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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감옥과 탈주
테오도르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1999
김유동 金裕東
경상대 독문과 교수
아도르노(T.W. Adorno)의 『부정변증법』(Negative Dialektik, 홍승용 옮김)을 꼼꼼히 읽으면서 여러 갈래의 상념들이 종국에는 ‘감옥과 탈주’라는 화두로 모아짐을 발견한다. 이것은 평자의 실존적 상황 때문인 것 같다. 평자의 해묵은 페씨미즘이나 ‘불행한 의식’이 아도르노를 만나면서 오히려 안식을 구할 수 있었고, 다음 몇년은 아도르노라는 척도로 다른 이론들의 도그마적 한계나 부분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현실이나 문학 텍스트를 해석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의 사상 자체가 생명을 위협하는 올가미가 되어 점점 옥죄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탈주라는 관념이 절박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다시 읽은 『부정변증법』은 그 자체가 절실한 감옥과 탈주의 드라마로 다가온다.
아도르노가 2차대전중에 쓴 『계몽의 변증법』이나 『최소한의 도덕』은 파시즘과 전쟁에 의한 인류의 총체적 위기와, 생존을 위한 순응을 요구하는 망명지 미국의 물질주의에 맞서 순수성을 지키려는 ‘정신’이 역사에 대한 증언을 담아 미지의 미래로 띄워보낸 ‘병 속에 든 편지’였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 귀환한 후 저명한 학자로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한 그에게 복원된 자본주의체제─말의 자유마저 허용되지 않는 사회주의 진영 또한─는, 발현형식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감옥·속박·올가미·주문(呪文)으로 여겨진다. 이 속박이 생명 자체의 원죄인 해묵은 윤회의 사슬인 동시에 인위에 의해 철저히 재조직된 ‘사회화된 사회’, 제2의 자연, 체계가 된 사회, 총체적 현혹연관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이것을 깨고 나오려는 자유·해방·타자·탈주·실천의 관념들이 모여든다.
‘잘못된 세계의 존재론’은 『부정변증법』의 대전제이고 세계정신과 형이상학에 관해 쓴 마지막 두 장에서 본격적으로 피력되지만, 일차적으로 정통 철학분과에 속하는 이 책의 본령은 인식론이다. 현실세계의 속박은 언어의 차원에서는 동일화하는 ‘개념’의 속박이다. 『부정변증법』은 해체주의의 방법과 비슷하게, 동일성의 체계를 만들어 그것과 화해하려는 헤겔류의 긍정적 변증법을 비판함으로써─칸트에 대해서는 역으로 역사의 범주를 끌어들여 해석하고 그의 자유 관념에 존재하는 (모더니티 세계관에서 비롯된) 강압적 성격을 비판함으로써─타자나 비동일성이라는 출구를 열고자 한다. 비동일성이나 미메씨스의 관념은 동일성이나 체계의 속박을 부수고 타자에게로 나가려고 하나, 이 타자는 다시 도그마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우상금지의 계율에 묶여 구체적 형상을 얻을 수는 없다. 부정변증법은 관념론을 넘어 진정한 객관적 진리로 나아가려 하지만 아포리아를 넘어 진리나 절대자에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출구 없는 상황을 죽는 날까지 감당했던 카프카(F. Kafka)처럼, 아도르노는 잘못된 현실에 저항하면서 타자를 꿈꾸지만 삶의 장벽 너머에 있는 절대자나 진리에 이르지는 못한 채 아포리아를 그저 감내하고 있을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의 방법에서 오해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점은 그가 부정적 총체성이나마 총체성의 범주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개념이 만든 족쇄는 개념이 풀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충실히 지킴으로써 합리성의 속박 너머에 있는 비합리성의 세계에 충분히 열려 있으면서도 비합리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입장에서 『부정변증법』의 또다른 축인 베르그쏭(H.L. Bergson), 후썰(E. Husserl), 실존주의, 하이데거(M. Heidegger) 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다(부유하는 지식인의, 현실이라는 ‘내용’이 빠져버린 지식사회학 비판 같은 형식주의 비판은 『부정변증법』의 또다른 차원이다). “주체나 주체의 현실적 속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우주 속으로 달아나버리는 교의들은 쉽게 세계의 경직된 상황 및 그 속의 성공기회들과 결합될 수 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은 속박의 틀이 완벽해짐에 따라 유목민적인 탈주의 논리가 새로운 지배조류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슨(F. Jameson)의 지적처럼 총체적 체계라는 재앙은 『부정변증법』이 씌어진 60년대보다 이제 새로운 천년이 열린 지금의 시대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세계의 존재론’은, 질(質)과 사용가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말살되어버린 채 순수한 양(量)으로서의 교환가치의 지배가 더욱더 철저해지는 카지노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론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소통을 위한 현재의 모든 시도는 진리를 팔아넘기거나 왜곡시키는 상황에서, 저항해야 할 것은 인식된 것과 이의 의사소통을 혼동하거나 어쩌면 이 의사소통을 더 높이 평가하려는 거의 보편화된 강요다. 요즈음의 모든 언어활동은 이러한 패러독스 때문에 괴롭다”는 아도르노의 말은 지식의 실용성과 물적 가치가 공공연하게 외쳐지는 지금의 시대에 더욱 실감나는만큼 지식인의 위기감과 좌절감은 더욱 커진다. 제임슨은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대한 적절한 이론이 될 수 있음을 피력한 『후기맑스주의: 아도르노 또는 변증법은 아직 유효한가』에서 “오늘날은 그나마도 불가능한 ‘상처받은 주체’의 ‘기록장치’ 속에는” 현대 산업사회의 메커니즘이 잘 재현되고 있는데, 그러한 상황은 “사회적 동질화가 훨씬 더 완벽해지고 과거는 폐기처분되어버렸으며 시대를 포착하는 아도르노 같은 모더니스트의 변증법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지금의 시대보다 훨씬 유리한 여건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20세기초의 위대한 모더니스트들과 동시대인이면서 아우슈비츠에서 운좋게 살아남은 아도르노는 현대세계라는 체계 바깥에서 이 체계를 관조하고 비판하는 개인적 주체의 경험적 특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체계에 대한 저항이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는 사그러든 68년 혁명 당시 좌우의 집중포화 속에서 갑자기 타계한 그의 죽음은 시대의 분수령을 개인의 운명을 통해 보여준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러한 자리가 오늘날의 지식인에게 마련될 것 같지는 않다. 그 때문에 현실이라는 족쇄를 재현하는 아도르노 사상은 그 자체가 또다른 의미의 족쇄로 다가오는데, 그 올가미를 감당하면서 어떻게 삶을, 실천이나 탈주의 놀이를 풀어갈 것인가는 오늘날 지식인의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