 꼴이었다. 입을 벌려 허공을 한입 베어물었다가 다물고, 다시 벌려 또 한입 허공을 베어물고. 내가 대답을 듣기를 포기할 즈음에야 그의 목구멍에서 겨우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저놈이 나한테 말을 한다.”

그는 여전히 시선을 허공에 던져놓은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요?”

“저놈이, 저 나무가.”

나무가? 말을? 나는 다시 한번 놀라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가 보고 있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키가 높다란, 소나무들 너머 서너 자 더 높은 키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높이 세운 자작나무였다. 엷은 안개 너머에서 자작나무의 나뭇잎들이, 모든 나뭇잎들이 손짓하듯 흔들리며 희미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아침햇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과연 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 법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무슨 말인지.”

그의 어조는 너무나 침통했다. 정말 그는 그 나무가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할말을 잃고 그의 얼굴과 나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말인데 못 알아듣다니.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저놈은 지금 인간의 언어와 너무나 가까운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그의 자책 또는 낙심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웠다. 그는 술이 덜 깬 것일까. 아니면…… 미쳐가는 것일까. 잠깐 내 뇌리에 스쳐간 생각이었다. 나는 얼른 그 불길한 생각을 뿌리쳤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저놈을 봐. 다른 놈들은 전혀 나뭇잎을 흔들어대지 않고 있어. 바람이 부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저놈만이 나뭇잎을 흔들어대고 있어. 손짓하는 것처럼.

“그걸 어떻게 아세요?”

“뭘?”

“저 나무가 인간의 언어와 가까운 언어로 말한다는 걸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저놈이 말을 하는 걸 어떻게 들었겠냐? 저놈이 말을 하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

어떻게 보면 논리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나무가 말을, 인간의 언어와 가까운 언어를 구사하다니?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판을 깨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장난 그만 하고 어서 내려가요. 내려가서 해장술이나 하시든지, 식사를 하시든지…… 술을 덜 먹어서 그런 게 들리는 모양이네요. 그는 실망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 들리냐, 너한테는?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들리긴 뭐가 들린다고 그래요? 참 형님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장수호는 새벽에 누군가 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를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소리는 아마도 꿈에서 들은 것이었을까. 아직 하늘에는 어둠이 가시지 않아 반투명의 검푸른 허공에서 어둠과 빛이 교차하고 있었고, 새벽별이 하나둘 하품을 하며 빛의 장막 너머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는 숙소에서 나와 천천히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안개가 차츰 엷어지면서 나무들이, 길과 하늘과 산과 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부터 절에 올라갈 생각은 아니었으나, 길을 나선 김에 절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쉬다 갈 생각으로 콘크리트로 만든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담배를 피워 물고 고개를 든 순간, 그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엷은 안개 속에, 키가 큰 선비처럼 그 나무는 단아하고 의젓했다. 그 나무가 그에게 나뭇잎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다. 다른 나무는, 나뭇잎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직 그 나무가 말을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나무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며 쉬다가 계속해서 산길을 올라가 절로 들어섰다.

안개는 연못에서, 대웅전의 지붕에서, 대웅전 문에서도 피어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그 자신의 몸에서도 피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엷은 안개 속을 휘적휘적 걸어다니는 맛은 각별했다. 부처의 미소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하는 너도 없고, 니가 걱정하는 걱정도 없다, 하고 말하는 듯했고, 그래서 그는 나는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하고 말하고 싶었으며, 그 다음 순간에야 정말 자신에게 아무 걱정도 없는지를 돌이켜보았고, 걱정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생각이 없는 것과 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칫 그런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파올 것 같았으므로 그는 부처를 흉내내어 생각도 없고 통하는 것도 없고, 없다는 것도 없다, 하고 중얼거렸다.

절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는 무심코 한 나무의 둥치를 짚었고, 그 순간 그 나무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 나무, 절로 올라갈 때 본 바로 그 나무가 그를 굽어보며, 나뭇잎을 흔들며 그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말, 말이었다. 그 나무는 말을 하고 있었고, 그는 분명히 그 말을, 적어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다만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뿐이었다.

“내가 미련해져서 말이야.”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그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꺾어 나무를 올려다보던 그는 손을 들어 나무둥치를 쓰다듬으며 사람에게 하듯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못 알아듣겠어. 나중에 다시 올게.”

그날 우리 일행은 근처의 성류굴과 원자력발전소를 둘러보고 무영계곡에 들어가 또다시 술로 회로 배를 채웠다. 그러나 장수호는 숙소를 떠나지 않았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다음에야 나는 그가 말하는 나무 앞에 가서 깔개까지 하나 깔아놓고 거기 앉았다 누웠다 하며 술을 마시다 책을 읽다 낮잠을 자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그놈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어요? 뜻밖에도 그는 빙그레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3

 

어머니가 암으로 쓰러지자 수술비와 입원비 등 치료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돈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란 묘한 존재다. 돈을 빌리자고 한다면 장수호에게 상의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직감이었다. 그런 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은 안다. 누구에게 돈을 쉽게 빌릴 수 있는지, 누구에게선 결코 돈을 빌릴 수 없는지를. 겉으로, 평상시에는 돈에 대해 지극히 초연한 듯 대범한 듯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막상 곤란한 형편이 되어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들에게는 언제나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준비되어 있고, 그 이유를 너무나 초연하게, 너무나 대범하게 늘어놓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인색해 보이거나 앞뒤 꽉 막힌 듯 보이는 사람들, 남의 일에 무심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까다롭지 않게 도움을 베푸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자들은 본능적으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그런 감각을 훈련시킨다고 해야 할까.

또한 묘한 것은 가난한 자의 심리다. 나는 어째선지 장수호에게는 돈 빌리자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생활해온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에게는 나의 구차스러운 꼴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이 다급해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을 꺼냈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나가자, 하고 일어섰고, 그 길로 나를 데리고 은행에 가서 천만원을 인출하여 내 손에 건네주었다. 어디에 쓸 거냐거나 언제 갚을 수 있느냐거나 따위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으레 하게 마련인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섭섭할 지경이었고, 그 때문에 반감이 생길 정도였다. 회사에 다시 들어서면서 그가 한 말은 이자 줄 생각 말라는 것이 다였다.

그 빚을 갚는 데는 2년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그 돈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한번 눈치 준 적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미리 은행에 들러 그의 통장에 돈을 입금시킨 후, 그에게 형수님까지 같이 모시고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으니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퇴근 뒤에 나는 장수호 부부와 함께 아내가 미리 예약을 해둔 음식점으로 갔다. 은행에서 받은 무통장입금증을 내밀자 그는 고맙다, 하고 말했다. 그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기까지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와 아내는 몇번 거듭하여 고맙다는 말을, 돈을 빌려준 것도 고맙고, 말 한마디 없이 2년 동안이나 기다려준 것도 고맙다는 말을 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괜찮아, 괜찮아, 했다.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나는 높은 이율이 아니라 은행이율을 적용해 계산한 이자를 봉투에 넣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이러지 않기로 했지, 하고는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고, 그는 다시 뿌리쳤다. 이번에는 아내가 말했다. 그러시면 저희가 너무 죄송해져요. 마침내 그가 나를 쳐다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맛있는 저녁 얻어먹는 것으로 됐어. 밥맛 술맛 다 떨어지니까 그거 어서 주머니에 넣어둬.”

나는 그것이 그의 본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돈을 빌리는 원인이 되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 역시 문상을 왔었으니까.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쎅시하고 조용했다. 공장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고 가는 몸집에 둥근 어깨, 허리는 수호의 팔뚝 굵기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고, 손가락에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소박한 실반지 하나가 이채로웠으며…… 얼굴과 몸 전체에서 어딘지 노곤한 피로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기까지 그들 부부와 우리 부부 사이에는 영화 얘기가 띄엄띄엄 오갔고, 회사 돌아가는 형편 얘기도 드문드문 오갔으며, 정치 얘기도 한두 마디 오갔던 것 같다. 그의 아내와 내 아내는 고들빼기 김치 담그는 법에 대해서도 얘기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직장 선후배 부부가 만나 저녁을 같이 먹는 자리에서 오갈 법한 대화의 선을 넘지 않는 평범한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밥과 함께 몇잔 술을 마시고 식당에서 나와 헤어지려는데 그가 문득 내 어깨를 잡으며

“씨이발, 세상 좆같아. 그렇지?”

하고 말했을 때는 나도 내 아내도 깜짝 놀랐다. 그가 돌연 어떤 선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나는 짐작했다. 언뜻 눈물이 솟았으나 나는 애써 참았다. 그는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내던지며 투덜거렸다. 좆도 아닌 돈 몇푼이 사람을 왜 이다지 주눅들게 만드는지. 그것은 꼭 내가 해야 할 말 같았다. 이리 와, 임마. 여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우리끼리 술이나 더 퍼먹자. 아내가 얼른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 그의 아내도 까딱 고개를 숙였다. 그들 두 여자가 멀어져가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그는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씨발놈, 눈물은. 2년 동안 니가 그 꼴이 뭐냐, 임마. 이게 뭔데 이런 거 때문에 그동안 내내 내 눈도 똑바로 못 봐? 이리 와, 씨발놈아. 그는 허름한 소주집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그날 밤 그와 나는 술에 만취하여 여관방에 들어가 잤다. 아마 나는 우리 집 사는 꼴을, 너무나 가난하여 방 한칸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전국의 친척집에 뿔뿔이 흩어져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우리 집 형제자매들 얘기를 포함하여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꼴을, 어머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눈물콧물을 섞어가며 늘어놓았던 것 같다.

그때 그는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했다. 얼마 전에 돌연 안기부 수사관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집만이 아니라 아내 쪽의 친가와 외가 양쪽 집안 모두, 그리고 그 방계 집안 모두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사관들이 그들에게 한 질문도 똑같았다. 그의 아내 유영선의 막내숙부가 근래에 찾아온 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막내 숙부라니? 장수호는 그제서야 유영선의 집안 어른을 통하여 영선의 아비의 동생 가운데 6·25동란중에 월북한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선에게는 막내숙부가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안기부 수사관들 말에 의하면, 그 막내숙부가 북한당국으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띠고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장수호 부부가 받은 조사가 가장 가혹하고 치밀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 부부의 전력 탓이었으리라는 것이 수호의 추측이었다. 얘기 끝에 그는 낄낄거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너 나한테 빌렸던 그 돈, 잘못하면 공작금으로 오인받아 조사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술김에도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홉시 뉴스에 종종 간첩단이네 지하당이네 하는 사건들이 터져 공안검사들이 연락책이니 자금책이니 하는 직함을 써붙인 조직표를 그려놓고 기자회견을 하는 광경이 방송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방송을 볼 때의 느낌이란 반신반의,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세상이 온통 간첩으로 우글거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그리고 어쩌다 재수 없으면 나 같은 별볼일 없는 자도 저런 조직표에 이름이 내걸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것이었다. 가끔 저런 사건을 만들어내어 공표하는 자들의 목적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웃어대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으므로 나 역시 배포가 커졌던 것일까. 나는, 괜찮아요, 망할 놈의 세상, 하고 내뱉었다. 큰일날 뻔했군요, 선배님. 다친 데는 없으시구요? 내가 묻자 그는 여전히 킬킬거렸다.

“다친 데는 없다, 적어도 나는. 하지만 마누라는 다쳤다. 내 자식놈도 다치고.”

그들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있었다고 말했다.

“마누라 뱃속에 있었어. 그런데…… 잃었다. 마누라는 출산능력을 상실하고.”

돈 벌려고 안달복달하지 마라. 그가 말했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우린 공작금을 받는 거다, 이놈의 세상으로부터. 그러니까 돈 때문에 비굴해지는 놈도 추해지는 놈도 다 바보다.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이 드물긴 하지만. 날 포함해서. 돈 때문에 난 내 자식을 잃고 마누라는 출산능력을 잃었다. 그 댓가로 난 공작금을 받고 산다. 너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놈의 세상이 너에게 나에게 온세상 사람들에게 돈으로 공작을 하는 거다. 북한이 아니라, 간첩이 아니라, 내가 아니라, 바로 이놈의 세상이. 우린 다 공작금을 받아먹고 사는 거다. 뭘 해도 공작이다. 술을 먹어도 공작, 술을 토해도 공작, 횡단보도를 건너도 공작, 잠을 자도 코를 골아도 공작, 다 공작이다. 돈을 빌려도 공작, 빌려줘도 공작. 울어도 웃어도 다 공작이다. 공작 안하려면 죽거나 미치거나 폐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이놈의 세상 톱니바퀴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벗어날 수만 있다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는데. 봐라,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린 어느새 이놈의 세상기계의 어느 부분에선가 톱니바퀴가 되어 공작을 하게 되고 말아. 맞아. 그래서 난 아이를 잃고 마누란 출산능력까지 잃은 거야. 그런데 어째서 비굴해져야 하냐. 어째서 안달복달해야 해?

말이 되는 얘기 같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술주정 같기도 했다. 그날, 나는 불영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형님, 그 나무가 뭐라고 그러던가요? 그는 무슨 나무, 하고 반문하지 않았다. 곧 알아들었다. 그뒤로 혼자서도 가고 마누라하고 같이도 가고 여러번 갔다. 그 나무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었어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금은. 그의 어조가 자신감에 차 있는 것에 나는 놀랐다. 알아들었다구요? 뭐라고 하는데요? 그는 웃었다. 내 몸속에도 가슴속에도 머릿속에도 내 것이 아닌 것이 너무 많다고 하더라. 그걸 다 내 거라고 착각하지 말래. 너도 한번 그놈한테 가봐라. 내가 알아들었는데 너라고 해서 못 알아듣겠냐? 너한테도 뭐라고 얘기해줄지 모르지.

 

 

4

 

1987년 초부터 그는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스크와 치약과 빈병과 랩을 배낭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섰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으로 나라 안이 들끓고 있었다. 그는 눈밑에는 치약을 바르고, 눈에는 랩을 붙이고, 코와 입은 마스크로 가리고, 대학생들과 함께 전투경찰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최루탄에 쫓겨다녔다. 그는 퇴근시간이 가까워져서야 회사에 나타났고, 그의 옷에서 나는 최루탄냄새 때문에 사무실 안에서는 여기저기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전투경찰에 밀린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쫓겨들어가고, 전투경찰이 성당을 포위했을 때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며 아예 출근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당이고 뭐고 경찰을 풀어 강제해산을 시킬 듯 붉으락푸르락하던 전두환정권은 어째선지 차일피일 경찰 투입을 미루고 있었다. 나는 명동성당에 몰래 들어가 그와 함께 하룻밤을 새운 적이 있었다. 장수호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유영선까지 거기 와 있었다. 그녀는 농성하는 군중들 앞에서 팔을 휘두르면서 목에 시퍼런 핏줄을 돋우며 피를 토하듯 외쳤다.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중정권 수립하자! 몇발짝 저편에 중세의 기사들처럼 진압복과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채 도열한 전투경찰이 빤히 보이는 곳에서, 어둠속에 언뜻언뜻 스쳐가는 손전등 불빛 속에 서서 주먹을 휘둘러 허공을 치는 그녀의 몸짓과 외침은 살이 떨릴 만큼 선동적이었다. 나는 군중들이 어둠속에서 한 목청으로 그녀의 구호를 따라 합창하는 것을 들으며, 그 가늘고 둥근 어깨와 가느다란 허리의 여자에게서 그런 외침과 몸짓이 나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를 향해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또다시 어느새 지친 것 같은 나른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장수호는 격앙되어 말했다. 엎어야 돼. 이번 기회에 엎어버려야 해. 제기랄. 정권 쥔 놈들만 빼고 지금처럼 온나라 위아래가 하나의 목표로 단결했던 적은 아마 없을 거다. 농성하는 젊은이들 가운데 몇몇이 그에게 수호 형, 하고 인사를 건넸다. 아, 영선이 누나도 여기 있네! 수호와 영선은 그들 가운데 몇몇과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반가워했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며, 내일은 출근할 거냐고 묻자,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 녀석이 지금, 하고 화를 냈다. 나는 그의 눈이 그처럼 뜨겁게 불타는 것을 처음 보았다.

“지금 출근이 문제냐? 계엄군이 나오면 당장이라도 시가전이 벌어질 판인데. 넌 정세파악이 그렇게 안되냐? 지금이 바로 혁명적 시기라는 거야. 정권은 지금 양보를 하는 것도 때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야. 민중의 단호함과 힘에 놀라 주저하고 있고 패주하고 있는 거야. 밀어붙여야 해.”

그의 판단이 옳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명동성당의 시위대는 무사히 성당에서 빠져나왔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도 그들이 거둔 작은 승리, 작지만 의미있는 승리였고, 정권의 양보가 아니라 패배로 보였다. 어쩌면 1979년과 80년에 칼과 탱크로 무장하고 무수한 상관과 동료들을 죽이고 체포하고, 비무장 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것으로 권력을 만들어낸 당시의 서슬퍼렇던 군사정권의 패배가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부터는 장수호만이 아니라 회사의 직원들도 이따금 일부러 짬을 내어 거리로 나가 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힘에 놀랐고, 그 힘이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데 격앙되었으며, 자부심을 느꼈다. 나 역시 점심시간 같은 때 틈이 나면 동료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나와 내 옆사람의 외침이 거대한 함성이 되는 것을 들으면 괜스레 가슴이 뿌듯했다.

마침내 서울역과 시청과 명동과 남대문과…… 서울시내가 시민들로 뒤덮였다. 상당한 수효의 회사 직원들이, 카피팀의 경우에는 거의 전원이 시위에 참가했다. 일주일쯤, 사는 것이 축제 같았다. 서울역 앞 광장에 새하얗게 뒤덮인 학생과 시민들 속에 끼여 구호를 외치고 발을 구르고 최루탄에 쫓겨다니고 돌을 던지다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장수호는 말했다.

“씨발놈들, 계엄군은 왜 아직 안 나오는 거야? 빨리빨리 나와야 결판을 낼 텐데. 이번엔 안 밀릴걸.”

나는 놀랐다. 그는 계엄령이 떨어지고, 그리하여 계엄군이 거리로 나오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그는 이번에는 80년 광주에서처럼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시민군이 조직될 것이요, 바리케이드가 처음에는 하나둘에 불과하겠지만, 결국에는 그 바리케이드가 정권을 포위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가 어째서 바뀌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정도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정권인수, 이렇게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헌법개정과 민주적 선거를 약속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그것은 정권의 전면적인 패배를 인정하는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승리라 생각했다. 시위는 물거품처럼 잦아들었다. 그러나 장수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제까지는 승리였으나, 이제부터는 쓰디쓴 패배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그랬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 때도, 4·19시민혁명 때도 이런 어정쩡한 승리 뒤에 언제나 패배가, 승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패배와 분열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는 권력을 민중이 장악해야 한다고 했다. 민중쏘비에뜨를 구성하여 그 쏘비에뜨가 권력을 장악, 군부독재자들을 철저히 패배시키고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게 하지 못해서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계엄군이 나왔어야 하고, 계엄군과 시민들이 맞붙어 싸웠어야 하고, 계엄군을 패배시켰어야 하고, 그리하여 권력을 시위지도부가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와 정부와 청와대를 접수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지난 겨울부터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그토록 열심히 시위에 참여해왔다는 것이다. 술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결국 민중들은 배신당할 거야. 새로운 일도 아니지. 늘 그랬으니까.

그의 눈이 다시 그때처럼 타오른 것은 그해 여름, 전국의 노동자들이 서울까지 올라와 시위를 벌일 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눈빛이 이삼일 만에, 신문과 방송 그리고 여론이 그들을 난타하는 것을 보고 사그라들었다. 딱 한번 술을 마시다 직원 누군가가 노동자들의 상경 시위가 걱정스럽다는 얘기를 했을 때, 장수호는 흥분하지도 않고 나직나직하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난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이해가 잘 안돼. 도대체 너 같은 사람들이 불안하다는 게 어째선지를 모르겠어. 뭘 빼앗길까봐 불안하다는 건지 모르겠어. 자기네들이 돈이 있어, 권력이 있어? 왜 불안하지? 아무것도 없으면서 뭔가 가졌다고, 빼앗길 만한 걸 가졌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혹시? 민주적인 헌법이 있는데 그것이 개악될까봐 불안해? 아직은 민주적인 헌법도 없어. 그저 믿을 수 없는 자들이 한마디 내뱉은 약속이 있을 뿐이야. 이제껏 피비린내가 자욱한 독재정권 아래 살면서는 불안하지 않았어? 편안했어? 너 같은 사람들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아무것도 없으면서 뭔가를 가졌다고, 지켜야 하는 뭔가가 자기네들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아니면 자기네들이 이 체제의 상층부에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는 후보자들이라고 착각하거나. 하지만 천만에. 지금 우리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있듯이 우리 역시 머지않아 배신당하고 말 거야.

수호가 없는 자리에서 직장동료들은 그가 너무 과격하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까? 무기 들고 산으로 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더구나 직업이 카피라이터라니. 너무나 유능한 카피라이터잖아. 자본가들의 유능한 쎄일즈맨 노릇을 하느라고 우릴 독려하여 허구한 날 날밤을 새우게 만들고.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패배하고,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그는 크게 실망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었다. 6월 10일 거리로 뛰쳐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수많은 시민들을 전투경찰을 풀어 최루탄과 곤봉으로 진압하는 한편 저희들끼리 체육관에 모여 앉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한 노태우 후보가 나중에 6·29선언이라고 명명된 대폭적인 양보를 하자 시민들이 그것을 고분고분 받아들이고 해산했을 때 이미 예정된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누군가가 묻자 장수호는 대답했다.

“엎어야지. 다시 들고 일어나 엎어야 해. 선거 다시 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형님은? 장수호는 그럼, 하고 말했다. 손에 똥이 묻어서 물을 얻어 씻고 나서는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나오다가 다시 똥을 짚은 거야. 어쩌겠냐? 당연히 다시 들어가 손을 또 씻어야지.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위와 정치의 계절은 지나갔다. 세상은 갑자기 너무나 조용해졌다. 직선으로 대통령을 뽑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1980년 광주학살의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6월항쟁을 통하여 뿌리를 도려내고자 했던 바로 그 장군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누구나 허탈감에 빠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손에 다시 달라붙은 그 똥을 씻어낼 방법은 없었다. 그저 다시 5년 동안 그 똥을 묻힌 채 살아가는 수밖에. 직장동료 가운데 한 사람의 말대로 나 역시 그토록 간절히 희구했던 민주주의라는 것이, 직접선거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것이 기실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우중(愚衆)의 허영을 만족시킬 수 있을 뿐, 군중을 분리하고 이간시키고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진 자들에게는 이리 끼웠다 저리 맞췄다 할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조롱당했다는, 속았다는 생각보다 더 기분나빴던 것은 그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장수호는 다시 침울하고 묵묵한 카피팀장으로 돌아갔다. 혁명은 잊혀졌다. 이제 크고 작은 상품쌤플과 책상 위에 쌓이는 카피원고들이, 시시때때로 소집되는 화급한 회의들이, 그리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거짓말을 만들어내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이야말로 우리가 매일매일 맞서야 하는 바리케이드였다.

 

 

5

 

장수호가 처음으로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은 골드카피 메달을 수상했을 때였다. 대개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 그것은 신혼 집들이라거나 이사를 했다거나 아이 돌잔치 같은 때였는데, 그들 부부에게는 아이도 없었고 이사를 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스무평짜리 전세를, 집다운 집을 겨우 마련했을 무렵이었는데, 그는 오십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현관문에 들어선 순간 나는 놀라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들은 우뚝 멈춰선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앞에 펼쳐진 정경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아야 했다. 위아래층이 트인 복층(復層) 아파트의 거실 가득 나무들이, 소나무·감나무·사과나무·단풍나무…… 들이 들어차 있었고, 마룻바닥에는 흙인지 먼지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나뭇잎들, 더러는 떨어진 감이나 사과와 더불어 쌓여 있었다. 거실이 아니라 숲속 같았다. 커다란 화분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그 화분 하나하나에 아파트에서는,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에서도 실내에서 키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나무들이, 그러나 분명히 그 우람하고 당당한 둥치를 들이박고 높다랗게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나무들이 집의 주인인 것 같았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여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도 들었으나,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곳은 그러나, 집이 아닌가.

나는 불영사의 말하는 나무를 떠올리고 자작나무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자작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자작나무의 말을 듣고 집을 이런 식으로 꾸민 것일까? 그렇다면 장선배는 분명히 정상이 아니었다. 장선배는 그렇다 치고, 그의 부인은 집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두고만 보았을까?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이게 웬일이야. 우리가 집에 온 거야, 공원에 온 거야? 이상하게 으스스하네. 그랬다. 어딘가 으스스한 기분, 집이 아니라 특별한 공간,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 낯설어서 호기심이 나는 게 아니라 낯설어서 두렵고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공간이었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비좁은 통로가 나 있었고, 그 통로로 우리는 걸어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에야 비로소 정상적인 실내의 정경이 나타났다. 방마다 가득 꽂히고 쌓인 책들, 그리고 그림들. 벽에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림들이 빽빽이 걸려 있었다. 유명한 작가들은 아니었다. 큰 규모의 작품도 없었다. 소품들, 그중에서도 풍경화가 많았다.

나는 고교시절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미대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장의 청소부였고, 어머니는 동네 골목에서 좌판을 놓고 옥수수나 감자를, 김치나 멸치볶음을 팔았다. 근근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방송국에 입사시험을 쳤으나 떨어지고, 곧 광고의 세계에 들어선 가난뱅이였다. 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나, 전시회에 쫓아다니지는 않았다. 관심도 차츰 멀어졌다. 그러니까 내가 그림에 전문적 식견을 지녔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과장이 없고 건전한, 균형잡힌 작품들이었다. 누군가가 여기저기 전시회를 다니다가 자신의 눈에 드는 소품들을 큰돈 들이지 않고 마련한 듯했다.

“그림 그리셨다구요?”

달동네의 골목길을 세밀하고 길다랗게 잡아넣은 그림을 보고 있는 내 곁으로 장수호의 아내가 다가왔다.

“아닙니다. 그림은 무슨……”

그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풍경화가 좋아요. 그림 한장에 무수한 얘기들이 들어 있어요. 이 덜 탄 구공탄 좀 봐요. 구멍가게 앞에 내놓은 찐빵틀, 그 앞에 둘러선 아이들, 넘어진 세발자전거, 창문에 유리 대신 붙은 신문지와 비닐 조각, 지붕에 얹힌 기름천막 위에 올려진 돌덩이, 그 옆에 기우뚱한 텔레비전 안테나…… 꼭 옛날 우리 살던 사연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긴 얘기에 잠시 기가 질렸다. 그녀는 그 그림에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아내는 듯 여겨졌던 것이다. 몇해 전 명동성당에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그녀의 눈빛은 기이했다. 눈속 깊은 곳에 외로움이, 두려움이, 그리고 슬픔이 담겨 있는 것 같은, 그런 것을 극복해낼 의지 같은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상실한 것 같은, 어딘가 힘이 없는 것 같은, 힘을 내기를 이제는 그만 포기해버리고 만 것 같은 그런 눈빛. 만일 내가 그녀를 그린다면 그 눈빛을 포착하고 표현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그런 눈빛. 나는 그녀가 출산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고, 그녀의 숙부가 간첩으로, 어쩌면 이 순간에도 수사관들에게 쫓기며 남한 어딘가에 잠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로 인해 늘 그녀가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으며……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 눈빛은.

식구란 장수호와 그의 아내 유영선뿐, 당연히 집안은 쓸쓸했다. 그러나 쓸쓸하다고 한마디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뭔가가 그 집에는 있었다. 나무들 때문이었다. 나무들, 위층의 방에 앉아서도 방문 밖으로 커다란 나무들이 내다보였다. 어디에서도 그 나무들이 고개를 들이밀고 이쪽을 넘어다보는 것 같은 기분, 이쪽 일에 참견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이 참…… 독특하네요. 누군가가 말하자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놓았다. 독창적이에요. 희한해요. 나무에서 벌레 안 생겨요? 술을 마시며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나무들 너머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넘어다보며 비웃음이라도 보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날, 밤이 깊도록 우리는 술과 포커를 즐겼다. 유영선도 같이 술을 마시고 포커를 쳤다. 장수호는 별로 말도 없이 술과 포커에 열중했으나, 유영선은 우리들의 농담에 웃기도 하고 만만찮은 기지가 엿보이는 대꾸를 내놓아 자리를 즐겁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그녀가 고등학교를 다니다 만 여공 출신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공장 노동은커녕 아침 설거지만 끝마쳐도 그만 피로해져서 창백해진 얼굴로 눕듯이 소파에 몸을 기대어 숨을 몰아쉴 여자, 전람회에나 다니며 그림이나 사모으고 집으로 돌아오면 큰 중노동이라도 한 듯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소파에 쓰러질 여자처럼 보였다. 장수호나 그녀나 아무리 뜯어봐도 맑스주의자라거나 과격한 노동운동가 출신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유복하고 원만한, 나 같은 밑바닥 출신과는 거리가 먼 부르주아일 따름이었다.

그렇구나, 장수호. 나 같은 자는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세상이 살라는 그대로만 살고, 운동도 한 적 없고, 물론 감옥에도 간 적 없지만, 겨우 이 지경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고, 너 같은 자는 맑스주의자였다가도, 감옥을 갔다와서도, 더구나 북한에서 친척이 간첩으로 넘어오는 일이 벌어져도 이렇게 살 수가 있는 거로구나. 그날 나에게 이런 생각도 없지 않았다는 점을 얘기 안한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동성당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목에 시퍼렇게 돋아나던 핏줄과 짱짱한 목청으로 사람들에게 구호를 외치며 팔을 휘두르던 그녀를……

공장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형수님? 짓궂은 녀석 하나가 물었다. 야 임마, 그런 걸 물으면 어떻게 하냐? 그렇게 제지하면서도, 또 장수호의 눈치를 보면서도 우리들은 모두 호기심을 품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장수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수호나 영선이나 지극히 태연했다. 그녀는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제본소예요, 하고 대답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제본소였어요. 여러분들 가운데 아마 제가 제본한 책 한번 읽지 않은 사람 없을 거예요. 교과서에서부터 잡지, 싸구려 책에서부터 학술서적까지 안 만들어본 게 없으니까요. 잘 모르시겠지만, 공장 안은 뿌연 종이먼지로 가득해요. 하지만 온전한 환풍기도 몇개 없이 우린 마스크 하나 쓰고 일해요. 당연히 늘 기침을 달고 다녀요. 기관지나 폐를 앓는 사람들이 많구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 힘든 건 싸구려 책을 만들 때예요. 제본을 하다보면 보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책의 내용을 알게 되는데, 그 내용이 한심할 땐, 더구나 야근에 시달리거나 피로에 지쳐 있을 때면 더욱 맥이 풀려요. 이따위 책 만드느라 고향에도 못 가보고 데이트도 못하는구나 싶어서요. 동료들 가운데는 그런 데 대한 반발로 이해할 수도 없는 책을, 좋은 책을 읽어보려고 애를 쓰는 애들도 있었구요. 거기 공헌한 사람이 바로 여기 앉아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남의 카드를 훔쳐봐요? 그녀는 장수호의 어깨를 딱, 쳤다.

우리는 새벽녘에야 한 사람 두 사람 쓰러지기 시작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여섯 사람의 직원이 두 개의 방에 나뉘어 쓰러져 잠들었던 것 같다. 꿈이었을까?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너무나 생생한 것을 보면 꿈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뿌옇게 먼동이 터오는 거실, 키가 커다란 나무들이 목을 꺾어 내려다보는 가운데, 흙과 나뭇잎과 떨어진 열매들 위에 벌거벗은 유영선과 장수호가 정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의 흰 몸 위에, 둥근 어깨에, 그의 굳건한 다리와 목덜미에 하늘하늘 나뭇잎이 떨어지고, 꽃잎이 떨어지고, 사과알이 떨어지고, 솔방울이 떨어지고, 청설모가 나무둥치로 뛰어다니고, 하늘다람쥐는 이 나무 저 나무로 날아다니고, 잠자리떼들이 짝짓기를 하며 날아다니고, 개미들이 교미를 위해 떼를 지어 하늘로 날아올라 천장에 부딪고 벽에 부딪고, 꽃뱀과 흰뱀이 나무둥치를 타고 기어내리며 허공을 날아오르고 흙속으로 파고들며 기나긴 교미를 하고…… 영선의 신음소리와 수호의 외침은 북소리와 장구소리처럼 어우러져 절정을 향해 치달아올랐다.

 

 

6

 

1992년 여름, 그는 갑자기 서울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표를 제출했을 때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이견 없이 그가 마침내 독립하여 회사를 만들 작정인 것으로 예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딘가 커다란 회사로 거대한 액수를 받고 스카우트되어 가기 위한 준비일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 무렵이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한두 번 몸을 팔면 수억의 상여금에 연봉이 몇배로 뛰었다. 한두 사람, 장수호가 정치 쪽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인 것 같다는 추측도 나왔다. 장군들의 독재가 청산되면서 과거에 변혁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국회의원으로, 구청장이나 시장으로 몸을 바꾸던 시절이었다.

그 어느 쪽도 아니라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밝혀졌다. 그는 다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을 뿐이었다. 어디에서도, 광고업계에서도 정치판에서도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을 통해봐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집에 전화를 해보았으나, 없는 국번이라는 안내원의 음성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의 집으로 찾아가본 다음에야 나는 그 아파트가 처분된 것이 이미 오래 전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 부부는 이렇게 돌연 사라져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나무들은 어떻게 했을까? 다 싣고 떠났을까? 혹시……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영선의 숙부는 간첩이요, 수호는 비록 타락했다고는 해도 맑스주의자였다는 것을 나는 상기했다. 어디, 지상에 겨우 서넛밖에 남지 않은 사회주의 나라로 이민이라도 떠난 것일까? 아아, 월북이라도 한 것은 아닐까……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해 한동안 광고업계에서는 온갖 소문들이 떠돌았다. 장수호가 결국 여공 출신 아내와 살지 못하고 이혼을 한 다음 폐인이 되었다는 얘기가 떠도는가 하면, 주식에 투자했다가 집이고 뭐고 다 날렸다는 얘기, 여기저기 빚까지 얻어 주식투자에 들이밀었는데 그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재산을 빼돌리고 해외로 도피할 계획이라는 소문도 잠시 나돌았다. 그러나 그뿐, 차츰 그는 잊혀졌다. 몇달이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더이상 기억해내지 않았다.

그가 회사를 떠난 뒤에 카피팀은 현저히 활력을 잃었다. 나는 두 차례의 스카우트를 통하여 한 광고전문회사의 카피팀장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장수호와 마찬가지로 여행이 취미가 되었다. 머릿속에 뜨거운 여름날의 말라버린 냇물바닥처럼 자갈만이 가득하여 아무리 광고문안을 짜내려 해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뜨겁게 달구어진 자갈들이 맞부딪는 소리 같은 것만이 가득 차오면 나는 무작정 차를 몰고 서울을 떠나 아무데로나 달려갔다. 때로는 내변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때로는 한적한 어촌에서, 관광지와는 인연이 먼 작고 한적한 절간에서 며칠 동안을 아무 생각도 않고, 술을 마시다 잠을 자다 깨어나 배가 고프면 먹고 다시 졸리면 자고 심심하면 그저 마을이나 거리를 오락가락 서성거리다가…… 하는 식으로 며칠을 지내다가 보면 머릿속에서 자갈 부딪는 소리가 잦아들었고, 그러면 부상으로부터 회복되어 전출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다시 전선으로 투입되는 전투병의 심정으로 마음속에서 억지로 투지를 불러일으키려 애쓰며 서울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이가 둘이 생겼고, 이십평짜리 전셋집에서 사십오평짜리 아파트로 집을 옮길 수 있었으며, 생활비를 걱정하면서 봉급이 눈곱만큼 오를 때마다 하늘만큼 기뻐하던 아내는 자기 차의 차종을 잘못 선택한 것을 후회하며 2년마다 차를 바꿀 궁리를 하면서 내가 일에만 매달린다고 불평을 했고…… 나는 이혼을 했다.

가정법원에서 나오는 길로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차창 밖으로 아내가, 아니 나의 아내였던 여자가 걸어가는 것이 보였고, 그 순간 나는 지금 내린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한번 뼈아프게 실감해야 했다. 남들과는 달랐다. 이제 다시 나는 혼자라는 것을, 어쩌면 영원히 혼자이리라는 것을 뜻했다…… 다시는 결혼이라는 그 지옥의 울타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나…… 나에게는 집이, 가정이 필요했다. 내가 이놈의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란 오직 하나, 번듯한 가정, 나를 남편이라 부르는 아내가 있고 나를 아빠라 부르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 흩어지지 않고 언제나 저녁이면 같이 모여 앉아 밥을 먹고 같이 잠드는 가정이었다.

텅 빈 집이 나를 맞았다. 아내의 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내가 집을 떠난 이튿날, 나는 아이들을 광주의 형님댁으로 보냈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빈집은…… 폐허와 같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문을 열었다가 나는 거기, 열린 채 옷가지들이 함부로 흩어지고 뒤엉킨 옷장을 발견했다. 이미 아침에 나갈 때 그 꼴이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광경을 본 순간 울화가 치밀었고, 나는 아아악, 고함을 지르며 문짝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내 고함소리가 텅 빈 방안에 메아리가 되어 내 귓전을 울렸고, 무릎이 휘청 꺾였다. 나는 침대를 향해 돌아섰으나, 침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색이 달라진 장판지, 먼지, 내가 며칠 전 벗어던진 양말, 구겨진 신문지, 받침이 깨어진 화분이 놓여 있었고, 물컵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문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 그것은 더이상 내가 꿈꾸던 집이 아니었다. 하나의 집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젊은 시절 이래 나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이제 깨졌다. 내 집은 파괴되었다. 나는 그 집을 복구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실패했다. 아비와 이유는 다르지만, 나는 내가 그리던 가정을 이루는 일에 실패했다. 아이들,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나는 찬장을 열어 술병과 잔을 찾아내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아침에 우유 한 잔을 마셨을 뿐, 그뒤로는 자동판매기에서 흘러나온 커피라는 이름의 달고 쓴 정체불명의 액체를 몇잔 마신 것이 전부였으나, 시장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탁이 놓여 있던 자리도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아무데나 벽을 등지고 쪼그리고 앉아 잔에 위스키와 물을 따라 번갈아가며 마시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내는 낡은 침대와 식탁을 그토록 악착스레 가져가려 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침대와 식탁에 대한 아내의 집착은 징그러울 정도였다. 집 꼴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서 돈을 따로 줄 테니 새 침대와 식탁을 마련하라고 권해보았으나, 그녀는 화가 났을 때는 가져가서 불태워버리겠다거나 깨뜨려버리겠다고 했다가 화가 가라앉으면 침대와 식탁을 여기 두고 가서는 밥을 먹을 때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속이 불편하여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것 같다고 호소했다. 짜증을 냈다가 애걸을 했다가 다시 화를 내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결코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나는 이번에도 아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아내는 나에게 이런 빈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고집을 부렸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은 어찌할 것인가? 나는 급히 위스키를 삼켰다. 아내는 아이들을 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기야 그녀는 아이를 맡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돈을 벌어야 했다. 오억, 그것이 삼년 사이에 그녀가 진 부채였다. 나의 전재산을 다 털어넣어도 오히려 부족했다. 단순히 빚 때문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오억 같은 것은 새발의 피로 여겨질 큰돈을 곧 만질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확신해 마지않았다. 늘 그 확신이 문제였다. 그녀가 그런 확신을 지니고 살던 삼년 동안 생긴 것이 바로 오억의 부채였다. 그런데도 그녀의 그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떼돈을 버는 방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다단계판매, 돌침대와 고급 소파와 가구와 보석 따위를 파는 일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내가 회사에서 받는 봉급은 부채의 이자로도 부족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단계판매를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거부했다. 그외의 길은 이혼뿐이었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이혼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무엇이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두부를 사 지지고, 콩나물을 사 국을 끓여 깍두기와 함께 작은 소반에 내놓으면서도 흐뭇해하던 나의 아내를 이렇게 기괴스럽게 뒤바꾸어놓은 것인가? 나는 아직도 아내의 그런 급격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은 깨어지고 아이는 온전히 나에게 남았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혼자서 길러낼 자신은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형이었다. 그는 큰아이를 바꿔주었고, 아이는 나에게 물었다.

“엄마는? 엄마는 어딨어?”

다섯살이었다. 그러나 집안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만은 민감하게 알아채고 있었다. 아내는 이미 나에게는 남이었다. 그러나 나의 아이에게는 엄마였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 모순 가운데에서 나는, 나의 아이들은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거짓말을 했다. 엄마는 미국에 갔어. 여러 밤 자야 오실 거다. 아이는 으으으, 울음을 내놓았다. 사내녀석이 울면 안돼. 누이동생이 울어도 니가 달래야 할 텐데 울긴. 아이는 울음을 그치려 안간힘을 다했다. 우린 언제 서울로 돌아가? 아이의 음성 뒤쪽으로 여기 설렁탕 둘이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주 하나 추가,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형은 아이를 데리고 가게에 나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여덟시 반이었다. 아아, 아이를 어서 데려와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살필 것인가?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하는 직장이 아닌가.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나 역시 울음을 삼켜야 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다시 술을 한잔 마시고 오래도록 차디찬 물을 마셨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려 목줄기를 적셨다. 이번에는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회사의 서주희였다. 나는 그녀에게 미리 써서 책상서랍에 넣어둔 휴가원을 내일 아침에 출근하는 대로 회사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알았어요, 팀장님. 괜찮으세요? 제가 친구해드려요? 어디세요? 제가 갈까요? 제가 술 한잔 사드릴게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지금의 내 처지를 놓고 엉뚱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와 몇차례 여관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정을 깰 생각은, 나도 그녀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어디에요? 그녀가 다시 물었고, 나는 머뭇거리다가 집이라고 대답했다.

주희는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그녀가 아파트 현관에 들어선 순간 나는 그녀를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어쩌면 주희는 내일 이곳에서 출근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현관에서 나의 목을 껴안고 등을 다독다독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악돌이. 악돌이, 나의 별명이었다. 악착스럽다는 뜻이었다. 악착스럽게 집을 세우고 지키려 했으나 그 악착은 어쩌면 집을 깨뜨리는 짓을 거든 노릇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돈을 벌려는 아내의 악착스러움이 결국 부채만을 늘려갔듯이. 나는 술잔을 들고 있어 그녀를 마주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술잔 탓만이 아니었다. 나의 어쭙잖은 자의식이 그녀를 안는 것을 방해했다. 이혼을 한 당일 아니냐, 조금 전 아이와 통화를 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았느냐, 하고 그 자의식은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에서 풀려나오자 나는 같은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계속 술을 마셨다. 주희는 나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고, 나는 먹지 않았으나 생각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라면을 끓이고, 햄과 치즈를 잘라 소반에 가져다 놓은 다음, 빈 잔을 찾아들고 내 앞에 돌아와 앉았다. 나는 그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주희는 잔을 내밀며

“악돌이의 자유를 위하여.”

하고 말했고, 나는 잔을 내밀며

“깨어진 나의 집에게.”

하고 말했다. 부딪친 우리 두 사람의 잔이 서로 다른 소리를 냈다. 자유라. 이것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자유, 그러나 이것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희는 말했다. 집, 멀쩡한데요.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는 그녀와 내가 서 있는 곳이 너무나 멀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도 같은 것을 의식한 것일까. 그녀가 손을 내밀어 내 뺨을 쓰다듬었을 때 그것은 어색한 변명처럼 여겨졌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엉뚱한 생각을 품는 일은 없도록 못을 박아둬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분을 다치지 않고 그런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싸움을 할 작정이 아니라면 단도직입적으로 난 재혼할 생각 없어, 하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싸움, 특히 여자와의 싸움은 이제 넌덜머리가 났다.

한밤, 요의(尿意)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안방, 침대가 놓여 있던 자리에 편 이부자리에 주희와 더불어 벌거숭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악착스레 침대를, 그리고 식탁을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아내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침대와 식탁이 있었다면 나는 그 침대에서 주희와 동침을 하고, 그 식탁에서 그녀와 밥을 먹고 술을 마셨을 것이다. 아내는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튿날, 나는 서울을 떠났다.

 

 

7

 

목적지는 따로 없었다. 광주로 내려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나는 강원도 쪽으로 길을 잡았다. 길을 좀 돌기도 했지만, 정선에 이르자 간밤 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에 더이상 운전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어딘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민박집이 눈에 띄자 차를 세웠다. 거기 주저앉아 자고 먹고 마시고 또 자고 먹고 마시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머리가 조용해지지 않았다. 아이들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형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그리고 주희와 통화를 할 때마다 머릿속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이나 가버릴까. 호주나 뉴질랜드로. 그런 나라는 탁아소나 유치원이 믿을 만하다니까. 주희와의 관계는 사실 청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다시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혼 때문이었다. 그날 술을 마시기 전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술이 판단력에 혼란을 가져왔던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아내는 무엇 때문에 나를 혐오한 것일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꼴이 혐오스러웠을까? 내 직업이 혐오스러웠을까? 너무나 가정적이었으므로 나를 혐오한 것일까? 가난에서 벗어난 지 겨우 서너 해였다. 아내는 돈이 아니라 비만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테니스를 다니다가 에어로빅을 다니다가 신문사의 교양강좌에 다니다가…… 남아나는 돈을 소비하기에 바빴다. 걱정도 불안도 더이상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돌연 그녀는 나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다단계판매에 뛰어들었고, 이 지경에까지 떨어진 것이다……

장날이었다. 나는 민박집에서 한낮까지 뒹굴다가 어슬렁어슬렁 읍내로 걸어나와 장터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가을이 깊어 겨울 문턱이라는 실감이 났다. 산촌의 계절은 빨라 얼굴에 와닿는 공기가 제법 쌀쌀하고 상쾌했다. 끈질긴 질병처럼 지긋지긋하던 여름이 물러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장터에는 김장용 배추와 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도토리묵과 산나물을 파는 아낙, 더덕을 까는 노파, 아직도 찾는 사람이 있는지 검정 고무신 흰 고무신이 수레 가득 쌓여 있는데도 벌써 떨이를 외치는 목청 좋은 장사치…… 나무궤짝에 송이버섯이 한움큼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근처에 다가가자 벌써 짙은 송이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무궤짝 너머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내는 텁수룩한 머리칼에 얼굴을 뒤덮은 구레나룻과 수염까지 온 얼굴이 털투성이였고, 두터운 입술에는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었으며, 곧고 긴 콧날이 불그레한 것이 벌써 술이라도 한잔 걸친 것처럼 보였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송이나 좀 사다 회사사람들에게 나눠줄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그에게 다가가 값이 얼마나 하는지를 물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얼굴, 그 표정. 내가 그것을 잊을 리 없었다. 장수호, 대원광고기획 카피팀장이었다. 장선배! 내 목에서 비명처럼 새된 소리가 밀려나왔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웬일이냐, 이 산골 구석에? 그는 어제 만난 사람을 대하듯 범연하게 물었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난 여기…… 여행중에……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는 빙긋 웃었다. 우물쭈물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그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들이더니 궤짝 위에 놓여 있던 송이를 한꺼번에 신문지에 둘둘 말아 쌌다.

“가져가라. 너한테 돈 받겠냐?”

그는 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는 장사에 이골이 난 장꾼처럼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니 덕분에 속시원히 떨이를 했구나.”

그는 엉덩이와 바짓자락을 툭툭 털고 나서 궤짝 안을 뒤적거려 국방색 천조각을 꺼낸 다음 그것으로 능란하게 멜빵을 만들어 나무궤짝에 걸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행위인지 알지 못한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여기 장터에서 송이를 팔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에 그는 나무궤짝을 등에 짊어지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시장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내 눈에는 그가 도망을 가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터무니없이 큰 목청으로 말했다. 장선배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는 나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그러나 따라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는 식의 무심한 걸음으로 사람들이 붐비는 장터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우리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해요. 이게 몇년 만입니까, 장선배님? 이렇게 헤어질 순 없잖아요.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헤어지긴. 술도 좋고 밥도 좋다만, 우선 마누라 얼굴이나 보고 나서. 그는 여전히 발을 재게 놀리며 말했고, 나는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난전이었다. 그릇전 옆에 잡화전이, 그 옆에 건어물전, 깨와 조와 찹쌀 따위를 파는 작은 잡곡전이, 그리고 또 바로 그 옆에는 채소전, 그 옆에는 차 옆구리에 천막을 치고 양복과 원피스 따위를 파는 사람…… 닭을 서너 마리 묶어놓고 앉아 있는 노파에, 반찬 몇가지를 늘어놓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낙, 망치와 펜치, 드라이버 따위의 연모들을 수레에 실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젊은이…… 장수호가 걸음을 멈췄다. 난전 한가운데였다.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난 떨이했어. 벌써요? 대꾸하며 일어서는 여자가 있었다. 사과궤짝 위에 더덕을 쌓아놓고, 과도로 더덕껍질을 벗겨가며 손님을 기다리던 여자였다.

“손님이 왔어. 누군지 알지, 당신도?”

수호가 말하자 그 여자는 머리에 둘렀던 노란 수건을 벗으며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검게 그은 얼굴,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칼, 더덕을 까느라 젖은 손은 투박했다. 운동복바지에 푸른 스웨터를 걸친 그 여자가 바로 장수호의 아내 유영선이라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나는 얼른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도 만나게 되네요.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나는 할말을 잃었다. 그녀 역시 너무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평범한 이웃을 며칠 만에 다시 만나는 것 같은 심상한 얼굴이었다. 수호는 그녀에게 국밥집에 가 있을 테니까 이따가 와, 하고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유영선에게 뭐라 온전한 인사말도 건네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랐다.

장수호를 따라 들어선 집은 시골장터 부근에 흔한 국밥집이었다. 막걸리 좀 주쇼. 그가 외치자 방문이 열리고 한참 동안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 다음에야 하품을 베어물며 덩치가 산만큼이나 되는 아낙 하나가 나타났다.

“장씨는 벌써 떨이했어?”

수호는 거침없이 대꾸했다.

“아따 장날인데 이 집구석은 어째 이리 한가해?”

“색시는 어떻게 하고 혼자 왔어? 아니, 손님이 오셨는가?”

아낙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누란 아직 떨이가 멀었거든. 어서 막걸리나 좀 내놔. 선짓국 좀 내오고.”

“선짓국은 시간이 좀 걸리는데…… 장국밥부터 먼저 하지 그래, 장씨?”

“그러든지.”

장꾼과 국밥집 주인의 수작은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고, 그런 그를 지켜보면서도 나는 여전히 충격을 가시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저 자신만만하던 카피팀장 장수호라는 것이, 서른댓의 약관에 골드카피를 수상한 사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장국밥을 뜨며 막걸리를 몇잔 주고받는 동안 나는 서울 소식을 이것저것 전했다. 누구는 아이를 낳고, 누구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이혼을 하고, 누구는 독립하여 광고회사를 차렸고, 누구는 승진하여 팀장이 되고, 누구는 스카우트 몇번에 연봉이 얼마로 오르고, 누구는 쫓겨나고…… 내가 이혼을 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건성건성 얘기를 들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술이 적당히 오르자 나는 마침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서울을 어째서 그렇게 갑자기 떠난 겁니까?”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냥.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여기서 이 지경이 되어 송이를 팔고 더덕을 팔며 살고 있는 것인가? 이번에도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재미도 있어. 송이 캐는 일이나 더덕 캐는 일이나.

“이런 일이나 하려고 서울을 떠났단 말이에요?”

내가 힐문하자 그는 대답했다.

“응. 좋아. 이렇게 사는 게.”

나는 말문을 잃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데 그가 감추는 것이 분명했다.

“장선배, 내가 아무리 힘없는 봉급쟁이라고는 해도 장선배 한 사람 자리는 당장이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갑시다.”

“난 거기 돌아갈 생각 없어.”

‘거기’라고 그는 말했다. 아무런 관심도 인연도 없는 것에 대해 말하듯. 나는 유영선이 저렇게 사는 게 속이 편한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편해. 마누라도 편하고. 건강해졌어, 옛날보다. 유영선이 몸이 약했던가? 그녀가 몸이 가냘펐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몸이 약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일까? 그것이 서울을 떠난 이유였을까?

“왜요? 왜 이렇게 사시는데요?”

“그냥 이게 좋다니까.”

그는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감출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자약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답답했다. 무엇을 피하여 이런 곳에서 숨어사는 것일까?

“댁은 어디에요?”

“멀어. 산골짜기야.”

“나도 거기 한번 가봅시다. 얼마나 좋은 덴지.”

나는 그가 고개를 저으리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로부터 도망하여 숨어사는 처지니까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누라 장사 끝나면 같이 가지, 뭐. 그때까지 우린 술이나 마시며 기다리고.

긴장감, 그의 어조에서 긴장감이 사라져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는 더이상 5초, 3초, 1초, 10분의 1초, 20분의 1초…… 따위와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그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나는 처음으로 그가 지금도 여전히 자신있고 당당하게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광고회사의 카피팀장이었을 때와 다름없이. 그러나 어떻게 이런 생활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의 이상한 아파트와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나무들을 떠올렸고, 그날 새벽 그들 부부의 뜨거운 정사를 떠올렸다. 그렇다. 그는 서울 한복판의 아파트에서도 그렇게 괴상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그렇게 괴상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 송이장사라니! 더덕장사라니!

 

 

8

 

유영선은 오래지 않아 국밥집에 들어섰다. 남은 더덕을 어떤 음식점에 한꺼번에 갖다주고 왔다고 했다. 그녀는 국밥집 주인 아낙과 형님 동생 하며 인사를 주고받으며 주방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우리 앞에 마주앉았다. 그녀는 나와 장수호가 주는 대로 막걸리를 받아 마시며, 음 맛있다를 연발했다. 비록 볕에 그은 얼굴에 손은 투박하고 거칠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밝고 쾌활했으며, 그녀의 웃음은 아름답고 싱싱했다. 무엇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영선을, 지금은 장바닥에 나와앉아 더덕이나 까고 살면서도 이렇게 맑고 아름답게 만든 것일까? 나를 떠날 무렵의 아내의 얼굴이 생각났다. 탐욕과 욕구불만과 적의와 불안감과 초조와 자의식으로 갈가리 찢긴 어둡고 앙칼진 얼굴, 무엇이 내 아내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하기야 나 역시 그녀가 보기에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장꾼이 된 그들 부부가 아니라 여전히 서울에서 잘 먹고 잘사는 그들 부부와, 여전히 가진 것 없고 아는 것 없는 가난뱅이 신입사원으로서 마주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당한 장꾼 부부 앞에서 나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주눅이 들었다. 아이는 몇이나 낳았어요? 영선이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나 이혼했어요.”

잠시 수호와 영선 부부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농담이라고 생각한 듯 웃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혼했다니까요. 가정법원에서 나온 이튿날 서울을 떠나온 겁니다. 차마 가정법원에서 나온 바로 그날,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빈 아파트에 정부(情婦)를 불러들여 술을 마시고 질펀하게 정사를 벌였다는 얘기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왜 이혼을 했느냐구요? 왜냐하면…… 글쎄, 우리는 왜 이혼을 했을까? 나는 심리적으로 자꾸만 수호 부부에게 의지하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이미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자신을 자제하기 위해 거듭 술잔을 비웠다.

술은 짙고 달았고, 산촌의 밤은 가차없이 깊어갔다. 형님, 그때 생각나요? 우리 부부랑 형님 부부랑 음식점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러 길로 나가다 말고 갑자기 형님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씨이발 좆같다, 그랬어요. 씨이발, 좆같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여전히 마찬가지네요. 씨이발, 좆같아요. 이십평짜리 전셋집에서 사십오평짜리 고층아파트로 집을 옮겼는데도 여전히 씨이발 좆같아요. 말이 좋아 스카우트지 몸값 받고 팔려다니기 두 번에 연봉이 일억 오천이 됐는데도 여전히 씨이발 좆이에요. 수호가 말했다. 너 공작금 많이 받아먹고 사는구나. 수호 부부가 웃어댔고, 나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형님, 그 나무들은 다 어떻게 됐습니까? 형님댁 거실의 화분, 그 나무들. 그걸 가지고 다니겠냐? 아파트 뜰에다 옮겨 심고 왔지.

수호가 나에게 송이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내가 송이를 내주자 그는 국밥집 아낙과 흥정을 하여 그 송이로 술값을 지불했다. 내가 술값을 내겠다고 나섰으나, 그는 그 특유의 힘이 실린 눈빛으로 나를 막았고, 나는 신입사원처럼 물러났다. 그런 눈빛으로 나 같은 사람 정도는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막아낼 수도 있을까?

내가 국밥집에서 나왔을 때 수호는 소달구지 옆에 서 있었다. 요즘도 이런 물건이 다닌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 집에 갈 생각이면 거기 올라타라.”

나는 이게 형님 자가용입니까, 하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싸늘한 산촌의 밤공기 속에서 내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나는 감자자루와 쌀자루 옆에 누웠다. 별들이 쏟아져내릴 듯 가득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가 그리워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립지 않았다. 아내가 원망스럽고 아이들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내 가슴을 뚫고 산골의 바람이 휑, 지나갔다. 나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시선을 하늘에서 거둬들이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한 형편이었는데도 내 몸은 다시 술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선이 옆에 올라와 앉았다. 수호는 고삐를 잡고 달구지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려, 이려. 가자, 견우 이놈아. 그는 능란하게 소를 몰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달구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 모퉁이에 아직 문을 열어놓은 편의점이 있었다. 잠깐만요. 나는 달구지에서 뛰어내려 캄캄한 거리를 달려갔다. 취기다, 이것은. 나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여섯 개 포장의 깡통맥주를 둘 사 들고 나는 달구지로 돌아왔다. 수호에게 깡통맥주를 건네며 나는 음주운전 좀 해보쇼, 하고 소리치고 또다시 큰소리로 웃어댔다. 취기로 가득한 머릿속이 우렁우렁 울렸다. 나는 차디찬 맥주를 그 머릿속에 들이부었다.

깜빡 졸았던가. 귓전에 여전히 달구지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려! 소 모는 소리가 들리고, 소가 똥이라도 싼 것일까, 소똥냄새가 언뜻 코를 스치고, 내 몸이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고…… 나는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정신을 차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둠, 사방이 깊은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완벽한 어둠, 빛이라고는 바늘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도시에서는 결코 한순간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이 부피를 지닌 물체처럼 온 천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고, 소는 물론이요 소를 몰고 있을 수호도, 바로 코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영선도 기척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낀 것일까. 하늘 가득 빛나던 별도 어느새 어둠속으로 숨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천지에 가득 어둠의 물결이 넘실거렸고, 달구지는 그 어둠속으로 끄떡끄떡 걸어들어가고 있었고, 다리를 건너는 것일까, 물소리가 서늘하게 귓전을 적셨다. 물속의 자갈들이 훤히 보이는 듯,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 물소리는 맑고 찼다.

“형님, 길이 보입니까?”

내가 묻자 수호의 대답이 어둠속에서 넘어왔다.

“눈감고도 간다. 걱정 말고 잠이나 더 자라.”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형님, 이제 말씀 좀 해보세요.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된 거 아무것도 없다.”

나는 문득 그들의 서울 집을 상기했다. 집안에 아이는 없고…… 나무들만이 가득했다. 나무들, 소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청설모가 뛰어다니고 뱀이 교미를 하고…… 그들은 이제 산속에서 그처럼 거침없이 소리 지르고 외치며 짐승처럼 교미를 할 것이다. 어떻게 된 건 이미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달구지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어둠을 넘겨다보았다. 어둠은 기이하게 머릿속을 비워갔다. 이혼도 아이들 걱정도…… 그 어둠 저편으로 멀어져간 듯했다. 천지가 어둠에 덮여 있는데도 멀리 산의 능선은 조각도로 오려놓은 듯 선명했다. 어딘가에서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 어둠속으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광원(光源)은 보이지 않고 그것이 내는 빛만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괜시리 서울을 떠나 이렇게 사시는 건 아닐 거 아닙니까. 무슨 동기나 계기가 없다면 이럴 리가 있어요?”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다시 달구지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한가지였다. 어둠, 어둠 속으로 나는 끝없이 흘러들어가고 있었고, 달구지는 삐꺽거렸고, 물소리는 끊겼다 이어지고, 그랬다가는 어느새 멀리 어둠 너머로 사라져버렸고, 나는 수호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순 그가 과연 소를 몰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워졌고, 소가 가는 대로, 어둠이 이끄는 대로 끝도 없이, 밤이 새도록 가고 가는 것은 아닐까, 막연히 두려운 한편 알 수 없는 자포적(自暴的) 기대로 설레기도 했으며…… 나는 잠과 취기 속으로 혼곤히 빠져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며 하늘을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별들은 어둠의 바닷속을 떠도는 물고기떼처럼 서서히 유영하며, 어둠에 길게 빛의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나는 말을 잊은 채 숨을 죽이고 그것을 지켜보다가 그것이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겨우 입을 열었다. 선배님, 그거 봤어요? 형수님, 보셨어요? 그거, 별들, 지금 하늘에…… 영선은 잠이 든 것일까, 대답이 없었다. 수호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선한데, 수호는 엉뚱하게 맥주나 하나 달라고 말했다. 그가 맥주를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끝내 얘기 안하실 겁니까?”

그는 중얼거렸다. 글쎄…… 할 얘기가 없는데 무슨 얘기를 하나…… 나는 일어나 앉아 맥주깡통을 땄다.

“산속에 들어와 게릴라를 양성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거냐구요.”

그의 음성이 넘어온 것은 내가 천천히 맥주깡통을 다 비웠을 무렵이었다.

“버리기로 한 것뿐이야.”

버리다니? 뭘 버린다는 것인가?

“세상을.”

세상을 버린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일까. 세상을 도대체 어떻게 버려요? 이건 도피에 지나지 않아요. 도피도 세상을 살아가는 한가지 방식에 불과해요. 어차피 형님은 송이를 따고 더덕을 캐서 팔아야 먹고살 수가 있잖아요. 내가 추궁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삐걱삐걱, 달구지가 흔들렸다.

젠장, 세상을 버려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였다. 그가 무엇이 아쉬워 세상을 버린단 말인가. 아름다운 아내에 좋은 직장에…… 새삼스럽게 갈증이 치밀었고…… 아이들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쯤 잠이 들었을까. 가게 구석방에서 담요조각이나 덮고 누워 자다가, 아직까지 나처럼 술을 퍼마시는 술꾼들의 주정이나 싸움박질에 잠이 깨어 칭얼거리는 것은 아닐까. 좋은 직장이 아니었다. 날밤을 새우는 것이 예사였고, 식구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내의 불만 혹은 탐욕은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좋은 세상을 왜 버립니까? ‘좋은 차 좋은 세상’, 그거 선배님이 만든 카피 아닙니까. ‘좋은 차 좋은 세상’은 그의 명성을 높인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버리기로 했어. 세상 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 거기 매달려 살지 않기로 했어.

“세상이 주는 공작금 받기 싫다, 이겁니까?”

수호는 작은 소리로 웃을 뿐이었다.

“선배님은 여전히 맑스주의잔가요?”

그렇게 물은 다음 나는 덧붙였다.

“타락한?”

그가 또 덧붙였다.

“괴상한.”

“불영사 앞에 그 자작나무가 선배님한테 들려준 얘기가 그런 거였습니까?”

“그 나무는 하나도 특별할 것 없었어. 모든 나무들이 얘기를 하니까.”

모든 나무들이 얘기를 한다? 그는 그럼, 하고 단언했다.

“그 얘기를 다 알아들어요, 선배님은?”

“넌 내 얘기 다 알아듣냐? 나무들하고도 마찬가지야. 알아듣기도 하고 못 알아듣기도 하고.”

그때 어둠속에서 영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마치 깊고 오랜 정사라도 치르는 듯 축축한 음성이었다.

“아, 젖이 너무 많이 나와요.”

젖이라니? 장수호가 말했다.

“참, 우리 애기 생겼다. 아들놈은 벌써 다섯살이다. 하나는 아직 젖먹이고. 이려, 어서 가자, 견우야. 새끼가 우릴 기다린다.”

 

 

9

 

다 왔다. 그가 달구지를 세웠다. 주인이 돌아오는 기미를 알아챈 것일까. 개가 먼저 뛰쳐나와 짖어댔다. 영선이 먼저 달구지에서 내려 젖가슴을 부여안고 허겁지겁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손전등을 쥐고 숨을 몰아쉬며 달려나왔다. 수호가 말했다. 준아, 인사드려라. 아빠 친구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산골에서만 자라 수줍은 것인지 아이는 얼른 아비의 뒤로 숨어 이쪽을 넘겨다보았다. 수호는 감자자루는 짊어지고 쌀자루는 손에 들고 비탈길을 느릿느릿 걸어올랐고, 그 뒤를 아이가 따르고, 내가 따랐다.

영선이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 마루 끝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옛날에 고향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농가, 흔히 볼 수 있던 광경이었다. 처마끝에 알전구가 매달려 어둠을 밝혔고, 개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당을 헤집고 다녔으며, 아이는 어느새 그 개를 쫓고 있었다. 영선이 젖을 물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가까이 다가가 갓난아기를 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젖을 물린 여자의 모습이 낯설었다. 옛날과는 달리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사방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나무들, 나뭇잎들 냄새가 대기중에 가득했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물 참 맑다. 저 물 먹고 산다. 겨울이면 따스하고 여름이면 시원하고. 수호가 산골사람처럼 물자랑을 했다. 저 산꼭대기 부근에 샘이 있는데, 거긴 고라니랑 야생 염소가 왔다갔다해.

“고라니랑 염소가요, 마당에까지 와서 나랑 놀아요. 염소 똥이 콩하고 똑같이 생겼는데요, 우리 강아지가 그 똥을 콩인 줄 알고 막 먹으려고 해요.”

준이가 수줍어하면서도 자랑했다. 수호와 영선이 웃어댔다. 어서 들어가세요. 영선이 방문을 밀었다. 수호가 물었다. 술 더 할래? 더덕술 있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낮은 방문을 들어서자 방구석 한쪽 귀퉁이에 엉뚱하게 토마스 모어와 끄로뽀뜨낀과 쌀바도르 아옌데의 사진이 사진틀도 없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조합이었다. 방에는 가구라고는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반닫이 하나뿐이었다. 접힌 이부자리와 베개가 반닫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컴퓨터는 물론 텔레비전도 없었다. 거기 붙은 벽시계를 보고 나는 놀랐다. 한밤중인 줄만 알았는데, 겨우 열한시 반이었다. 버리고 나니까 좋습니까? 내가 물었다. 네, 하고 대답한 것은 영선이었다. 나는 설명을 기다렸으나 그녀는 젖을 빠는 아기에게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내온 술상에는 감자와 버섯, 더덕, 그리고 산나물 들이 놓여 있었다. 준이가 술상 앞으로 다가와 감자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아이의 손을 보고 소스라쳤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의 손, 그것은 손이 아니라 단풍잎, 초록색의 단풍잎이었다. 아이는 그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에미의 옷자락에 매달리고 아기의 뺨을 간지르고 젓가락질을 했다. 나는 수호와 영선을 번갈아 쳐다보았으나, 그들은 원래 아이들의 손이란 그런 것이라는 듯 너무나 태연했다. 나는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몇번이나 확인했으나, 아이의 손은 양쪽 손 모두 틀림없는 단풍잎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영선이 안고 있는 아기를 돌아보았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아기의 손가락은 덩굴, 나팔꽃 같은 식물의 연록색 덩굴손이었다. 아이의 손목에서 스프링같이 돌돌 말린 덩굴손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가닥 뻗어나와 에미 손가락에 매달리고 제 눈을 비벼댔다. 나는 수호에게 말했다. 아이들 손이…… 수호도 영선도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아이들을, 그 손을 본 순간 나는 나의 아이들이 생각났고, 당장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당장 아이들을 내 곁에 데려다둬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밤새도록 술을 마셨으나, 내 생각은 내내 아이들에게, 나의 아이들에게 가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나는 길을 나섰다. 수호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굳이 뿌리치고 그의 집을 나섰다. 당장 정선읍내로 내려가서 차를 몰고 광주로 갈 생각이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을 놀이방에 맡기고 출근을 해야 한다 할지라도, 애 보아주는 사람을 따로 고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을 내 곁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압박했다. 알 수 없이 초조해져서 나는 진땀까지 흘리며 분주히 걸음을 재촉했다.

중턱쯤 내려왔을 때 나는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올라오는 경찰관을 한 사람 만났다. 나는 그에게 이 길이 산을 내려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 경찰은 맞다고 대답하고 나서 잠시 뭔가를 망설이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는 돌연 눈에 날을 세우고 뚜벅, 물었다.

“어디에 왔다 가는 길이십니까?”

그의 모자에 붙은 모든 금속장식들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나는 선배네 집에 왔다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장수호 유영선이네 집?”

하고 물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무슨 일로?”

그는 반말이었다. 나는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놀러요.”

“무슨 선밴데?”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답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의 질문마다 꼬박꼬박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이 못마땅했으나 그의 질문이 나오면 나의 의지와는 거의 상관없이 내 입이 열리고 대답이 나왔다. 내 입은 내 것이 아니라 그의 입인 것 같았다.

“직장 선배요.”

“무슨 직장?”

왜일까? 무엇이 내 속에서 저절로 대답을 만들어내고 대답하게 하는 것일까? 이 산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내가 이처럼 고분고분 대답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대원기획이오.”

그는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닦고 다시 썼다.

“뭐 하는 회산데?”

나는 기계 같았다. 그가 단추를 조작하면 나는 작동했다.

“광고회사요.”

“신분증 좀 내놔보쇼.”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운전면허증을 꺼내 주었다. 그는 푸른색 제복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꼼꼼하게 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와 이름을 적어넣었다.

“여긴 언제 왔어요?”

나는 어젯밤에 왔다고 대답했다.

“몇시에?”

나는 수호의 방에 걸려 있던 벽시계를 떠올리며 정확한 시각을 또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 하나하나를 수첩에 써넣고 나서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일로 갑자기 여기까지 선배를 보러 왔을까?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이건 정확히 질문은 아니니까 대답하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

나는 오랜만에 어제 정선장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대답했다. 그는 믿지 않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런 기색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 참 굉장한 우연이네. 그건 뭐요?”

그가 고갯짓으로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비닐주머니를 가리켰다. 영선이 싸준 송이와 더덕, 간밤에 마시다 남은 더덕술이었다.

“봅시다, 좀.”

그는 비닐주머니를 열어 안의 물건들을 확인했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무례했고 나는 무력했다. 제복, 내가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제복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는 수첩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기분 나빠하지 마쇼. 댁은 선배 잘못 둔 탓이라도 있다지만, 나야 이거 무슨 죄요? 그런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런 데로 들어오는 바람에 허구한 날 여기까지 오르락내리락…… 젠장. 다른 데로 이사 좀 가라고 권해보쇼. 조금만 더 내려가면 콘크리트 포장길이 나올 거요. 그는 자전거를 끌고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터덜터덜 산길을 내려가다 말고 나는 그늘에 주저앉았다. 슬픔,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내 몸이 징그러웠다. 공기의 밀도가 갑자기 수십배 수백배가 높아져 몸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공기 속에 쇳조각들이 가득 들어차 순간마다 몸 이곳저곳을 베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장수호가 이 깊은 산골까지 들어온 까닭을 막연하게나마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피냐 아니냐 따위는 더이상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가 더 깊이 더 멀리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그는 세상을 버리고자 하지만 세상은 끝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