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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유재현 劉在炫

1962년 서울 출생.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hyoo@imagenet.co.kr

 

 

 

시하눅빌 스토리 1

솜산과 뚜이인

 

 

캄보디아 시하눅빌.

새벽 세시 반이 지나기 전에 시하눅빌의 모또택시(영업용 오토바이) 운전사 솜산은 시내 서편의 시장 싸루(시하눅빌에서 가장 큰 시장)의 맞은편 골목에 있는 숫자 맞히기 도박판에서 마지막 이십 달러를 잃었다. 오른쪽 바지주머니를 더듬자 손때에 전 천 리엘짜리 지폐 두 장과 이백 리엘짜리 지폐 석 장이 손에 잡혀 나왔다. 구겨진 작은 지폐들이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초라하게 붉고 푸른 빛을 띠었다. 모두 합해야 일 달러도 되지 않는 구겨진 지폐들을 다시 바지주머니에 넣고 솜산은 아직도 도박꾼 십여명이 남아 있는 도박판을 뒤로 했다. 싸루의 앞길에서 골목으로 새어들어오던 흙바람이 솜산의 힘없이 벌린 입안으로 들어와 으적 씹혔다. 사흘 동안 솜산은 숫자 도박판에서 천 달러를 탕진했다. 한달에 백 달러를 버는 솜산으로서는 일년을 모아도 만지기 버거운 돈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싸루의 넓은 앞길에서 솜산은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검은 하늘은 어둡고 무거웠다. 태국만에서 불어오는 눅눅한 바람이 얼굴을 불쾌하게 어루만지는 동안 솜산은 우두커니 서서 아가리를 크게 벌린 고양이의 목구멍처럼 깊고 어두운 싸루를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일어나는 흙먼지의 소용돌이가 솜산의 발목을 휘감고 돌아갔다.

솜산은 잠시 망설이다 인적이 사라진 길을 건너 거대한 검은 장막에 덮인 것처럼 보이는 싸루로 걸어들어갔다. 깊게 팬 좁은 미로와도 같은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무거운 어둠속에 가라앉아 있던 시장 안의 정물들이 천천히 흐릿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마치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이었지만 솜산은 싸루의 깊고 좁은 진창길에서 자꾸만 걸음이 엉켜 휘청거렸다.

솜산은 싸루의 한구석 길모퉁이, 어둠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사방 일미터 남짓의 아버지 좌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솜산이 인도네시아의 감옥에서 풀려나와 시하눅빌의 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아버지는 도둑이 들끓어 좌판 뒤에 해먹을 걸어놓고 밤을 지새던 일을 그에게 넘겼다.

중국제 산양(三洋) 오토바이 한대를 구해 모또택시 운전에 나설 때까지 일년 동안을 솜산은 꼬박 싸루의 좌판 뒤에서 밤을 지새웠다.

─도둑은 사람을 무서워하느니.

아버지는 좌판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그렇게 말했지만 모든 도둑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솜산이 아버지의 좌판을 지키던 일년 동안 점포를 지키던 시장 상인 두 명이 총알에 구멍이 뚫려 실려 나갔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도둑 중 한명은 상인의 총에 맞아 싸루를 떠났다.

떠날 때에는, 부스럭 소리에도 무시로 간담이 서늘해져 잠을 깨던 일이며 우기에 비가 새어들어 온몸이 흙탕물에 흠뻑 젖던 일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그만 지긋지긋해져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으리라 했던 싸루였지만 그 뒤로도 솜산은 계모나 이복동생들과 다툰 날이거나 왠지 울적해지는 날이면 가끔씩 싸루의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무엇보다 솜산은 이곳처럼 완벽하게 어둠속에 파묻혀버릴 수 있는 장소를 시하눅빌에서는 찾지 못했다.

솜산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솜산은 이리저리 엇대놓은 두껍고 거친 판자와 녹슨 쇠사슬과 아이 머리통 크기의 자물쇠로 뒤덮인 진열대 뒤를 더듬어 찾아낸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잠을 자지 못해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애써 다잡았다.

솜산의 텅 빈 머리에 몇달 전부터 결혼을 보채던 뚜이안의 앙칼진 얼굴이 떠올랐다. 오래 전에 혼기를 놓친 서른살의 베트남 여자 뚜이안. 솜산의 아버지는 뚜이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아가는 것이 팍팍하기만 했던 민주캄푸치아 시절을 보낸 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난민수용소와 감옥에서 민주캄푸치아 시절보다 그리 나을 것도 없는 도합 십육년의 세월을 허송한 터라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솜산이었지만 아버지는 뚜이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 하필 유온이냐?

베트남인의 다른 이름인 유온은 야만인을 의미했다. 수백년 동안 크메르족들을 밀어내면서 영토를 넓혀온 비엣족은 크메르족에게는 오랫동안 야만적인 침략자였다.

─숲속으로 멀리 들어가 놀지 마라. 유온이 잡아간다.

유온이 잡아간다. 크메르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겁을 줄 때면 늘 하는 말이었다. 유온이라는 말에는 막연한 공포심과 그만큼의 증오심이 배어 있었다. 민주캄푸치아 시절에 유온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렇지 않으면 미국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인민의 적이었다.

민주캄푸치아가 무너졌지만, 모두들 유온이라면 노골적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내심으로는 벌레를 보는 것처럼 싫어했다. 베트남이 십만의 군대를 끌고 들어와 민주캄푸치아를 무너뜨리고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을 세우고, 또 십년의 세월이 지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고 나서도 유온에 대한 크메르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이 유온을 백안시하는 것은 그만큼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절반은 중국인인 솜산의 아버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솜산의 유온에 대한 생각은 그저 그랬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것이 유온이었다. 솜산은 이십여년 전 베트남의 캄보디아난민캠프에서 칠년을 지냈다. 불과 열다섯의 나이였음에도 숙모의 가족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간다는 말에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따라나선 솜산이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신 쏭베의 난민수용소에 갇히고 말았다. 수용소 생활 칠년 만에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왔으니 허송세월을 한 것이나 진배가 없었지만 그 살벌한 내전통에 목숨을 건사했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난민캠프 주변의 유온들은 처지가 캠프 안의 솜산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간혹 유엔이나 국제적십자사 따위의 기구들에서 원조물품이 들어오는, 그마저 절반이나 깎여 들어오는 난민캠프 생활을 부러워하는 유온들도 있었다.

유온에 대한 뿌리깊은 백안시말고도 솜산의 아버지에게는 뚜이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몸 팔던 유온을 마누라로 데리고 캄보디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뚜이안은 몸 파는 베트남 여자였다. 시하눅빌의 베트남 여자는 대부분이 몸을 팔았기 때문에 솜산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솜산의 아버지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건 집이건 땅이건 쥐뿔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에게 올 캄보디아 여자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칠년을 베트남의 난민수용소에서 보낸 솜산은 유온이나 크메르나 별로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캄보디아를 베트남의 식민지쯤으로 여기는 콧대높은 유온들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함께 살아가는 법이니까 그닥 이상할 것도 없었다.

솜산은 침에 젖어 축축해진 필터 없는 담배를 고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성냥 불빛에 잠깐 동안 주변의 모든 것들이 환하게 드러났다가 이내 다시 무거운 어둠속에 묻혀버렸지만 검은 흙이 범벅이 된 싸루의 진창길과, 진열대의 잿빛 판자를 얽어매고 있는 붉게 녹이 슨 쇠사슬의 잔영은 한참 동안 솜산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잔영 너머 싸루의 어둠속 어디에선가 해먹 흔들리는 소리가 한숨소리처럼 들려왔다.

솜산이 도박장에서 날린 천 달러. 그건 뚜이안의 돈이었다. 좀처럼 피우지 않던 담배의 연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면서 솜산은 싸루의 진창 밑으로 끝없이 꺼져들어가고 있었다.

 

시하눅빌의 다른 베트남 여자들도 몸을 팔았지만, 뚜이안처럼 서른이 넘도록 몸을 파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대개는 스물다섯을 전후해 돈을 모아 베트남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모은 돈을 밑천으로 그럴듯한 땅과 집, 가게를 마련해 시하눅빌에 눌러앉았다. 뚜이안에게도 오년 전쯤에는 그럴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가 버는 돈을 맡아두고 있던 뚜이안의 어머니가 프놈펜에서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총에 맞아 죽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봤지만 뚜이안의 어머니가 프놈펜의 누구에게 돈을 맡겼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고 돈을 맡은 쪽이 자청해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림잡아 이만 달러에 가까울 것으로 짐작이 가는 그녀의 돈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졌다. 다시 시작하기에 뚜이안은 너무 나이가 많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뚜이안을 찾는 사내들의 발길은 줄어들었고 유곽에서 그녀는 퇴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서른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뚜이안은 유곽의 붉은 불빛 아래에서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적당히 탄력있는 가슴과 조금 처지기는 했지만 보기 드문 반 아름의 허리와 평평하지 않은 둥글고 푸짐한 엉덩이를 갖고 있었다. 뚜이안은 여전히 젊은 창녀들의 도도함과 불친절한 써비스 그리고 그녀들의 성적 무지에 지친 나이든 사내들을 이따금씩 손님으로 받을 수 있었다.

뚜이안은 십년을 넘긴 유곽생활에 지쳐 있었다. 서른이 넘은 뚜이안이 유곽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결국 마마상이 되는 길이었다. 뚜이안이 머물고 있는 유곽을 운영하는 마마상은 일생을 베트남과 태국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창녀와 마마상으로 지낸 여자였다. 마마상에게는 미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던 71년 싸이공에서 만난 미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튀기 딸이 있었다. 지금은 미국의 텍사스 어딘가에 사는 마마상의 유일한 혈육인 튀기 딸은 이제 그녀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인 듯했다. 그녀는 방안의 작은 불전 옆에 딸의 작은 사진을 담은 조그만 액자를 두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마마상의 딸은 한눈에도 미인이었다. 마마상은 그녀의 딸을 끔찍이도 사랑했지만 그녀의 딸은 그렇지 않았다. 십여년이 넘도록 마마상은 단 한장의 편지도 그녀의 딸에게서 받지 못했다. 우기에 접어들어 장대 같은 빗줄기가 유곽 앞길의 커다란 웅덩이를 채울 때면 마마상은 방 창문에 걸터앉아 주름으로 늘어진 볼을 일그러뜨리며 그녀의 딸이 보고 싶고 원망스러워 끅끅 흉물스러운 소리를 내며 울곤 했다.

뚜이안의 마마상은 때때로 유곽에 있는 젊은 창녀들의 손목을 담뱃불로 지지곤 했다. 마마상은 호텔이나 가라오께, 나이트클럽으로 창녀들을 보내곤 했다. 그녀들은 돌아와서 손님들에게서 받은 돈을 마마상에게 내놓곤 했는데, 그것이 충분치 않은 액수일 때 그녀는 자신의 방법으로 어린 창녀들을 응징하곤 했다. 뚜이안은 이제 그런 일을 당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짧은 대나무 막대로 발바닥을 맞거나 담뱃불로 지짐을 당하는 젊은 창녀들을 볼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뚜이안은 그런 마마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만큼 충분한 돈도 없었다.

이제 십여년을 유곽에서 보낸 서른살의 뚜이안이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뚜이안은 결혼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뚜이안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내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이미 한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내들이었고, 뚜이안보다는 그녀가 어딘가에 숨겨두었을 얼마간의 돈에 욕심을 부리는 무능한 사내들이었다. 캄보디아 여자와 베트남 여자들이 모두 그렇듯이 뚜이안도 그런 사내들을 경멸했다.

솜산은 그런 사내들 중에서 뚜이안이 가장 마음에 두는 사내였다. 대단하진 않아도 솜산은 돈을 버는 데 제법 수완이 있었으며, 늘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아니면 독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난민캠프와 감옥에서 십여년 이상을 보낸 솜산이기에 베트남 말과 인도네시아 말을 구사할 수 있었고, 아버지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중국 말, 그리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감옥에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해 이제는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되는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돈벌이에는 아주 유리한 능력이었다. 솜산은 적어도 한달에 이백 달러 이상을 벌었다. 한달에 백 달러를 벌기가 급급한 모또운전사로서 이백 달러 이상을 손에 쥔다는 것은 이 사내가 남들보다 배 이상의 수완을 발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수완은 버스터미널에서 프놈펜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의 등을 치는 데서 발휘되었는데, 솜산은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간차(대마초)건 헤로인이건 여자건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댓가로 언제나 커미션을 챙겼던 것이다.

뚜이안은 이런 솜산의 수완을 그의 몸에 흐르는 중국인의 피 탓으로 여기곤 했는데, 그 빌어먹을 중국인의 피 때문에 솜산이 도박의 유혹에 약하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싸루에서 넋을 잃고 귀신처럼 어둠속에 웅크리고 앉아 한시간쯤을 보낸 솜산은 싸루를 빠져나와 이제 막 희부옇게 동이 트기 시작한 거리로 나와 에카리치의 집으로 향했다.  구름이 낮게 깔린 새벽하늘은 검고 어두웠다.

아버지와 계모 그리고 다섯명의 배다른 이복형제들만으로도 비좁기 짝이 없는 판잣집의 잡초가 무성한 마당에 발을 딛자 마당 한구석 어디에선가 도마뱀이 쩌국 울었다.

─비가 오려나.

도마뱀이 울면 비가 온다. 솜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때맞추어 빗방울 한점이 솜산의 이마를 때렸다. 솜산은 중국식 대나무 침상이 이리저리 놓여 있는 좁은 집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잡초가 무성한 뜰 한구석의 돌 위에 걸터앉아 웃옷 주머니에서 담배꽁초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쓰레기와 잡초들이 전부인 마당 한구석에 야자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판자를 잇댄 후 함석을 얹은 집은 솜산이 인도네시아의 감옥에서 돌아와 팔을 걷어붙이고 보수를 한 것이었지만, 삼년 만에 다시 흉물스러운 몰골로 변해 있었다. 찢어진 함석지붕에서는 무시로 물이 떨어졌고 흙바닥은 이곳저곳이 패어 집밖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우기가 돌아오기 전에 손을 보아주지 않으면 집은 제구실을 못할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솜산의 아버지가 하나 둘씩 판자와 각목 따위를 주워모아 뜰 한구석에 쌓기 시작한 것도 우기가 오기 전에 집을 손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손을 본들 그 집에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 땅이 내 땅이라면.

솜산은 담배연기를 한숨처럼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난 이년 동안 시하눅빌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한 변이 오십미터쯤인 이 땅도 이제는 십만 달러를 호가한다는 소문이었다. 십만 달러. 맹세컨대 아버지라도 죽일 유혹에 시달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땅은 이제 솜산의 아버지 소유가 아니라 프놈펜에 사는 쳔(陳)이라는 중국인의 소유였다. 그가 95년에 시하눅빌에 내려와 시내와 해변의 땅들을 사 모을 당시에 땅들은 고작해야 몇천 달러 이거나 몇 헥타르가 되어도 만 달러를 넘지 않았다. 솜산의 집이 들어서 있는 이 땅을 솜산의 아버지는 오천 달러에 프놈펜의 중국인에게 팔았다.

솜산의 아버지가 이 땅을 마련한 것은 폴포트의 민주캄푸치아가 베트남 군의 침공으로 무너진 후 내전이 일상화되어가던 북서부의 시소폰을 떠나 프놈펜을 거쳐 시하눅빌에 발을 딛은 직후였다. 강도에게 아들의 목숨을 빼앗기고 그래도 프놈펜이 나을 것 같아 프놈펜으로 떠난다는 땅주인에게 오백 달러인가를 주고 산 땅이었다. 솜산의 아버지는 이 땅에 캄보디아식이 아닌 중국식 목조가옥을 짓고 살았다. 베트남의 난민수용소에서 캄보디아로 돌아온 솜산이 이리저리 수소문을 한 끝에 아버지를 찾아 돌아온 곳도 바로 이 집이었고,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인도네시아로 떠나 난민수용소와 감옥에서 칠년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곳도 이 집이었다. 그럭저럭 이번에는 삼년을 지낸 집이었다.

솜산의 아버지는 프놈펜의 중국인에게 오천 달러를 받고 그가 새 집을 건축할 때까지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좋다는 조건으로 땅을 넘겼다. 소문에 사년 전에 아버지의 땅을 산 프놈펜의 중국인은 곧 이 땅에 호텔을 세운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솜산의 가족은 이 집에서도 쫓겨날 판이었다.

솜산은 아버지가 이 땅을 프놈펜의 중국인에게 판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도 절반은 중국인이 아니던가? 온전한 중국인과 절반 중국인의 안목이 그리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솜산은 못내 아쉽고 화가 났다. 십만 달러가 아니라 그 절반인 오만 달러만 손에 쥐고 있었어도 솜산의 가족은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원한다면 솜산의 아버지는 아편을 피우면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솜산의 아버지는 싸루의 모퉁이에 사방이 고작 일미터인 점포에서 열쇠며 자물쇠, 일회용 라이터 따위를 팔면서 여섯이나 되는 가족들의 생계를 돌봐야 했다. 그나마 솜산은 계산조차 되지 않는 군식구였기에 여섯이었다.

솜산은 손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손가락으로 튀겼다. 잡초 사이로 떨어져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붉은 불꽃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어두운 허공을 날았다. 솜산은 집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뜰 한구석의 야자나무에 매달아놓은 해먹에 몸을 실었다. 해먹의 흔들림이 멍한 솜산의 의식을 더욱 몽롱하게 만들었다. 툭, 빗방울 몇점이 솜산의 얼굴에 떨어졌지만 솜산은 꼼짝도 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늦은 아침까지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다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굵은 빗발이 오락가락 했다.

“솜산 그 녀석 며칠 동안 호되게 당했는데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는지?”

유곽을 지나치다 잠시 비를 긋기 위해 들른 싸루 도박장의 고정멤버인 말단 경찰 쏙트리가 마침 아침으로 국수를 먹고 국물을 들이켜는 뚜이안 앞에서 비에 젖은 머리를 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쏙트리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뚜이안은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고 나서는 쏙트리가 은근히 뱉어놓은 말이 뜻하는 것을 눈치챘다.

“이런 찢어 죽일 놈!”

뚜이안은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뒤뜰에서 작은 장작을 다듬는 칼을 집어들고 나섰다.

국수 그릇을 뒤엎으며 미친 듯이 뛰어나간 뚜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말단 경찰 쏙트리는 생각했던 대로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 이제 요절 한번 나봐라.

쏙트리는 영어 좀 한다고 유세나 떨고 유온말을 한답시고 베트남 것들과 어울려다니고 중국인처럼 사람들 등이나 치고 돌아다니는 솜산이 평소부터 못마땅했다. 게다가 쏙트리 보기에 솜산은 지나치게 약았다. 간차나 헤로인을 팔고 여자 장사까지 하면서도 총을 들고 다니는 인간은 아니었다. 간사하면서도 비굴한 인간 그것이 쏙트리가 보는 솜산이었다.

뚜이안의 마마상도 잔뜩 독이 오른 뚜이안의 그 꼴을 보았다. 마마상은 팔짱을 끼고 얼굴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끅끅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그랬지. 사내놈을 찾으려면 얼치기 중국놈보다는 온전한 캄보디아놈을 찾으라고 말이야.”

그러나 뒤뜰까지 뚜이안을 따라나온 마마상은 칼을 든 뚜이안이 눈을 가로로 찢고 그녀를 쏘아보자 단박 안색이 창백해져서 입을 비죽거리며 홀로 들어가버렸다.

칼을 허리춤에 차고 80cc 오토바이를 타고 유곽을 나선 뚜이안의 얼굴에 사정없이 굵은 빗발이 내리쳤지만 뚜이안의 가슴은 솜산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렸다. 뚜이안은 연신 입으로 흘러들어오는 빗물을 내뱉으면서도 비가 온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 망할 중국놈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테다.

뚜이안의 그 돈이 어떤 돈인지는 솜산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유곽의 젊은 베트남 창녀들은 모두 서양인을 받기를 꺼려했다. 생김새 때문이기도 했지만, 운탁(UNTAC, 유엔캄보디아잠정기구)과 함께 들어온 서양인들에 의해서 에이즈가 캄보디아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에 서양인은 이래저래 달가운 손님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서른의 늙은 창녀인 뚜이안으로서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되지 못했다. 서양인은 뚜이안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게다가 오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재수가 좋으면 십 달러를 놓고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때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행해지기는 하지만 몸을 파는 일은 어디에서나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뚜이안의 어머니도 뚜이안을 데리고 베트남을 떠나 이곳 캄보디아의 시하눅빌까지 오지 않았던가. 하물며 서양인들에게 몸을 파는 것은 몸을 파는 일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깔리는 일이었다.

뚜이안이 솜산에게 건넨 천 달러는 그렇게 해서 번 돈이었다.

“이봐, 미또나에 삼천 달러짜리 집이 나왔어.”

일주일 전에 솜산이 뚜이안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뚜이안은 내심 가슴이 벅차 올랐다. 미또나는 시내와 부두 사이에 있는 해변을 향한 길이었다. 그 길의 왼쪽으로 이백여 미터 떨어진 구릉의 꼭대기에는 이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빈민촌이 있었다. 길도 험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후줄근한 동네였지만 뚜이안은 유곽을 나올 수 있다면 그로써 족하다고 생각했다.

솜산이 천 달러가 부족하다고 했을 때, 뚜이안은 솜산이 집값이 몇년 안에 만 달러까지는 오를 것이고 집의 명의는 뚜이안의 이름으로 해주겠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천 달러를 선선히 내놓았을 것이었다.

“집을 사고 돈을 좀 모아서 반년쯤 뒤에는 결혼식을 올리자구.”

뚜이안에게서 천 달러를 챙긴 솜산은 이런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뚜이안이 옥츄탈과 속카 해변이며 에카리치의 솜산의 집과 시내의 버스터미널, 부두 심지어는 훈센 비치까지 시하눅빌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있을 때 솜산은 부두 옆 품터메이의 포네리 집에 숨어 있었다. 사흘을 뜬눈으로 새운 뒤 해먹에서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비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솜산은 꼼짝없이 장작 패는 칼을 들고 설치는 뚜이안과 맞닥뜨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잠에서 깬 솜산은 아무래도 뚜이안이 들이닥칠 것 같아 이른 아침에 품터메이로 숨어들었다.

품터메이는 솜산이 가끔씩 찾는 부두 옆의 창녀촌이었다. 포네리는 솜산이 손님을 데려다주는 집의 주인으로, 한 명에 일 달러를 소개비로 받았다. 비가 내리는 날 품터메이는 시궁창보다도 못했다. 길은 진흙탕이나 다름없었고 생선 썩는 냄새가 온 거리에 진동했다. 솜산은 오토바이를 포네리의 집 뒤편에 숨겨놓고 판자로 얼기설기 막은 방에서 잠에 곯아떨어져 정오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솜산은 배도 고프고 머리도 복잡했다. 미또나의 집을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솜산에게는 애당초 이천 달러가 없었다는 것이다. 더 나쁜 일은 솜산에게 재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재수만 있었다면 천 달러를 밑천으로 왜 삼천 달러를 만들지 못했을 것인가.

나무판자로 엮은 지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장에 힘없이 시선을 박고 있던 솜산은 거의 평생 동안 자신을 따라다닌 것처럼 느껴지는 불운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으로 진격하던 해에 솜산은 겨우 여덟살이었다. 미군의 폭격이 심심찮게 계속되던 어느 해에 들판에서 일하던 솜산의 어머니가 마침 B52가 떨어뜨린 폭탄의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해 말에 고향인 다케오를 떠난 솜산의 일가가 프놈펜의 싸터메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프놈펜이 함락된 지 며칠 되지 않아 새 정권은 프놈펜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소개하기 시작했다. 솜산의 가족은 몇날 며칠을 걸어 바땀방을 거쳐 태국 국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소폰의 집단농장에 가서 살았다. 솜산의 고모 하나가 시소폰에서 영양실조로 죽었지만 프놈펜에서 시소폰까지 그 험한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사람의 목숨값이 물소값보다 한참 밑바닥이던 민주캄푸치아 삼년 반 동안에도 솜산의 가족은 모두 생명을 부지했다. 베트남군이 프놈펜을 거쳐 시소폰까지 들어왔을 때 솜산의 가족은 모두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프놈펜에서 솜산은 다섯달간 학교를 다녔고 그것이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솜산이 받았던 유일한 교육이 되었다.

이듬해에 솜산의 가족 중 솜산과 배다른 형제 둘, 그리고 고모 둘과 할머니는 베트남의 싸이공으로 향했다. 프랑스로 이민을 갔던 삼촌의 연락을 받고 떠난 길이었다. 싸이공에서 십개월을 보낸 후 솜산 일행은 모두 쏭베에 있던 난민수용소로 보내졌고 솜산은 그곳에서 칠년을 보내야 했다. 칠년 뒤에 아버지가 있던 시하눅빌로 돌아온 솜산은 다시 인도네시아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려 했지만 바땀의 난민수용소에서 다시 육년을 보내야 했다. 육년의 캠프생활 끝에 캄보디아로 송환되기 직전에 솜산은 수용소를 탈출하여 육개월 동안 칼리만딴의 이곳저곳을 헤매다 인도네시아 경찰에 붙잡혀 자카르타의 감옥에서 일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자카르타의 감옥에서 나와 다시 돌아온 곳이 시하눅빌이었다.

십오년의 세월을 난민수용소와 감옥을 전전해야 했으니 솜산은 역시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쏭베의 난민수용소에 있던 솜산의 고모 중 하나는 지금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고, 배다른 형제 하나는 프랑스에 살고 있다. 그러나 솜산이 돌아온 곳은 결국 캄보디아였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포네리의 좁은 방안에서 솜산은 조심스럽게 늘 허리띠 안쪽에 차고 다니는 작은 가방 속에서 여권을 꺼냈다. 붉은 표지의 캄보디아 여권. 이걸 만들기 위해 솜산은 무려 백 달러를 써야 했다. 이십 달러의 뇌물을 주고 아이디 카드를 만들었고 프놈펜에까지 올라가서 이틀을 머물면서 팔십 달러를 쓰고 여권을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인쇄한 여권은 깨끗하고 튼튼해 보였다.

반년 전 프랑스에서 온 베트남인이 이틀 동안 솜산의 모또를 이용했다. 마르쎄이유의 의류도매상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는 그는 두달 전에 솜산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의류매장 사장이 점원을 구하고 있는데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초청하겠노라고.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솜산은 다음날로 그렇게 해주면 분골쇄신 일을 하겠노라고 편지를 보냈고, 일주일 뒤에는 여권을 만들었지만 마르쎄이유의 베트남인에게서는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다.

점원이 필요없게 된 것일까? 한달에 천 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솜산은 여권의 첫 장을 펼쳐 들어 자신의 사진과 적힌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여권에 적힌 솜산의 이름은 중국식 이름인 핑(平)이었다. 솜산의 가족 중에 핑이란 이름을 가진 그의 숙모와 조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기 때문에 솜산이 빌려 쓴 것이었다. 그 이름을 볼 때마다 솜산에게는 이번만큼은 캄보디아를 떠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조금씩 충만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전직 크메르루주 절름발이 포네리가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솜산이 여권을 쓰다듬으며 왠지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있을 그때였다.

“너 이제 큰일났다.”

문을 열고 들어선 포네리는 눈을 부라리며 큰소리로 고함을 치듯이 외쳤다.

“이놈. 베트남 계집의 돈을 도박으로 날려버리다니 정말 대단한 놈 아니야? 그것도 천 달러씩이나 말이야. 방금 뚜이안이란 계집이 널 찾는다고 품터메이를 먼지 털듯이 털고 갔다.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말이야. 내가 만약에 네 놈이 여기 있다고 알려주었으면 넌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포네리는 솜산이 누워 있던 침대 한쪽 모서리에 털썩 걸터앉아,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막 몸을 일으킨 솜산의 뒤통수를 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솜산은 갑자기 뒷골이 지끈거려 빈속이 더욱 메슥거려왔다. 그런 솜산의 눈에 부처의 사진을 모셔놓은 손바닥만한 제단이 들어왔다. 솜산은 주머니에서 천 리엘짜리 지폐를 꺼내 제단에 올려놓고 향로의 타다 만 향에 불을 붙이고는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시하눅빌은 좁은 동네였다. 품터메이에 숨어 있는 것도 길어야 이틀이면 족했다. 이틀이면 누군가 뚜이안에게 고자질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솜산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놈아, 부처님이 널 봐주겠냐, 아니면 그 개만도 못한 유온계집이 널 봐주겠냐? 게다가 네 놈은 예수한테까지 고개를 숙였던 놈 아니냐?”

부처의 제단 앞에 손을 모으고 있는 솜산을 보고 포네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빈정거렸다. 행여 뭐라도 나올 것이 없을까 싶어 외국인이 운영하는 시내의 교회들을 기웃거린 것을 두고 이죽거리는 것이다.

솜산은 대꾸하지 않는 대신 문득 예수한테 빌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든 예수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예수나 부처가 아니라 모하메드에게도 머리를 조아릴 터였다.

“그 계집도 유온인데 네 놈을 그대로 놔둘 성싶으냐?”

베트남군의 칼리니코프 소총 탄알에 무릎뼈가 부서진 포네리였다. 그나마 빗겨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의족을 매달아야 했을 것이다. 이년 전 포네리가 다리를 절며 빨린에서 시하눅빌로 돌아왔을 때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발목지뢰를 밟은 것쯤으로 여겼다. 포네리가 크메르루주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두고 봐라. 유온놈들을 다 몰아내지 않으면 십년 안에 캄보디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포네리는 늘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 지난번 총선에서 베트남인들이 현 정부에 몰표를 준 것이나 지금 정부의 수상이 베트남이 세운 괴뢰정권 출신이라는 것을 보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어쩌면 좋겠소?”

솜산은 한껏 비굴한 표정으로 포네리를 바라보았다.

“어쩌긴 이놈아. 지금 당장이라도 프놈펜으로 가든지. 아니면 바땀방에라도 가든지. 어쨌든 여길 뜨는 게 상책이지.”

하긴 시하눅빌을 뜨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었다. 캄보디아 제일의 도시인 프놈펜도 넓었고 두번째로 큰 도시인 바땀방도 넓었다. 뚜이안이 아무리 찾고 싶어도 찾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뚜이안이 살아 있는 한 시하눅빌로 돌아오지만 않으면 솜산은 평생 뚜이안과 부딪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늦기 전에 말이야.”

포네리가 솜산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놈펜이건 바땀방이건 시하눅빌을 빠져나가는 길은 외길이었다. 그 외길에 검문소가 두 군데 있었다. 만약 뚜이안이 그 길을 지키는 경찰과 헌병 들에게 미리 손을 써놓았다면 솜산이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 길을 빠져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연히 재수가 없으면 경찰이나 헌병의 총에 맞아 그 길로 저세상 사람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토바이만 없다면 시하눅빌을 빠져나가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솜산의 혼다 125cc 오토바이는 물경 천 달러에 가까운 돈을 치르고 새로 장만한 것이 아니던가. 오토바이도 없이 불알 두 쪽과 주둥이 하나만 가지고는 프놈펜을 가든지 바땀방을 가든지 아니면 시엠립을 가든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요령부득이었다.

“어때. 네 오토바이는 내 사백 달러를 쳐주지……”

포네리가 넌지시 솜산의 의중을 찔렀다.

“프놈펜까지 가는 차편도 알아봐주고 말이야.”

─빌어먹을 크메르루주 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솜산은, 포네리의 이 음흉한 제의에 이를 갈았다. 사백 달러라니 지금 당장 내다 팔아도 칠백 달러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가. 차라리 뚜이안에게 오토바이를 내주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이었다.

오랜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한결 머리가 맑아진 솜산은 자신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뚜이안이 그렇게 설치고 다녔으니 이제 시하눅빌에서 솜산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심지어는 셈삭 호텔의 스티브며 쌤 레스토랑의 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보는 놈마다 솜산의 오토바이에 눈독을 들이고 공갈을 쳐댈 것이 뻔했다.

솜산은 늦기 전에 결정을 해야 했다. 이대로 뚜이안의 성깔을 잠재우지 못하고 시하눅빌에서 시간만 보낸다면 말마따나 골로 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제일 꺼림칙한 상대는 뚜이안의 단골 중의 하나인 홀아비 군인 잔톤이었다. 뚜이안이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애원하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와 눈에 보이는 대로 솜산의 머리통에 AK-47 소총을 갈겨댈 위인이었다.

잔톤뿐이겠는가. 뚜이안의 유곽은 물론 여자들이 몸을 파는 모든 집들은 경찰과 군인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 보호의 댓가였다. 솔직히 말해서 경찰이나 군대와 유대를 맺고 있는 유곽들에 비한다면 솜산은 아무것도 아닌 피라미였다.

다행스럽게도 뚜이안이 지금 칼을 들고 설쳐댄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솜산을 죽일 생각이 없거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정말 솜산을 없애고 싶으면 뚜이안으로서는 아주 간단한 방법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한다……

포네리가 열어놓은 문으로 오후의 햇빛이 따갑게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비는 그친 모양이었다. 퀴퀴한 생선이 썩는 냄새가 무겁게 포네리의 방안을 흘러다녔지만, 솜산은 그 냄새를 맡지 못했다.

 

시하눅빌에서 이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스텅하우에서 이제 막 돌아온 뚜이안은 유곽 이층 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맞은편의 거울을 보고 있었다. 비에 젖고 바람에 날려 형편없이 엉클어진 머리가 그녀의 이마와 볼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너덧 시간을 돌아다닌 끝에 온몸은 황토먼지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웅덩이의 물이 튀어 하반신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귀신이나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던 뚜이안의 눈에서 툭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찢어죽일 중국놈.

무슨 신세가 이렇단 말인가. 고작 몸을 팔러 고향을 떠난 지 벌써 십이년,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고향을 떠난 뚜이안이었다. 남들은 똑같이 몸을 팔았어도 벌써 시하눅빌 시내에 버젓한 건물을 사기도 했다. 뚜이안도 어머니만 변을 당하지 않았으면 일찌감치 몸 파는 생활을 청산하고 남들 보기에도 버젓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물다섯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뚜이안은 몸을 팔 줄은 알았지만 돈을 모으고 간수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자 뚜이안은 끈 떨어진 연이었다. 마마상도 뚜이안을 홀대하는 눈치가 역력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 뚜이안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빼돌렸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라는 기세였다. 그나마 조금씩 돈을 만지기 시작한 것은 스물여덟이 되어서였다.

고향에 아버지만 있었어도 뚜이안은 빈손일지언정 어떻게든 고향인 하티엔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기실 캄보디아와 베트남 국경에 접해 있던 하티엔은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고향엔 뚜이안을 반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뚜이안의 어머니가 뚜이안을 낳던 해에 농사꾼이던 뚜이안의 아버지는 미군이 떨어뜨린 폭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뚜이안의 어머니가 찾은 것은 폭탄이 만든 거대한 웅덩이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남편의 찢어진 호치민 쌘들뿐이었다.

솜산에게 왠지 마음이 끌렸던 것도 솜산 역시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처럼 미군의 폭탄에 맞아 죽은 동병상련의 처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케오와 하티엔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뚜이안은 거울 속의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뒤로 넘겼다. 비를 맞은 탓에 비릿한 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긴 머리를 손으로 말아 틀어올리면서 뚜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내 손이 아니라도 넌 누구 손에라도 죽는다.

천 달러도 천 달러지만, 믿었던 솜산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어차피 운이 없어 제대로 못 풀린 인생이었다. 쥐뿔도 가진 것 없는 중국놈 하나 죽이는 것쯤이야 거리낄 것이 없었다. 뚜이안은 유곽을 드나드는 경찰과 군인들 중 몇몇을 떠올렸다. 아무라도 이십 달러만 주면 뚜이안의 소원쯤은 들어줄 것이다. 돈이 아니라도 눈웃음을 치거나 눈물을 훌쩍거리며 사정하면 들어줄 것이다.

─넌 이제 죽은목숨이다.

앙다문 뚜이안의 입술이 거울 속에서 시퍼렇게 핏기를 잃어갔다.

뚜이안은 늦기 전에 그들 중 하나를 찾아나섰다. 솜산이 걱정했던 대로 뚜이안은 홀아비 군인인 잔톤을 먼저 떠올렸다. 잔톤이 근무하는 부대는 옥츄탈 해변의 초입에 있었다.

홀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마마상은 뚜이안이 이층에서 내려와 뛰쳐나가는 것을 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깨끗하게 개어 있었고 햇빛이 야자나무 사이로 새어들어 마마상이 앉아 있는 흔들의자의 바로 앞을 달구고 있었다.

“영락없이 미친년 꼴이네.”

마마상은 삐걱이며 돌아가는 씰링팬 밑에서 이제 막 나른한 오수에 빠지려던 참이었다. 이제 육십을 넘긴 그녀는 가끔씩 머리가 흐릿해지는 탓에 뚜이안이 무슨 이유로 저렇게 끔찍한 꼴을 하고 유곽을 뛰쳐나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마상은 어쨌든 막 잠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뚜이안이 옥츄탈의 부대로 찾아가 잔톤을 만나고 있는 그 시간에도 솜산은 품터메이의 포네리 집에서 시하눅빌을 떠날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었다. 천 달러 때문에 지난 오년 동안 시하눅빌에서 쌓아온 기반을 버리고 도망가기에는 아무래도 억울했다. 게다가 프놈펜이든 어디에서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 솜산은 자신이 없었다. 또 마음 한구석에는 뚜이안이 몹시 화는 났겠지만 자신을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솜산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잔톤은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뚜이안의 부탁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뚜이안이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하는 것도 그렇지만 잔톤은 솜산이라는 새앙쥐 같은 중국놈을 곱게 보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찢어진 눈하며 벗겨진 이마, 툭 불거진 입술도 가관이거니와 도박판에서 언젠가 잔톤의 돈을 물경 백 달러나 축낸 놈이 바로 솜산이었다. 그래서 그러지 않아도 언젠가는 한번 뜨거운 맛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터였다.

─재수없는 중국놈.

그렇기는 해도 잔톤은 솜산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뭐래도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총알을 머리에 박으면 그 누구라도 다시 살아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솜산이 뚜이안에게 저지른 짓은 잔톤이 보기에도 죽어 마땅한 짓이었지만 해가 지날수록 누군가의 머리에 총알을 박는 것이 조금씩 골치아픈 일이 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여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래서 시내의 리카도(Licardo)놈들의 귀에라도 들어가고 그놈들이 인권이네 뭐네 하고 떠들어대는 재수없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군복을 벗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뚜이안의 부탁이기는 해도 무보수로 해주기에 잔톤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섭섭했다. 그래서 시원한 대답 없이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옥츄탈 해변의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런 잔톤의 속셈을 뚜이안이 헤아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런 잔톤의 손목을 넌지시 부여잡고 뚜이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잔톤. 앞으로 넉달 동안 아무 때라도 찾아주세요.”

솜산에게 천 달러를 날린 뚜이안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녀의 몸뚱어리 밖에 없었다. 경찰과 군인 들에게는 늘 공짜라고는 하지만 대개는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곤란하다는 것이 관행이었다.

잔톤은 어림잡아 뚜이안의 제안을 값어치로 환산해보았다. 일주일에 세 번쯤 뚜이안을 찾는다면 한번에 이 달러씩 육 달러. 한달이면 이십사 달러, 넉달이면 구십육 달러였다. 또 적당히 뚜이안과 나눌 수 있는 솜산의 오토바이도 있지 않은가.

“헌데 그놈이 아직 시하눅빌에 있을까?”

잔톤은 그럭저럭 섭섭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뚜이안에게 물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밤까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뚜이안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잔톤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시하눅빌에 없다면 나도 어쩌지 못하네.”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시하눅빌에 있다니까요.”

한두 번 살을 섞은 사이가 아니었다. 뚜이안은 솜산이 이런 상황에서 하루 만에 결정을 내리는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오토바이 때문에라도 솜산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입단속이나 잘 하게. 마마상한테도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잔톤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뚜이안의 어깨를 슬쩍 껴안았다. 아직까지는 탄력을 잃지 않은 뚜이안의 가슴의 촉감이 잔톤의 손끝에 뭉클하게 전해져왔다.

 

해가 질 무렵 품터메이의 솜산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얼마?”

“세 명에 천 달러를 준다는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헝클어진 머리가 한꺼번에 풀리면서 솜산의 눈앞에 빛이 보였다.

품터메이의 솜산에게 찾아온 것은 부두 앞 언덕의 산정오락성(山頂娛樂城) 카지노에서 일하는 찬모노롬이었다. 프놈펜의 중국인이 지은 카지노 호텔인 산정오락성은 지금은 손님보다 직원의 수가 더 많은 형편이지만 수상 훈센이 수도인 프놈펜에서 이백 킬로미터 내에 있는 카지노의 영업을 금지한 올해 초부터는 전망 하나로 버티는 호텔이었다. 시하눅빌은 프놈펜에서 이백삼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산정오락성의 찬모노롬이 전한 소식은 말레이시아에서 온 세 명의 중국인이 세 명의 처녀를 구한다는 것이었다. 도박을 즐기는 중국인의 오래된 믿음 중의 하나는 처녀와 관계를 가지면 도박운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도박을 하는 중국인이 처녀를 구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시하눅빌만 해도 처녀인 딸을 비싼 값에 팔 베트남 부모들은 널려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재수를 위해 처녀를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솜산은 때때로 싸루의 도박장의 중국인들이나 ]스관광에 나선 일본인이나 유럽인 들에게 처녀를 알선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솜산은 삼백 달러를 받아 이백 달러나 이백오십 달러를 처녀들의 부모에게 주고 나머지를 챙기곤 했다.

“헌데 베트남 처녀는 싫고 캄보디아 처녀를 달라네.”

뜸을 들이던 찬모노롬이 슬쩍 말을 흘리면서 솜산의 눈치를 살폈다.

캄보디아 처녀? 솜산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 없이 찬모노롬에게 물었다.

“얼마?”

“천 달러?”

솜산은 느긋한 표정으로 찬모노롬을 바라보았다. 찬모노롬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솜산은 놓치지 않았다. 캄보디아 속담에 마음을 보려면 얼굴을 보라고 했다.

상대가 산정오락성의 고객이라면 문제가 틀렸다. 모르긴 해도 지난 며칠동안 꽤 많은 액수를 날렸을 것이고 산정오락성이라면 싸루의 허름한 도박장하고는 그 단위가 다를 것이었다. 산정오락성의 고객들이 처녀를 찾는다면 한명에 삼백 달러가 아니라 천 달러도 내놓을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돈을 잃은 중국인들은 지금 당장 운을 위해 처녀를 원하고 있다. 누가 그들의 요구에 맞추어 처녀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찬모노롬이 힘들게 품터메이의 포네리 집에 숨어 있는 솜산을 수소문해 찾은 이유는 솜산이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이나 미국인 그리고 유럽인까지 상대할 정도로 발이 넓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중국인들이 여간 보채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캄보디아 처녀였다. 어느 크메르 부모가 딸을 내놓는단 말인가. 아무리 헐벗고 굶주려도 그건 크메르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오백 달러를 주면 내일 오전까지 준비해주지.”

코를 만지작거리던 솜산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찬모노롬에게 입을 열었다.

“천오백 달러?”

찬모노롬의 얼굴이 슬그머니 일그러졌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절름발이 포네리가 눈을 껌벅이며 입을 벌리고 찬모노롬과 솜산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찬모노롬이 성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딴 데 가서 알아봐.”

솜산은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다시 오간 흥정은 십분 만에 천이백 달러에 끝났다.

“아침 여덟시에 출발할 테니까 그리 알아.”

솜산이 찬모노롬에게 일렀다. 찬모노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래도 솜산이 찬모노롬보다는 한수 위였다. 포네리가 입맛을 다셨다.

“천이백 달러. 헌데 네 놈은 하룻밤 만에 어떻게 처녀들을, 그것도 세 명이나 구할 수 있지?”

솜산은 포네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분주히 포네리의 방을 나섰다.

“저놈 말을 믿어?”

바람을 일으키며 포네리의 방을 나가는 솜산의 뒷모습에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던 포네리가 찬모노롬에게 넌지시 물었다.

“글쎄요?”

여전히 쓴 입맛을 다시던 찬모노롬도 고개를 모로 꼬았다.

─재수없는 중국놈.

포네리가 솜산이 사라진 방문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하룻밤에 세 명의 처녀?

솜산은 포네리의 집 뒤뜰에 숨겨놓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솜산이 아니라 부처가 나서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처녀들을 구할 수 있다 해도 이렇게 급한 경우에는 한명당 삼백 달러 이상은 치러야 했다. 급하게 서두를수록 비용은 오르는 법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이백 달러를 벌 수 있다면 평소의 솜산으로는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솜산은 일이백 달러로는 해결되지 않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시하눅빌 시내로 들어가면서 솜산은 쉴새없이 분주하게 머리를 굴렸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렸기 때문인지 부두에서 불어오는 저녁 바람은 차갑고 싱그러웠다. 솜산의 머리는 시내가 가까워질수록 맑고 명료해졌다.

승리기념탑을 지나는 언덕길을 내려가자 저 멀리 시하눅빌 시내의 불빛이 보였다. 뚜이안에게 선물로 받은 솜산의 모조 카시오시계는 이제 일곱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서둘러야 했다.

 

동이 트기 직전에 솜산은 미또나에 살고 있는 마약거래상인 삐의 집에 들렀다. 삐는 나무집의 모기장 안에서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몇번을 흔들었지만 깨는 기색이 없어 솜산은 어둠속을 더듬어 물병을 찾아 삐의 얼굴에 물을 들이부어야 했다. 잠에서 깨어난 삐는 잔뜩 화가 나서 왼손으로 흥건하게 젖은 얼굴을 훔치며 솜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누구야?”

삐는 당황하지 않고 어둠속의 솜산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솜산이 빨리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면 삐는 머리맡의 베개 밑에서 재빠르게 꺼내 오른손에 쥐고 있던 38구경 중국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죽고 싶어?”

불의의 침입자가 솜산임을 확인하고 삐는 잔뜩 볼이 부은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여전히 권총을 손에 쥔 채 집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권총을 허리춤에 감추었다. 삐는 입맛을 다시며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의 스위치를 올렸다. 작은 형광등이 푸른빛을 내며 삐의 더럽고 초라한 나무집 안을 밝혔다.

솜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십 달러짜리 두 장을 삐에게 내밀었다.

“간차?”

이십 달러를 받아든 삐가 솜산에게 물었다. 솜산이 고개를 젓자 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방안 한구석에 던져두었던 바지를 꿰어차고는 나무집 계단을 내려갔다. 솜산은 삐가 올 때까지 사분쯤을 기다렸다. 돌아온 삐는 작은 비닐봉지에 넣은 흰색 분말을 솜산에게 내밀었다. 삐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다음부터는 이 시간에는 오지 말아. 정말이지 넌 오늘 운이 좋았지만 다음엔 그냥 쏴버릴 거야.”

삐는 솜산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노려보았다. 솜산은 손을 모아 캄보디아식 작별인사를 하고 삐의 나무집을 나왔다.

솜산은 종종 강도가 나타나곤 하는 미또나의 숲길을 걸어 오토바이와 뚜이안이 기다리고 있는 독립해변의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동이 트기 전의 검푸른 서편 하늘 아래 야자나무 잎들이 무성한 숲길을 빠져나와 해변이 보이는 작은 길로 접어들었을 때 뚜이안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좀 일찍 올 수 없어.”

팔짱을 낀 채 뚜이안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솜산을 대했다.

솜산은 지난밤 일을 떠올리며 뚜이안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솜산이 남들의 이목을 피해 숲속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고양이 걸음으로 유곽의 이층 뚜이안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뚜이안은 마치 귀신이 나타난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홀아비 군인 잔톤에게 솜산을 죽여줄 것을 부탁한 뚜이안이 제풀에 오금이 저려 솜산의 귀신이 나타난 것으로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십분만 내 말을 들어주면 그 다음엔 나를 죽여도 좋아.”

솜산은 뚜이안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유곽의 뒤뜰에서 가져온 장작을 다듬는 칼을 내밀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놀랐던 뚜이안은 곧 불같이 화가 치밀어 솜산이 내민 칼을 낚아챘다.

“뻔뻔스러운 중국놈.”

칼을 잡은 뚜이안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않았어도 칼은 솜산의 몸 어디에라도 박혔을지 몰랐다. 화를 못 이긴 뚜이안이 털썩 침대에 주저앉는 것을 놓치지 않고 솜산은 재빠르게 두 팔로 뚜이안의 어깨를 감싸안고 몇번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일 오전이면 천 달러가 나와. 오전이면 나온다구. 부처님께 맹세할 수 있어.”

“이 찢어죽일 중국놈이……”

뚜이안은 여전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솜산이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기 때문에 칼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정말이야. 내일 오전이면 천 달러가 나온다니까.”

뚜이안은 느닷없이 닥친 일이 그저 어지럽기만 해 가쁜 숨을 몰아쉬다 제풀에 지쳐 그만 정신이 빠져버린 것처럼 멍해져버렸다.

솜산은 그런 뚜이안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칼을 빼앗아 침대 밑에 밀어넣고는 뚜이안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기색을 살폈다. 허를 찔렸기 때문에, 그리고 어깨를 껴안은 솜산에게서 낯익은 살냄새가 코끝에 묻어 나오면서 뚜이안은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솜산에 대해 가졌던 격한 증오와 살의를 상실해갔다.

시간이 흐르자 뚜이안은 숨을 고를 만큼 안정을 찾았다. 그러자 뚜이안은 원수와도 다를 것이 없는 솜산이 코앞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고 미워졌다. 솜산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뚜이안은 잔톤의 총알로 벌집이 된 솜산의 시체에서 그 얄밉게 찢어진 눈을 도려내고 배를 열어 간을 꺼내는 자신의 모습을 몇번이고 머릿속에 그리지 않았던가. 아직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정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뚜이안은 그런 자신이 너무도 분하게 여겨져 그만 솜산이 눈앞에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후두두 눈물을 뿌리고 말았다.

솜산은 눈물을 흘리는 뚜이안의 얼굴을 보고 적이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뚜이안의 방안 구석구석을 신중히 살펴보았다. 혹시 흉기라도 될 만한 물건이 있다면 뚜이안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치워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태생이 악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워낙 성질이 급해 화가 돋으면 닥치는 대로 들고 휘두르는 버릇이 있는 뚜이안이었다.

“말해봐, 더러운 중국놈아. 어떻게 내일 오전에 천 달러를 주겠다는 거지?”

눈물로 얼룩진 얼굴도 훔치지 않은 뚜이안이 먹다 남은 앙코르맥주를 바닥까지 비운 다음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솜산을 다그쳤다.

한 고비를 넘긴 솜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딴에는 애처로운 웃음을 짓는다고 지었을 때 뚜이안은 그 얄미운 꼴에 다시 분이 치밀었는지 솜산의 뺨을 쉬지 않고 서너 대나 올려쳤다. 눈앞에서 서너 차례 청천벽력 같은 불이 오간 솜산은 보기좋게 침대 아래로 나동그라져야 했다.

“네 말대로 내일 오전까지 천 달러가 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넌 죽은목숨이야.”

뚜이안은 침대 아래 솜산에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친 김에 휘두를 것이 없나 하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솜산은 냉큼 뚜이안의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아픈 볼을 비빌 틈도 없이 용수철처럼 일어서 뚜이안의 손을 잡았다.

“이봐 뚜이안.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널 찾아왔겠어? 다 수가 있으니까 찾아온 거 아니야?”

“수는 무슨 수? 네 놈의 그 알량한 수라는 게 다 나 같은 년 등쳐먹는 수 아냐?”

뚜이안은 솜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솜산의 억센 손이 이번에는 뚜이안의 가는 팔목을 부러질 만큼 힘차게 그러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손 놓지 못해.”

뚜이안이 몸을 비틀었다.

“얌전히 있으면 놔주지.”

“이 더러운 중국놈이.”

어쩔 수 없이 뚜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솜산은 뚜이안의 손을 놓아주고 그제서야 아직도 얼얼한 자신의 볼을 쓸었다.

“그년의 손맛 참 독하기 짝이 없구나.”

 

그 저녁에 솜산이 뚜이안을 이해시키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얇고 작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솜산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뚜이안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솜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솜산에게도 뚜이안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었다.

“돼지 같은 놈. 더러운 일은 모두 내게 시키는구나.”

표독스러운 눈으로 솜산을 쏘아보던 뚜이안은 침대 머리맡에 붙은 거울을 보면서 대충 얼굴을 정리한 후 솜산에게 꼼짝 말고 방에 있으라고 이르고는 오토바이 키를 집어들고 방을 나섰다.

뚜이안이 황망하게 떠난 방은 이제 막 전투가 끝난 전쟁터와 같았다. 구겨진 침대보와 방바닥 여기저기서 나뒹구는 화장품들, 그리고 바닥의 흙 묻은 발자국들은 뚜이안이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솜산은 긴 한숨을 내쉬고 뚜이안의 침대에 길게 몸을 뉘었다. 피곤이 온몸을 덮쳐와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솜산은 잠들기 전에 방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뚜이안은 그날 저녁 내내 시하눅빌의 나이트클럽과 가라오께, 유곽 그리고 품터메이를 조심스럽게 헤집고 다니면서 열여섯이나 열일곱, 열여덟 먹은 어린 창녀를 찾았다. 그것도 캄푸치아 크롬(캄보디아의 남동 지역, 또는 그 지역 사람)으로 그중에서도 마침 생리중인 아이여야 했으므로 뚜이안은 밤 열한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세 명의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마상들은 뚜이안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가끔씩 그런 아이들을 찾는 변태 외국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내주긴 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뚜이안에게 다짐을 받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혹시나 애들이 다치면 모두 네 책임이야. 그런 애들을 찾는다면 분명히 정상적인 놈들은 아닐 거야.”

뚜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별걱정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마마상들에게 타박을 주면서 각각 십 달러씩을 주고 어린 창녀들을 시내에서 외진 꼬포호텔로 데려다놓았다. 두 명은 열여섯, 다른 한명은 열아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모두 이제 막 베트남에서 시하눅빌로 왔기 때문에 그다지 얼굴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모두 캄보디아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뚜이안이 유곽 이층의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 솜산은 잠에서 깨어 뚜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솜산은 뚜이안이 자신이 맡은 일을 모두 해놓은 것을 알았다. 나머지 일은 모두 솜산의 몫이었으므로 솜산은 자정이 가까워지자 바쁘게 움직였다.

솜산은 우선 시하눅빌 근교의 작은 마을들 중에서 세 집을 골랐다. 빠떼랑과 림, 그리고 스텅하우에 집 하나씩을 빌려 세 아이들을 옮겨놓는 데는 바람과 같이 서둘렀어도 꼬박 네 시간이 걸렸다. 집주인들과 어린 창녀들에게는 단단히 주의사항을 일러두었고 그 댓가로 삼 달러씩 주었다.

부두를 지나 이십여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 스텅하우는 길가에 철사줄을 늘여놓고 달리는 오토바이를 넘어뜨려 터는 강도로 유명했다. 길도 여기저기 웅덩이가 패어 있어 여간 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녁 여덟시가 넘으면 어지간해서는 시하눅빌의 모또 운전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그 철사줄에 꼼짝없이 목이 잘려나기 십상이기 때문에 해가 지면 아무도 그 길을 기웃거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솜산으로서는 가끔씩 강도가 나타나는 림이나 빠떼랑으로 가는 길도 그랬지만 스텅하우조차도 지금의 처지에서는 가릴 바가 아니었다.

새벽 내내 뚜이안은 그러지 않아도 좋으련만 그런 솜산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뚜이안. 스텅하우로 가는 길은 내 혼자 다녀오지.”

위험하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통하지도 않는 막다른 외길이 스텅하우였다. 시하눅빌로 돌아나올 수밖에 없는 스텅하우라 솜산은 뚜이안을 위해 그렇게 타일렀지만 뚜이안은 듣지 않았다.

“죽이게 되면 너부터 죽이겠지.”

뚜이안은 막무가내로 오토바이에 올라앉아 솜산의 허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솜산은 이 표독스럽고 막무가내인 유온계집에게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솜산이 삐의 집에 들러 독립해변으로 나왔을 때 모든 준비는 완료된 셈이었다. 시계는 이제 곧 아침 여섯시를 가리킬 양이었다. 동이 트고 있었고 서편 하늘도 조금씩 희부옇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솜산과 뚜이안은 유곽으로 돌아가 일곱시가 될 때까지 함께 머물렀다. 온밤을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헤맨 솜산과 뚜이안은 모두 물먹은 솜처럼 지쳐 있었지만 늦추어지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솜산과 뚜이안의 머리와 정신을 투명하고 맑게 지탱하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솜산과 뚜이안은 늘 그랬던 것처럼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탐하는 대신에 그 둘은 그저 나란히 누워 가끔씩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분명히 뚜이안의 얼굴에는 애증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솜산은 때때로 뚜이안의 표정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솜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솜산은 슬며시 뚜이안의 손을 잡았다. 뚜이안은 매섭게 뿌리쳤지만 그런 일이 너덧 번쯤 계속 되자 뚜이안은 솜산에게 자신의 손을 맡겨두었다. 피곤하다는 듯이.

아침 일곱시에 유곽을 나온 솜산은 마지막으로 추엔민병원에 들러 산부인과 의사인 렁을 만났다. 오십대 후반의 의사 렁은 프놈펜이 크메르루주에게 함락되기 반년 전에 의사로 일하고 있던 캄폿에서 베트남으로 도망간 눈치 빠른 중국인으로, 십여년 전에 캄보디아로 돌아와 시하눅빌에 추엔민병원이 세워지면서부터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청진기를 목에 건 렁은 금테안경 너머로 혼탁한 흰자위를 굴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렁은 솜산이 내민 이십 달러를 받아 바지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렁에게도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추엔민병원의 현관문을 열고 나서던 솜산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일주일 동안 솜산이 제대로 눈을 붙여본 것은 품터메이의 포네리의 집에 머물던 반나절뿐이었다. 그동안 변변히 배를 채운 일도 없었던 솜산은 싸루에 들러 배를 채우고 산정오락성으로 향했다.

뚜이안은? 물론 유곽을 나오면서부터 솜산과 함께였다.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맑았고 햇빛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하눅빌의 높고 낮은 언덕과 해변의 시리도록 흰 모래를 달구기 시작했다. 태국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약하지만 도로변의 야자나무 잎들을 살랑살랑 흔들 정도는 되었다. 솜산은 천천히 부두를 향하는 두 개의 언덕을 넘어 산정오락성이 있는 언덕으로 접어들었다. 산정오락성의 붉은 기와지붕이 보이는 비탈길에서 솜산은 오토바이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뚜이안에게 말했다.

“뚜이안. 네가 있으면 중국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

솜산의 허리춤을 잡은 뚜이안은 말이 없었다.

“네가 날 못 믿는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너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그땐 날 탓하지 말아.”

묵묵부답인 뚜이안에게 볼멘 목소리를 던진 솜산이 오토바이의 기어를 넣으려고 할 때 뚜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내려.”

“뭐?”

솜산은 뚜이안의 목소리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리란 말이야, 중국놈아.”

뚜이안은 자근자근 씹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냉랭하게 솜산에게 말했다.

솜산은 언덕 밑에서부터 언덕 꼭대기에 지어진 산정오락성까지 걸어가야 했다. 뚜이안이 솜산의 오토바이를 타고 유곽으로 돌아간 것이다.

─독한 베트남년.

오토바이를 가져가겠다는 뚜이안의 속셈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기왕지사 산정오락성 언덕 밑에까지 온 것을 꼭대기까지 태워다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솜산은 터덜터덜 비탈길을 걸어올라가면서 뚜이안에게 욕을 퍼부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비탈길은 그늘 한점이 없어 솜산의 등판은 금시 축축한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찬모노롬은 솜산이 도착하기 전부터 현관 앞에 나와 앉아 솜산을 기다리고 있다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어떻게 됐어?”

찬모노롬이 의심에 가득 찬 얼굴로 솜산의 얼굴을 살폈다.

솜산은 대답 없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의 땀을 훔치자 얼굴에 붙어 있는 흙먼지가 한 움큼 손등에 묻어나왔다. 그제야 솜산은 지난 며칠 동안 목욕은커녕 얼굴 한번 제대로 씻지 않은 것을 알았다.

기실 솜산은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헤진 셔츠와 바지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데다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었기 때문에 땟국과 흙먼지를 감출 수 있었다.

어적어적 씹히는 입안의 모래를 대충 침으로 헹구어 뱉은 솜산은 찬모노롬에게 중국인들의 행로를 설명했다.

“틀림없는 거지? 돈은 일이 다 끝난 후에야 받을 수 있는 거야.”

못내 의심스러웠던지 찬모노롬은 몇번이고 솜산의 다짐을 받고서야 말레이시아에서 온 중국인들을 모시러 자리를 떴다.

중국인들은 십분쯤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한눈에 보아도 중국인인 그들은 하나같이 흰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집이 좋은 풍채들이었지만 얼굴은 며칠 동안의 도박으로 부옇게 떠 있었으며 이마에 깔린 우울한 그늘과 신경질적인 눈매가 그동안 제법 많은 돈을 잃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솜산을 보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허리에 손을 얹고 찬모노롬을 바라보았다.

“손님들께서 워낙 급하게 찾으시던 터라 밤새 일을 준비하느라 차림새가 이 모양입니다.”

솜산이 중국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꽝뚱(廣東)어로 넌지시 말했다.

“꽝뚱어를 하는군……”

중국인들 중 하나가 입을 이죽거리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고는 다른 두 명의 중국인들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가지. 시간 허비할 것 뭐 있나. 돌아와서 좀 쉬기도 해야 하고.”

‘山頂娛樂城’이라는 붉은 글자를 새긴 한국산 승합차는 이미 현관 앞에 대기중이었다. 솜산이 먼저 조수석에 올라타자 찬모노롬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중국인들을 뒷좌석에 태우고는 자신도 올라탔다.

솜산 일행이 먼저 간 곳은 시하눅빌에서 사십분쯤을 가야 하는 스텅하우였다.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강의 다리를 넘자마자 차를 세운 솜산은 큰길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나무집으로 중국인들을 인도했다. 스텅하우로 가는 험한 길에 질렸는지 중국인들은 내내 말이 없었다.

솜산은 그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린 창녀를 중국인들에게 보였다. 중국인들 중의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들러 이른 대로 집주인은 슬픈 표정으로 어린 창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웅했다. 중국인들은 말없이 얼굴을 모로 돌리고 늙은 아버지와 어린 처녀의 작별을 외면했다.

문제는 찬모노롬이었다. 캄보디아 말을 모르는 어린 창녀의 입에서 베트남 말이 튀어나왔다가는 눈치를 채일 터였다. 그 때문에 한마디도 입밖에 내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해놓기는 했지만 솜산은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창녀는 솜산의 주의대로 승합차가 시하눅빌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입밖에 내뱉지 않았다. 오는 도중에 찬모노롬이 시답잖은 농을 던지기는 했지만 어린 창녀는 창밖을 보고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찬모노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눈치였다.

시하눅빌에 도착한 승합차는 서지 않고 곧바로 빠떼랑으로 향했다. 빠떼랑에서도 솜산의 일행은 어린 창녀를 태웠다. 마지막 목적지인 림에서 어린 창녀를 태우고 승합차는 정오가 훨씬 넘어 시하눅빌로 돌아왔다. 그렇게 네 시간을 돌아다닐 동안 중국인들은 별다른 말이 없이 꾸벅꾸벅 졸기만 했고 솜산은 찬모노롬이 엉뚱한 짓을 못하도록 내내 쓸데없는 이야기로 주의를 끌어야 했다.

시하눅빌로 접어든 승합차는 두시가 가까웠기 때문에 곧바로 추엔민병원으로 향했다. 솜산은 중국인들과 어린 창녀들을 데리고 산부인과 의사 렁을 찾았다. 어린 창녀가 세 명인 것을 알고 렁은 금테안경 너머로 솜산을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솜산은 단박에 렁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정신이 어질어질했던 탓에 솜산은 렁에게 검사를 받을 처녀가 세 명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지 못했던 것이다. 솜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렁을 바라보며 중국인들과 찬모노롬이 눈치채지 못하게 검지를 들어 코를 쓰다듬었다.

렁은 이런 일을 해줄 때 한 명에 십 달러를 받았다. 세 명이라면 삼십 달러였지만 솜산은 이십 달러로 깎기로 내심 작정을 하고는 그만 그것을 렁에게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솜산은 머리의 뒤꼭지가 형편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여기서 십 달러 때문에 산통이 깨진다면 그야말로 지난밤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솜산은 오토바이도 뚜이안에게 뺏긴 채 빈손으로 시하눅빌을 떠나야 했다. 솜산은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산부인과 진찰실의 벽에 자신의 머리를 마구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제발. 렁 선생님. 렁 의사님. 렁 부처님. 렁 하나님.

솜산은 등뒤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억지로 태연한 척 가장한 채 렁의 안경 너머 눈을 바라보았다. 솜산은 온몸의 기운이 한꺼번에 발바닥으로 빠져나가 진찰실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 겁처럼 느껴지는 삼십초가 지났을까 늙은 산부인과 의사 렁은 검지를 들어 코를 비비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튼이 쳐진 진료실로 어린 창녀 하나를 불렀다. 솜산은 하마터면 힘이 풀린 무릎이 꺾여 진찰실 바닥에 주저앉아버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야만 했다.

세 명의 어린 창녀들이 모두 렁의 진찰을 끝내자 중국인들은 렁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처녀올시다.”

렁의 대답은 무성의하고 간단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렁의 무성의한 태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솜산이 제공하는 여자들이 처녀인지 아닌지일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솜산의 어린 창녀들은 모두 처녀였다. 중국인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솜산과 중국인 일행은 다시 어린 창녀들을 태우고 산정오락성으로 돌아갔다. 산정오락성의 로비에서 중국인들이 찬모노롬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을 솜산은 멀찌감치 로비의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각각 한명씩의 어린 창녀들을 데리고 객실로 올라간 후에야 찬모노롬은 솜산에게로 걸어와 천이백 달러를 내밀었다.

돈을 내미는 찬모노롬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모두 깨끗한 백 달러짜리 지폐였다.

“이번엔 촉박해서 그랬지만 다음에도 이러면 거래 못해.”

솜산은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찬모노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런 일엔 솜산이 찬모노롬보다 훨씬 선배였던 것이다.

솜산은 돈을 받아들고 현관으로 나와 분주한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와 지나는 모또를 잡아타고 뚜이안이 기다리는 유곽으로 향했다. 건기로 접어드는 이른 오후 시하눅빌의 날씨는 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아직 습하고 세상 만물을 태울 듯이 무더웠다.

솜산은 싸루에서 시원한 앙코르맥주 두 병을 사들고 뚜이안의 유곽으로 들어섰다. 천장이 높은 홀에는 마마상이 흔들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마마상의 아이들은 이 시간에는 모두 방에 틀어박혀 빌어먹을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었다. 솜산은 홀의 안쪽에 있는 주방에서 유리컵 두 개를 꺼내 그중 하나에 삐에게서 받은 작은 비닐봉지의 분말을 털어넣었다. 십 달러를 주었으니 삐는 솜산에게 일 그램 정도의 헤로인을 주었을 것이다. 솜산은 흰색 분말이 바닥에 깔린 컵에 약간의 물을 넣었다. 물을 먹은 분말은 곧 투명하게 녹아 컵은 그저 물이 마르지 않아 바닥이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유곽의 이층에서 뚜이안은 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솜산은 중국인들에게서 받은 천이백 달러를 모두 뚜이안의 침대에 던졌다. 푸르스름한 녹색의 깨끗한 백 달러짜리 지폐 열두 장이 뚜이안의 침대에 흩어졌다.

“솜산.”

뚜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에 흩어진 백 달러짜리 지폐들을 하나씩 집어들고는 장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솜산은 손에 든 컵을 창문 앞의 작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 앙코르맥주를 가득 채웠다.

“모두 천이백 달러야.”

뚜이안은 솜산을 바라보았다. 솜산은 아무 말 없이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뚜이안에게 시원한 맥주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뚜이안이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을 때 솜산은 가볍게 쨍 소리가 날 정도로 뚜이안의 컵에 자신의 컵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솜산은 뚜이안의 얼굴에서 이제 막 그윽하게 애정이 담기기 시작한 크고 둥근 눈을 보았다.

 

품터메이의 포네리에게서 솜산이 이제 막 시하눅빌을 떠났다는 연락을 휴대폰으로 받았을 때 마침 잔톤은 자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림의 해군기지를 떠나 시하눅빌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포네리의 연락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잔톤은 솜산이 4번 국도에서 림으로 꺾어지는 갈림길에 도착하기 전에 그와 마주칠 것이었다.

해가 지고는 있었지만 4번 국도에는 아직도 사람들의 왕래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잔톤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하튼 뚜이안과의 약속을 지킬 셈이었다. 잔톤은 오토바이를 뚜이안과 나누는 대신 자신이 가지기로 결정을 하자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다.

잔톤은 어느 곳이 적당할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채석장 근처의 언덕으로 마음을 결정했다. 언덕의 꼭대기이면서 커브길이기도 했기 때문에 시야가 좁은 곳이었다. 서둘러 가면 자리를 잡고 솜산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잔톤은 허리춤에 꽂은 중국제 권총인 하뿌온(K54)의 둥글게 닳은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십년이 넘은 낡은 권총이기도 했고 처음부터 잘 만들어지지 않은 총이어서 명중률이 형편없는 물건이었지만 잔톤은 이 총을 조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실수는 있을 수 없었다.

 

같은 시간에 솜산은 이제 막 시하눅빌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솜산은 산정오락성의 중국인들에게 받은 천이백 달러와 뚜이안의 방을 뒤져 나온 삼백 달러를 가지고 있었다. 빨리 달리면 너무 늦지 않게 프놈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놈펜에서 하루나 이틀을 묵은 후 솜산은 시엠립으로 갈 작정이었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이라면 솜산의 수완으로 자리를 굳히기 쉬울 것이었다.

솜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처녀를 구하면 이틀이나 사흘을 함께 지내는 관행으로 볼 때 뚜이안이 구한 어린 창녀들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처녀를 사고자 했던 중국인들보다도 산정오락성 쪽에서 먼저 솜산을 그대로 두지 않을 일이었다. 산정오락성이 체면과 고객에 대한 신용을 내세워 나선다면 시하눅빌에서 솜산은 그대로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바다를 향해 내리박히듯 달음질하다 급하게 멈춘 형세의 시하눅빌을 빠져나가는 길은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부두로 가는 길과 시내로 가는 길의 갈림길에 있는 검문소를 지난 솜산의 오토바이는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이제 막 가뿐하게 그 길을 오르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엔진소리가 허벅지를 통해 솜산의 귀에까지 기분좋게 울려왔다.

─자정이 되기 전에……

솜산은 자정이 되기 전에 프놈펜에 도착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잘 닦여진 4번 도로이긴 해도 오토바이로는 무리한 거리였지만 솜산은 개의치 않았다.

고개 너머로 이제 막 붉게 물드는 서편 하늘이 보였다. 그 길을 오르면서 솜산은 자신이 혼다와 함께 하늘을 향해 날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솜산은 문득 뚜이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해졌다. 일 그램의 헤로인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솜산은 알지 못했다. 뚜이안을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궁지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깟 유온계집, 재수가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겠지.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왔지만 솜산은 고갯마루에 다다르기 전에 뚜이안에 대한 생각을 툭툭 털어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고개의 끝에서 솜산의 눈 아래에 낯익은 시하눅빌의 바다가 펼쳐졌다. 수평선 위를 솜처럼 부드럽게 떠 있는 뭉게구름 아래로 짧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바다 위로 어둑어둑하게 그늘이 깔리기 시작했다.

솜산은 조금은 섭섭한 마음으로 그 검은 바다에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