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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논단 | 제7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피안과 현실, 절망과 환상이 관계맺는 방식

최인석론

 

 

서영인 徐榮姻

1971년 울산 출생. 경북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현재 경북대 강사.

 

 

1. ‘마술’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최인석 읽기

 

최인석(崔仁碩)의 새 연작소설집 『아름다운 나의 귀신』은 최인석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익숙하고 또 한편으로는 낯설다. 철거 직전의 민둥산 판자촌은 여전히 가혹한 절망의 세계이며, 죽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 없는 악무한의 지옥처럼 보인다. 철거촌은 삽차와 포클레인을 이끌고 진주한 철거반들에게 점령당했으며, 입주권과 프리미엄을 중간에 놓고 복부인과 부동산업자 그리고 철거촌 주민들은 거친 욕망에 들끓고 있다. 이곳은 경악할 만한 지옥이지만, 또 그리 낯선 곳도 아니다. 아비와 어미가 싸우다 서로를 죽이고 굶주린 아이들은 창백하고 거칠게 자라나 공장의 직공으로, 깡패로, 창녀로 뿔뿔이 흩어지는 이곳. 희망이란 도대체 어떤 틈새로도 엿볼 수 없는 이곳은 때로는 매음굴로, 때로는 감옥으로, 혹은 군대로 모습을 바꿔 최인석 소설 도처에 존재하던 세계가 아닌가.

이 지옥의 한켠을 고스란히 비우고 들어앉은 저편의 세계, 희망이라고 부르기에는 그것이 발딛고 있는 지상이 너무 끝모를 절망이어서 차라리 환상이라거나 신화라고 불러야 할 법한 저편의 세계는 또 어떤가. 무당과 신들의 세계, 이곳과는 전혀 다른 질서로 영위되는, 그래서 절망의 땅에 태어난 주인공들의 영혼이 거주하는 저편 세계의 존재도 그리 생경하지는 않다. 징후적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최인석의 전작(前作)들에서 절망의 끝에 이른 인물들의 눈앞에 언뜻언뜻 기적처럼 꿈처럼 나타나곤 했던 그 피안의 세계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사의 두 축이라 할 만한 절망과 환상의 세계 자체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라면 이번 소설집에서 최인석이 보여주고 있는 낯섦,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대립된 세계가 각자의 몸을 최대한 부풀려 서로를 팽팽하게 맞대고 있는, 그 극적인 맞대기의 긴장이 창출하는 새로운 경험이 주는 낯섦이다. 쓰레기와 시궁창과 구더기와 온갖 악덕과 부패가 들끓는 철거촌은 여태껏의 절망을 한번에 응축시켜놓은 듯한 지옥의 형상을 이룬다. 그리고 나는 잘못 태어났다고 외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저편의 세계는 이제 거대한 환상과 신화의 집결체로 구체적 형상을 이루어 절망과 지옥의 현실로 밀려들어오고 넘쳐 흐른다.

지옥의 현실과 천상의 환상을 넘나드는 그 비약과 하강의 순간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서사를 장악하고 있는 이 기괴하고 몽환적인,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한 장면들은 환상과 사실 사이에 움직일 수 없는 거리를 내정하고 있던 일반적 상식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환상이란 현실보다는 알 수 없는 신비감에 의존하는 세계지만, 이곳의 환상은 너무도 생생한 구체적 실감을 갖추고 있으며, 그에 반해 이곳의 사람들과 환경은 상상해보지도 못한 비참을 형상화하고 있기에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분명 최인석의 이번 작품집은 기존의 상식과는 다른 환상과 현실에 대한 모종의 관계를 따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1는 최인석 소설의 핵심에 가까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취재형 인물’과 ‘가공적 인물’의 공존2이라거나 ‘이성적 비판’과 ‘광기의 세계’라는 유형구분3으로 이전부터 암묵적으로 동의된 해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마술적 리얼리즘’ 혹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명명법에는 환상과 사실이라는, 단순하게 화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 맞붙어 있으며 이 개념들을 맞붙이고 의미부여하는 이면에는 서로 다른 비평적 입장이 불안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 두 입장이란 환상의 편에서 사실을, 혹은 사실의 편에서 환상을 흡수하려 하는 비평적 욕망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상반된 입장의 비평적 욕망이 한 작품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공존하는 데는 아마도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와 소비사회가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욕망과 그에 따른 개인의 강조라는 시대 배경이 내재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최인석의 소설세계는 ‘비루한 것의 카니발’, “어떤 내용의, 어떤 품질의 삶이든지간에 개인 스스로 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모양을 만들려는” ‘진정성의 파토스’로 의미화4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객관적 현실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권위와 억압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오직 진실한 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해 파악되고 재구성된 현실일 따름이라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사실’이란 개인의 환상과 내면 속에 존재하는 리얼리티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삶이 굴절되고 오염되어 그 근원과 주체를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개인의 주관과 욕망은 그 사회적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갈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 이른바 ‘개인적인 것의 정치성’이라거나 ‘육체의 사회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환상’은 개인의 심리와 정신과정이라는 혼탁한 거울의 깨진 틈으로 불안하게 내비치는 사회적 현실의 다른 얼굴이 될 수 있다.

어느 쪽에서든 환상과 사실은 적극적으로 관계맺고 해석되어야 하는 비평적 대상이며, 그러므로 이 둘의 불안한 공존은 좀더 엄밀하고 촘촘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최인석의 소설이 오늘의 비평적 논점을 첨예하게 관통하고 있다고 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 미묘한 입장들을 사이에 두고 최인석이 본격적으로 펼쳐내는 환상의 세계를 추적하는 일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더군다나 최인석은 이미 독특한 시선으로 절망적 현실을 깊이 그리고 다면적으로 탐사해온 만만찮은 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문학과 현실의 관계라는 해묵은 화두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절박하다면, 그의 소설을 꼼꼼히 읽어보는 일은 분명 의미있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는다.

 

 

2. 절망에서 환상으로 가는 길─주관적 리얼리티의 극한

 

그 달동네 꼭대기에는 거대한 송전탑이 하나 시커멓게 곤두서 있었다. 민둥바위와, 찰기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흙,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갖다 버린 온갖 쓰레기들, 망가진 세발 자전거나 구멍난 양동이, 소주병들, 담배꽁초, 본드가 말라붙은 비닐주머니, 찢어진 만화책과 고무신짝, 운동화짝, 빈 음료수통과 더러는 죽은 개나 고양이의 시체 따위가 널린 가운데에 소나무가 말라 죽어가고, 그 자리에 아카시아가 가시를 드러내고 끈질기게 뿌리를 틀어내리기 시작하는 빈터 쓰레기밭 한가운데였다. (「내 사랑 나의 귀신」, 『아름다운 나의 귀신』 9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온갖 쓰레기들로 가득 찬 쓰레기밭. 이곳이 민둥산 판자촌의 현실이라면, 송전탑은 이 지상의 질서에 몸담고 싶지 않은 주인공들이 환상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한 사닥다리와도 같다. 동네 어귀에 우뚝 선 천년도 더 된 느티나무(「직녀, 내 사랑」)나, 네온을 밝힌 교회첨탑(「내 사랑 나의 암놈」)을 환멸에 지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기어오르며, 그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자신만의 환상의 영역을 만들어나간다.5 이 지상이 타락한 욕망으로 가득 찬 악귀의 세상이라면, 저편의 환상의 세계는 악귀들을 물리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신들의 세계이며 기형과 불구의 세계가 아니라 완벽의 세계이다. 그곳은 지상에 없는 것들로 만들어진 지도이며,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꿈의 속도, 영혼의 속도, 사랑의 속도로 만들어진 세계이다. 그리고 그 환상의 세계의 완벽성은 언제나 추한 지상과 대비됨으로써 의미를 가지기에 늘 슬프고 외롭고 우울하다.

현실과 환상의 극단적 대립이라는 조금은 낯선 작품구도 때문에 우리는 동서양의 숱한 보조 텍스트(카프카라든가 『산해경』 같은)들과의 연관을 우선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일반론적 도식과 유추 이상을 넘어서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러한 강렬한 대비효과에 매혹되다 보면 모호한 인상주의적 얼버무림이나 찬탄으로 작품 읽기를 끝맺을 우려가 있다. 아마도 작품을 해석하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이분된 세계가 어떻게 관계맺고 있느냐일 것이다. 두 세계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면 타락한 세상에 대한 묘사는 주관적 과장에 머물 수 있으며, 환상의 영역은 환멸적 현실에 대한 선험적이고 추상적인 대비효과 이상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의 현실과 환상과의 관계, 더 구체적으로는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환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짚어보는 일은 다소 지루하더라도 작품분석과 의미발견에 필요한 과정이다.

「내 사랑 나의 귀신」은 이 연작소설집에서 서문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말하자면 소설들의 배경이 되는 철거촌의 환경을 소개하고 또 환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문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주인공인 어린 소년 ‘나’가 어떻게 극악한 현실에서 환상의 영역을 찾아내고 또 거기로 나아가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제시되어 있다. 나는 빚에 몰린 부모를 따라 처음 이 판자촌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언덕빼기에 별처럼 불을 밝히고 모여 있는 판자촌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곳을 사랑했으나 곧 그 판자촌의 우울한 현실에 실망하게 된다. 그곳은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그래서 거기서는 모든 것이 함부로,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저 흘러간다. 그가 처음 발견했던 별빛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희망이란 것은 이 세계에서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그 동네 사람들은 사람들끼리 싸워도 말리지 않았다. 구경만 했다. 잘 웃지도 않았다. 게을렀다. 더러웠다. 툭하면 이웃사람이, 친구의 형이, 아비가, 누이가 절도다, 폭력이다, 강도다, 강간이다, 사기다 하여 경찰들에게 잡혀갔고, 어느날 갑자기 이웃집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그날 감옥에서 나온 그 집 아비이거나 형이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가 아니라 망가지기 위해, 서서히 죽어가기 위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곳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였다. (「내 사랑 나의 귀신」 26〜27면)

 

세상의 잔혹과 비참을 일찌감치 경험한 나는 이 잔인한 곳의 질서에 더이상 몸을 섞지 않는 것으로 환멸을 견딘다. 더러운 골목길을 뛰어다니지도 않고 악다구니와 싸움과 욕설에도 귀를 닫은 채, 민둥바위 위에서 판자촌을 내려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세로 무언가를 간구하고 있던 무당 당골네를 발견하게 된다. 당골네는 더럽고 악한 이 세계와 대비되는 희고 순결하고 깨끗한 무언가를 갖고 있으며, 당골네를 통해 나는 싸우고 욕하고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삶이 아니라 꿈꾸고 기원하고 자신을 던지는 삶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은 저주와 환멸로 이 치욕을 견디는 것 이상을 알지 못했던 나에게는 세상을 깨는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최초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던 당골네가 나의 연인,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이 근본적으로 대상과의 합일 욕망이라면 내가 당골네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옮겨가게 되는 과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판자촌으로 밀려들어오는 철거반이 아귀들이라며 그들을 물리치는 주문을 외우는 당골네, 육교 위 난간을 뛰어다니고 송전탑 위로 날아오르는 그녀의 딸 귀연이, 지상에 없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 이 세상에서 사라졌던 김정호의 귀신을 접신하는 귀연이의 세계는 적어도 나에게는 뜬금없는 환상이거나 비현실적인 기괴함이 아니다. 현실에 대한 비애와 다른 세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은 사랑이라는 심리적 과정을 통해서 의심없이 당골네의 세계에 접신하는 것이다. 드디어 나는 당골네가 주문을 외우며 철거반의 삽차로 달려든 이후 당골네의 부채와 방울을 들고 당골네의 목소리로 주문을 외운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벽을 깰 수 있게 하는 상상력과 환상의 가능성은 「직녀 내 사랑」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 한동수 역시 철거촌의 밑바닥 삶 속에서 일찌감치 삶의 비극성을 깨닫고 환멸의 길로 나선 인물이다. 술만 먹는 무능한 아비, 식욕과 탐욕만 남아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어미, 자식의 도둑질을 부추기는 부모, 이들은 이미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이나 의욕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사람들이다. 동생은 구더기떼에 뒤덮여 목숨을 잃고, 형은 결국 탈주범이 되어 인질극을 벌이다가 담뱃갑에 시를 남기고 죽었다. 여기서도 세상은 망가지기 위해 존재하고, 나는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 따름이다. 골목 어귀의 커다란 느티나무로 올라가 그 느티나무 속에서 새로운 지도를 찾는 나의 행위는 이 지옥 같은 세상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이지만, 아직은 비극적 세상을 인지한 우울한 내면의 표상 이상은 아니다. 내가 직녀와 플래닛 X를 만나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본격적 탈주를 감행할 수 있게 하는 환상의 세계는 책의 ‘발견’ 이후에 이루어진다.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공장에 들어가고 거기서 임금을 받지 못하자 농성에 참가하게 되는데, 반복되는 교육과 집회에 지쳐갈 무렵 우연히 발견한 책의 세계는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가지고 있다.

책이란, 혹은 문학작품이란 현실적 허구의 세계이며, 그러므로 자기완결구조를 가지는 또하나의 다른 세상을 품고 있다. 이 책 속에는 놀랍게도 나의 것과 같고도 다른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의 가족들은 곧 나의 가족들이며, 「동물농장」은 내가 다니는 공장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책들은 또한 가상의 허구로 축조된 이미 완결된 세계라는 점에서 내가 겪은 현실과는 다른 것이기도 하다. 나는 독서를 통해 부모에 대한 나의 분노, 세상에 대한 나의 좌절, 그리고 순이를 향해 뻗쳤던 그릇된 욕망의 위악적 배설구들을 총체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나의 좌절이 부분적이고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의 생김생김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책에서 그려지는 모습들이 내가 아는 세계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에 나는 감정이입의 방식으로 그 책의 세계에 몰입한다. 이 감정이입을 통해 나는 책이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창출한 것처럼 스스로 하나의 환상, 하나의 허구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된다. 내가 겪은 분노와 좌절이 책의 세계와 동일하다면 책이 만들어내는 허구가 내가 꿈꾸는 환상과 다를 이유가 없고, 그 동일시의 경험을 통해 환상은 적어도 나에게는 유일한 현실이 된다.

 

바로 그때 나는 형을 보았다. 형이, 파괴된 벽체 옆에서, 구경꾼들 옆에서 돌아서더니 눈으로 나를 찾아 지그시 누르듯 나를 지켜보다가 빙긋, 웃었던 것이다. 나는 입 안으로만 중얼거렸다. 형! 형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그는 입을 열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말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를 따라 다시 민둥산으로 올라갔다. 저 아래쪽 골목 끝에서 불자동차가 올라오며 왱오왱오,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비 어미도 나도 죽지 않았어. 민둥바위에 이르러 형이 처음 한 말이었다. 형이…… 죽지 않았어?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죽은 게 아니야. 숨은 거야. 현실 너머로.” (「직녀 내 사랑」, 『아름다운 나의 귀신』 71면)

 

나는 일찌감치 이 세상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으나, 이 세상 이외의 곳을 알지 못하기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 책을 통해 발견한 허구의 세계, 그곳은 현실 너머로 내가 숨을 곳이었다. 싸우는 것과 집어삼키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몰랐던 부모는 내가 민둥산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프로판 가스를 틀어놓고 서로를 죽이고 죽었다. 그 폭발의 현장에서 나는 담뱃갑에 시를 남기고 죽었던 형과 만난다. 어처구니없게도 부모를 죽인 죄인으로 체포된 법정에서도 나는 법복을 입은 판사의 형상을 하고 있는 어미의 환상을 보았으며, 나를 체포하여 끌고 간 경찰관은 나의 아비였다. 부모를 죽이지 않았다는 나의 말을 묵살하고 나를 패륜의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판사나, 무능력한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한 경찰은 자식을 도둑으로 내몰았던 나의 부모와 무엇이 다른가. 말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 존재하고, 법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이곳. 엉뚱하게 부모를 죽인 죄인이 되어버린 내가 여기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법정에 홀연히 나타난 형과 푸른 눈의 직녀, 그들의 고향인 플래닛 X를 꿈꾸는 것말고는.

이 주인공들에게 절망적 세계인식과 환상이란 결코 동떨어지고 분리된 세계가 아니다. 절망적 세계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좌절은 이곳과는 다른 세계를 간절하게 꿈꾸게 하고 그 욕망은 환상을 불러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현시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역으로 환상의 세계는 절망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한 개인의 좁은 시야를 확장시키고 내가 아는 세계 이상의 다른 곳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사랑과 감정이입은 그 간절한 욕망의 현시물인 다른 세계와 몸을 섞게 하고, 또는 그 세계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바로 그곳임을 확신하게 한다. 여기서 환상은 흘깃 스쳐가는 영감이나 부질없는 동경이 아니라 이미 내가 그 속에 있는 한 그곳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는 구체성을 가지며, 그것은 바로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의 구체성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들의 욕망은 강렬하고 또한 그래서 환상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건너가는 나름의 경로는 있지만, 아직 절망의 땅에서 환상의 저편으로 건너가는 근원적 이유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환상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절망을 불러온 이 세계의 본질, 벗어날 수 없는 모순의 구조를 탐사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이미 절망한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환상의 세계로 건너가는 내적 논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환상의 세계에 대한 유려한 형상화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실감에 비해 주인공들이 환상의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 이유, 현실로부터 이끌어낸 논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최인석이 이번 작품집에서 새롭게 펼쳐내고 있는 환상의 세계가 가지는 공과는 우선 이 ‘이미 절망적인 세계’라는 전제의 타당성이 점검된 이후에나 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절망과 환상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교차점에 대해 끈질기게 회의하고 모색했던 전작들로 우회해보기로 하자.

 

 

3. 심해(深海)에서─파괴된 세계, 오염된 주체

 

이미 세계는 추악하고 비루하며 절망은 극한에 와 있다. 과연 최인석은 “희망에 대해 언급할 때보다 희망의 파산에 대해 묘사할 때 더 열정적이고 확신에 넘친다.”6 희곡작가의 전력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축조하는 소설 속의 공간은 이미 그 자체로도 추악함으로, 고통과 절망으로 끓어넘친다. 그날치의 매춘과 싸움으로 일용할 양식을 버는 매음굴(「심해에서」), 삶의 모든 비애와 부끄러움이 한 곳에 집중된 듯한 자본주의의 수도 뉴욕(「약속의 숲」), 그 속에서는 누구든 끔찍한 폭력과 광기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삼청교육대(「노래에 관하여」). 작품이 설정하고 있는 공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가 세상에 대해 품은 비관과 증오가 단순하지 않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려내는 절망의 심도는 단지 극단적 공간설정에 머물지 않는다. 그 극단적 공간 속에서 안간힘으로 버티며 길을 찾는 주인공들 앞에는 어김없이 또 한번 가혹한 좌절이 운명처럼 버티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가혹한 운명 앞에서 끈질기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러나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이 절망적 세계의 탐색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좌절하게 하고 세상을 시커먼 절망으로 물들이는가를 묻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근본적으로 ‘찾는 자’이다. 처음에 이들은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이 공간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번번이 앞을 가로막는 좌절 앞에서 이들이 찾는 것은 어느새 이 절망의 근원, 세계의 근본적 구조로 바뀐다. 출구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 출구가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출구를 희망하기에는 이 세계의 절망이 너무도 깊다는 것을 알아버리게 되는 역설적 상황 앞에서 이들이 출구를 찾아 나아가기보다는 절망의 세계 깊이 가라앉는 방법을 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출구를 찾기 위하여 침잠하는 것이며 또한 그 가장 낮고 비루한 절망의 한가운데에 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직 찾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출구를 발견하는 순간은 한없이 유보되며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심해에서」의 선영은 욕설과 싸움과 매춘의 신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골목에 자리잡은 여관의 구석진 쪽방에서 그 지옥 같은 매음굴을 탈출할 방법을 모색한다. 가출을 가정해보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끈질기게 부모를 설득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너무도 합당한, 반박 불가능한 이유 앞에서도 웬일인지 부모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녀보다 더 이 지옥 같은 골목을 끔찍해하고 지긋지긋해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부모는 이곳을 떠나자는 선영의 설득에 전혀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설득을 침묵으로 무시한다. 선영은 자신이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되고, 또한 떠나버리는 것으로 끊어질 줄 알았던 이 지옥과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니 에미나 나나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니 에미는 강원도 산골하고, 이 동네, 그것밖에 모른다. 다른 데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늘 보고 살았으니 이 장사나마 그럭저럭 해서 먹고사는 거다. 하다 보니 이력도 붙고. 나 또한 아는 데가 없다. 공사판으로 떠돈 것뿐이니 무슨 세상을 알겠냐. 내가 아는 건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뿐이다. 텅 빈 땅에 기초 파고, 골조 올리고, 배관공사하고, 벽 쌓고, 콘크리트 치고, 내장공사하고…… 그때까지는 내가 안다. 어떤 집이든지 어떤 빌딩이든지 어떤 아파트든지 그게 완공되기 전까지는 내가 다 안다. 모르는 게 없다. 수십년 동안 온갖 놈의 걸 다 지어봤으니까. 지금 서울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 그거 내가 지은 거다. 중부고속도로, 내가 놓은 거다. 올림픽대로도 내가 놓은 거다. 잠실운동장? 올림픽공원? 다 내가 만든 거다. 그렇지만 완공된 다음에는 난 몰라. 완공된 데에는 한번 들어가본 적도 없다. 그러니 뭘 알아 다른 장사를 하겄냐? (「심해에서」,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188〜89면)

 

선영은 이제 알게 된다. 자신이 나고 자란, 부모가 살고 있는 터전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의 강렬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던 이곳의 절망은 단지 싸움과 매춘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님을. 진짜 절망은 그 추악한 환경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길들이고 그래서 다른 곳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린 데서 온다는 것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다른 곳을 향할 가능성마저 잃어버릴 때 이 밑바닥의 삶은 영원히 변화되지 않고 영속화되리라는 것을. 이제 분노의 대상은 선영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 싸움을 일삼는 창녀와 깡패, 포주 들이 아니라 그들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세계의 구조가 된다. 그러나 이 세계의 구조와 운동법칙 자체를 싸움의 대상으로 삼기에 선영은 너무도 무력하다. 이 세계는 추악하고 비루할 뿐 아니라 가혹하고 야비하다. 더 잘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새 세상은 당연히 그런 것으로 믿게 하고 또 그 삶에 적응하게 하여 그저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남은 삶을 연명해가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선영의 앞에서 살아온 내력을 말하며 보였던 아버지의 눈물과 전세금을 노름판에 쏟아붓는 아버지의 모습은 둘다 진실일 것이다.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지만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체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는 아버지는 무서웠던 것이다. 햇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심해의 차가운 수압 속에서 살아가는 심해어들은 이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시력도,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부레도 퇴화되어 납작해진 몸으로 캄캄한 바닷속 밑바닥에 엎드려 그저 생존해나갈 따름인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은 더이상 사람의 삶이 아니고,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아니게 살도록 만드는 이 세계는 원한어린 저주의 대상이지만, 누구도 거기에 맞설 수 없거나 혹은 맞서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세계는 변화되지 않고 영원히 이 모습대로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 최인석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철저한 비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선영은 다행히 그 매음굴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심해를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상담한 교사 동환의 말처럼 매음굴이거나 감옥이거나 군대가 아니더라도 이 세계는 모두 심해이기 때문이다. 선영이 그 매음굴을 빠져나가 조금은 나은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일상에 안주하여, 더 인간다운 삶을 꿈꾸지 않는 한 그는 다시 한번 길들여진 심해어가 될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모든 생인 듯이, 그 바깥의 삶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과 주어진 자기 몫의 편안함에 고립된 채.

그러니 어딘들 심해가 아닐까. 이 심해 같은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생을 떠돈 아버지를 증오했던 아들이 안착한 아파트단지의 작은 서점(「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꿈과 그들 자신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던 시절’을 청산하고 여당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지난날의 혁명가가 그 가파르고 성급했던 시절을 못 견뎌 떠나간 아내를 찾아간 자본주의의 수도 뉴욕(「약속의 숲」). 우리들의 일상 곳곳, 숨쉬고 먹고 생각하는 이 모든 곳이 바로 심해이다. 아침에 일어나 서점을 보다가 집에 들어와 잠시 쉬고 다시 나가 서점을 보고 만원짜리 책을 팔아 이천원의 이문을 남기는 이 일상, 상처는 아물지 않고 더 황폐해졌을 따름인 아내의 손을 잡고 가정의 평화를 가장하고, 정치는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역설하며 거칠었던 과거의 흔적을 애써 봉합하는 그 삶은 우리 몸 구석구석 스며든 심해의 수압일 터이다.

그리하여 최인석은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아버지의 방황과 외도, 자신의 무심한 일상 속으로 걸어들어간 성우는 피나는 경쟁과 돈 벌어 성공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삶이 모두 억압된 이 심해를, 그곳을 역류하려 한 아버지의 안간힘을 만난다(「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 혁명의 꿈이 뼈아픈 회상으로만 남은, 자본과 속도로 이미 평정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 대영은 백인 자본주의자들에게 내몰린 황인종 어린 딸과 흑인 손자의 고통을, 일용할 양식을 벌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저당잡힌 남루한 삶을 만난다(「약속의 숲」). 세상은 추악하며 전혀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유지되어가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이미 순결하지 않다. 아무도 믿을 수 없으며 나 자신조차도 이미 오염되어 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임을,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이미 더럽혀졌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잊지 않는 일이다. 이것을 세계의 거대함 앞에 좌절한 한 개인의 포기선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의 진실을 직시하고 그 조건으로부터 시작하려는 철저한 회의와 모색의 부정성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거대함과 만만치 않음을 잊고 산다면, 지금 주어진 조건의 추악성을 외면하고 언젠가는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섣불리 믿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느새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세계의 부정함은 이미 나의 몸 속에서 서식할 것이며, 급기야 나의 영혼을 잠식하여 나를 무기력한 심해어의 몰골로 만들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4. 환상과 현실이 관계맺는 법

 

이제 민둥산 철거촌으로 돌아와보자. 주인공들을 저 환상의 땅으로 떠나가게 했던 절망의 구조는 「심해에서」나 「약속의 숲」에서 밝혀진 구조와 다르지 않다. 지상에 발붙일 곳 없는 자들이 누더기로 엮어놓은 터전은 도시미관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효용을 위해 여지없이 뭉개진다. 이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부정 그 자체이다. 그런데 더 납득할 수 없는 일은 터전을 빼앗긴 그들이 이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 맞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은 숱한 싸움 속에서 그들의 싸움이 부질없는 것임을, 이 거대한 절망의 구조는 적응하는 것말고는 다른 삶의 방법을 허용하지 않음을 알아버렸을 것이다.

세상은 못 견디게 부정하고 추악한데, 그것과 갈등하고 싸울 주체는 이미 오염되어 그 추악한 세상의 운동법칙을 그대로 따른다. 그들은 한푼의 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싸우고, 이웃의 돈을 끌어대 자신의 몫을 더 불리느라 여념이 없다. 변화를 위한 갈등과 적대가 형성되지 않는 세계, 그러니 이제 이 싸움은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전장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들의 머릿속 세계, 환상의 세계이다. 물론 이 내면 속의 싸움은 더욱 큰 분노로 터질 듯하고 강렬한 부정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분노로 가득 찬 내면이 세계를 압도하는 이 영혼의 왕국은 그것 자체가 부정한 세계에 대한 비판이며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겠지만 어딘지 불안하다. 이 환멸적 영혼의 소유자들은 이미 지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상은 희망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이 지상의 비참에서 출발하였지만, 환상의 세계가 구축된 이후에는 그 출발점을 잊는다. 절망하는 대신 꿈꾸는 삶을 발견하고 희망과 절망을 총체화한 세계의 구조를 인식하게 했던 환상은 그 자체로 충족된 세계를 이루어 출발점과 교접하지 않으며 이 지상의 비참을 이미 압도해버린다. 그래서 친구 어머니를 향해 품은 불가능한 사랑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로 내비쳤던 절망적 현실과 환상의 거리감은 귀신을 내쫓는 주문소리에 지워져버린다(「아름다운 나의 귀신」). 또한 한동수가 책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이 지상의 구조에 대한 통찰은 알레고리의 형태로 추상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는 드디어 이 지상을 떠나 미지의 소혹성 플래닛 X로 날아간다(「직녀 내 사랑」).

이들은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걸어들어가는 대신 ‘혼돈으로부터 한걸음’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우리가 발디딘 현실이 파산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 작가에게 이 절망의 땅을 솟구치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고 떠나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이곳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고 끊임없이 비명을 내지르는 것, 이미 우리의 발끝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파국의 늪에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소중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전히 절망과 관계맺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염소 할매」는 아직 이 지상을 떠나지 않은 환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염소 할매’는 민둥산 판자촌이 사람 하나 살지 않는 허허벌판 산등성이였을 때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움막을 짓고 뿌리를 내린 사람이며, 이후 철거로 밀려나기 직전까지 이곳을 지켜온 민둥산 판자촌의 산 역사이다. 그는 철거로 아수라장이 된 절망적 현실에서 욕망에 휩쓸리거나 환멸 속에서 떠나는 자들과는 달리, 이곳에서 살아온 그리고 이곳을 지키려는 자이다. 염소 할매가 끝까지 이 철거촌을 떠나지 않고 남는 것은, 전셋집을 마련할 돈에 현혹되지 않는 것은 그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일구고 지켜왔기 때문이며, 그래서 고단하게 벌어먹으며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보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집이란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살고 가꾸는 그 보람과 환희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는 입주권이나 몇푼 돈으로 이들을 여기에서 몰아내고, 또 가난하고 볼품없으나마 이들의 존재를 감당해준 이 땅을 강제로 파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작가의 뒤를 따라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부당함에 맞설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염소 할매는 교환과 파괴의 법칙이 아니라 노동과 생산의 법칙에 따라 살아온 삶 때문에 그만한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나라와 점령군들의 속임수와 폭력에 대한 울화도 울화려니와 가장 큰 이유는 이 집과 이 동네와 이곳에서 산 세월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이곳은 나의 세계, 나의 세상이었다. 내가 만든 세계, 나와 나의 이웃들이 만든 세계였다. 아무도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나와 이웃들이 이곳에 들어와 삶을 개척하고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내 늙은 손으로 잡초 뽑고 돌멩이 골라내고 땅 파 움집을 지었다. 내 늙은 두 다리로 오르내리던 잡초밭과 숲이 지금은 길이 되고 골목이 되지 않았는가. 바로 그 길로 점령군이 들어왔던 것이다. 내가 일찌감치 월세방 하나 얻을 돈이라도 움켜쥐고 이곳을 떠나지 못한 이유를 나의 세계가 거의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마당에야 나는 깨닫고 있었다. (「염소 할매」, 『아름다운 나의 귀신』 147면)

 

이 작품에서 염소 할배와 그가 끄는 흑염소의 환상이 다른 소설에서의 환상과 다른 점은 그것이 이곳을 지키고 이곳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염소 할매는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 환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통해’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염소 할배는 처음 염소 할매가 이곳에 나타났을 때 벼락맞을 소나무를 피해 느티나무 아래에 집터를 잡아 주었으며, 처음 철거반이 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홀연히 나타나 부서진 집터를 고르고 새로 움막을 꾸리는 일을 돕는다. 염소 할매가 공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딸을 찾아나섰을 때 염소 할배는 그녀의 딸이 마포 야당당사에서 농성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염소 할매를 그곳까지 데려다준다. 염소 할매가 철거반에 저항하다 경찰 호송차에 갇혔을 때 염소 할배는 어느새 그 차 안에 들어와 수천마리의 염소떼와 함께 그 철거반들을 몰아내는 환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염소 할배의 환상은 한정된 현실에 갇힌 개인의 시야를 확장시키고, 그래서 아직 보지 못했으므로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염소 할매가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현장에 개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 된다. 자신이 둥지를 틀고 삶을 꾸려온 터전이 사라지는 것은 그것을 당한 한 개인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이 반복될수록 세상은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이며 지옥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파괴와 유린이 자신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고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그래서 그것이 어느날 느닷없이 닥친 재앙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세계의 구조이며 이 삶의 기반이라면, 그 개인은 더 절망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것을 견디고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사는 것 자체가 모욕이라면, 그리고 이 모욕의 역사가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면, 우리는 이 절망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루하루 연명하고 새끼들을 키우는 것 이외에는 알지 못했던 늙고 가난한 염소 할매는 염소 등에서 그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들을 만난다. 그리고 철거반에 맞서 싸우는 것과 밀린 임금을 받으려고 야당 당사에서 농성해야 하는 딸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왔으나 나는 돌멩이를 던지고 나무토막을 던지며 버텼다. 딸년이 농성하던 성으로 병사들이 쳐들어가던 밤이 생각났고, 이 싸움이 그 싸움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감옥에 들어간 딸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전투경찰의 방패와 곤봉과 최루탄 앞에서는 수성은 무력할 뿐이었다. (「염소 할매」 147면)

 

드디어 자신의 집마저 부서지고 이 철거촌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 경찰 호송차에 갇힌 염소 할매의 눈앞에 보인 염소떼의 환상은, 부수고 무너뜨리고 싸우고 다시 집짓는 삶이 염소 할매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들의 이웃과 그들의 아이들이 반복해야 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현현(epiphany)한다. 그리하여 폭력과 광기로 그들의 마을을 밀어붙이는 경찰과 철거반이나 몇푼의 욕망에 갈팡질팡 몰려왔다 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긴 싸움의 한 장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염소 할배가 보여주는 환상은 염소 할매가 살아온 삶의 구체성과 결합하여,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와 관계맺는 현실의 엄연함을 그야말로 문득 환상처럼 깨닫게 한다. 「염소 할매」는 이미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 인간의 탐욕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비정함을 집요하게 추구하며, 한편으로는 이 지옥 같은 세계를 부정하기 위해 만날 수밖에 없었던 최인석의 환상이 가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이곳의 질서를 도저히 긍정할 수 없기에 다른 방식의 삶, 다른 구조로 만들어진 질서를 찾아 헤매어야 했고, 그래서 ‘환상’의 힘을 빌려 ‘발견’하고자 한 다른 세계는 그러나 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당연한 진실의 회복에 있었다. 이 당연한 진실, 폐허에서 자라는 푸성귀와 햇빛과 아이들의 눈부심, 그것들과 접촉하며 그것을 유지시키려는 염소 할매의 열망이 파괴의 폭력과 탐욕의 광기 속에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최인석이 환상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 세계의 비극인지도 모른다.

푸른 눈의 직녀와 플래닛 X, 오체투지의 당골네 역시 염소 할매의 비현실적인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떠나기 위해 꿈꾸는 자와 살기 위해 꿈꾸는 자의 거리만큼 멀다. 이 거리를 메우는 것은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스스로를 모욕하게 했던 우울한 현실의 구체성, 그 갈등의 역사를 확인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글이 먼 길을 우회해온 까닭도 현실과 환상이 관계맺는 최인석 식의 방법이 가지는 가능성과 위험성 모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최인석이 말하는 역사는 비극의 역사이고,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이미 파국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이 극단적 비관에 의해 절망의 원인을 탐색하고 우리 삶의 조건을 비정하게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풍요와 안락의 일상을 뒤집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 잠식되어가는 과정임을, 그것을 부정하는 우리들 자신조차도 이미 오염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한 것은 최인석의 힘이다. 우리는 그의 집요한 비관을 통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기 위해 더 절망해야 하는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요한 비관주의는 역으로 어쩌면 영원히 유보될 희망을 찾다 지쳐 선험적 절망의식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환상의 영토를 찾아 떠난 주인공들에게서 느꼈던 불안함은 바로 이 위험성의 징후이기도 하다. 심해의 근원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그리하여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절망하는 의식 바깥에 있는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현실의 폭을 확장하려는 ‘탐색하는 주인공’들이 이미 세계는 심해일 따름이라고 먼저 선언하지 않기를 바란다. 타락한 세상의 저 점령군들을 떠받는 환상의 염소 등에서도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새로운 눈물이 계속해서 눈앞을 가”(「염소 할매」 155면)린다. 이 비장한 긴장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최인석의 환상을 통해 기꺼이 리얼리즘과 만날 수 있으며, 이는 지난 시절에 극단적으로 좁혀진 현실 개념을 반성하고 소재에 대한 경직성을 풀 기회로 연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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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경렬 「현실과 환상 사이」, 최인석 『아름다운 나의 귀신』, 문학동네 1999.
  2. 방민호 「‘시장과 구정물의 늪’의 딜레마를 넘어」, 최인석 『나를 사랑한 폐인』, 문학동네 1998.
  3. 강진호 「비극의 세계, 절망과 부정의 형식」, 『실천문학』 1999년 가을호.
  4.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1999년 겨울호; 「진정성의 이념과 소설」, 『창작과비평』 1997년 겨울호.
  5. 황광수 「파경, 또는 근원으로부터의 출발」,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6. 염무웅 「부정의 치열성과 예술적 형상화」, 최인석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창작과비평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