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편지

 

 

독자의 편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역동적 간섭으로 나아가는 문학을 바라며

새로운 문명의 도전에 직면하여 문학이 포기되어서는 안될 사색의 기제인만큼 지난호 특집의 의미는 각별하다. 전반적인 기획이나 필자의 안배에서 주최측의 면밀한 준비가 느껴지는 특집은 잔칫집에 온 듯한 풍성함을 전해주어 멀리서나마 흐뭇했다.

고은의 글은 정보사회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반하여 ‘치열한 문학의지’를 역설하고 있지만, 시대의 변화가 요청하는 문학의 변용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결하고 있어 주의주의(主意主義)와 잘 구별되지 않았다. 황석영의 글은 기존 리얼리즘의 한계를 반성하면서 전통예술의 형식적·내용적 가능성을 상기시키는데, 긴요한 지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기존 리얼리즘의 협애함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전통적 서사의 죽음을 한탄하고, 우리 시대 문화수준의 경박함을 탓하면서도 이런 문화의 소비자들인 신세대를 여유롭게 수용하는 것은 모순으로 여겨졌다. 김병익의 글은 인문학이 짊어져야 할 과제들에 대한 총람으로 읽힐 만큼 포괄적인 시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문화비평과 구별되는 문학비평의 고유한 과제가 따로 규명되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정남영은 문학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확장에 맞서는 유효한 기제임을 지적했지만, 모든 질서를 억압이나 지배와 동일시하는 것은 일면적으로 보였다. 이런 시각은 시급히 착수되어야 할 질서의 변경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의 과제는 ‘유동성’을 포괄해내는 열린 질서를 세워가는 데 있지 않을까. 현 시대에 대한 부정이 또다른 야만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실한 개선을 지향하는 ‘규정적’ 부정의 길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또 이 글에서의 리얼리즘 구상은 ‘문학이 가진 창조적 잠재력’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데, 이런 거대한 리얼리즘 개념은 변별력과 분석적 가치를 상실하고 모호해지기 쉽다. 나희덕의 글은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현대의 부정적 모습을 극복해내는 양상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그 추구의 여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단순화와 이데올로기화를 경계하는 충실한 시각이 돋보였다.

신경제의 논리 앞에서 이제 문학은 자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반추와 이를 통한 자기갱신의 노력 없이는 존재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강요된 성찰’로부터 역사와 인간에 대한 역동적인 간섭으로 나아갈 때만 문학은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창비의 특집이 이런 전환을 모색하는 활발한 논의로 이어지길 바란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독문학과 박사과정 이재영

 

 

의료대란과 ‘분단체제적’ 현실

임상 의사로서 『창비』 2000년 겨울호의 의료문제 관련 특집을 관심있게 읽었다. 이미 디지털창비 자유게시판에서 분단체제 안에서 의료문제를 파악하려는 시각, 그리고 또 그에 반박하는 논쟁이 벌어졌던 것을 보면서, 『창비』가 기존 매체들의 편협한 논의를 넘어서서 의료문제를 더욱 큰 맥락 안에서 다루어주길 기대했던 터였다.

황상익의 「국민과 함께하는 의료개혁을 위해」는 의사들에게는 ‘내부로부터의 뼈아픈 충고’가 될 것이다. 의사들과 일반 국민들 사이의 ‘깊은 심연’을 지적한 이 글은 의사들이 참으로 새겨들어야 할 목소리가 아닌가 한다. 의사들이 의료제도와 정책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 못지않게 스스로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고쳐나가고, 국민들은 오히려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 인식해나가야 한다는 그가 보여주는 ‘바람직한 구도’는 고개를 끄덕이게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언제나 가능할까 하는 막막함도 들게 한다.  박형욱의 「의료다원주의 관점에서 본 의료개혁」은, 흔히 한국 의료체계의 문제점이 공공부문의 취약성이라고 얘기되지만, 사실은 정부가 ‘부적절하게’ 개입함으로써 초래된 ‘획일주의’가 문제의 본질이므로 ‘다원주의’를 모색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발상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의료체계와 의사집단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규제는 마땅히 필요한 것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개입할 것인가, 또 그것이 ‘적절’한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의료대란’ 사태를 겪으면서, 분명 일정한 개혁성을 가진 의약분업이라는 제도가 왜곡되고 과연 개혁인지 아닌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지는 과정을 보았다. 아직 최종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때이른 감이 있으나, 지금까지는 의약분업에 기대했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는지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 약물 사용의 감소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의약분업을 때려치우고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보고 ‘개혁이 개혁이 아니게 되는’─혹자는 엉뚱하다 할지 모르나─‘분단체제적’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의 이같은 의료대란은 북한의 무상의료체계에 위협을 느낀 유신정권이 의료보험을 졸속으로 도입하면서부터 이미 예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곡된 의료체계는 결국 분단체제의 산물인 것이다. 게다가 시민단체와 진보적 의사단체가 의료개혁을 내세우면서 의사집단을 개혁대상으로만 설정했지 의사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간과하여 의사집단을 설득하지 못한 ‘전술적 실패’에서 보듯이, 80년대식 운동방법이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 것도 지극히 분단체제적인 현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번 특집이 이러한 분단체제 내에서의 의료체계라는 시각, 큰 맥락 안에서 문제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담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소 불만스럽고, 자유게시판에서의 논쟁보다 한발 뒤처진 듯한 느낌도 들지만, 분단체제 논의의 산실인 『창비』가 앞으로 의료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거시적·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박형진 phy6839@hotmail.com

 

 

의사들이 의료개혁의 주체로 서려면

2000년 의사파업이 종결되고 다시 병원에 돌아와 근무하고 있는 전공의로서 그간의 과정에 대해 착찹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의사로서 환자들을 저버린 데 대한 본능적 죄의식이 존재하는 한편, 극단적 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료보호환자 조제거부, 임의적 진료, 대체조제 등이 현실에서 헤아릴 수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황상익 교수가 후배에 준 글에서처럼 나 또한 파업기간 내내 과연 이럴 수밖에 없는가 하고 많은 고민을 했다. 정부의 반민중적이고 무책임한 의료정책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왜 국민들이 의사의 이러한 정당한 항변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걸까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또 전면파업이 옳았느냐는 고민은 아직도 명쾌하게 결론내리기 힘든 문제다. 의사들의 투쟁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진보적 성향의 의사들 사이에서도 극단적 편차를 보였다. 정부의 반민중적인 정책에 대한 저항이라는 면에서 민중적 성격을 가진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의사라는 기득권층이 민중의 건강을 볼모로 한 반민중적 투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박형욱씨와 채만수씨의 글은 이러한 획일적이고 고식적인 담론을 어느정도 벗어나 있어 무척 반갑게 읽었다. 앞으로 의사집단이 더욱 전문가적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의료개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선 나름의 방향성을 가져야 할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 이번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동대문구 제기동 제기한신아파트 105-1001 이해국

 

 

경인여대 사태에 대한 공정한 법집행을 촉구한다

‘전문·실업교육의 오늘’을 진단한 지난호의 현장통신은 여러모로 유익했다. 특히 사립 전문대학의 비리문제를 조명한 이상권·김상훈 두 분의 글은 교육민주화를 통해 좀더 바람직한 교육개혁을 이루려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데 경인여대의 재단퇴진운동 사례를 통해 비리 사학재단의 전횡을 생생히 전해준 이상권 경인여대 학장이 동료교수 셋과 함께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들이 구속된 사유는 학교 경영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사전 모의하고 학생을 선동했다는 혐의였다. 그런데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학교의 경영권은 이사회에 있으며, 학교에 문제가 발생하면 국가에서 임시이사를 파견해 학교경영을 정상화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법리대로 보면, 현임 학장은 사립학교법에 따라 교육부가 파견한 이사회에서 선임됐기 때문에,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학사운영을 위임받은 것이지 경영권을 탈취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경영상의 비리와 불법을 밝혀내기 위해 집단행동을 한 사람들은 긴급구속까지 하면서, 학교의 등록금을 재단으로 빼돌린 명백한 불법경영자는 불구속한 것이 과연 공정한 법집행이라 할 수 있는가? 시민단체들이 현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엄동설한에도 거리에 나가 항의를 하는 것은 검찰과 사법부의 공정한 법집행을 바라기 때문이다. 영장실질심사에서 현직 학장과 교수들이 도주와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도 납득이 가질 않는다. 만약 법집행상 담당 검사와 판사의 잘못이 있었다면, 국가 기강의 확립과 헌법의 보전을 위해서라도 국민의 이름으로 징계를 요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시민들은 검찰과 사법부의 불명예나 불신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헌법으로 부여된 검찰과 사법부의 심판 기능의 회복이요, 정의와 원칙의 확립이다. 그리고 교육민주화인 것이다. 이번 경인여대 사태도 이같은 원론에 맞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공동대표 최현섭

 

 

신경숙·최인석의 소설을 읽고

신경숙의 「부석사」에서는 일군의 상처입은 약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여자이고 남자이며 한마리 개이자 수리부엉이이다. 여자가 개를 그냥 ‘개야’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아’ ‘존재야’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는 것 같다. 거기에는 작가의 지극한 측은지심이 스며 있다. 이 작품에 따르면 목숨을 가진 모든 존재는 가엾다. 덧붙여 이 작품의 약자들은 한결같이 착하고 순하고 바르다. 여자의 경우 상처받고 비뚤어져도, 곧게 서 있는 화분을 어긋내거나 차를 몰거나 휴직을 하고 빈둥거리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위안을 얻지만 한편으론 그 ‘정갈한 수난자’의 대열에서 소외된다. 그리하여 두 남녀가 낭떠러지에서 쌓아올린 ‘부석사’, 그 두 개의 돌 틈에 우리의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슬프다.

최인석의 「모든 나무는 얘기를 한다」는, 소설 자체를 읽는 즐거움뿐 아니라, 서영인의 비평에 비추어 다시 곱씹어보는 재미 또한 맛보았다. ‘절망과 환상이 관계맺는 방식’에 대한 비평가의 이해를 단순화하면, 환상은 최인석의 주인공들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발견한 내면의 구체적 출구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환상은 단지 화자 ‘나’의 꿈이나 취기 속의 환각만은 아니다. 기실 장수호와 유영선이라는 존재 자체가 환상이 아니던가. 그들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처럼, 나무들에 둘러싸여 뱀과 잠자리와 함께 교접하는 태초의 손상되지 않은 남녀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이, 그리고 세상사람인 화자가 ‘버리지 않는’ 자기존재의 환상일 수 있다.

 용산구 산천동 한강타운아파트 101-107 이명현

 

 

농촌정서의 형상화와 작중 인물의 진정성

소설 배경이 농촌이라는 이유만으로 ‘농촌정서’를 그렸다고 할 수는 없다. 창비신인상 가작 「눈길」에 등장하는 전혀 ‘풋풋’하지 않은 농촌의 인물들과 이야기 전개의 비약, 미루어 짐작해야 함을 강요하는 구성은 진정한 ‘농촌정서’의 형상화와는 거리가 멀다. 「눈길」의 어느 인물에게서도 ‘밑바닥 인생’의 진솔한 삶을 읽을 수 없었다. 작중인물의 진정성은 현실의 억압에 대항하는 고민과 몸짓에 달려 있지 사투리로 치장된 대화나 묘사에 있지 않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효성아파트 301-201 정우용

 

 

시를 읽어야 할 이유가 모호해지는 시대에 만난 행운의 시

허만하 시인의 「슬픔이 의지가 되는 때」는 대자연과 우주와 죽음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한편의 장엄한 음악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솟구쳐오르는 바람과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 잦아드는 한마리 순록의 목숨이란, 그 조용한 죽음이란 대자연이 써내려가는 거대한 악보 위의 짧은 쉼표일 따름이다.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인간의 삶 역시 조용히 지워지는 순록의 생명과 크게 다를 바 무엇일까.

노원구 월계3동 삼호아파트 25-106 소선순

 

 

설득력있는 붓놀림으로 풀어낸 프로이트의 이론

김종엽의 「프로이트와 기차」는 근대성의 상징인 기차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며 불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예컨대 기차여행은 쾌락과 질병의 원인이며, ‘자유연상’은 차창으로 보이는 파노라마 같은 풍경이고 신경망은 철도망과도 같다. 정작 논문의 매력은 프로이트와 기차란 제재를 통해 테크놀로지와 우리의 세계경험 사이의 관계를 확장하는 데 있다. 즉, 프로이트를 책 속에서 현실로 성실히 안내한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생산적’인 질문이 기대된다. 가령, 그가 제출한 질문 “경인선 개통이 당대인의 세계체험과 이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같은 글 말이다.

경기 고양시 일산구 일산2동 중산마을 208-206 김현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