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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대학, 다양한 욕망의 출구를 찾아서

 

 

임찬종 任粲鍾

서울대 사회학과 2학년. cj-yim@hanmail.net

 

 

1. 나는 2000년에 대학에 입학했으니, 90년대에 대학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했으며, 90년대 대학사회의 위기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목격할 수 없었다. 단지 전설처럼 전해지는 80년대의 무용담과, 냉소적이거나 지나치게 격앙된 상태에서 쏟아지는 90년대에 대한 비판과 자조만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고시학원, 고급노동자 생산공장, 신분상승을 위한 각축장,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변해버린 대학이라는 푸념들……

그렇지만, 80년대도 90년대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에게도 2000년의 대학은 황폐했다. 사회적 모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집회나 시위에 나가면 매번 비슷한 얼굴들만이 초라한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에는 명백한 모순과 초라한 저항이 존재했지만, 또 한편에서는 모순의 피라미드 상층에 서려는 사람들이 도서관과 고시원을 가득 메웠다. 강의를 선택하는 기준은 커리큘럼의 질이나 교수의 명성이 아니라, 학점을 얼마나 쉽게 딸 수 있느냐였다. 이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실천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과 실천을 이어가고자 애쓰는 사람들도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명확한 전망이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토론을 하다보면 문제가 있다는 것만 확실할 뿐, 누구도 그 너머를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2. 떠나간 사람들은 대중문화(자본주의 지배논리의 외피인 대중적 삶의 양식) 속에서 살고 있었다. 2000년 4월 30일 노동절 전야제 때, 고려대 교문 앞에서는 시위대가 전경과 대치하고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개그콘써트」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5월의 서울대 축제 때는 서울대 시설관리노동조합이 파업을 하고 있었지만,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주최한 ‘재미있는’ 축제의 펌프 경연대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비난하기는 쉽다. 왜 너는 집회에 참가하지 않고 「개그콘써트」를 보았냐? 왜 너는 시설관리노동조합이 파업하는 와중에 펌프를 하고 있었냐? 이처럼 그들 하나하나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식의 비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이 대중문화 속에서 살게 된 이유와 대중문화 속에서 그들이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냉정하게 따져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을 신세대의 다양한 문화적 기호와 민주주의적 감수성에 전통적 조직들이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현상은 새로운 조직과 연대에 대한 실험이 행해지는 긍정적인 예들이라고 본다.

이같은 분석에는 경청할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운동’의 장을 떠나 대중문화 속으로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그중 한가지는 운동의 장에서는 실현 불가능했던 여러 욕망들이 대중문화 속에서는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운동은 독재에 대한 저항이나 자본에 대한 적대와 같은 형태로 종합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다양하고 미시적인 욕망들이 충분히 드러날 수 없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두드러지게 실현되는 유머, 화려함, 세련됨, 안락함 등은 운동의 장 속에서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치부되거나, 때로는 운동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주변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3. 그러나 과연 대중문화가 대중들의 욕망을 해방시킨 것일까? 우리는 대중문화 속에서 자유로운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학점따기에 목숨을 걸고, 고시원·도서관을 가득 메우며, 영어학원과 컴퓨터학원에서 웅성거리는 대학생들이 자유롭다고?

오히려 대중문화는 욕망을 새로운 방식으로 관리하는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그것을 처음으로 강렬하게 시사받은 것은 학사관리엄정화방안 철폐투쟁 때였다. 2000년 가을 서울대학교는 학사관리를 다른 대학교들 수준으로 ‘엄정화’하려고 시도했다. 그 골자는 학사경고 4회 누적시 영구 제적하고 상대평가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엄정화방안 철폐를 외치며 저항했다. 이에 저항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그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대학교육의 목적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즉, 이제 대학교육은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한 고급 기능인력을 양성하는 공정이라고 인식하고, 엄정화방안은 교육과정의 이러한 성격을 강화하는 규율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호응 부족에 투쟁의 방법과 수위를 놓고 내분까지 겹쳐 투쟁은 지리멸렬하게 막을 내렸다. 물론 투쟁의 결과로 99학번 제적자들을 구제하고, 학사경고를 받는 학점을 2.0에서 1.7로 내리는 등의 몇가지 타협안을 얻기는 했다.

투쟁이 실패로 돌아간 기술적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투쟁방식에 대한 막연한 반감, 학생회선거와 기말고사 기간이 끼여 있었다는 시기적 어려움 등. 그러나 핵심은 무엇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이 투쟁이 자신과 관련없는 것으로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많은 학생들은 ‘학사경고 4회 누적시 제적’이나 ‘상대평가’라는 조항이 조금 불편한 것이긴 해도, 이로 인해 피해볼 사람은 공부를 안하는 게으른 학생들일 터이므로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들은 학점에 옥죄어 살아가고, 더 높은 토익점수, 더 많은 자격증을 따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무관심의 이유는, 첫째로 저항의 측면에서 보면, 이들에게는 반란의 가능성을 제시할 힘의 원천인 새로운 대안(학사관리엄정화방안과 다른 방식의 학사관리 방법, 학점에 목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발현해도 ‘먹고살 수’ 있는 방법 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지배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여러 욕망은 지배의 논리(예를 들면 높은 학점, 높은 토익점수, 많은 자격증 취득과 같은, 학사관리엄정화방안이 권장하거나 강제하는 유형의 삶)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다양하고 미시적인 욕망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학사관리엄정화방안 등에 의한 강제, 혹은 졸업 후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학점을 잘 따거나, 토익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사법고시를 보거나, 자격증을 많이 취득하는 등의 방식으로 욕망을 이루어나갈 수밖에 없다. 이는 욕망을 억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욕망을 특정한 형태로만 실현되게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 속에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질주하는 과정은 경쟁과 배제의 연속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욕망이 더 많이 봉쇄되는 하층으로 떨어지게 된다. 또, 욕망이 대중문화 속으로 포섭되는 과정은 자본의 장 속에서 기능하게 통합되는 종합의 과정이고, 그렇지 않은 욕망들은 배제되고 추려지는 조작의 과정이라는 점도 문제다. 예를 들어 순수하게 직접 연주를 하고 싶다는 욕망,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 취직에 도움이 안되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 들은 강제되는 경쟁의 규율에 의해 배제되고 억압당한다. 이러한 욕망들은 거대자본이 생산하는 음악·영화를 소비하는 욕망으로 재구성되어야 하며(몇몇은 자본증식에 도움이 되는 상업적인 음악이나 영화를 생산하도록 재구성된다), ‘경쟁력 있는 학문’을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만일 저항의 가능성, 새로운 욕망 실현의 가능성, 새로운 삶의 형태의 가능성이 뚜렷할 경우, 강제되는 대중문화에 대한 다양한 반란이 펼쳐질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가능성은 희미하기만 하다.

 

4. 그렇다면 새로운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어떻게 해야 떠나간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올 수 있을까? 새로운 대안,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정과 저항뿐 아니라 긍정과 창조의 관점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정과 저항을 위한 실질적인 힘 자체가 긍정과 창조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앞의 학사관리엄정화 반대투쟁의 예를 들자면,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단지 ‘반대’라는 부정으로 종합하기에만 열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높은 학점을 따는 삶’에 포섭되어 있는 학생들의 다양한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학사관리엄정화를 반대해야 하는 논리적(혹은 도덕적) 이유를 들어 설득하고, 모든 것을 저항으로 종합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학사관리엄정화방안 반대가 아니라 그 대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대중문화에 포섭되지 않은 형태로 학생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했다. 학생들의 성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대학이란 공간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 이런 문제들이 대중적이고 민주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 했다. (사실 이런 논의의 공간은 상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욕망들을 은밀하게 실현하던 여러가지 흐름들이 서로 결합되어 힘을 창출할 수 있었을 텐데, 욕망이 실현되는 해방구, 그 은밀한 흐름은 너무 미미했다.

결국 대중문화가 싫다면, 자본주의가 혐오스럽다면, 그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저항을 위한 총체적인 전략과 대안이 주어져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현실의 모순에서 출발해서, 현실의 모순을 벗어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그리는 영화를 손수 만드는 일일 수도 있고, 노동해방을 꿈꾸는 노동운동일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과 관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 공부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학회운동의 새로운 흐름이라든지 대안영화 만들기 공동체, 순수인문학 공부 모임 등 새로운 동아리들이 늘어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리고 다양한 국면에서 시도되는 이같은 노력들이 결합되고 확산될 때, 흩어진 사람들은 어느새 다시 같은 길에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