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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인하대 국문과 교수
동방일사(東方一士)를 추모함
야스에 료오스께 『칼럼으로 본 일본 사회』, 소화 2000
지명관(池明觀) 선생이 손수 편역한 고(故) 야스에 료오스께(安江良介) 선생의 칼럼집이 한림신서로 출간되었다. 『세까이(世界)』 편집장으로서, 그리고 이와나미(岩波)서점의 사장으로서, 일본사회의 타락에 길항하면서 한국의 긴 반독재투쟁의 가장 미쁜 해외지원자 역할을 감당했던 그의 부재는 이시하라 신따로오(石原愼太郞)의 희극적 망언이 연발되는 작금의 상황에 비추어 더욱 그 존재를 강력히 환기한다. 나는 선생을 한번 뵈었다. 한반도의 통일과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깊은 관심 덕분에 오히려 한국정부로부터 반한·친북 인사로 분류되어 입국이 금지되었던 그는 1995년 마침내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다. 바쁜 일정을 나눠 백낙청 선생을 만나러 창비에 들렀을 때 나도 말석에 끼여 그를 직접 대면하는 드문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한국의 군사독재정권과 일본 자민당의 유착으로 특징지어졌던 불행한 한일관계를 넘어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려 한 그의 포부는 그러나, 이듬해 병마에 잡혀 1998년 벽두, 끝내 기세(棄世)함으로써 멈칫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나는 칼럼집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칼럼이란 발표 당시의 사회적 문맥과 워낙 밀착된 터라 시간의 채찍을 견디기 어려운 종류의 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칼럼은 사나워지기 쉬운 글이라 글쓴이의 내공에서 우러난 문자향(文字香)이 보통 솜씨로는 좀체 드러나기 어렵다. 그런데 그의 칼럼집은 나의 상식을 단박에 균열내었다. 자신의 눈에 투철하면서 독자에게도 동참의 여백을 남겨두는 그의 대화적 글쓰기의 독특한 형태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부드러웠던 그분의 인격과 한몸이 되어,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게 한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를 비롯한, 그와 교우를 맺었던 유수한 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듯이, 그는 필자들에 대한 ‘친구·편집자·교육가’였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자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세우는〔立人〕 일에 헌신한 터라, 정작 그가 남긴 글은 적다. 이 점에서 그를 필자로 발굴한 『시나노마이니찌심붕(信濃每日新聞)』의 편집자적 안목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그는 이 신문에 1989년 10월 21일부터 쓰러지기 직전인 1996년 6월 29일까지 매주 한 편의 칼럼을 연재했다). 그리하여 죽은 뒤에야 그가 일생을 봉직한 이와나미의 방대한 도서목록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추가했던 것이다(『同時代を見る眼』 1998). 비판적 안목과 따뜻한 마음씨를 단아한 문장으로 교직(交織)한 이 칼럼집을 읽어나가면서, 짧은 칼럼 한 편에도 혼신의 힘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의 마음의 끝자락을 감지하게 되는데, 거기서 일본 제일의 금박 직인(職人, 금박 기술자)의 가문에서 지성의 영역으로 이동한 일본 전통 장인의 숨결을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경이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은 그가 대단한 독서가라는 점이다. 이 칼럼들의 많은 부분이 자신의 방대한 독서 체험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더구나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더미 속에서도 독서인의 자세를 깨끗하게 지켜나간 점은 거의 감동적이다. 출판사에 관계하다 보면 원고 또는 책에 치이게 마련이라 독서다운 독서를 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그뿐인가. 현대의 지식인으로 행세하려면 엄청난 지식의 바다에 일용할 양식을 찾듯 의무적으로라도 한발을 담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일들을 감당하면서도 그 바깥에 오롯한 독서의 공간을 경건히 마련한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젊었을 때 읽은 책을 서가에서 꺼내 다시 읽는”다는 구절에 부딪혀 나는 잠시 요즘의 내 흐트러진 삶을 되돌아보았다. 일용적 독서의 와중에서도 간간이 회귀하여 자신의 삶을 가다듬을 자기만의 고전들을 갖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와같은 내면적 충실성이 그의 긴 운동의 생생한 바탕이었던 것이다.
그의 고전은 무엇인가? 뜻밖에도 그것은 『논어』를 비롯한 유가의 경전이다. “오늘 ‘격동의 시대’란, 즉 스스로를 돌아보는〔內省〕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을 근원에서 되돌아본다─그런 노력이 없다면 위기는 깊어갈 것이다.” 이 칼럼집을 관류하는 단 하나의 주제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데, 소련의 소멸과 미국식 소비문명의 범람과 일본 거품경제의 파탄이라는 위기 앞에서 그는 문득 자기로부터의 개혁으로 돌아간다. 이는 물론 은둔주의의 낡은 설교가 아니다. 20세기의 실패를 넘어설 새로운 길을 근본적인 마음자리에서 탐색하는 긴 혁명의 비로섬〔始〕을 반구저기(反求諸己)의 정신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궁구하는 이 정신이 자신의 고향 카나자와(金澤)를 아끼는 마음과 연결된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카나자와가 니시다 키따로오(西田幾太郞)를 비롯한 뛰어난 지식인들을 배출한 사실을 알게 되었거니와, 그런데 그것은 낮은 차원의 지방주의의 발로가 결코 아니다. 지방에 대한 그의 각별한 관심에는 메이지(明治) 이후 근대 일본의 중앙집권주의가 나라 안팎에서 저지른 과오에 대한 강한 비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의 향기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도시 카나자와는 이른바 ‘우라닛뽄’(裏日本), 즉 혼슈우(本州)의 서쪽 해안선 지역에 속한다. 일찍이 신라·발해와 교류하면서 일본의 문명적 젖줄의 하나였던 이 지역은 서구의 도착과 함께 격하되었으니, 그의 고향 사랑은 서구 및 그 모방자 ‘태평양 일본’에 대한 대안적 사고를 발양시켰던 것이다. 그가 태평양보다는 그의 고향바다 ‘동해’를 축으로 한반도·중국·러시아와 화해를 추구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한 것이 어찌 우연일까?
탈냉전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소통의 계기를 찾지 못하던 남북관계에 어떤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한국의 낙후한 정치구조를 개혁할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낙천·낙선운동이 일본에서도 발진했다는 즐거운 소식도 들려온다. 동아시아에 비둘기가 날아오르는가. 야스에 선생의 일갈이 귀에 쟁쟁하다. “잡지가 신문의 뒤를 따라가서는 안된다. 잡지가 보여주는 비전, 이념이 신문에 방향을 주도록 되어야 한다.”(36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