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권지예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1997년 『라쁠륨』으로 등단. 발표작품으로 「두 개의 꼭두각시 인형」 「상자 속의 푸른 칼」 「사라진 마녀」 「투우」 등이 있음. kjiye@hanmir.com

 

 

고요한 나날

 

 

삐용삐용삐용……

눈뜨자마자부터 벌써 세번째 듣는 소리입니다.

오늘은 석가탄신일입니다. 오늘같이 이렇게 비가 살풋 오는 휴일이면 앰뷸런스 소리가 더욱 극성을 떱니다.

사고 후 앰뷸런스에 실려 이곳 응급쎈터로 온 지 한달이란 시간이 흘러버렸군요. 아침을 꿈꾸지 않는 서른 번의 밤들이 흐른 거죠. 새날을 여는 아침은 내게 끔찍했거든요. 척추를 관통하며 사지로 뻗어나가는 저린 통증. 뒷목과 머리통을 짓누르는 무거운 압통. 눈을 뜨면 내 몸의 아픔은 나를 일깨워주었죠. 넌 나와 함께 여전히 살아 있어. 내 몸 구석구석을 점령한 악령 같은 고통이 잠들기 전까지 하루종일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붙을 걸 생각하면 아침에 눈뜨기가 싫었어요.

아침이면 휠체어를 타고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을 보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곤 했죠. 그러고는 익숙하지 않은 내 얼굴에 잠시 치를 떨었어요. 사고 당시에 찢어져 응급실에서 급히 꿰맨 왼쪽 뺨의 Z 모양의 깊은 상흔과 살점이 떨어져나간 콧마루. 주홍글자 A도 아닌 이 Z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곰곰 생각해보곤 합니다. 그리곤 양치컵에 가득 물을 받아 주머니 속의 동전지갑을 엽니다. 그 안엔 간호사가 아침마다 놓고 가는 하루치의 투약봉지에서 날마다 빼낸 입원일수만큼의 푸른색 잘덴이 들어 있죠. 그때 어김없이 바깥에서 병간을 맡은 어머니나 언니가 문을 두드립니다. 뭐 도와줄 거 없니? 난 그만 동전지갑을 닫아버립니다. 그러곤 다리의 깁스라도 풀어서 내 스스로 화장실 거동이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고통과의 결별을 유보하자고 마음먹곤 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오른쪽 다리의 깁스를 푸는 날입니다.

“조루야. 그래, 오늘 공구리한 거 내뻔지는겨? 어이구 션하겄네.”

용자씨가 나를 돌아보며 느려터지게 말문을 엽니다. 용자씨는 내 옆침대의 뇌수술을 받은 사십대 후반의 육덕 좋은 충청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별명은 ‘미륵부처’. 언젠가 그녀의 계모임 친구들인지 한떼의 여인네들이 고향에서 단체로 문병 와서 “머리 깎구 그러구 앉았으니 뚜껑 깨진 미륵부처가 따루 웂네!” 해서 병실 식구들이 한바탕 웃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고 참, 조로래니까! 쾌걸 조로도 몰러? 조루는 뭔 조루. 조루는 거시기 뭐이냐, 사내들 물총이 말 안 들을 때가 조루지. 그라고 공구린 뭔 공구리. 기부스!”

옥선씨가 톡 나서서 한마디 합니다. 그 소리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립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옥선씨의 부푼 눈자위가 붉습니다. 어젯밤 막내딸 때문에 또 속을 끓이며 몰래 울다 잠든 게 분명합니다. 여걸 조로(Zorro). 언젠가 병실의 누군가가 내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내 얼굴의 Z 모양의 흉터를 보고 말이죠.

옥선씨 역시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올라온 올해 마흔세살 된 여인입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통에 의치인 앞니 두 개가 빠지긴 했지만 병실을 나설 때는 립스틱을 바른다든가 삭발을 가리기 위해 장밋빛 베레모를 쓰는 등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죠. 그래서 그이를 ‘장밋빛 베레모’라 부르고 있지요. 비슷한 시기에 ‘미륵부처’와 함께 중환자실에서 올라왔지만 ‘장밋빛 베레모’는 머리회전이 빠르고 기억력이나 순발력에서 단연 뛰어나요. 재바른 성격 탓으로 우리 병실의 감초 격이죠. ‘미륵부처’는 중환자실에서 올라온 지 열흘이 넘어도 스스로 대소변도 못 가리는 처지였지만 말이죠. ‘장밋빛 베레모’는 깁스한 내가 화장실에라도 갈 것 같으면 재빠르게 휠체어를 대령해 내 보호자 역할까지도 톡톡히 하곤 했답니다.

그리고 조간테스트에서도 늘 만점을 맞곤 했지요. 조간테스트란 아침 회진 때 신경외과 과장이 뇌수술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는 간단한 구두시험 같은 건데, 늘 문제의 유형이 똑같아요.

“아줌마, 100에서 7을 빼면 얼마죠?” “지금 대통령이 누군지 말해봐요” 또는 “오늘이 며칠이에요?” “지금이 아침이에요, 밤이에요?” “오늘 아침 식사에 반찬이 뭐가 나왔어요?” 항상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그녀들의 보호자들은 눈뜨자마자 예상문제로 훈련시키는데, ‘미륵부처’는 평균 40점을 상회하는 정도거든요. 기껏 연습을 시켜도 93인 정답을 91이나 87로 대답하거나 굳이 대통령을 김영삼으로 우긴다거나 지금이 아침이 아니라 밤이라고 우겨서 모두를 김빠지게 한답니다.

그러나 ‘장밋빛 베레모’는 요지부동의 어떤 기억을 우기고 있답니다. 그럴 때마다 의사와 간호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나갑니다. 병원 밑에 저승으로 떠나는 흰 배가 있는데 흰 옷 입은 남자들이 사람들을 꽁꽁 묶어 저승으로 팔아서 넘긴다고 우깁니다. 자신도 그만 막내딸을 돈 백팔십을 받고는 배에 실어버렸다고 괴로워합니다. 어느날엔가는 무슨 일인가로 병실에 들어온 중환자실의 남자간호사를 보고는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그러더군요, “바로 저이여.”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웃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자 그 며칠 후엔 휠체어에 탄 저를 데리고 기어이 흰 배를 찾아내서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온 병원을 미친 듯 돌아다니곤 했답니다. “나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참다 못해 말했어요. 그런데 어제 아침 의사가 물었어요. “아줌마, 병원 밑에 흰 배가 와 있죠?” 그러니까 “으미, 제가 꿈을 꿨던 모양여요.” 그러며 결국 고개를 숙여버리더군요. 의사가 나가고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며 “이제 됐어요. 이제 퇴원하게 됐네.” 그러자 그녀는, “그럼 으쪄. 그렇게라도 생각혀야지. 그렇게라도 질끈 속고 살어야지. 쎄 빠지게 병원비 대는 애들 아부지를 봐서락도…… 그려, 그런 기억이 뭔 대수여. 난 이렇게 숨쉬고 살아 있는데…… 그러면 디?지.”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은 참 망연해 보였습니다.

“그 사고에 병신 안되기 만분 다행이라. 처음보다사 얼굴도 마이 좋아졌다. 그캐도 처음 볼 때사 처자가 얼굴이 저래 우얄꼬 싶던데……”

안동 할머니가 한마디 거듭니다.

‘장밋빛 베레모’ 옆침대에 계시는 당뇨합병증으로 오른쪽 발목을 절단한 칠순 할머니입니다. 안동에서 올라왔다는 살빛이 희고 기골이 장대한 이 할머니는 양반가의 종갓집 마나님의 풍모를 가졌습니다. 한동안 주무실 때 발이 아프다고 신음하셨어요. 발은 없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이 할머니의 별명이 뭔지 아세요? ‘각선미’랍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붕대를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보호자침대에서 아침잠을 즐기는 며느리를 깨워 붕대를 새로 감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바짝 맸다, 어째 이리 맵시가 없냐, 끝이 동그스름해야지 너무 뭉툭하지 않냐, 하며 타박을 하십니다. 절구공이처럼 뭉툭하게 잘린 살덩이를 놓고 아침부터 실랑이를 벌이지요. 그러면 며느리는 옛날 교련시간에 선생님 앞에서 붕대 감는 연습하듯 시어머니의 다리를 이리 싸매고 저리 싸매느라 진땀깨나 흘리지요. 그러면 할머니는 장갑에 손가락이 제대로 들어갔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확인하듯, 금방 붕대로 친친 싸맨 다리를 살살 돌려보거나, 힘차게 꺼떡꺼떡 들며 아침체조를 하십니다. 붕대 감은 그 뭉툭한 다리는 마치 거대한 누에 한마리가 고개를 들어 뽕잎을 따려는 포즈와 닮아 있답니다.

이 병실엔 나를 포함해 여섯명의 환자들이 있어요. 나머진 두명의 중풍환자입니다.

내 맞은편 침상엔 간병인이 딸린 중증의 중풍환자 할머니가 계신데, 말도 못하고 똥오줌까지 받아내는, 식물처럼 시들어가는 할머니죠. 분뇨냄새를 병실 가득 풍기는 통에 처음 한동안은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코가 많이 무뎌진 것 같아요. 이불을 걷어내고 기저귀를 갈아줄 때 어쩌다 세운 무릎 사이로 노인네의 치모 빠진 어두운 구멍이 보입니다.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흔적기관으로나 남은 그것이 노인네의 무표정한 눈동자처럼 처연해 보이기까지 해서 외면하곤 하지요.

또 한 사람은 ‘미륵부처’의 옆침대. 제가 몰래 붙인 별명입니다만, ‘경악하는 발레리나’가 살고 있답니다. 입원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니 병원에서 그야말로 살고 있는 거지요. 오십대의 아주머닌데 뇌일혈환자지요. 왜 발레리나냐구요? 그건 그녀가 발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걷기 때문이에요. 물론 혼자서 걷지는 못하고 누군가 부축을 해줘야 하지만, 그녀의 두 발끝은 발레리나의 발끝처럼 꼿꼿하기만 합니다. 풍을 맞는 순간 무척 놀랐는지 동그랗게 치켜뜬 눈도 인상적이지요.

“조로, 심심한데 구경이나 가볼까나? 응급실 현관 앞에 가믄 오늘 같은 날은 볼 만할 거인디. 휴일날 사고가 겁나게 많잖여.”

장밋빛 베레모를 쓴 옥선씨가 앞니 빠진 얼굴로 웃으며 휠체어를 대령해놓고 내게 말합니다. 옥선씨는 그러며 불안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봅니다. 옥선씨는 오늘 퇴원허가가 떨어져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어제부터 돈을 구하러 간 남편에게서 소식이 오지 않았어요. 그 조급증을 달래고 싶어 옥선씨는 쏘다니고 싶었던 거죠.

우리는 응급쎈터의 현관까지 내려갔는데, 마침 앰뷸런스가 들어왔어요. 차에서 내린 중년여인의 울음소리가 낭자했어요. 성질 급한 옥선씨가 휠체어를 놔둔 채로 쪼르르 달려갔다 옵니다.

“으미 시상에! 남자 땜이 빙초산을 처먹었나벼. 머리가 긴 처년디, 즈 엄마가 울고불고 난리여. 하이고 이 초냄새, 여기꺼지 진동허네.”

바람결에 시큼한 냄새가 실려오는 것도 같았어요.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생목숨을 끊어…… 글 안혀?”

나는 속으로만 조용히 대답합니다. 끊을 수 있지요.

그날…… 이 세상에서 당신과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생각이 나더군요. 그날은 봄빛이 눈부시게 화사한 날이었지요. 아파트를 나오면서 정원에 핀 목련 봉오리는 클라이맥스로 부풀어올라 있었고, 아파트단지 내의 벚나무의 꽃들도 팝콘처럼 모두 소생의 기쁨으로 펑펑 터져 있었어요.

나는 그날 옷장 문을 열고 무얼 입을까, 한참을 고르다가 소매 없는 분홍색 시폰 블라우스에 살구색 투피스를 골랐어요. 아직 철이 일렀지만 그날의 봄볕은 정말로 유난했기 때문에 선뜻 선택해버렸지요. 마침 이틀 후면 당신의 생일이어서 그날 당신과 우아하고 맛깔스러운 레스또랑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미리 축하를 해주고 싶었지요.

그날 좀 늦게 나타난 당신은 나더러 봄꽃보다 더 화사하다고 했어요. 만난 시각이 오후 네시였지만 날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당신은 즉흥적으로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했지요. 시내의 호텔에서 식사를 하기엔 시간이 애매했기에 나도 흔쾌히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구요.

우리는 강화도로 향했지요. 당신이 한적한 바닷가를 안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도착할 때쯤엔 고즈넉한 낙조가 한창일 거라구요. 강화도 가는 길의 길섶에 핀 벚꽃. 농가의 뜨락에 핀 살구꽃, 먼산을 핑크빛으로 물들인 진달래. 비낀 저녁 햇살 속으로 바람이 부는지 벚꽃 잎들이 호르르 날리기도 하는 길을 우리는 달렸습니다. 당신은 CD플레이어에 앙드레 가뇽의 피아노곡을 걸었고 차창을 조금 열어 담배를 피웠어요. 사위어가는 봄날 하오의 햇빛 속에서 그 길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마치 천국으로 빠져들고 있는 듯했답니다. 난 눈을 감았지요. 그러자 잠시 스틱에서 손을 놓은 당신의 따뜻하고 축축한 오른손이 내 왼뺨을 살짝 어루만져주었죠.

「조용한 날들」이 잔잔하게 흘러나왔어요. 그 곡을 들으면 당신과 처음 쎅스하던 날이 떠올라요. 언젠가 당신이 툭 뱉었던 말.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만나서 러브호텔이란 델 가서 처음으로 함께 쎅스를 나누기 직전이었죠.

─견딜 수가 없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여 있는 일상이. 이 고요하고도 조용한 나날들이.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썩어가는 웅덩이 같은 내 인생이……

난 그 말이 특별히 불행을 겪어보지 못한 남자의, 더군다나 인생의 반환 점을 이제 막 돌아 지나온 길의 궤적과 비슷한 여생을 살아가야 할 남자의 상투적인 투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날 난 찻집을 나와 바로 옆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나 나올 법한 마법의 성처럼 생긴 모텔로 앞서서 걸어 들어갔잖아요. 당신의 놀라고 어색해하는 표정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당신은 곧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쫓아왔지요. 당신의 인생에 연민을 느낀 건 결코 아니었어요. 상관없는 일이죠. 당신의 인생이 웅덩이든, 강물이든, 바다든. 하지만 나야말로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었던 돌멩이였죠. 고요한 수면을 경쾌하게 휘젓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방향 잃은 짱돌이 바로 나였다구요. 당신의 웅덩이에 내 몸을 날려버리고 싶었던 거죠. 난 너무나 고요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에 못 견뎌하는 사람들의 원심력을 알아요. 일상의 구심력이 완강할수록 터져버릴 것 같은 폭발력을 말이죠.

외포리를 거쳐 한적한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작은 포구 같았어요. 당신은 포장되지 않은 왼쪽 길로 차를 몰았습니다. 차가 다니기에는 너무도 비좁은 방죽길을 따라가니 한쪽에 습지가 나타나고 갈대밭이 펼쳐지더군요. 우리는 차가 갈 수 있는 끝까지 가서 캔맥주 하나씩을 나눠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파도는 잔잔했지만 갈대들은 심하게 몸을 뒤척이며 몸부림치고 있었어요. 당신은 왠지 할말을 잃고 노을이 번져가는 하늘과 연회색빛 바다만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러더니 말했지요.

─바다를 보면 끌어당기는 힘, 중력이 생각나. 어릴 때 지구본을 가지고 놀며 무척 신기해했지. 지구는 둥글고 또 돌고 있는데 왜 바닷물은 넘치지 않을까. 그런데 말야, 저 파도는 끊임없이 솟았다 꺼졌다 하지만 결국 인력의 힘에 복종하지. 기껏 성난 듯 솟구쳐봤자 잠깐일 뿐이야. 모든 것에는 정해진 궤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운명이 있구. 난 가끔 어쩔 수 없는 기분이 들곤 할 때 바다에 오곤 했지. 나 자신을 달래고 승복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말이야.

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조심스레 물었지요.

─일은 무슨 일…… 어제, 개를 안락사시켰어.

아하, 당신이 우울한 이유를 나는 그때 알았지요. 누구에게나 그런 게 있겠지만 당신에게 개는 특별한 존재 같았어요. 당신의 개, 그러니까 이름이 스노우라고 했던가요. 여덟살 된 캐나다산 래브라도 리트리버 암컷. 당신은 가끔 스노우 이야기를 했어요. 그 개가 얼마나 충직하고 영리한지에 대해. 또 당신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동반자라고. 당신은 늘 새벽 여섯시면 일어나 스노우와 산책을 한다고 했지요. 언젠가는 그 개가 병을 앓고 있다는 얘기도 언뜻 들었던 것 같은데……

당신은 언젠가 그랬어요.

당신의 아내가 6년 만에 몹시도 힘들게 가진 아이가 5개월 만에 자연유산이 되어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구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땐 막 수술을 끝내고 나오는 의사의 손에 과일주를 담그는 데나 쓰일 것 같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구요.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다섯달을 살았고 죽어서는 병속에 들어갔던 건데, 당신은 뱃속에 있던 다섯달 된 태아가 그토록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것에 경악을 했다구요. 당신은 그랬어요. 병속에서 마치 불멸의 양수에 잠겼다 언젠가는 깨어나게 될 것 같은 환상에 몸을 떨었다구요. 당신도 죽고 당신의 아내도 죽어 없어진 먼 미래에 말이지요. 그리고 창밖을 보았을 때, 거리에는 소리없이 첫눈이 내렸다지요.

그후로 당신의 아내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고, 당신은 눈빛 영롱한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게 되었는데, 당신은 개를 보자마자 그만 ‘스노우’라고 입안에서 굴러나온 단어를 그에게 붙였다지요. 그 개는 당신에게 혈육과 같은 존재였던 거지요.

그런 걸 떠올려보자니 나 역시 가슴이 먹먹해지긴 했습니다. 세상 인연의 신비로움 때문에 말이지요. 사람과 사람은 물론이고 사람과 짐승 사이의 인연도 무엇이기에 정을 끊지 못해 힘들어하나. 바로 그때 당신이야 이유를 몰랐겠지만, 내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고 목구멍에서 어떤 말이 내 입으로 솟구쳐 올라오려고 했는데요. 그 순간 갑자기 당신의 혀가 내 입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앰뷸런스가 어째 안 들어오네. 이제 물리치료 받으러 가야제?”

옥선씨는 휠체어를 돌립니다.

물리치료실 앞 벤치에는 소라 엄마가 붉은 눈으로 앉아 소라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물리치료실에서 며칠 전부터 자지러지게 우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어린것이 얼마나 처절하게 울던지요. 그러다 보았어요. 커튼이 열린 칸막이 치료실에서 갓난아기와 젊은 엄마, 물리치료사 이렇게 세 사람이 용을 쓰고 있는 모습을. 침대 밑으로 아기의 머리를 내려오게 하고서 물리치료사는 반복적으로 아이의 목을 힘주어 비틀어 빼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기는 숨이 넘어가고, 아기의 몸을 붙든 엄마도 함께 울었어요. 바로 그 아이가 생후 두달 된 소라였어요.

선천성 사경(斜頸). 태어날 때부터 무슨 이유인지 목뼈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병이래요. 뼈가 여린 갓난아기 때부터 힘으로 비틀어 바로잡지 않으면 뒤틀린 소나무처럼 기형적으로 되어버린다는군요. 울고 있는 소라 엄마를 애써 외면하며 치료실로 들어갑니다.

하루에 두 번씩 치료를 받지만, 아직 나의 몸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 같습니다. 갑자기 몸속에 게릴라처럼 숨어 있는 고통들이 반격을 가합니다. 일탈된 근육이나 뼈, 연골, 인대 들이 아픔을 호소합니다. 치료실에는 ‘pain killer’라는 전기치료기가 있는데요. 담당 치료사인 강선생님에게 나는 물었어요.

“왜 ‘페인킬러’라면서 완전히 고통을 죽이지는 못하죠? 왜 고통들이 날마다 살아나지요?”

물리치료실의 강선생님이 그러더군요.

“물리치료는 원인을 제거하는 완전한 치료가 아니에요. 낫는다는 것은 고통에 서서히 익숙해진다는 거죠. 인간의 몸은 고통을 선별적으로 느껴요. 가장 강한 고통을 제일 먼저 느끼지요.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 단계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거죠. 그런 다음엔 그 다음 단계의…… 그러니 고통이 인간의 몸에서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니고 인간이 그 고통에 익숙해짐으로써 잊는 거지요.”

갑자기 물리치료실에서 자지러지는 아기의 울음소리와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경택이라고 남자아기가 사경 교정치료를 받으러 왔어요. 첫날이라 시끄러울 거예요. 좀 참으시고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자 갑자기 두려움과 불안으로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어요.

그날…… 당신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핏빛으로 물드는 수평선 쪽을 한참 바라보더니 차를 출발시켰어요. 당신의 옆얼굴, 특히나 단정하게 다문 입매를 좋아한 나였지만, 그날따라 당신의 입술은 굳게 봉인된 편지봉투마냥 알 수 없는 침묵으로 완강해 보이기까지 하더군요. 서울로 다시 되짚어오는 도중에 분무기로 뿌리는 듯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애써 핀 꽃들이 다 지겠다.

당신이 그렇게 말했어요.

─꽃이 지는 게 대수예요? 이 비 그치면 더 싱그런 잎이 돋을 텐데요.

내가 말했구요.

─인연 중에 봄꽃과 잎새 같은 인연은 참 슬플 거야. 꽃이 져야 잎이 나는…… 서로 만날 수가 없잖아.

마치 그날 당신의 그 말은 잠언처럼 들렸지요. 아니, 그건 운명에 대한 예언이었던가요. 당신은 비 젖은 봄꽃처럼 가버렸지만 내 뱃속엔 당신이 지면서 남긴 여린 떡잎이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날, 당신과 붉은 와인을 한잔씩 나누면서 아기의 잉태에 대해 귀띔을 하려 했지요. 당신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조심스럽긴 했지만요. 사랑하는 남자의 아기를 잉태한 그 사실만은 여인에게 있어 분명 행복한 일이죠.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그날, 어쩌면 와인을 마시기 전에도 당신의 표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기회를 놓쳤어요. 강화 바다에서 당신이 스노우를 안락사시켰다고 말하며 우울해할 때, 나는 고백하려 했었지요. 당신이 그때 내게 키스하지만 않았다면, 스노우를 잃은 그 가슴자리로 당신의 아이가 가까운 미래에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어요. 그러나 내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들을 당신의 혀가 먹어버렸지요. 영원히 말이죠.

아기는 아직까지 무사하답니다. 그러나 의사는 좀 조심스런 반응을 보입니다. 아기가 용케 생명을 잃지 않은 것도 기적이지만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 또한 앞으로 있어야 할 기적이라구요.

나는 어쩌면 무모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기를 지우지 않겠다는 고집 말이에요. 한데 요즈음 난 불안한가봐요. 자주 꿈을 꿉니다. 꿈속의 내가 슈퍼에 갑니다. 꿈속에서도 입덧 때문에 몹시 고생을 하는지 슈퍼의 식료품 코너에서 입맛 당기는 음식을 고릅니다. 저장식품 코너에서 병속에 든 황도복숭아가 눈길을 끕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건 복숭아가 아니라 태아의 모습입니다. 마치 아기는 진공상태로 저장된 황도복숭아처럼 흐물거립니다. 나는 꿈속에서 아악, 비명을 지르지만 소리를 낼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가위에 눌린 거죠.

당신과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이 떠오르는군요.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요. 하지만 난 당신의 그 마지막 모습에서 나와 아기의 삶의 열쇠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차는 이슬비에 젖어 번들대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지요. 내가 당신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어요.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넌 날 만날 때마다 늘 마지막으로 생각한다며?

─집착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내 자신에게 늘 그렇게 주술을 걸었을 뿐이죠.

─생각나니? 네번짼가…… 모텔에 들었던 날,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지? 그랬더니 니가 뭐라 그랬지? 미안해할 거 없어요. 사랑에도 다 타고난 운명이 있는 거예요. 우리들 사랑도 인간처럼 생로병사를 자연스레 겪게 놔둬요. 인력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녜요. 그렇게 말하는 니가 놀라웠다. 자유롭고도 강한 느낌. 어쩌면 그래서 더욱 널 사랑했는지도 몰라.

─후회하세요?

─아니. 그래도 너에게 항상 미안해……

─뭐가요? 난 아무 욕심 안 부리잖아요. 늘 얘기했죠? 내가 싫어지면 암말 없이 떠나도 난 괜찮다구요.

─떠난다고 꼭 싫어진 건 아닐 거야.

─뭐 그런 거 따지지 말자구요, 비겁하게. 우리가 왜 서로를 이토록이나 끌어당기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요? 좀 더 빨리 밟을 순 없나요? 내가 오늘 근사한 데 저녁식사 예약을 해놨거든요.

─나 키워서 잡아먹을 일 있니?

우리는 맥빠지게 웃었죠. 당신과 내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한 대화예요. 사고 이후 나는 이 대화를 여러번 꺼내어 곱씹어보곤 했지요.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우린 어쩌면 그날 밤 호텔 레스또랑에서 퓨전요리를 음미했을 것이고, 기분 좋은 취기에 젖어 객실로 올라갔겠지요. 내 몸을 구석구석 아는 당신은 솜씨 좋은 횟집 주방장처럼, 또는 기교가 뛰어난 연주자처럼 나를 다뤘겠지요. 내 뼈는 당신의 손길이 닿은 곳마다 현악기처럼 울면서, 또 내 살은 켜켜이 쾌락으로 저며졌겠지요.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오로지 쎅스의 목적인 양 당신은 늘 묻곤 했지요. 행복해?

물론 난 행복했지요. 늘 마음속으론 이 쎅스가 마지막이야,라고 생각하니까 언제나 절절하지요. 항상 목이 메면서도 이 남자에게 더이상 욕심을 내선 안돼,라고 다짐했죠. 그런데 아이를 가진 걸 알고부터는 혼란에 빠져버렸어요. 당신이 내게 더 집착을 하게 될지 아니면 내게서 도망을 가게 될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우리 앞의 시야가 불빛으로 환해지는 것도 잠시, 우리는 곧 블랙홀로 빠져버렸지요.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이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뛰어든 것이지요. 짧았던 것도 같고 영원처럼 긴 것도 같은 시간이 흘렀어요. 내가 잠깐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은 머리를 좌석 머리받이에 기대어놓고 가쁜 숨을 쉬고 있었어요. 당신을,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에 피범벅이 된 당신을 난 온 힘을 짜내어 불러보았지요. 내 입에서도 어디서 흘러든 것인지 비릿한 피맛이 났지요. 대답도 않던 당신은 내가 세번째로 불렀을 때에야 고개를 내 쪽으로 겨우 돌리더군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저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죠. 나는 한없는 슬픔을 간직하고서 피안의 세계를 직감하고 숙명에 체념한 당신의 안타까운 두 눈을 마주 보았어요. 당신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붉은 눈물처럼 눈 밑을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그때 당신은 피묻은 손을 아주 조금씩 움직여 내 손을 찾았지요.

오랫동안 피흘리는 손으로 맞잡은 우리들의 마지막 악수를 잊지 못할 거예요. 당신의 손은 아주 차고 축축했어요. 당신은 내 손을 잡은 손에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지요. 당신의 힘이 내 손에 전해지는 그 느낌은 뭐라고 할까요,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게로 이어주고 넘겨주는 마지막 의식처럼 느껴진 거예요. 당신은 내 눈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어요. 그 마지막 당신 몸의 표현, 난 당신의 생명을 건 메씨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난 행복했어요. 앰뷸런스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나는 의식을 잃었죠.

하지만 그후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듣고는 내가 어땠을까요. 살아남은 자의 형벌 말입니다. 당신도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나는 오늘까지 하늘색 잘덴을 서른 알이나 모아두었답니다. 매일 밤 내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건 바로 그 이유입니다. 매일 투약봉지에서 그것만 빼서 모으고 있으니까요. 벗어나고 싶은 고통은, 몸의 고통이나 풀리지 않는 암호처럼 새겨진 얼굴의 상흔, 그런 것보다도 당신에 대한 질긴 기억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그 믿음입니다.

물리치료실에서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옥선씨는 지하 3층 버튼을 누릅니다. 건물의 맨 아래로 내려갑니다. 내려서는 이상한 기기들이 있는 방과 보일러실과 통제구역이 있는 복도를 정신없이 돌아칩니다.

“분명히 있어. 여기 어디로 나가면 배가 매어져 있다니께. 바다가 있단 말여.”

옥선씨의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또 그 소리. 정신 차리세요. 잘못 생각했다고 의사한테 인정했잖아요. 그리고 아줌마 딸은 작년에 교통사고로 죽었구요.”

“아녀, 내가 팔아먹은 거여. 의사한테야 병원비 땜이 그랬지. 또 수술하잘까봐. 돈이 무서워서. 아녀, 아녀. 남은 속여도 나는 못 속여. 이 머릿속에 딱 들러붙은 이 생각은 으짜구. 그럼 내가 못된 귀신이 씌었단 말여? 이렇게 날 속이고 살면 내가 아닌 거이지. 죽을 때꺼지 내가 아닌 거이지……”

나는 옥선씨의 팔을 잡아 흔들었어요.

“정신차리세요. 제발 잊을 건 잊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좀 그러세요. 왜 쓸데없는 생각에 아줌마 인생을 붙잡아둬요?”

옥선씨는 쭈그려앉아 울기 시작했어요.

“그려, 그려. 살어야지.”

그이의 어깨를 다독이다가 나야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요. 나는 무슨 미망에 기대어 이렇게 두 목숨을 지금까지 이어나가는 걸까. 혼란스러웠지요.

병실로 올라가니 뜻하지 않게 꽃바구니와 소포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세상에, 발신인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떨리는 손으로 포장지를 뜯으니 흰색 핸드폰이 나왔어요. 그건, 바로 내 것이었어요. 사고 후에 핸드백을 아무리 뒤져도 못 찾겠더니만. 그리고 필체를 짐작할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의 카드. 당신의 아내가 보낸 것이었어요.

“안녕하세요? 놀라셨죠? 이 카드를 보실 때면 전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타고 있을 겁니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사고난 날로부터 나흘 후엔 그이와 나란히 비행기에 타고 있었을 텐데요. 우린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었죠. 전 거기서 디자인 공부를 하려고 어드미션까지 받아놓은 상태였구요. 한달이 늦어지긴 했지만 전 훌훌 털고 떠나기로 결심했답니다. 그인 꼼꼼하게 출국준비를 했었죠. 물건과 가구도 진작에 처분하고 아끼던 개도 정을 떼려고 안락사를 시켰어요. 병들긴 했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인 꼭 죽음을 예감한 사람 같았어요.

그일 많이 사랑했죠? 그래서 많이 힘들 줄 알아요. 그인 사고후 만 하루 만에 편안하게 갔답니다. 그 사람을 기다리지 마세요. 이제 그이를 놓아줘요. 그래야 당신이 살아요. 그는 영원 속으로 사라졌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바로 여기 있구요. 그리고 당신은 살아야 하니까요. 정말로 빨리 일어서길 바래요. 참 당신의 핸드폰을 보냅니다. 차에 떨어져 있더군요.”

난 머리가 멍해졌어요. 당신이 이민을 준비했었다구요? 왜 당신은 나를 곧 떠날 거라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나요? 왜 저를 속인 거죠? 마지막 날, 당신의 굳은 표정과 침묵의 의미는 무엇이었나요.

나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비내리는 거리의 연등들이 함초롬히 젖고 있는 걸 말이죠.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보았습니다. 내 핸드폰 안엔 생전의 당신 육성이 일곱 개나 저장되어 있었어요. 문자메씨지도 네개나 그대로 남아 있었구요. 당신은 기계 속에서 숨소리조차 생생히 살아 있더군요. 그 옛날 당신의 아이처럼 죽은 당신의 목소리도 이 기계 안에 영원히 저장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는 하나씩 삭제 버튼을 꾹꾹 눌러버립니다.

오후엔 오른쪽 다리의 깁스를 풀었답니다. 한달여의 감금상태에서 벗어난 다리는 단무지처럼 쪼글쪼글 시들어 있더군요. 고치 같은 깁스 속에서 마치 새로 세상에 태어난 애벌레처럼 미약하기만 한 다리를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힘을 주고 움직여보려 했지만 먼산의 메아리가 돌아오듯 희미한 감각만이 저의 뇌신경으로 전달되는 것 같더군요. 첫돌을 넘기고 최초로 땅에 두 발을 디딘 이래 수십년 동안 저의 것이라 여겨왔던 다리. 제 존재의 집인 이 육체마저도 제 뜻에 따라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더군요. 하긴 이 세상에 오로지 제 것인 게 어디 있겠어요. 차차 좋아지겠지요. 돌배기 아이처럼 새로 걸음마 연습을 하면 근육에 힘이 올라 장딴지가 다시 풍선처럼 팽팽해지겠지요. 다시…… 다시 말입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 휠체어 대신 목발을 짚고 홀로 병실을 나서보았습니다. 복도 휴게실 쪽이 떠들썩했어요. 병실 남자들이 모여 팔씨름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담배를 피며 모여 있는 남자들이 소년들처럼 서로의 알통을 자랑하느라 법석을 떨더군요. 그런데 그중에 가끔 복도에서 만나곤 하던 옆병실의 남자도 끼여 있었답니다. 그도 팔을 들어올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요, 그는 왼편 팔꿈치 밑이 잘린 산재(産災)환자거든요. 흰 붕대로 감은, 남들보다 짧은 팔을 들어올리고 상박 근육을 대견스레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남자.

어쩌면 이런 광경들, 도대체 젊고 예쁜 다리도 아닌 뭉툭하게 잘린 다리에 대한 할머니의 집착이나 그 남자의 이런 모습이 어이없고 우스꽝스럽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순간 저는 ‘각선미’ 할머니나 그 남자…… 갑작스런 재앙으로 닥친 고통에 힘겨운 사람들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집착이라기보다는, 고통을 견디는 자들의 또다른 삶의 확인이라고 말이지요. 그들의 표정이 일상에 지친 사람들보다 더 어린애 같고 무구한 것에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말입니다.  인간은 결국 필연적인 것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운명애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목발에 조금 자신이 생겨 연못으로 혼자 나가보았어요. 가는 비가 뿌리고 있는 연못가엔 아무도 없었어요. 작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수많은 원을 겹쳐 그리고 있더군요. 바깥에 나와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이던지요. 그 사이에 계절은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어요. 그 화려하던 봄꽃들은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연못가의 개나리, 철쭉, 목련은 초록잎으로 무성하게 물이 올라 있어요. 연못의 물은 물이끼 때문인지 황록색으로 흐려져 있었는데, 연잎들이 군데군데 떠 있었어요.

난 뒤뚱뒤뚱 연못가를 한바퀴 돌았어요. 그리고 비오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힘없는 다리로 버티고 서서 기지개를 켜보았답니다. 연못은 고여 있지만 많은 것들을 품고 키우더군요. 비 때문에 연잎이 더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연잎 속에 숨었던 잉어가 흐린 물속으로 설핏 보이기도 하더군요.

환자복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작은 잔돌 같은 알약들이 손에 잡히더군요. 하나씩 연못에 던졌어요. 간혹 비단잉어들이 솟아올라 입질을 했어요. 그렇게 서른 알의 잘덴은 작은 돌멩이처럼 고요한 수면을 가볍게 휘젓고는 흔적 없이 사라졌답니다. 잉어들이 수면제를 먹으면 어찌될까요. 비오는 날 모이를 던지는 사람도 없는 한적한 연못 속의 비단잉어들은 우산 같은 연잎 속에 숨어 한바탕 곤하게 낮잠을 잘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꿈을 꿀지도 모르죠. 나쁜 꿈을 꿀까요?

삐용삐용삐용……

앰뷸런스 소리가 들려옵니다.

산다는 것은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인가봐요. 불행이든 고통이든 말이지요. 어떤 호르몬의 화학작용인지는 몰라도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나 불행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아닐는지요. 그러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란 없을 거예요. 천진하게 잠든 이 병자들을 보세요. 어둠 속에서 병자들과 간병인들의 숨소리가 풀무질하는 소리처럼 시끄럽네요. 누군가가 물방귀 뀌는 소리, 깊은 잠에 맥을 놓은 가느다란 신음소리, 모두가 곤히 잠든 모양입니다. 지금 시각이 몇시나 되었을까요. 자정을 넘겼는지도 모르겠군요.

아 그런데 이게 뭘까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누군가 제 머리채를 확 낚아챕니다.

“저, 저, 저 수달 좀 잡어!”

뭐야, 뭐야. 사람들이 모두 부스럭거리며 일어납니다. 옆침대의 ‘미륵부처’가 내 침대에 엎어져 있습니다. 그이의 남편이 달려와 등판을 철썩 때리며 침대로 그이를 옮깁니다.

“이 화상아, 수달 같은 소리 말어. 꿈을 꾼겨, 헛거를 본겨? 아, 정신 못 차리남! 뚜껑을 또 한번 열텨?”

“아 시커먼 수달이 일루 휙 지나갔다니께.”

푸우, 헛웃음을 웃거나 군시렁대거나 입맛을 다시며 사람들이 다시 잠을 청합니다. 병실이 다시 조용해집니다.

아아 이제 나도 좀 자야겠어요. 언젠가는 말이죠, 이런 일들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죠. 당신을 비겁하다고 원망하지도 않겠어요. 장밋빛 베레모의 말처럼 기억이 뭔 대수겠어요. 그래요.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