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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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진정 위대한 사유를 기다리며

보리스 까갈리쯔끼 『근대화의 신기루』, 창작과비평사 2000

 

 

조우석 趙佑石

중앙일보 출판팀장

 

 

언론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대선배 한분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고, 나 역시 그때마다 공감했던 얘기 한 토막으로 허두를 떼려 한다. 천편일률의 이데올로기적 고착은 차치하더라도 시야 자체가 협애하기 때문에 언론 고유의 탄력있는 의제 설정에 실패하곤 하는 한국 저널리즘의 풍토 속에서 보기 드물게 넓은 시야를 가진 칼럼니스트로 정평이 나 있기도 한 그는 이런 말을 종종했다. 어제오늘 인류의 삶을 제대로 천착하는 진정 위대한 사유를 전개할 지성이 등장할 나라를 꼽는다면, 아마도 러시아가 최우선일 것이다.

과연 그렇다. 무시할 수 없는 문화적 지층을 가진 러시아는 지난 세기 이후 현대사 전개의 전위에 서왔으나, 현재는 거의 세계에서 예외적으로 청소년들의 평균신장이 줄어들 정도로 극도의 경제·사회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사 전개의 극과 극을 오가는 최대치의 경험이 인류의 삶에 무의미한 것만이 아니라면, 그 속에서 뭔가 나와도 나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이 말은 단순한 전망만이 아니어서, 알게 모르게 활동중인 그런 종류의 지식인을 이땅의 신문기자들이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그들의 독자적인 목소리가 담긴 칼럼도 정기적으로 받고 그들을 기획에도 참여시켜보자는 것이 그 복안이었다.

『근대화의 신기루』(The Mirage of Modernization, 유희석·전신화 옮김)의 저자 보리스 까갈리쯔끼(Boris Kagarlitsky)야말로 그가 언급했던 사상적 깊이를 지닌 지식인의 한 명일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책을 읽으면서 확인하였다. 내게 이 책은 한마디로 ‘아마도 세계체제론자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제3세계의 시각에서 바라본 개발주의 이데올로기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리얼한 현장비판의 목소리겠지’ 싶었다. 관심을 끈 것은 저자가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좌파적 신념과 혁명적 열정에 대한 강조의 대목이었는데, 그 내면에는 아마도 옮긴이들의 지적대로 러시아의 전통적 지식인상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10-43140대 초반인 까갈리쯔끼는 그가 책에서 ‘관료정’(etacracy)에 지나지 않았다고 언명한 브레즈네프 시기 공산지배층 사이에 광범위한 부패가 진행됐다고 하는데, 그때 그는 반체제 활동을 했다. 즉 전후세대에 속하는 그는 일찌감치 교조화된 맑스주의와 그 관료적 폐해를 목도하면서 성장했고, 때문에 그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구소련의 해체과정에서 나타난 무수한 기술관료와 지식인들의 맹목적인 서구편향에 대해 다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취하기 어려운 소수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비교적 짧은 문장을 속도감있게 전개하면서도 일관된 시야를 잃지 않는 그는 짐작대로 제도화된 공산주의와 실천의 거점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을 별도로 간주하면서 자신의 이론과 실천상의 어려운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데, 지금 싯점에서 그의 책을 읽는 행위는 한국의 일반 지식인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노릇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무수한 제3세계 담론 중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저자의 좌파적 시각이야 명쾌하기 짝이 없고, 그 적실성 여부에 상관없이 경의를 표할 만하다. 단 주변부화된 제3세계 국가들 중에서도 엉거주춤한 위상을 갖고, 예전과 달리 무수한 포스트 이론들에 둘러싸인데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 방향을 잃고 시야마저 몽롱해진 한국의 평범한 지식인이 까갈리쯔끼의 책을 읽는 행위는 그만큼 곤혹스럽기도 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측면도 있겠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석틀을 이용해 1970년대 이후의 상황을 다양한 출처의 최신 자료들을 동원하여 분석하는 까갈리쯔끼의 저널리스틱한 순발력이 돋보이는 이 책은 러시아에서 명료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려준다. 한마디로 까갈리쯔끼가 보는 지금의 세계, 특히 제3세계 일반이란 ‘샴 쌍둥이(허리가 서로 붙은 기형쌍둥이)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어떤 민족국가 단위에 국한해 보더라도, 저자가 인용한 맑스의 말대로 ‘신세계는 얻지 못한 채 구세계는 잃어버렸기’ 때문에 부분적인 근대화의 구조와 전통적 구조가 마구 얽혀 있다. 이런 착종된 상황이란 아마도 상식이겠지만, 세계 전체를 단위로 해서 봐도 역시 개발도상국의 빈곤이 제1세계의 번영과 붙어 있는 구조이다. 후진국의 존재란 세계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여서 ‘항구화되고 자기재생산적이 됐으며, 이 상태란 뒤바뀔 전망이 거의 없다’는 것이 저자의 현실주의적 시각이다.

따라서 저자는 제3세계가 제1세계로 건너뛰는 그런 종류의 이행이란 거의 무망하며,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개발전략 자체가 일시적 유행일 뿐 아니라 도대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런 형편에서 저자가 한국을 포함한 타이완,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호랑이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특히 한국을 거론하면서, 마치 스딸린 사후 동유럽의 개혁 요구가 결국 체제의 토대를 침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치적 자유화가 부분적 근대화와 체제의 토대를 침식할 것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내가 관심있게 접한 대목은 제8장 ‘전위를 찾아서’에 제시된 ‘전위’ 개념이다. ‘광범위한 민중과 연계된 노동계급’이 의연한 좌파로서의 그가 말하는 ‘전위’이다. 이런 점에서 ‘대안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세력이 정치현장에 없는 한 대안을 내놓는 행위란 무의미하다’는 까갈리쯔끼의 생각은 당연한 논리이자 소망이겠고, ‘이해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사상은 언제나 치욕스런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맑스의 기본입장에 비춰봐도 당연한 소신이다.

하지만 이 대목을 관심있게 읽으면서도 그의 판단에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나를 발견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럴까. 근현대사 이후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한국사회의 파행적 상황에서 오는 착종현상이 그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특히 내 경우에는 신문기자로 20년째 밥을 먹어오면서 느껴온 피로감 내지 무기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까갈리쯔끼가 1989년 공산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차원에서 자유주의가 구가하는 승리란 일시적인 것이고, 그것은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역작용을 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밝히는 대목까지는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정부들이 민중의 불만을 막아내는 데 곤혹스러워하고 동유럽과 제3세계의 좌파들이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역사적 투쟁의 새로운 단계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는 저자의 낙관적 전망은 나 같은 회의론자에게는 다소 공허해 보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