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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논단

 

통일시대의 북한영화 읽기

 

 

이향진 李香鎭

영국 셰필드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

 

 

198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북한영화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분단현실이 갖는 억압적 측면과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통일을 논함에 있어 문화적 접근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영화는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만남을 통해 완성되는 열린 텍스트이며, 영화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이들간의 상호작용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넓혀가는 대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영화읽기를 통해 분단의 현실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정치외교적·군사적 협상과 사회경제적 지원을 위주로 하는 대화과정에서는 수혜자의 위치에 머물기 쉬운 일반 대중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인간의 문화행위로서 영화는 그것이 생산된 사회 내부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바, 재현된 갈등구조 속에 다의적으로 표현된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수용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읽어내기를 요구하는 한편, 언제나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1 북한의 대표적인 대중문화 형태인 영화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작품 속에 재현된 사회의 갈등 및 변동에 대한 문화적 대응양식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역동성을 전제로 한다. 이는 문화가 가진 역동성이 사람들에게 현재의 삶을 지탱하는 가치체계와 의미를 재구성하여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2

 

 

1. 좌절된 꿈의 기록─초기 북한영화와 정치적 목적성

 

북한에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대중의 정치사회화이다. 국가의 절대적인 통제와 지원 아래 성장해온 북한영화는 현 사회를 지탱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반복적으로 내면화시킴으로써 권력 중심부와 일반 주민, 그리고 서로 다른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줄이고 이를 기반으로 현 체제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사상교육에 그 일차적인 중요성을 둔다. 따라서 북한영화가 보여주는 강한 정치적 성향은 영화의 또다른 중요한 사회적 기능인 대중오락적 측면이 사상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여하는 수단적 가치에 머물도록 한다.

정치적 목적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북한영화는 일제하 카프(KAPF)문예운동이 지향하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이론적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적인 영화사는 북한정권 수립 이후의 기간만을 인정하면서, 최근까지 일제하의 한국영화 생성이나 카프계열 영화인들의 작품활동이 갖는 의미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정부의 입장은 현재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역사를 재단하고 이미 만들어진 작품의 사회적 존속 여부까지도 국가의 통제 아래 둠으로써, 과거 군사정권하의 남한사회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잔존했던 일제치하 영화정책과 너무도 흡사한 특성을 보여준다.

1903년 활동사진이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한국영화는 그 전반적인 상업적·오락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이를 대중 정치교육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부·지배층의 개입과 이를 거부하고 밑으로부터의 저항을 모색하는 사회세력 간의 대립을 통해 성장해왔다. 첫 한국 극영화인 「월하의 맹세」(윤백남 1923)부터 일제당국의 직접적인 개입과 지원 속에 양산되던 친일영화에 맞선 나운규의 「아리랑」(1926)까지 꾸준히 맥을 이어오던 민족주의적 성향의 영화들의 출현과 이에 대한 대중적 호응은 식민통치와 경제적 탄압을 거부하는 피지배민족의 민중의지를 표현한 문화적 영역에서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북한영화의 실질적 기반과 이론적 토대를 발전시킨 카프계열 문학·예술인들의 일제하 작품활동은 이러한 역사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아리랑」 및 후속작품들을 두고 이어지는 나운규·이필우를 위시한 비(非)카프계열 영화인들과 안종화·윤기정·서광제·강호·김유영 등의 카프계열 평론가들 간의 논쟁은 카프계열 예술인들이 지향하던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위한 대중교육수단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명쾌히 드러낸다.3

그러나 1928년 김유영의 「유랑」으로 시작된 사회주의 저항영화운동은 일제의 계속되는 검열과 사상적 통제, 그리고 연이은 흥행 실패와 경험 미숙 등으로 인해 미완성작 「지하촌」(강호 1931)을 포함한 5편의 작품을 끝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반제·계급투쟁을 위한 경향성 영화는 이들의 좌절된 꿈으로 남게 된다. 따라서 임화·강호 등 일제하 카프문예운동을 주도하던 일단의 작가들이 해방 후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하의 남쪽이 아니라 또하나의 해방된 공간인 북쪽으로 향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축적된 기술과 자본, 사회적 하부구조 없이 완성된 텍스트로 존재하기 어려운 영화의 매체적 특성상, 새로이 출범한 북한의 정치체제는 국가권력이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후원자로서 영화인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충족시켜주었다. 특히 공산정권의 출범과 함께 이루어진 영화산업의 국영화조치는, 주요 기계설비는 물론 거의 모든 영화촬영소와 영화인들이 서울에 집중해 있던 당시의 열악한 제작여건에도 불구하고 북한영화가 태동, 성장해갈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일제하의 카프 영화인들이 겪은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작품의 한결같던 흥행 실패는 이들에 의해 주도된 초기 북한영화의 대중성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한다. 지난 10여년간의 북한영화계의 새로운 움직임, 즉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관객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 제작에 대한 모색은 문화적 엘리뜨주의에 입각하여 그동안 도외시한 대중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전반적인 사회발전과정에 따라 구분되는 북한의 영화사는 다음의 5단계로 나누어진다. 평화적 건설 시기(1945년 8월〜1950년 6월);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시기(1950년 6월〜1953년 7월); 전후 복구사업과 사회주의 기초 건설을 위한 투쟁 시기(1953년 7월〜1958년); 사회주의의 전면적 건설과 사회주의 완전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의 시기(1959〜66년); 그리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하기 위한 투쟁의 시기(1967년〜현재).

구(舊)카프계열을 주축으로 하여 북한영화계는 첫 두 단계인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위한 산업적 여건을 형성해나간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지는 업적은 3·1운동을 기념하여 기록영화 「우리의 건설」(1948)과 극영화 「내 고향」(김승구 1949)의 제작한 것이다. 또한 1948년 10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산하에 ‘북조선영화인동맹’이 조직되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한 김일성의 교시는 북한에서 영화가 대중의 사상교육과 정치선동을 목표로 하는 국가 정책사업임을 분명히하고 있다.4 1947년에는 소련과 중국에서 도입한 기자재와 이들의 기술지원 등에 힘입어 조선예술영화촬영소가 설립되고, 주인규·강홍식·추민 등의 월북 영화인들이 그 운영을 맡으면서 북한영화는 서서히 모양새를 갖춰가게 된다. 그 결과, 첫 5년간 15편의 기록영화와 2편의 인민계관상 수상 극영화가 제작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인 두번째 시기에는 인민군 소속 영화제작소에 의해 70여편의 종군기록영화와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최익규 1952) 「또다시 전선으로」(천상인 1952) 「정찰병」(전동민 1953) 등 5편의 극영화가 만들어졌다.

휴전 이후 1958년까지의 세번째 시기에는 모두 20여편의 극영화가 제작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빨치산 처녀」(윤룡규 1954) 「신혼부부」(전동민 1955) 「아름다운 노래」(전동민 1955)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대체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 보여준 북한주민들의 희생적인 투혼과 전후 경제복구 노력 등을 주제로 한다. 또한 1955년에는 전쟁중에 파괴된 조선예술영화촬영소가 복구된다. 이 시기에 김일성은 영화관련 연설을 통해 자연주의나 형식주의 등을 내세우는 부르주아의 반동적 미학사상을 철저히 배격하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전통을 창조할 것을 일관되게 강조한다.5 1959년부터 1966년까지의 네번째 시기에는 ‘천리마 시대’에 걸맞은 혁명적인 작품의 창작을 독려하는 김일성의 교시와 함께 전체 영화계도 제작 편수의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본격적인 발전궤도에 오른다. 인민계관상 수상작 「분계선 마을」(박학 1961)과 「정방공」(오병초 1963)은 이같은 북한정부의 입장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북한영화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40년대 후반과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영화계는 산업적 기반과 사회적 하부조직을 정비해나가는 한편, 내용 면에서는 체제이데올로기의 정당화와 대중 노력동원의 독려라는 국가적 차원의 요구를 개별 작품의 내적 논리와의 심각한 갈등 없이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일제하 구카프계열 영화인들이 보여주던 정치권과의 대치·저항이라는 갈등관계가 아닌 동반자적 이해관계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었다. 나아가 당시만 해도 김일성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고, 북한영화계 역시 전쟁기간중 박헌영과 함께 처형된 임화를 포함한 선별적 숙청작업 이후에도 10여년 이상을 남로당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영화의 초창기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이론적 틀을 기반으로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이라는 공통노선이 강조되고 파벌간의 세력투쟁이나 대립이 노정되지 않은 잠복기간이었다고 하겠다.

 

 

2. 김정일의 주체영화예술론과 정치적 예속성

 

당파성, 인민성,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견지하며 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북한영화계는 당내의 권력투쟁이 다시 표면화되는 1967년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갈등의 중심에서 비켜설 수 없게 된다.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의 수령화 작업을 ‘비사회주의적인 개인 우상화’라고 비난하며 도전하는 연안파와 소련파를, 김일성이 역이용하여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라고 반격함으로써 제거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러나 당내의 권력투쟁은 여전히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었으며, 특히 1960년대 들어 점차 심화되던 중소분쟁 속에서 김일성은 독자노선을 견지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성향을 더욱 강조한다. 이후 1967년에 다시 불거져나온 정치권의 세력갈등이 김일성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 출신 군강경파의 갑산파에 대한 일방적인 승리로 판가름나면서, 북한영화는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에 대한 지지·옹호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 예속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나아가 김일성은 주변국가의 경제원조가 현저히 감소한 데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자력으로 극복하고 권력투쟁의 화두였던 체제·이념논쟁을 종식하기 위해 주체사상을 사실상 북한영화의 이론적 기반이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상위개념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이론적 지향의 중대 변화와 구카프계열의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예고한 김일성의 1967년 1월 연설은 김정일에 의해 주도된 ‘67년 반종파투쟁’을 시작으로 북한영화계를 재편성하고 그 이론적 기반을 수정하는 계기를 마련한다.6

1967년 제4기 15차 당 중앙인민위원회 전원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김정일은 잔존하는 봉건적·유교적 사상과 사대주의, 교조주의 등을 제거하고 당의 유일사상을 튼튼히하는 것만이 바로 북한영화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전통을 제대로 세우는 것임을 강조하고, 이어 박팔양·박금철·김도만·안함광 등 갑산파 구카프계열 영화인들을 ‘반당 수정주의자’ ‘반혁명 종파분자’로 지목하여 숙청을 단행한다.7 영화계 지도인사에 대한 이러한 사상비판은 영화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간 정부가 상급기관으로서 영화계를 관리하던 것과는 달리, 1968년 김정일이 당 선전선동부 영화예술과장으로 취임하면서 북한정부는 실질적인 제작주체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67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제작된 영화는 김일성을 제외한 작가나 연출가, 배우 등 개별 영화인들의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춘 채 ‘공동집체작’이란 이름으로 소개되는데, 이는 당시 북한영화의 정치적 예속성을 드러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8 또한 이후 김정일의 성공적인 권력승계는 그가 영화를 시작으로 선전선동부의 주요 직위를 두루 거치면서 문화예술계 전반을 통해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대중선동가로서의 정치적 역량을 입증함으로써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다.9

이처럼 1967년은 북한영화사에서 원년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73년 김정일에 의해 완성·출판된 『주체영화예술론』은 ‘67년 반종파투쟁’ 이후 북한영화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론의 사실상의 폐기선언에 가까운 이론적 전환과 이에 따른 영화의 정치적 예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체 영화예술론에 따르면, 북한에서의 영화는 민족 특유의 역사적 경험과 정서를 바탕으로 반제·계급투쟁의식을 고취하고 현 북한 정치체제가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질서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할 때만 비로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10 정권 출범 직후부터 체제 정당성 획득과 대중 사상교육에 영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해온 김일성의 교시는 ‘민족적 형식에 당성·노동계급성·인민성이라는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는다’는 주체문학예술론의 기본원칙을 이룬다.11 북한영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김정일의 『주체영화예술론』은 이러한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구현하여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인민의 혁명을 완성하기 위한 계급투쟁을 고무·선동하기 위해 영화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작품상으로 보면 1960년대 후반 이후 북한영화계에서는 김정일에 의해 제기된 1966년 북한식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논쟁을 계기로 ‘수령형상문학’ 또는 ‘항일혁명문학’의 영상화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교육을 통한 우상화작업은 그 개인의 수준을 넘어 가계의 혁명적 혈통과 장자세습을 전제로 한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김정일 자신의 권력승계를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1967년 이후에도 북한영화의 제작 편수는 매년 증가하여 1980년대초에는 연 30여편의 극영화를 선보였다. 이 중 인민계관상 수상작품은 「유격대 오형제」(3부작, 박승수 1968) 「피바다」(최익규 1969) 「꽃피는 마을」(김영호 1970) 등으로, 시대적 배경과 소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김일성의 항일투쟁혁명역사 없이는 현재의 북한사회가 성립할 수 없었음을 주지시키는 작품들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전쟁물 역시 한국전쟁을 민족의 해방자인 수령을 보위하는 반제투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북한정부가 전쟁영화의 백미라고 극찬하는 「이름없는 영웅들」(20부작, 류호선·고학림 1979〜81)과 「월미도」(조경순 1982)를 들 수 있다. 이밖에 또다른 형태의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찬양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는 미국 자본주의자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남한과 북한사회를 대비하여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고자 한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오병초 1969)과 「금희와 은희의 운명」(유원준 1976) 등이 있다.

 

 

3. 1980년대 이후 북한영화, 새로운 가능성에의 도전과 한계

 

1980년대 후반부터 통일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일기 시작한 북한영화에 대한 관심은 1990년 뉴욕에서 개최된 ‘남북한 영화시사회’를 시작으로 남북 영화행사와 교류, 방송사간의 경쟁적인 북한영화 방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민간 차원에서도 2000년에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영화의 일반극장 상영 및 북한영화계와의 공동제작이 모색되는 등 점차 사회 전반에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한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더이상 영화산업과 관련된 공식집계를 외부에 공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제작된 작품들의 경향과 이에 대한 공식논평, 그리고 김정일의 영화관련 연설 등은 북한영화의 현재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외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1980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북한영화의 연간 제작 편수는 130여편에 이르고, 이중 극영화는 30여편을 차지한다. 이 작품들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산하의 10개 창작단과 인민군 소속 2·8예술영화촬영소 산하의 3개 창작단에 의해 제작된다. 특히 2·8예술영화촬영소는 초기에는 주로 전쟁물을 제작하던 것과 달리, 1980년 이후에는 일반 극영화 제작에도 본격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며, 1996년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여 4·25예술영화촬영소로 개명한 후, 관·민을 잇는 중간고리로서 군의 역할을 강조하고 군·관·민 일체의식을 구현하는 작품들을 주로 선보인다.

영화관람 실태를 살펴보면 총 관객수가 총 1억 8410만 9천명에 이른다는 1989년 북한의 공식집계를 기준으로 할 때 주민들의 영화관람은 연 8〜9회에 이르며, 1993년의 경우에도 유사한 수치를 보여준다.12 물론 구체적인 통계기준을 따져보지 않고 이러한 수치를 기준으로 남북한을 절대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제난과 주민들의 빈사상태가 전세계의 걱정거리로 부상한 1990년 이후에도 북한정부는 주민들의 위기의식을 완화하고 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영화제작에 몰두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960년대 후반 권력갈등의 결과로 한 차례 사상적·이론적 변화를 겪은 북한영화계가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중과의 갈등, 즉 관객들의 무관심과 냉소적인 반응을 인식하고 영화가 설득력을 잃고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내용과 형식 면에서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노력들은 1980년대 이후 북한영화가 보여주는 대중성과 오락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우선 1980년부터 일기 시작한 3대 혁명소조운동과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실천하고 주민들의 사상교육을 튼튼히하기 위한 ‘숨은 영웅 따라배우기’는 영화에서도 ‘숨은 영웅 형상문학’이라는 형태로 제기된다.13 마지막 인민계관상 수상작인 「여단장의 옛 상관」(채풍기 1983)과 최근 남한방송에 소개된 「설한령의 세 처녀」(고학림 1984), 뉴욕영화제에서 선보인 「도라지꽃」(조경순 1987)이나 「숲속의 갈림길」(이승호 1990) 「편지」(김길인 1990) 등은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황폐한 산간지방을 일구며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이들 영화는, ‘항일혁명문학’ 또는 ‘수령형상문학’ 계통의 「초행길」(오병초 1980) 「조선의 별」(13부작, 엄길선 1980〜87) 「민족의 태양」(4부작, 엄길선 외 1987〜90) 등 김일성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혁명투사를 주인공으로 한 대서사적 작품들과는 달리, 현재의 북한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즉 도시와 농촌 간의 생활격차나 세대갈등 또는 ‘단일계급국가’의 위계적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혜택의 차이와 이에 따른 주민들의 소외감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사상이 투철한 주인공들의 모범적인 모습을 통해 현재 북한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인간형을 제시함으로써 인민성의 강화라는 정책적 의도를 드러내긴 하지만, 개인적 업적과 성취에 의한 상향이동이 어려운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과 경제난을 비롯한 정체된 사회에 대한 불안, 주민들의 동요 등 현재 북한 지도체제와 주민들의 갈등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북한영화가 보여주는 또다른 특징은 시대물의 부활을 통해 영화의 오락적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일체의식을 고취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북한은 구카프계열 영화인들이 주로 활동하던 1960년대 중반까지는 비록 편수는 적지만 「심청전」(전동민 1957) 「춘향전」(윤룡규 1959) 「애국자 김정호」(전운봉 1965) 등 시대물을 제작했다. 그러나 시대물이 갖기 쉬운 봉건적 세계관과 비현실적 내용에 대한 김일성의 비판에 따라 고전의 영화화는 이후 15년간의 휴지기를 맞는다. 따라서 「춘향전」(유원준·윤룡규 1980) 「사랑 사랑 내 사랑」(최은희·신상옥 1985) 「홍길동전」(추석봉 1986) 「온달전」(하응만 1986) 「임꺽정」(5부작, 장영복 외 1988〜89) 등 시대물을 다시 제작하기 시작한 1980년대의 북한영화계는 변화하는 관객들의 관심과 현실적 필요에 따라 김일성의 교시조차도 유보하는 정책적 유연성을 보여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이후 북한영화의 특징은 그간 금기시하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의 등장과 그에 대한 대중적 인기로도 설명될 수 있다. 「춘향전」이나 「사랑 사랑 내 사랑」처럼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은 물론이고, 「홍길동전」 「온달전」 그리고 「임꺽정」 같은 시대극의 주인공과 그를 따르고 흠모하는 여인들, 현대물인 「도라지꽃」 「월미도」 「설한령의 세 처녀」 「봄날의 눈석이」(이춘구 1985) 「음악가 정률성」(조경순 1992) 등의 주인공들은 전후세대의 이성에 대한 관심과 결혼에 대한 꿈, 실연의 아픔 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남한의 관객들 눈에는 이러한 주인공들의 모습이 조금도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남녀의 애정관계를 다룬 영화의 퇴폐적·이기주의적인 경향을 우려하며 이를 동지간의 우정과 사상적 유대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나, 「피바다」나 「꽃파는 소녀」 등 6,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중성적 이미지, 민족과 김일성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그린 주제의식 등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의 북한영화계가 보여주는 이러한 변화가 북한영화의 주류인 ‘수령형상문학’이나 ‘항일혁명문학’의 전통과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숨은 영웅 형상문학’이나 시대물 역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주체사상의 구현이라는 북한영화의 전통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8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 작품들은 ‘수령형상문학’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민족의 역사를 김정일 자신의 가족사로 축소하여 보여준다. 김정일의 할아버지인 김형직의 전기 「여명」(채풍기 1987), 어머니 김정숙의 일대기 「친위전사」(류호선 1987), 그리고 삼촌인 김철주를 주인공으로 한 「혁명전사」(2부작, 류호선 1987) 등을 그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혁명투사의 삶을 사는 주인공과 이를 지켜보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통해 전통적 가족주의를 부각시킨 이들 작품은 권력의 세대교체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한층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소련·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 해체에 따른 여파, 심화되는 경제난,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속에서 1994년 북한은 김일성의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민족제일주의’에 입각하여 7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완성된 50부작 「민족과 운명」에는 계급해방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확신과 남한을 비롯한 서구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적이고 비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대중에게 단합과 인내를 호소하려는 정부의 입장이 전편에 걸쳐 선명하게 드러난다. 최덕신·최홍희 같은 월북인에서부터 남한공작원, 비전향 장기수, 일제하 공산주의자, 위안부, 카프계열의 작가, 현재의 북한 노동자 등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로 구성된 「민족과 운명」의 주제는 ‘민족의 운명은 곧 개인의 운명이며, 민족의 운명은 민족의 자주성에 관한 문제’라는 김정일의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14

또한 정권교체에 따른 사회적 불안을 민족적 일체의식의 강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현 북한정부의 노력은 영화계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첫째, 김정일은 ‘67년 반종파투쟁’으로 폐기처분된 구카프계열 영화인들의 작품에 대한 선택적 복원 및 이들 영화인의 복권과 사면을 지시했다. 아울러 그간 인정하지 않던 일제치하의 한국영화 생성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면서 나운규의 「아리랑」을 예로 들어 당시 영화인들의 활동과 작품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할 것을 지시했다.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작품과 작가들을 30여년이 지나 다시 대중선동에 이용하려는 김정일의 의도는 김일성 사후 현실화된 자신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당내 세력의 규합과 대중적 기반의 재창출을 위한 것이다.

 

 

 

4. 폐쇄된 사회의 열린 창으로서의 영화 읽기

 ─「초행길」과 「여단장의 옛 상관」을 중심으로

 

북한영화가 사회비평을 위한 텍스트로서 갖는 장점은 명시된 작품의도와 재현된 현실 사이의 괴리가 낳는 숨은 의미구조를 읽어내는 좀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개입을 수용자들에게 촉구한다는 점이다. 1974년 당 중앙인민위원회를 통해 확정된 김정일의 권력세습이 대외적으로 공식화된 1980년 이후 북한영화계는 더이상의 어떠한 이론적 도전도 불허하며 주체사상을 절대적인 창작원칙으로 내세운다. 또한 내용 면에서는 ‘수령형상문학’이라는 큰 줄기에 새로운 소재들을 도입함으로써 장르간의 구분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북한영화의 특성과 변화의 모습들이 개별 작품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명백한 정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 주민들의 삶의 갈등적 측면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분석대상으로 택한 작품은 1980년 이후 북한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수령형상문학’ 계통의 「초행길」과 ‘숨은 영웅 형상문학’ 계통의 「여단장의 옛 상관」으로, 단일계급사회를 이루는 하위집단간의 불신이나 위화감, 소외의식을 상호이해와 단합된 의지로 극복하고 자주국방·경제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주제이다.

「초행길」은 북한정권 출범 직후 ‘노동계급독재를 구현하는 새로운 사회질서와 자주경제체제의 조속한 실현’을 촉구하는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최초로 외국의 기술원조 없이 기관총을 제작하는 데 성공하는 한 당 고위간부와 제련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김철진은 계급사회의 가장 미천한 위치에서 최고 권력엘리뜨로 부상한 인물로, 그의 항일투쟁 경력과 계급의식 그리고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은 국가와 노동계급을 이어주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데 절대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김철진이 만나는 사람들은 공장노동자에서부터 일제시대의 영세자본가, 지식인, 기술자 그리고 소련 유학파 출신의 당 간부 등 다양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의 차별적인 성격화는 현재 북한주민의 성분을 분류하는 3가지 기준인 핵심계층, 동요계층 그리고 적대계층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재현한다. 특히 주인공 김철진과 노동자들이 겪는 주변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에는, 건국 초기의 상황을 빌려, ‘56년 반종파투쟁’으로 시작되어 71년에 일단락된 주민성분 구분사업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초행길」은 드러난 이야기 구조로 볼 때, 해방된 조국에서 지난날의 과오나 계급관계를 초월하여 전주민이 노동계급으로 다시 태어나 한마음으로 공산주의사회 건설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회상장면과 인물들의 전형화된 행동양식은 계급사회에서의 출신성분이 여전히 현재 북한주민의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일차적 기준임을 암시한다. 이처럼 북한 현대물에 빈번히 등장하는 과거 회상방식은 단지 김일성 항일혁명역사 교육의 차원을 넘어 현사회의 위계적인 계급구조를 정당화하는 극적 장치로 이용된다.

노동자를 위한 안전시설에는 관심이 없는 일본인의 착취로 형을 잃고 자신도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일해온 제련공장을 떠나려 했던 노동자 충일과 친일경력이 있는 부공장장 병찬을 대하는 철진의 태도와 평가기준은 북한정부의 차별적인 주민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철진과 공장지배인들의 회의 장면에 나타난 수직적인 화면처리와 상하관계를 분명히 보여주는 카메라 위치는 철진과 공장노동자들의 담소 장면이 보여주는 수평적인 인물배치와 평면적인 카메라 이동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대사처리에 있어서도 전자의 경우 철진은 화면 상단에 배치된 김일성 초상화를 배경으로 단상 아래 모인 공장지배인들의 무책임한 업무방식을 위압적인 태도로 추궁한다. 이와는 반대로 후자의 경우에 철진은 노동자들 속에 섞여 들어가 제련작업을 같이 하면서 공장을 현지답사한 김일성이 ‘중요한 것은 자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정신력’이라는 말을 남긴 자리를 가리키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반복되는 이러한 장면처리를 통해 「초행길」은 작중인물들을 재분류하고 다시 세분화하여 궁극적으로는 충일로 대표되는 ‘정치적 신데렐라’ 신화를 이끌어낸다.

반면 병찬으로 대표되는 동요계층은 국가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사상적 동요를 보이며 쉽게 불순세력의 위협에 넘어가는 한계를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초행길」은 동요계층, 특히 지식인에 대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이는 실제로 동요계층이 전인구의 약 50%를 차지하는 북한의 현실과 충일의 경우처럼 교육을 통해서 지도자적 역량과 자질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 북한의 가치관이 작품상에서 그대로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적대계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무기공장 공장장은 철진과 충일이 일제와 싸우고 핍박받는 삶을 살 때 소련에서 ‘편안하게’ 지낸 유학생으로 56년과 67년에 있었던 ‘반종파투쟁’의 숙청대상을 연상시키는 인물유형이다. 충일의 ‘무식한 노동자 출신배경’을 비웃고 상부세력을 이용해 철진을 제거하려는 공장장은 북한사회의 대표적인 적대계층이 정치적 추방자집단임을 확인시켜준다.

이처럼 1940년대 후반의 건국시기를 배경으로 한 「초행길」은, 반종파투쟁을 통해 1960년대에 국가체제이념으로 확립되는 주체사상에 대한 강조, 67년에 공식화되는 수령화작업의 의의 그리고 군수산업과 중공업 위주의 북한 경제정책이 가져온 경공업 퇴조와 이에 따른 주민의 생활고 등, 북한정부가 1970년대 이후 점차 가시화되는 사회적 불안에 대처하고 체제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다양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문제를 제시하면서 민족적 단합과 폭넓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영화의 숨은 의미구조는 카스트제도에 가까운 주민정책에 의해 심화되는 단일계급사회의 불평등한 현실과 이에 따른 사람들의 불만 및 갈등적 상황을 재현한다.

「초행길」이 당 간부의 영웅적인 건국일지를 소재로 한 반면, 「여단장의 옛 상관」은 인적이 드문 산골에서 운전병으로 평생을 보낸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퇴역을 주선하는 상관 및 가장의 초라한 모습에 늘 불만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족과 겪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늙은 군인의 고집스런 군복무가 국가의 요구가 아닌 개인의 자발적인 사회참여임을 강조하는 결말에는, 점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직업이나 학력에 따른 생활환경 및 사회적·문화적 혜택의 차이 등으로 산간지방에서의 생활이나 육체노동을 꺼리고 도시와 전문직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계층 상향이동 지향에 대한 북한정부의 우려가 반영되어 있다.

진취적이고 위엄을 갖춘 장교들과 자리를 지키며 명령에 따르는 어린 병사들의 모습을 질서정연한 역할분담체계와 공동체적 이미지로 재현한 「여단장의 옛 상관」은 관객들로 하여금 북한의 계층구조가 갖는 경직성과 사회집단간의 차별적 삶의 원인을 전쟁의 위험이 채 가시지 않은 사회가 전시체제의 거대한 군대처럼 조직될 수 밖에 없는 분단현실에서 찾도록 유도한다. 또한 주인공의 사적 공간인 가정과 그가 속한 공적 공간인 군대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는 서술구조 역시 가족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될 때마다 말없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부대로 돌아가 맡은 일에 몰두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엄격한 명령체계 속에 상부상조하는 군의 위계질서를 사회체계의 모범적인 전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국가가 주창하는 추상적인 계급의식과 사람들이 현실에서 주관적으로 느끼는 계층의식이 갖는 괴리의 심화는 이러한 장면처리와 설득논리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편에 걸쳐 확연히 드러난다.

새로 부임한 여단장처럼 화려한 경력과 높은 지위를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전후세대는 체제변동의 격동기를 살았던 부모세대와는 달리 계급혁명 완수를 위해 현 사회구조를 수호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 따라서 부모의 출신성분이 자식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짓는 일차적 기준이며 성취가 아닌 귀속적 지위에 의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는 현실은 구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나 계층간의 위화감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전중 사병들이 보이는 소극적인 자세와 근무태만을 지적하는 주인공을 귀찮게 여기며 퇴역 후의 미래를 걱정하는 병사들, 오직 여단장의 임관 외에는 바깥세계와는 두절된 채 군용트럭에 한꺼번에 실려왔다 다시 실려나가는 이들의 모습이 반복되는 장면들은 고립된 개인들을 사회의 필요에 따라 임의적으로 배치하는 강제적인 인구정책과 정체된 북한사회의 구조를 읽게 한다. 따라서 「여단장의 옛 상관」이라는 제목처럼 30여년을 한 자리에 머물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주인공은 바로 북한이 요구하는 이 시대의 ‘숨은 영웅’인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육을 받고 평양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일하는 주인공의 아들이나 대학생인 딸은 자신들의 출신배경에 대한 열등감과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이목을 두려워하며 아버지와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은 일제치하와 전쟁중에 가족을 잃은 가난한 농가 출신 부모 덕분에 핵심계층의 선택적인 삶을 보장받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주관적인 계층의식에 맞지 않는 현실에 갈등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주변의 인정을 갈망한다. 이들에게 준거집단은 여단장이나 「초행길」의 철진, 충일과 같은 정치적 신데렐라와 그들의 자식들이지 육체노동을 하며 시골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특히 해군 고위장성 딸과의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의 퇴역을 간청하며 아버지에게 결혼식에 낡은 병사복 대신 입을 양복을 사서 보내는 아들과 사돈의 체면을 난처하게 할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을 비난하는 딸이 가진 불만은 자신들이 평범한 노동자집안 출신이라는 점이다. 또한 아들의 사회적 성공을 자랑하는 주인공의 태도 역시 자식들의 계층 상향이동에 대한 희망을 드러낸다. 따라서 비록 영화는 퇴역명령 취소와 ‘중요한 것은 별이나 직분이 아닌 충성심이라는 김일성 수령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여단장의 젊은 병사들을 향한 연설로 끝나지만, 결혼식장을 향하는 주인공의 가슴을 뒤덮은 화려한 색깔의 훈장들은 대다수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훈시와 치하로 무마하려는 드러난 작품의도와 재현된 현실에 숨겨진 의미구조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확인케 한다.

 

 

5. 맺음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구 카프문예운동을 근간으로 하여 대중의 정치사회화 수단으로 출발한 북한영화계는 중소분쟁으로 인한 독자노선을 강조하고 이를 기반으로 당내 권력투쟁을 종식시키며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로 전환하는 1960년대 후반까지 사회주의 질서와 체제이념을 옹호하는 작품들을 제작하면서 그 산업적 기반을 형성해왔다. 그리고 ‘67년 반종파투쟁’ 이후 실질적으로 북한영화산업을 총괄해온 김정일의 권력승계가 대내외적으로 공식화되는 1980년대초까지는 주체사상의 구현과 ‘김일성수령형상문학’이나 ‘항일혁명문학’ 계통의 작품 제작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적 예속성을 보여왔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종식과 함께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 더욱 심화되고 중공업 위주의 개발정책 등에 따른 경제적 위기가 심각해진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사회통합과 체제안정을 강조하며 영화의 대중성 또는 인민성에 촛점을 둔 ‘숨은 영웅 형상문학’ 등 노동계급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활발히 제작한다. 또한 전반적으로 영화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거세되었던 오락성의 부활도 시도한다. 이러한 북한영화계의 변화는 김일성 사후, 민족주의를 사회발전가치로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정권교체에 따른 민심의 동요와, 폐쇄적인 사회경제구조나 고립정책으로는 더이상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총제적 위기를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개방을 준비하는 김정일 지도체제하의 북한사회가 영화에 거는 기대와 의지의 구체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같이 북한에서의 영화는 사회의 내적 갈등과 외적 상황에 대처하며 역사에 대한 반복적 교육과 새로이 제기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란 두 가지의 목표를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달리 강조해왔다. 이러한 정치지향적 영화정책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들의 문화행위로서 영화가 갖는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가진 자율성은 그 속에 담긴 숨은 의미구조가 수용자의 주관적인 입장에 따라 재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제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영화는 단순히 체제의 정치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수 없다.

북한영화가 남한이나 바깥세계의 관객들에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러한 폐쇄된 사회의 열린 공간으로서 갖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열린 텍스트로서의 영화가 수용자들의 참여를 통해 언제나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에서, 북한영화는 통일을 논의하는 현싯점에서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 할 다양한 문제들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을 위한 문화운동으로서의 북한영화 읽기는 드러난 정치구호 밑에 함축적으로 표현된 분단의 역사와 숨겨진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를 다층적으로 해석하고 담론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이루어진 제3국에서의 남북영화제 개최나 공동영화제작의 모색 등 체제 수준의 접근보다는 남한의 영화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북한의 영화가 문화적 편의시설이나 방송 등을 통해 그 저변을 확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적 배려와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개방적인 인식전환이 우선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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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 Rosenstone, Visions of the Past: The Challenge of Film to Our Idea of History, Cambridge, MA: Harvard Press 1995, 7면
  2. K. Marx & F. Engels, Selected Letters, Peking: Foreign Language Press 1977, 92면.
  3. 이효인 『한국영화사강의 I』, 이론과실천 1992, 93〜150면.
  4. 김일성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의 투사로 되어야 한다」(1946.5.24), 『김일성저작선집』 2,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9, 233면.
  5. 김일성 「영화는 호소성이 높아야 하며 현실보다 앞서 나가야 한다」(1958.1.17), 『김일성저작선집』 12,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13〜28면.
  6. 김일성 「혁명적 주제 작품에서의 몇가지 사상미학적 문제」(1967.1.10), 『김일성저작선집』 12,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13〜28면.
  7. 김정일 「새로운 혁명문학을 건설할 데 대하여」(1967.2.7), 『김정일저작선집』 1,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113~14면; 김정일 「반당·반혁명 분자들의 사상 여독을 뿌리빼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울 데 대하여」(1967.6.25), 『김정일저작선집』 1,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230~31면.
  8. 최척호 『북한예술영화』, 신원문화사 1989, 201면.
  9. 이우영 『김정일 문예정책의 지속과 변화』, 민족통일연구원 1997.
  10. 한중모·정성무 『주체의 문예리론 연구』,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3, 51〜70면.
  11. 박승덕 『사회주의문화건설리론』, 평양: 문예출판사 1985, 169면.
  12. 『조선영화년감 1990』, 평양: 문예출판사 1990, 451면.
  13. 한중모·정성무, 앞의 책 105〜106면.
  14. 김정일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창작성과에 토대하여 문학예술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1992.5.23), 『조선중앙년감 1993』,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93, 50〜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