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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점검 | 의료대란과 의료개혁
의사파업과 노동자·민중운동
채만수 蔡萬洙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부소장.
지난 6월 이래 한국사회는 의사들의 대대적인 폐업·파업투쟁이라는 일찍이 겪어본 적도 없고, 어쩌면 아무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을 사태를 겪고 있다. 10월 중순 이후 정부와 의사단체 간의 대화로 사태가 다소 진정되면서 예민하게 반응하던 매스컴도 다소 조용해지긴 했지만, 대학병원 등 대형 종합병원의 주요 치료진을 구성하는 인턴(수련의)·레지던트(전공의) 등은 계속 진료를 거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대생들도 대부분이 자퇴서를 낸 채 쉽사리 학교로 복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금년 의사자격시험 원서접수 결과도 전국 41개 의과대학 본과 4학년생 3081명 가운데 겨우 2%에 해당하는 62명만이 응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상황전개에 따라서 의사들의 대대적인 파업투쟁이 다시금 벌어질 수도 있음을 뜻하므로 앞으로의 추이가 주목된다.
그런데 의사들의 이러한 파업투쟁은 당장의 환자들뿐만 아니라 잠재적 환자인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포로 다가와서 격렬한 반응을 불러왔는데, 대체로 그 반응은 의사들이 ‘환자, 곧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기득권층의 집단이기주의를 추구한다’고 규탄하면서 파업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정부나 언론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및 그들에 의해 강하게 영향받은 대중뿐 아니라 의사사회 내부의 일부 ‘진보적 분파’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과 이에 따른 병원·의사들의 수입감소가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계기이기 때문에, 이번 의사들의 파업을 가리켜 ‘집단이기주의’라고 규정하고 비판하는 데는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과 자본의 언론이 파업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을 대중으로부터 분리하여 억누르고자 할 때 이 ‘집단이기주의’라는 개념을 즐겨 동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어느 집단의 정당한 이익추구를 억제하기 위해서도 동원되는, 아니 사실은 주로 그런 목적을 위해 고안되고 사용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실과 상황에 입각해서 그러한 이익추구가 왜 부당한가를 증명하지 않는 한 ‘집단이기주의’라는 규탄은 사실 부당한 선동에 불과한 것이다.
의사들의 파업이 ‘집단이기주의’라고 규탄하는 데 앞장선 사람들도 물론,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약분업’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보건의료체계가 획득해야 할 핵심적인 과제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의사들이 부당하게도 ‘완전 의약분업’이라는 ‘비현실적’ 요구를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이 의약분업을 회피하거나 이를 빌미로 의료수가를 대폭 인상시키려는 것은 ‘기득권층’의 집단이기주의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언론 및 시민운동단체의 강력한 선전과 우리 사회에서 의사들이 대체로 고소득층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힘입어 대중적 호응을 얻었는데, 이러한 주장과 대응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더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의약분업’ 및 ‘국민부담의 증대’ 문제
우선 정부·언론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등의 선전활동에 의해 ‘의약분업’에 절대적 필요성과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의사들의 움직임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런데 과연 정부나 언론, 시민운동단체 등이 정말 의약분업의 의학적·약리학적 필요성과 정당성 때문에 현재와 같은 정치적 무리를 유발하고 감수하고 있는지, 즉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의약분업을 통한 ‘약물의 오·남용 방지’가 그러한 무리를 감행하는 진짜 이유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인지 의심해봐야 한다. 그러면 현 의료보험의 임박한 재정파탄이라는 사정이 정부가 정치적 무리를 감수하면서 ‘의약분업’을 강행하게 된 진짜 이유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수많은 종류의 감기약, 소화제 등 어쩌면 사람들의 복용회수와 복용량이 가장 많은 약들이 대부분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고, 이들 약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의사·약사 간의 이해관계와는 별도로, ‘의약분업’을 내세우는 정부의 진짜 동기, 즉 ‘의약분업’을 통해 보험재정의 예상되는 파탄을 모면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간과되는 것 중의 하나로, ‘의약분업’이 마치 그 자체로서 자명한 것처럼 얘기되지만, 사실은 ‘의약분업이 무엇’인지 혹은 ‘어떠한 의약분업’인지조차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의약분업’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일 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기 때문에, 실상 여러 형태와 내용을 가질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아스피린’이 의사의 처방에 의해서만 판매가 가능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느냐, 아니면 약사가 임의로 판매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의사와 약사 그리고 건강보험공단, 나아가 그 약의 소비자인 환자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릴 뿐만 아니라, ‘의약분업’의 형태와 내용도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 의사들이 ‘완전 의약분업’ 혹은 ‘임의조제나 대체조제 금지’를 주장하는 것도 바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의약분업’이 그 자체로서 자명하다는 듯이 주어진 형태대로의 정착만을 주장하는 것은 균형을 잃은 채 어느 한편의 이해만을 옹호하는 것일 수 있는데, 실제 현실 역시 그러하다.
한편 ‘의약분업’은 약물의 오·남용이 광범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정당성과 필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약물의 오·남용이 상업주의적인 보건의료체계 때문에, 즉 비싼 병원비 때문에 환자들이 손쉽게 약국의 매약에 의존함으로써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부나 언론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누구도 침묵하고 있다. 더구나 사회의 일부 계층이 바로 그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 때문에 약물의 오·남용은 차치하고 약물을 포함한 일체의 치료로부터 배제된다는 사실은 은폐되고 있다.
시민운동단체나 ‘진보적 의료단체들’, 그리고 많은 노동운동단체들이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적 투쟁’ 때문에 의료보험료 인상 등 국민의 부담이 증대된다고 규탄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의사들의 투쟁에 밀려서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정부가 의사의 처방료나 기타 수가 그리고 의료보험료 등을 인상하기로 함으로써, 국민부담이 증대한다는 주장이 타당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투쟁을 통해 인상되는 처방료 등의 액수는 기껏해야 ‘의약분업’에 따른 의사들의 수입감소분을 보상할 뿐 그 이상은 결코 아니다. 그 때문에 의사들의 투쟁을 계기로 의료보험료나 의사의 처방료 등이 인상된다고 해도, 그것이 ‘의약분업’ 이전, 그러니까 의료보험료가 인상되지 않았던 때에 비해서 의사집단의 총수입을 증대시키지 않는다면, 의료보험료 등의 인상에 따른 ‘국민부담 증대’의 원인은 사실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의 엄청난 리베이트를 포함해서 의사들의 과거의 수입이 정당한 것이었느냐 여부는 여기서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이미 ‘의약분업’ 실시 이전에 보험료 등을 인상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정부는 ‘의약분업에 따른 국민의 부담 증대는 없다’는 선전과는 달리 ‘국민부담의 증대’를 전제하고, 또 그것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의약분업’을 실시하는 것이다. 정부나 보험공단은 소득감소에 따른 의사들의 저항이 있을 것을 당연히 미리 계산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저항을 빌미로 의사들에게 정치적·도덕적 부담을 지우면서 보험료 등을 인상하려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파업 초기 언론 및 시민운동단체 등을 동원한 호들갑에서 알 수 있듯이 파업에 대한 사회적 패닉을 증폭시킴으로써 의사들의 저항 자체를 일정한 수준에 묶어두려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때문에 지금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의사들의 저항 자체가 아니라 정부의 예상에서 벗어난 그 강도와 완강함인 것이다.
시민운동단체든 누구든 진실로 의료와 관련해서 ‘국민부담’의 문제를 거론하려면, 보험료 등의 인상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 이른바 ‘국민건강보험’ 제도하에서 환자들이 강요당하는 엄청난 ‘본인부담금’을 문제삼아야 한다. 정부는 이번의 사태를 겪으면서 인상한 수가를 반영해도 보험수가는 ‘원가’의 80%밖에 안된다고 하면서, 점차로 수가를 현실화하고, 그에 따라 보험료도 더욱 올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시민운동단체나 노동자·민중운동은 ‘국민부담 증대’라며 비판·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총의료비 중 의료보험공단을 포함한 공공부문의 지출부담률은 1997년 현재 45.5%밖에 안되는바, 보험료를 인상한다고 해서 자연히 이 비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국민부담’ 문제의 핵심은 ‘보험료 인상’ 여부가 아니라 환자들의 부담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말해주는 ‘본인부담금’인 것이다. 그런데도 시민운동단체나 노동자·민중운동이 환자의 ‘본인부담금’을 문제삼는 대신에, 혹은 그것을 문제삼는 척만 하면서, 의사파업에 따른 ‘국민부담 증대’ 운운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은폐하거나 비켜가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운동단체나 노동자·민중운동측의 이러한 태도는, 의사들의 파업이 장기화되어 8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제도언론이 한국사회의 의료보험제도를 포함한 의료제도 일반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검토한 후 현 제도를 정말 큰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감기치료보험’이나 ‘진료비할인제’ 등으로 규정하는 것과도 대비되는 극히 천박한 견해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의료비 인상 부담의 국민 전가를 반대하는 문제가 단지 의료수가나 보험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의료보험제도 및 조세제도 등의 전반적인 변혁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때문에 그것이 마치 의료수가나 현재의 ‘국민건강보험’하에서의 보험료 인상 여부의 문제처럼 말하는 것은 선동에 불과할 뿐이며 올바른 태도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의사들이 ‘생명을 볼모로 이기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즉 정말로 생명을 볼모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상업주의’라고. 사회주의 경제·사회체제라면 그러한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가 발붙일 수조차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사회제도를 전제하더라도 바람직한 보건의료제도라면, 그 이름이야 의료‘보험’이든 의료‘세(稅)’든 ‘국민의 부담’은 철저히 소득누진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의 최하위 소득계층, 예컨대 하위 20% 정도의 계층은 그 부담이 면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병의 예방 및 치료와 관련하여 누구에게도 이른바 ‘본인부담금’ 같은 비용부담을 지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의사들은 왜 파업을 벌이는가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서 의사파업을 규탄하는 데는 ‘의사들은 노동자·민중이 아니며, 의사들의 생존권은 노동자·농민 등 서민의 생존권과는 다르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는 자본가’이고, 심지어 전공의들이나 의과대학생들도 ‘미래의 자본가의 입장’에서 파업을 벌인다는 주장도 있다. 그들의 파업은 ‘강자의 협박’이고 ‘기득권자들의 집단이기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수만명의 의사, 의과대학생, 의과대학 교수가 의사로서의 생사를 걸고 벌이는 투쟁을 과연 ‘자본파업’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 의사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고 허심탄회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이 현재 한국에는 약 6만 8천명의 의사가 있는데, 그중 약 1만 8천명이 개원의이고 약 5만명이 수련의·전공의·전임의·봉직의 등의 ‘월급쟁이’ 의사다. 그중 일반적으로 ‘기득권층’이라는 관념에 어울리는 의사의 수는 정확한 통계나 조사는 없지만 사실상 소수에 불과하고, 수련의·전공의나 전임의 그리고 다수의 개원의 등 절대 다수 의사들의 노동조건이나 임금·수입은 지극히 열악하다. 때문에 의사들의 파업에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는 언론조차도 특히 전공의 등의 노동시간은 주당 80시간에서 심지어 1백수십 시간에 이를 정도로 살인적인 데 비해, 임금은 형편없이 낮다고 보도할 정도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폐업·전업·이민하는 의사들도 상당수인데, 이들의 이러한 경제적 실패는 장사꾼으로서 손님을 유혹하는 입심과는 관련이 있을지언정, 의사로서 그들이 지닌 기술·의료 수준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수록 한편으로는 병원의 독과점화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다수 의사들, 특히 아직 확고한 사업기반을 갖추지 못한 전공의를 위시한 젊은 의사들이나 새롭게 배출되는 의사들의 절대 다수가 전문직 노동자로서 갈수록 열악한 처지로 몰릴 것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른바 ‘기득권층’ 의사들의 상당수도 그 상황과 조건이 열악해지면서 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다. ‘농민층 분해’ 개념을 원용하면, ‘의사층 분해’가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고 그것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정부는 의사들의 소득감소를 강요함으로써 그같은 분해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이는 ‘의약분업’을 강행했고, 이러한 사정이 의사들을 극한적인 투쟁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사정과 전망이 이러한데 의사들의 투쟁을 가리켜 ‘기득권층의 집단이기주의’니 ‘강자들의 협박’이니 하는 것은 근거 없는 매도에 불과하다. 설령 의사들의 파업이 결과적으로 일부 ‘기득권층’ 의사나 ‘폭리를 취하고 있는 대형병원’의 이익과 합치된다 할지라도, 그들의 이익을 배제하는 한편 전락해가는 의사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러한 비난이 매도에 불과함은 변함없다.
앞으로 체계적인 분석과 연구가 있어야겠지만, 현재 의사들은 사회계급적으로 대략 ‘소수의 부르주아(고수입 봉직의 및 대형병원 경영자로서의 개원의)─다수의 고임금 전문직 노동자─절대 다수의 저임금 전문직 노동자─다수의 전문직 자영업자(대부분의 개원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투쟁의 동력은 그러한 전문직 노동자와 자영업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사들에 대한 이러한 분류는 물론 의사들의 자기인식과는 많이 다를 수 있고, 또 의사들을 ‘노동자’로 규정하는 데는 현재 의사들의 투쟁에 비판적인 노동자·민중운동뿐만 아니라1 의사들 자신도 저항감을 느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정과 전망이 이렇기 때문에 설령 정부의 강압적 조치에 의해서든, 의료수가 인상 등 회유책에 의해서든, 아니면 ‘집단이기주의’를 규탄하는 시민운동단체나 노동자·민중운동 측의 압력에 의해서든(?), 지금 당장 의사들이 파업을 중단하더라도, 그 누구도 분해과정에 들어간 의사들을 구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의사들이 유사한 집단행동을 하거나 의사직 포기, 해외이민 등으로 보건의료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의사파업에 대한 대응과 비판, 특히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그것은 이러한 사실과 전망을 염두에 두어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의사파업투쟁의 성격 및 노동자·민중운동의 대응
의사들의 파업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곧 의사들의 파업투쟁이나 그들의 요구사항이 모두 타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의사들이 그렇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조건에 놓여 있으므로 그러한 조건을 기초로 해서 대응을 조직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의사들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고 파업 중단을 촉구하는 것이 사태를 악화시킬 뿐 사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미 명백해졌다.
의사들의 이번 투쟁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보건의료체계가 파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 투쟁을 계기로 의사들이 기존의 즉자적 존재로부터 대자적 존재로 전화하고 있다는 것, 즉 정치의식화되고 사회의식화된 집단으로 전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의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허위의식과 오류가 나타날 수밖에 없고, 나아가 그들이 어떤 색깔, 어떤 노선의 사회의식·정치의식을 갖게 될 것인가는 사회 일반의 객관적인 조건이나 의사사회 내부의 선진활동가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운동의 대응에 의해서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중의료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한 의사는 컴퓨터통신 공간의 한 글에서, 아옌데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칠레의사협회의 반동적인 파업을 예로 들면서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으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지를 폈는데, 그 파업과 지금 한국 의사들의 파업은 동기와 성격이 엄연히 다르다. 칠레의 예는 의사집단이 (친)파시즘적으로 정치의식화·세력화했을 경우의 위험을 보여주는 것으로, 바로 이 때문에도 지금 의사들의 파업에 대한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신중한 대응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금 의사들의 요구사항에는 애초의 투쟁 동기 및 조건이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밥그릇 싸움’의 성격을 지닌 것들이 많다. 그 이해는 약사나 보험공단의 그것과 대립되며, 또 ‘국민’의 그것과도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고, 의사들 내에서도 사실 많은 부분 이렇게 인식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주어진 틀 내’에서 이해관계를 타산할 때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관계, 특히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를 전제로 할 경우 누구에게도 이를 비난하거나 매도할 권리가 없다. 그 ‘틀’을 전제하는 한, 남는 것은 오직 서로간의 끝없는 ‘밥그릇 싸움’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임있는 비판자, 책임있는 노동자·민중운동이라면 그들을 매도하는 대신에 그 틀이 이미 낡아서 파탄에 직면했음을 보여주고, 그 틀을 넘어서서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의사들 스스로가 운동과 투쟁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 길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과학적 인식으로 그 길을 일깨우고 제시할 임무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번 의사파업에 대한 그동안의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대응은 유감스럽게도 철저하게 오도된 것이었다. 그러한 오류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이 시민운동단체들의 이른바 ‘진보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데 기인한다. 1989〜90년의 이른바 ‘토지공개념’ 소동을 통해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운동단체가 자신의 성격을 노동자·민중운동과 대립적으로 정립시킨 이래, PCS범대위 소동, 재벌개혁 투쟁,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최근의 낙천·낙선운동과 송자 교육부장관 퇴임운동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사회·정치문제의 핵심을 왜곡하고, 자본의 합리화에 노동자·민중을 동원해왔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2
노동자·민중운동은 이러한 시민운동단체들의 왜곡된 진보이데올로기의 하나인 ‘의약분업’이라는 추상적 주문(呪文)에 사로잡혀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구체적 형태와 관련하여 벌어질 수밖에 없는 ‘밥그릇 싸움’을 현실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극히 주관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결과, 서로 같은 것을 두고 다투는 양방 중 한쪽의 이익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자가당착을 범한 것이다.
그리고 예컨대 이 문제에 대한 민주노총의 입장에는 시민운동단체말고도 민주노총 소속 보건의료산업노조 일부 지도부의 견해가 상당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같은 견해가 객관적이고 냉정한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업무상의 특수관계로 인한 정서적 앙금이 짙게 투영된 것은 아닌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통신에 올라오고 있는, “우리가 파업할 땐 어쩌더니”라거나 “우리가 파업할 땐 응급실에 인원을 배치했는데” 운운하면서 의사들의 파업을 비난하는 글들은 명백히 그러한 감정의 발산이다.)
의사들과 현재의 보건의료산업노조의 조직대상 직종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듯한 형태를 띠고 나타나지만, 그들은 결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해야 할 관계에 있다.3 그리고 그 갈등과 대립이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 때문에 증폭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인식 아래 이번의 일련의 투쟁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할 의사집단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의 태도 또한 윤리적·도덕적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결코 과학적이지는 않은 대속의식(代贖意識), 즉 노동자·민중주의가 작용하고 있지 않나 되돌아볼 일이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난 6월의 제1차 의료파업 직후 김대중정부가 롯데호텔노조 및 사회보험노조의 투쟁을 가히 살인적인 폭력으로 유린한 사태를 두고 많은 노동자·민중운동 단체들이 “강자인 의사에게는 무릎꿇고 노동자·농민 등 약자는 짓밟는 게 ‘국민의 정부’입니까?”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 점이다.
김대중정권의 그러한 정책 결정의 배경에는 실제로 의사들의 파업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못해 실추된 ‘공권력의 권위’를 이들 노동자투쟁에 대한 폭력을 통해 보상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에 대해서 민주노총이나 기타 노동자·민중운동이 취해야 할 태도는 김대중정권의 파쇼적 폭력성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이어야지, ‘왜 우리한테만 폭력이냐?’는 식의 대응은 절대 금물일 것이다. 그러한 대응에는 명백히 ‘의사들의 파업도 폭력으로 유린하라’는 요구, 다시 말해 파시즘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노총을 위시한 수많은 노동자·민중운동 단체들이 태연히 그리고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이같은 오류를 범했다.
의사들의 파업을 ‘집단이기주의’라고 규탄하고, 의사들이 의료정책을 부당하게도 전문가주의적으로 독점하려 한다는 성토로 일관한 시민운동단체나 언론, 노동자·민중운동의 대응과 관련해서 그러한 대응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귀결되는가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응으로 보건의료체계의 개선을 위한 어떤 적극적인 방안도 제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사태의 추이가 노동자·민중 일반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한편 정부와 의사들 그리고 정부와 약사들의 은밀한 대화와 거래하에 의사·약사·제약회사 등의 이익만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데도 의사의 ‘집단이기주의’를 그토록 성토하던 어떤 시민운동단체나 노동자·민중운동 단체도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의 의지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이 의사들의 파업에 올바르게 대응하는 대신에 그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 매도하면서 사실상 정부로 하여금 폭력으로 억압할 것을 요구한 영향은 의사들의 파업과 요구에도 사실상 투영되고 있다. 예컨대 보건의료산업노조의 한 광고는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에는 노동자·농민·시민 대표는 단 한명도 없고 22명 위원 중 10명이 의사[인]…데도 폐업주도 의사들은 [자신들을] 보건의료발전특별위원회에 과반수 이상…각종위원회에…50% 포함시키라”고 한다며 “이는…이기주의와 권위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 비판에도 어느정도 의의가 있지만, 의사들의 처지에서는 사방을 둘러봐도 적의에 찬 시선뿐이고 고립무원으로 자신들밖에 믿을 데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자구책을 구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보건의료정책을 수립하고 조정하는 과정과 기구에서 노동자·민중·시민의 참여를 배제하겠다는 일부 의사들의 주장은 논의의 여지없이 잘못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그러한 빌미를 노동자·민중·시민운동측에서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민중·시민 대표의 참여를 배제하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한 ‘전문가주의’는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의사들은 600개 내외의 이른바 ‘상용의약품’을 선정한다는 방침 자체에 대해 반발하면서도, 그것을 선정하는 가칭 ‘지역협력위원회’에는 노동자·농민·시민의 대표를 배제하고 의사와 약사만이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를 두고 ‘전문가주의’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하지만 그것은 비판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주장 아닌가? 일반적이고 정책적인 사항을 논의·결정하는 기구에 전문가만의 참가를 주장한다면 이는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전문가주의’겠지만, 특수한 전문적 식견을 요구하는 사항을 논의·결정하는 기구에 비전문가의 참가를 요구하는 것 또한 명백히 비판받아야 할 ‘민중주의’이자 대중에 대한 아부이기 때문이다. 사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민중주의가 ‘의사들을 배제하고도 보건의료정책을 꾸릴 수 있다’는 극단적인 좌편향으로까지 나타났다.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를 서둘러야
의사들의 투쟁은 사실 현재의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고 이는 부르주아언론 또한 인정하는 바인데도, 처방은 어느 것이나 현체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미봉책만을 강구하는 것이다. 심지어 ‘의사선택권’ ‘진료선택권’이라는 부르주아적 ‘선택권’을 내세우면서 상업적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을 주장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처방까지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동자·민중운동의 잘못된 대응도 한국사회 보건의료체계의 핵심적 문제가 ‘의약분업’이라는 돌팔이 처방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약물의 오·남용을 포함한 보건의료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주로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에 기인하며, ‘의약분업’은 이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가 극복되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 때문에 동기도 내용도 불투명한 ‘의약분업’이 아니라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만이 문제해결의 현실적·근본적 길임을 명백히해야 한다.
일부에서 현체계의 기본 골격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보험혜택의 확대, 공공의료의 확대 및 공공성의 강화, 50% 재정지원의 법제화 등을 요구하지만, 현재의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의 틀이 유지되는 한 의료문제의 파탄은 불가피하다. 더구나 ‘정부는 국민의 추가부담 없는 의약분업 실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는 의약분업이 직접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고, 사실은 정부나 보험공단이 의도했던 ‘환자의 부담 증대’가 현실화되리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 기인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결국 극히 불철저하고 민중주의적인 것으로, 문제의 핵심과 본질을 은폐·왜곡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회화된 보건의료체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의 문제가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그런데 공상이 아닌 한 그것은 앞으로 연구와 투쟁을 통해서 형성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짐으로써 누구도 ‘돈이 없어서’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는, 그러한 의료체계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를 제기하는 데 대해 ‘당장의 현실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식으로 힘있게 문제가 제기되지도 못하는 현상황에서는 물론 당장의 현실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제기하고 연구해야만 비로소 현재의 보건의료체계의 문제점과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 침로가 명확해진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모든 대안이 당장의 현실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향하고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적 노선 일반에 대한 악선전과 왜곡선전으로 인해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 혹은 사회주의적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이해 역시 극도로 왜곡되어 있다. 심지어 의사사회 일부에서는 현재의 왜곡된 엉터리 의료보험제도조차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그리고 ‘보건복지부는 사회주의적 보건의료체계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될 정도다.
그 때문에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를 위한 문제제기는 현재의 의사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다수의 의사들에 의해서 배격되고 성토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제기해야만 이에 대한 관심이 확대될 것인데, 특히 앞으로 전개될 ‘의사층의 분해’와 기존 보건의료체계의 위기의 심화는 이에 대한 관심과 지향을 확대시킬 것이다. 즉 ‘의사층의 분해’는 불가피하게 의사사회를 ‘노동자·민중적으로’ 아니면 ‘파시즘적으로’ 정치세력화할 것이다. 때문에 보건의료체계의 사회화 문제가 명확히 제기되어야만 의사들은 이후 가속적으로 전개될 ‘의사층의 분해’ 과정에서 현재 선호하고 있는 상업주의적 보건의료체계가 결코 자신들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잠정적으로는 조세제도 등 주요 경제제도의 변혁을 통해서,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변혁을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민중과 함께해야만 의사와 의료제도의 구제가 가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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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투혼’이라는 얼굴을 감춘 한 단체는 컴퓨터통신 공간에 올린 한 글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동네병원의 경우에도, 개업의는 대략 4〜5명에 달하는 간호사들, 청소부, 경리를 고용하고 있다”며 개원의들은 자본가로, 전공의나 의대생들은 ‘미래의 자본가’로 규정하는 한편, 그러한 입장에서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 자본가들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병원의 의사들은 결코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에 기대어 자신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이야말로 그 병원을 유지하는 절대적 조건이 된다. 이러한 처지의 개원의들을 가리켜 ‘자영업자’, 즉 소생산자가 아니라 ‘자본가’라고 왜장치고, 심지어 대형병원 자본에 고용되어 있는 의사들을 가리켜 ‘자본가’라고 왜장칠 수 있는 투혼, 그리고 정색을 하고 의사 일반을 가리켜 ‘배부른 돼지’라고 규정할 수 있는 투혼은 오직 ‘음침한 골방의 병든 투혼’일 것이다.↩
- 여기서 거론한 문제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지면관계상 자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다. 다만 가장 최근의 문제인 송자 교육부장관 문제에 대해서만 간략히 설명하면, 그가 교육부장관으로 부적절한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떳떳치 못한 치부나 처신 등 이른바 그의 도덕성이 아니라 그가 예전에 연세대 총장 등을 지내면서 보여준 신자유주의적 교육관·교육정책이다. 그런데도 시민운동단체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사실상 언급조차 안했다.↩
- 자영업자로서의 의사와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간호사 등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잉여노동의 착취관계이므로 적대관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지금 보건의료산업노조의 현실적 조직대상은 사실상 대형병원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소형의원의 문제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