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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상륭 朴常隆

1940년 전북 장수 출생. 1963년 『사상계』 신인상 수상. 소설집 『평심』 『아겔다마』 『열명길』, 장편소설 『칠조어론』 『죽음의 한 연구』, 산문집 『산해기』 등이 있음.

 

 

두 집 사이

제5의 늙은 兒孩 얘기

 

 

새로 세든 방에서 늙은네는, 어디다 머리를 둬 다리를 뻗을까 궁리하다, 사흘도 지나지 않아, 방향(方向)을 잃어버렸다. 망망대해나 사막 가운데, 또는 달도 별도 없는 밤의 큰 숲 속에서도 아니고, 하필 자기의 소잡한 방에서, 처음엔 한 방위(方位)를 잃고, 그에 따라 남은 세 방위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츠쯧, 땀도 못 낼 일이 또 있겠는가. 의식하고서든 못하고서든, 동쪽 되는 데가 언제든 동쪽이고, 서쪽 되는 데도 또한 그렇다고 믿어 지내는 일이란, 삶이, 일상(日常)이라고 이르는 사각진 석반 위에 세운 상륜탑 같은 것이라고 알게 하는데, 그 노반 부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어지러울 테다, 온전치 못할 테다, 땀도 못 낼 테다. 궁여지책으로 늙은네는, 지남철을 하나 구해, 책상 겸용의 개다리상판 한 귀퉁이에 놓고, 남북을 가늠하기에 의해, 동서를 가름해보기도 했으나, 나중엔 차라리 그것이, 늙은네의 방향감각에 더 많은 차질과 혼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잡동사니들을 처넣는 상자갑 속에다 던져넣어버리고 말았다. 그 상자갑은, 추억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거나, 수전노의 돈궤(그동안 얼마나 많은 화폐개혁이 있었을 겐가), 또는 아르빠공의 마음의 풍경을 담고 있었을 것이었는다. 철따라 해뜨는 곳이나 지는 곳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으나, 그러는 동안 이사도 몇차례 했다 해도, 스물둬 살 이후부터의 평생을 살아온 도시의 동쪽은 늘 동쪽에만 있어온 것이지, 이사를 했다 해서 북두칠성까지도 (자루 도는 것말고) 자리를 옮기는 것은 아니었던 것(동쪽으로 이사를 했으니 동방이 없어져버린다면, 하늘 소맷자락 속에는 여분의 방위가 億數로 많을 테다), 그래서 이제는 거의 고정관념이 되다시피 한 방위들이, 지남철에 의하면, 예를 들면, 이제껏 동방이었던 것이 차라리 북쪽에 가까운 방향이라고 일러주고 하니, 믿을 수 없는 것도 그것이던 것이었던다. 이런 눔의 지남철에 의지해 항해를 하는 수부가 있다면, 그는, 해뜨는 것 보러 부상(扶桑)을 향했는데, 지는 해 함께 함지(咸池)에 꼴깍 함몰하고 말 테다. 방향감각이라는 것도 그렇게 본다는즉슨, 어떤 특정한 고장을 오래 살다보면, 일종의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모양인데, 그럴 것이, 술이라도 취해 몸부림을 하며 자는 중, 북두성 자루 돌 때 따라 어디만쯤 빙그르 돌았다는 경우, 이 취한 손이, 오줌이 마렵게 되었다거나, 목이 갈해 더듬기 시작했다 하면, 이제 문제가 생기는 법인 것. 거기 분명히 있어야 될 문이나 숭늉그릇이 없어지고, 대신 이해할 수 없는 딴 것들이거나 벽이 가로막아 있는데, 이제 그는 이 평면 벽의 미궁에 빠지게 되는다. 이차원의 세계로 풍 빠져내린 것이다. 그 미궁은 다름아닌, 방위, 또는 방향에 대한, 그의 고정관념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고도 늙은네가 더 못 참을 일은, 이 방에서는, 동서남북이라는 네 방위 중의 하나가, 자기의 눈이, 깜냥껏 시퍼렇게 뜨고 보는 앞에서 실종을 해버리는, 그 불쾌한 경험인데, 늙은네가 자기의 방향감각에 의해서든, 또는 (이제는 집어치워버린) 지남철에 의해서든, 그쪽 구석〔角〕이 동쪽이며, 저쪽 구석이 서쪽이고, 그러면 이쪽 구석이 마땅히 남쪽이 된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북각(北角)을 정리해내려 하면, 거기 마땅히 있어야 할 그 방위가 민틋하게 깎여 없어져,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그것이다. 이 방에서는 언제든, 돌(咄), 방위 하나가 깨끗하게 지워져 없고만 있다. 그러자부터, 이 한 삶의 늙은 탑은, 그 노반 되는 데쯤부터서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늙은네가 세든 방은, (‘河口’라는 말이 있어 하는 말인데) 노구(路口)에 세워진 건물의 삼층에 있다. 길이 둘로 나누어지는 지점에, 또는 두 길이 하나로 합류하는 지점에, 다시 말하면, 길이 만든 삼각주(三角洲)에, 길의 운명이나 횡포에 복종해 세워진 건물이나 가옥은, (대략 말하면) 유독 한 각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오각주의 형태를 취해 있게 마련인데, 거기서 갈라진 길 하나는 함지에 이르고, 다른 길은 부상에 이르는지 어쩌는지, 그것은 어째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든 그 일점은, 모두어진다는 의미에선 두 배는 부산하고, 헤어진다는 까닭에 의해서는, 두 배는 외로운 곳임에 분명하다. 이 노구에 세워진 (대략 말해서) 오각꼴 건물은, 그 안의 공간을 구획지어, 벽 두고 문 트며 창을 내는 이들에 의해, 여러 모양을 드러낼 것이로되, 일반적으로는, (밖에서는 불거져나왔으나, 안에서는) 뾰족하고도 깊이 골이 패어져들어 별로 쓸모가 없는, 오각 중에서도 예각진 그 한 구석은, 일단은 잘라내어져버리는 모양이었다. 더욱 분명하게 말하면, 거기 어디만쯤에다 벽을 둬 막아, 남은 (훨씬 더 넓은) 공간을 사각으로 취해내고서야, 가구든, 사무용 책상이나 궤, 또는 바둑판 따위, 필요한 것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넣을 수 있게 되는데, (깎임받은 橫三角錐의 縱三角柱 꼴의 공간도,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버림받아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땅에 신발창을 댄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데 엉덩이를 댄 것은, 담배나 필름 따위를 파는 가게로도 쓰이고, 위층엔 변소를 차려, 바둑꾼들이나, 복덕방 손님들의 일용할 육신적 배설을 돕거나 하고, 그 위층은, 경우에 따라, 일용할 삶도 빵도 별로 여유가 없는, 예를 들면 이런 홑 늙은네에게 세를 내주기도, 아니면 창고로 쓰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보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삼각이나 원 따위도 아닌, 사각진 공간에 두는 듯하다. (색다름이나, 어떤 식의 멋을 추구하여 원통형으로 지은 건물이라도, 현실적인 문제로서, 그 안에다 가구 등속을 배치하기에 의해서 보면, 사람들은 다시 또 사각을 내접하는데, 그러면 별수없이, 별로 쓸모없는, 길다란 반원 같은 부분들이 제외되곤 하던 것.) 근년 들어, 땅은 둥글 뿐만 아니라, 빙글빙글 도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공처럼 둥근 그 유동체 속에다 사각의 터전을 확립해놓고서야, 그릇에다 뭘 담아놓아도 쏟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다 깨어보았더니, 벽이나 천장에, 배를 깔고 누워 있더라는 일 같은 것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음에  분명하다. 지체(地體)는 아직도, 코페르니쿠스여, 네모지며, 안정되어 흔들림이 없는 까닭에, 뉴튼입습지, 은행나무 암수들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서, 눈으로 갖다가시나, 손 그러쥐고 혓바닥 빼내먹는 따위, 무슨 만유인력론이겠는가, 바다도 엎질러지지 않으며, 섬동지 세상 조판할 때 깎아, 천장에 박아놓은 별들도, 못〔釘〕 빼고 떨어져내리지 않는 것이다. 저 네 뿔〔角〕진 데는마다, 동서남북이 지켜 있어, 땅이 궤도를 벗어나 어디로 한없이 굴러가버리거나, 벼룩 한마리라도 너무 멀리 뛰어, 허허한 공간 속에 실족하거나 하지 않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방위들은 그러던 날, 천체 지체 지키는 장수들이라고 신격(神格)을 띠어,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피맺혔다, 인식 속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츠, 쯔츳, 그러나 어떤 인식 속에서는, 그 네 방위 중 하나가 어디로 실종을 해버렸다고 한다면, 땅이 갑자기 한 각을 잃어, 삼각의 모습을 드러내버릴 것은 당연하다. 사각에서의 한 각의 상실은, 이제껏 360˚를 지켜왔던 공간이, 180˚의 공간으로 축소되어버린 결과여서, 삼각은 각은 셋이라도, 사각의 반밖에 되잖는 것이 문제다. 이각형(二角形)이란 있는 것이 아닐 것이지만, 이 경우엔 사각에 대해 삼각이란 이각으로 축소된다. 삼차원에서의 추락. 땅의 반이, 세모꼴로 떨어져나가버린, 이런 감산법(減算法)은 이해키 곤란하다. 늙은네는, 바로 이런 방에 세든 것인데, 세도 하긴 사각진 방의 반에 해당하기는 해서, 세를 들긴 든 것이다. 자기의 저축 위에서, 자기의 목숨의 길이를 계산할 때 늙은네들은, 불꽃을 먹이는 초(기름)보다도, 초 똥구녁 밑으로, 훨씬 더 긴 심지를 이어놓는데, 심지를 젖 먹이는 초의 길이만큼만 태우고 말려고 작정했다면, 어떤 늙은네들은, 네모진 방도 서넛쯤 더 퍼쓰고도 남을 저축을, 방석 밑에 깔아두고도, 훌쭉해진 창자로 얼어죽었다는 얘기 같은 것도, 심심찮게 들린다. 태우고 있는 초의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데에, 문제는 있었을 터이지.

그 세모꼴의 방에서 늙은네는,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낮에는, 접시물 위의 일엽편주로, 맴돌이질하다 끼니를 거르기도 하고, 같은 이유로, 밤에는 잠을 잘 못 이루고 뒤척이기나 했다. 잠을 잘 못 이루는 까닭은, (앞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어디다 머리를 둬 어디다 다리를 뻗을지를 알 수가 없어 그런 것인데, (『마하바라타』에 이른) 잠잘 때, 머리는 동방이나 남방(사이 어디에, 扶桑은 있는 게다. 그렇다면, 咸池는 西北方間 어디에 있음일 것)에 둬야 오래 산다는 말에 귀를 묶여서만은 아니라도, 잠을 설칠 현실적인 문제가 한가지 더 있었던 것이다. (우선, 그 방의 크기가 밝혀져야겠지만, 삶의 심지를, 대략 두 회갑 길이쯤 해놓은 늙은네의, 방의 크기는 알아서 뭣에 쓸 것인가.) 삼각진 방에서, 한번이라도 잠을 자본 일이 없는 이라면, 잘 짐작할 수 없는 일이 이것일지 모르되, 그런 경험을 해본 이라면, 그런 방은, 잠을 평안하게 지켜주는 것이기보다, 머리를 욱죄거나, 두 발목을 묶어매는, 형틀 비슷한 것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방을 잠시 잊기로 하고, 먼저 삼각진 침대를 생각해보는 것이, 저 괴로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살펴둘 것은, 세모꼴 침대에 누우려 했을 때, 사람들은 먼저 무엇을 궁리했을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론, 눕고 난 뒤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이다. 세모꼴 침대에서, 침댓전으로 늘어지거나 굴러떨어지는 몸의 부분은, 그런 방에서는, 욱죄임이 되거나, 처박힘의 형태로 바뀐다는 것을, 그러고는 살펴얄 것이다. 축음기 따위, 늙은네가 가진 가구랄 것도 못되는 고물 몇가지는 잊어버리기로 하고 말하면, 늙은네가 머리를 한 구석에 두는 경우엔, 두 발은 넓은 자리를 차지해 얼마쯤은 자유스럽되,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통은 구석 넓이보다 더 커지고, 그러다보면, 형틀에다 목을 넣어놓고 있는 듯한 답답함이 일어, 그 각진 소잡함을 참아낼 수가 없이 되는데, 그래서 이번엔, 자리를 바꿔 잠을 청하면, 두 발이 구석에 끼여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불어나는지, 십자매 장 속에 갇힌 독수리 모양, 번열을 내고 푸드득이기 시작한다. 때문에, 늙은네가 삼각의 그중 긴 한 변을 취해, 그 변(벽)에 등을 기대 다리를 뻗어보기로 하면, 그때는 또 사변(斜邊)의 벽이, 시야를 많이 차단해, 갑갑하고 불편한데, 하체 쪽은 그쪽대로, 각공(角空)에 끼여, 버르적여쌓다가는, 나중에는 별수없이, 새우꼴이나, 잠든 개꼴을 꾸미고 말게 된다. 가장 기다란 자리에 눕는다고 누운 것이, 서로 이웃해 있는 두 각의 형틀에 욱박혀든 결과가 된 것이다. 그렇게 세 방(方)을 난항하는 중에, 밤이 흐르고, 동틀녘쯤에야 늙은네는, 제 사타구니 사이에 제 대가리를 끼워넣고 자는 개잠을 설풋 들이는데, 세모꼴의 방안에서는, 개잠도 둥근 것은 아니다. 받치는 것〔발〕과, 받침을 받는 것〔머리통〕이, 허리 접힘에 의해 맞대어진 그것은, 세모진 것인데, 세모난 세상에서는, 세모난 형태만이, 세모꼴의 억류로부터 벗어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긴 그렇다, 시간도(縱橫으로 몇개의 삼각이 중첩된 것인지, 이런 자리에서 따질 것은 아니로되, 모래시계 속의 시간을 보면) 과거·현재·미래가 뒤집히는 데서 삼각의 모양을 띠고 있다. 삶도, 나기·늙기·죽기라는 삼각의 꼴을 취해 있으며, 해도 부상·중천·함지에 이르는 삼각진 운행을 계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달도, 초승·보름·그믐 속에 이우는 달이라는 삼각의 자궁에서, 맺혔다·익었다·쇠하는 성쇠를 되풀이하고 있다. 늙은네가 방위를 하나 잃었을 때부터, 늙은네의 한 세계가 세모꼴져버려, (혜능에 의하면, 마음은 형상이 없거나, 아니면 모든 형상이라고 이르되) 늙은네의 마음 자체가 세모꼴져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축생도(畜生道)나 ‘몸의 우주’는 삼각지다. 거기 어떤 ‘점(點, vija)’의 인식이 시작된다면, 사각이 잃어버리게 된, 그 한 각이 되살아날지도 모르긴 하다.

어떤 저녁으론 늙은네는, 죽은 뒤엔 참 길고도 긴 잠을 자게 될 것이라며, 눕기나 잠자기를 포기하고, 아예 삼각뿔 모양새로 앉아,라는 말은, 일종의 가부좌랄 것을 꾸며, 아침을 맞기도 했는데, 잡기장(雜記帳)에 끄적거려놓은, 한둘의 도면이나, 단상 같은 것에 의해 보면, 늙은네도 한 9쯤의 공안(公案)은 알고, 그것에 마음을 묶어맸던 듯하기는 했다. 그런 뒤에도, 한 서너 달쯤 후에, 변소간(은 늙은네도 棋院에 딸린 것을 써야 했던 것)에서 자주 만나 늙은네를 알게 된, 그 아래층 기원의 몇 기사(棋士)들의, 심심한 입에 오르내렸던 얘기 몇마디를 미리 빌려다 쓰기로 하자면, 늙은네는 그렇게, 다시 말하면 죽기도 세모지게, 앉은죽음을 했더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방에 세든 어느 때로부터 비롯해 늙은네는, 그 세모진 세상을, 세모진 앉음새로, 세모진 삶을 ‘흘러간 옛노래’를 들으며, 세모지게 견뎌왔던 것이나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하지만, 그래서 늙은네는 과연, 삼각형, 또는 이각형의 세계를 극복했었는지 어쨌는지는, 최판관밖에는 모를 일이었다. 듣자니, 그 주검이 담긴 용기(관곽)는, 반사각형, 즉 직사각형꼴이어서, 세모진 주검을 담기에 여간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더라고 했다. 장의사에서 온 이들은, 별다른 수를 못 찾고, 기표(記表)가 아니라 기의(記意)에 수정가필을 해야 했던 모양이었다. 저 삼각의 주검을 늘여 펴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자 솔은 뼈들이 어긋나느라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냈는데, 반사각형의 관곽이란, 모든 주검에 다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 저항의 소리도 같더라고 했다. 하지만, 사각형을 이루는 360˚의 공간에서, 한 각을 떼어내자, 그 공간이 갑자기 180˚로 줄어버린 것을 염두에 둔다면, 반복하지만 1/2로 축소되어버린 것을 개의키로 한다면, 이 경우의 직사각형도, 정사각형의 1/2이라는 점에서는, 그것 또한 다를 바 없는 삼각형인 것, 우두둑 소리는 웬 것인고? 고고(呱呱) 소리였겠지맹, 고고(苦呱)─대개는 눈치챘겠지마는, 그래도 늙은네는, 삼각형의 울에 갇힌 짐승의 운명을 짐승스럽게만 끝내버린 것만은 아니었다는, 한두 가지의 물증을 남겨놓고는 있었다. 하나는, 늙은네가 아주 젊었을 때, 솔찮은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했었을 축음기와 판이며, 하나는, 끄적끄적거리다 남긴 잡기장이, 그것이다. 모짜르트나 슈베르트 등도 들은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늙은네가 주로 소지하고 있는 축음기판들은, 이제는 ‘흘러간 옛노래’라고 이르는 범주의 것들이어서, 더듬어 짐작해볼 것들이 많았다.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고향, 외로운 객줏집, 떠돌기, 한숨, 눈물,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랑, 순애야, 김중배야, 망향, 박꽃 얹은 지붕, 물레방아, 짠 눈물, 순애야 너 잘살았으면 싶으지, 듣기로는 그런다, 정든 땅 언덕 위의 집은, 이엉 대신 슬레이트를 얹었으며, 아는 이들은 죽었거나, 뿔뿔이 헤어졌노라고, 돌아갈 곳도, 원한을 품을 김중배도 땅 아래 묻혔다고, 한숨, 고향 없는 향수, 망향…… ‘흘러간 옛노래’가 담고 있는 사연과 현실은 대체로 저런 것들…… “제 얼굴 제 보아도 더럽고 슬미웨라/검버섯 구름 낀 듯, 코춤은 장마진 듯, 이전에 없던 뼈, 새바위 엉덩이에 울근불근……”

늙은네가 못다 채우고 남긴 잡기장은, 그중의 많은 이들이 무덤 아래나 누웠을, 옛 지우들의 주소며 전화번호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나, (그것 들여다보기도, ‘흘러간 옛노래’ 듣기였었을 터이지) 이 방으로 이사하고 난 뒤, 늙은네의 떨리는 손으로 끄적거려져 있는 것들은,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있어온 것들을, 빌리기도, 번안하기도, 한둬 글자 보태기도 해서, 근래의 자기의 심경을 대신해놓고 있어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것도 고작 몇구절에 불과했다.

 

─세상이, 네 방위를 두고 있다고 이르는 것은, 응달쪽에 감춰져 있는 부분까지를 합쳐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메루’(Sumeru)에 대한 ‘쿠메루’(Kumeru)에의 연상은, 세상은, 이를테면 피라미드형의, 두 삼각추가, 그 밑변을 맞대고 종립해 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까닭에,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도 있다’는 명제가 이뤄졌을 터. 밑변을 상접한 두 삼각추에 의해, 네 방위가 명료해졌을 것이었다.

─한 각이 상향한 삼각(△)은, 불의 상징이며(수메루), 하향한 것(▽, 쿠메루)은 물의 상징이라는 것은 알려진 바대로인 것. ‘△’은 링가(男根)며, ‘▽’는 요니(女根)라는 것.

─▽ 속에, △가 내접하거나, 겹쳐지는 데서, 나기와 죽기의 갈아듦이 있고, 그것은 그래서 쾌(快)며, 동시에 고(苦)라고 이르는 것일 것. 쾌/고, 쾌고, 쾍오, 쾍!

 

쾍!─늙은네의 고고(苦呱) 소리는 저러했을 것이었다. ‘몸의 우주’에서의 해탈법은, ‘탄트라’로 이해되어지는데도, 늙은네는 ▽와 △의 야합, 공(空)과 색(色)의 일원화에 관해 쓰고 있지만, 그것인즉슨, 탄트라적 상징, 또는 기호 몇을 나열해놓았거나, 상정해놓았을 뿐으로, 점(點, vija)의 변증법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늙은네는 ‘점’에의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와 △가 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다시 또 ‘점’이며, 이 ‘점’은 ‘말〔言語〕’이랄 것인데, ‘쾍’도 말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아니라도, 그것은 ‘점’의 인식에서 드러난 것이었다기보다는, 수사학적(修辭學的) 춘사로 이해되는 것이 탈이다. 그래서 그것은 ‘잡기(雜記)’였을 뿐인데, 다시 말이고, 또 말이지만, 늙은네는,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자신 속에서, ‘황방(黃方)’이라는, 중심(中心)을 짚어내지를 못한 것이었다. 늙은네가 그 중심을 찾아내려 하기만 했었더라면, 늙은네는 필시, 횡삼각과 종삼각이 만나는 그 일점에서, (그럼에도 종내는 그것까지도 분쇄해버리기는 해야 하지만) ‘자아(自我)’를 발견했었음에 분명하고, 순간과 영원이 갈리는 그 일점에서 또한, 존재와 관계된 소멸과, 동시에 어떤 불멸도 체득했었을지도 모른다. ‘흘러간 옛노래’가 일러주기는, 늙은네는 어느 때부터였는지, 미래에로 열린 눈을 감아, 보려 하지 않은 듯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그 까닭임에 분명하다. 그런 삶도 그러나,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살고 있는 자들 중에는 없으며, 한번 더 유예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자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삶은, 오디쎄우스의 것뿐만 아니라, 갑돌이의 것도 사실은 파란만장한 것을. 오디쎄우스 고향 돌아가다. 쉴지어다. 명복을 비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