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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시간을 거슬러가서 던지는 질문

영화 「박하사탕」

 

홍성남 洪性男

영화평론가

 

 

“나 다시 돌아갈래!” 철로 위에 선 한 남자가 기차의 기적소리에 대항이나 하려는 듯 절규를 토해낸다. 도대체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일까? 분명 이 사내의 목숨을 앗아갔을 기차는 그와 동시에 그를 재귀(再歸)케 하는 기적을 부린다. 이제 기차라는 이창동(李滄東)의 ‘타임머신’과 함께 우리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김영호라는 이름의 이 사내가 돌아가고자 했던 곳으로. 박하사탕의 알싸한 맛이 입안 가득 감돌 것 같은 바로 그곳으로, 서서히, 그리고 집요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먼 과거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초록 물고기」에 이은 이창동 감독의 두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이처럼 시간을, 그리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 20년의 시간대에 걸친 일곱개의 장들은 연대기적 순서와는 정반대로 배열되어 있다. 각 장들 사이를 잇는 기차의 이미지를 가교 삼아 우리는 과거로의 ‘퇴행’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원인이 일단 유보된 채 결과만이 먼저 보여지기에 이런 식의 역행의 내러티브는 우리를 감질나게 만든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성급한 우리로서는 그런 낯선 형식이 다소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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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창동의 타임머신은 바삐 서두르는 일 없이 아주 침착하게 우리를 ‘야유회’니 ‘사진기’니 하는 간판이 붙은 간이역에 내려놓는다. 그 일곱개의 간이역은 대부분(즉 마지막 역을 제외하고) 상처받은 우리들의 지난 고된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그야말로 황량한 역이다. 지난 20년 동안 어느정도 억압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 같지만 실상은 역사의 피해자였던 김영호는 우리로 하여금 그 역에 잠시 머물도록 하는 역장(驛長)이요, 그럼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대리인이다. 꿈을 간직한 평범한 공원이자 착한 남자였던 그가 80년 광주에서 실수로 한 여학생을 총으로 쏘아 죽이면서 그의 붕괴의 드라마는 시작된다. 이후 그는 직업정신에 투철하고 냉철하게 고문을 수행하는 ‘미친 개’ 형사로, 가정 내부로부터의 균열을 목도하는 가구점 사장으로, 그리고 종국엔 대책없을 정도로 파괴된 한 남자로 세상에 의해 마모되어간다. 이 영화는 김영호의 이같은 인생유전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얼룩진 상처만을 추가하는 오욕의  과정 외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80년 5월 광주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리네 역사의 풍경과 단면 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토록 무자비한 역사의 폭력이 남긴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김영호라는 인물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본격적으로 역사를 다룬 영화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물론 이건 영화에 대한 평가 내리기와는 무관하다). 다분히 도식적으로 그려진 우리의 최근세사가 영화 전편을 감싸고 있지만, 그것은 주인공 김영호가 경험하는 하강의 내러티브를 위한 밑그림을 제공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즉 그것은 자체로 의미가 탐구되는 일종의 구체적인 역사라기보다는 감독이 던지는 ‘보편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영화는 김영호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삶은 아름답다, 그렇죠?” 어느정도 자조적인 톤을 지닌 이 질문을 받는 순간 우리는 새삼 당황함과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김영호로부터 이 말을 듣는 영화 속 사내처럼 우리도 머쓱하기는 마찬가지다. 앞만 보며 달려온 우리로서는 ‘삶’과 ‘아름답다’라는 너무나 진부한 두 단어가 결합해 문장이 성립한다는 것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창동은 정말 그러냐고 뚝심있게 묻는다. 그리곤 그 증거로서 순수했던 순백의 첫사랑이, 그 순정이 존재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기를 쓴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강가, 거기엔 오물을 뒤집어쓴 더러워진 손이 있기 전의 ‘착한 손’이 있다. 최종적으로 이걸 확인하려고 역류하는 내러티브 구조가 필요했던 것일까?

「박하사탕」은 슬픈 영화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슬픈 것은 영화 곳곳에 배어 있는 가슴 아픈 장면들, 디테일한 묘사들보다는 역행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가당찮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우리는 마지막에 해맑은 순수의 시공간에 다다르고 짐짓 해피엔딩을 봤다는 듯 가장하며 자리를 뜰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가공의 시도는 우리에게 허망함만을 더해줄 뿐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현실과 합일하지 않는 픽션의 헛된 조형성을 더욱 아프게 통감한다. 그런 면에서 「박하사탕」의 내러티브 구조는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참으로 ‘잔인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첫사랑을 느끼기 시작할 적의 화사함, 그때 갖게 되는 심성의 투명함으로 상징되는 순수의 세계란 다소 ‘순진한’ 발상인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것에다 ‘열린’ 해석을 허용한다고 해도 추상적인 회고 취향이라는 누명을 벗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런 결점마저 너끈히, 또는 시치미떼고 돌파한다고 할 만큼 이창동은 꽤 대단한 입심을 갖고 있다. 소설가 출신답게 그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인물들에다가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데 단연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는 「간첩 리철진」의 장진 감독과 함께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꼽힐 만한데, 이 둘 가운데 정통적이라거나 고전적이란 수사가 더 어울릴 인물이 바로 이창동이다. 「박하사탕」의 거꾸로 가는 시간배치도, 시간 그 자체가 주요 페르쏘나로 등장하지 않고 캐릭터와 스토리 같은 요소들이 중시되기에 실험적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토마스 만의 말처럼, 이 영화 속의 시간 역시 그저 생의 수단이면서 이야기하기의 수단인 것이다. 화려한 스타일과 특수효과로 치장된 스펙터클이 판치는 현재 아주 ‘낡은’ 주제로 이야기라는 예스런 요소를 우선시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재차 거론하자면 「박하사탕」은 시대를 거슬러가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