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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3cm의 사회학
안창현 安昶賢
『한겨레』 교육공동체부 기자. blue@hani.co.kr
1. 세기의 전환기에 우리 청소년들이 단발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00년 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유교적 세계관과 민족적 자존심으로 단발령에 저항했다면, 청소년들은 ‘인권’이라는 근대적 가치관에 기대고 있다. 이제는 잦아들었지만, 3cm라는 마지노선을 지키려는 어른과 그 선을 넘겠다는 청소년들의 다툼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한국사회의 여러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사실 과거에도 두발규제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은 꾸준히 있었다. 1980년대 교복자율화 시절 필자가 다니던 서울 ㅅ고등학교에서는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며 일군의 학생들이 교실 유리창을 한꺼번에 깨뜨리는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시위를 주도한 몇 학생이 처벌받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다른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세상을 달궜던 두발자율화 요구는 그렇게 ‘즉흥적인’ 저항은 아니었다. 뚜렷한 논거를 바탕으로 조직을 갖춰 대중 설득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예전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
이들의 요구가 사회운동으로 자리잡는 데는 먼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 큰 몫을 했다.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요구와 여론을 묶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매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매체 속에서 동료를 찾아 조직을 만들 수 있고, 집단적 토론과정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이러한 인터넷의 매체적 기능을 십분 이용했다. 청소년들은 먼저 아이두(www.idoo.net)와 같은 청소년 커뮤니티 싸이트에서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운동으로까지 돌출된 것이 두발문제이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두발자율화운동은 상당히 다른 형태로 진행됐을 것이다. 아니 80년대처럼 잠복해 있었을 수도 있다.
운동전술도 인터넷을 주로 이용했다. 십대들이 운영하는 두발제한 반대서명운동 홈페이지(http://www.mywith.net)가 그것이다. 올해 1월 들어 서명자는 16만명을 넘어섰다. 이 숫자가 모든 언론과 교육당국을 놀라게 했고,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지난해 10월 교육부는 지침을 내려 학교마다 토론회를 열고 학교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규칙을 정해 지키도록 했다.
이처럼 싸이버공간을 활용한다는 점은, 새로운 세대의 특질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시민들에게 선전물을 나눠주며 서명가판대를 운영하던 80년대와 분명 달라졌다. 1999년 씨애틀 시위를 비롯해 최근 다보스 포럼에서 오프라인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터넷 네트워크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2. 두발자율화요구 논쟁이 달궈지면서 신문과 방송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그 논쟁의 장에서 청소년들은 서태지식 빨간 머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외쳤다.
“두발 제한의 부당성은 그것이 명백한 인권 침해라는 것이다. 헌법은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으며, 유엔이 제정하고 우리나라도 가입한 ‘아동·청소년 권리조약’도 마찬가지다. 두발은 엄연한 신체의 일부이며, 타인에 의해 침해받아서는 안된다.”(육이은 「따져봅시다」, 『한겨레』 2000.10.11)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의 이와같은 말은 민주적 소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쉽게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인권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구성원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일까.
서울 양천구 목동, 중산층 주거지역이라 학부모들의 교육열도 높다. 이 지역 ㅇ중학교 김아무개 교사도 요즘 십대들이 달라졌다는 데 동의한다. 국어시간 토론을 벌여보면 자기주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교사는 그게 ‘반쪽짜리’로 느껴진다고 한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생활적인 예를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 성적에 관계되지 않은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전체 청소시간에 빠지고도 같은 반 친구들에게 미안해하지도 않는 아이들이 25% 정도 되니까요. 칠판 정리하는 주번활동도 안하려고 하고요. 이런 아이들이 두발자유를 요구하면 ‘네 할 일이나 제대로 하고 말해라’ 해주고 싶습니다.”
이런 교사들이 지적하는 것은 십대 권리의식의 미숙함이다. 권리에 따른 책임의식이나 연대의식이 부족해, 자기 것은 끝까지 챙기면서도 남은 배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 십대들은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에 항상 받고만 자란 세대이다. 그러다보니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요구는 강하기 마련이다. 이런 자기주장이 ‘교과서에 나오는’ 권리의식으로 전환했을 때 의무와 연대 없는 반쪽짜리 권리의식이 된다.
현재 두발규제 반대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청소년운동은 다음 단계로 올바른 학칙개정운동을 시작했다. 전국중고등학생연합과 인권운동사랑방은 올해 5월까지 ‘인권을 찾자, 교칙을 찾자’라는 이름의 캠페인을 벌이고 반인권적인 학칙을 분석한 뒤 공청회 등을 거쳐 ‘민주교칙’을 만들어 일선 학교에 권장한다고 밝혔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제대로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한다고 한다. 성적순에 따라 사람을 대접하는 풍토와 입시위주 교육과정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요구들 속에 예컨대 장애청소년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은 찾을 수 없다. 특히 같은 청소년으로서 인권침해가 심각한 근로청소년들에 대한 연대의식은 아주 부족해 보인다. 실제 지난해 12월 서울기독청년회에서 3833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32.1%가 아르바이트의 문제점으로 인권침해를 꼽았다. 편의점·주유소 등에서 일하는 청소년의 82.3%가 업주들한테 체벌을 받고 있다는 국무총리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 조사결과도 있다. 십대들의 권리의식이 자신과 함께 남의 권리에도 관심을 갖는 좀더 성숙한 권리의식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일부 교사들의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3. 두발자유화 논쟁이 뜨거울 무렵 한 고등학교 교감은 “학생들은 어려서 도덕적 판단력이 부족하고 사회경험이 없어 권리행사도 제한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는 제한과 통제 쪽에 서 있는 진영의 인식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머리 길이로 청소년을 구분하지 않으면 그들의 탈선을 막을 수 없다는 ‘실용주의’와는 궤가 다른 말이다.
이에 맞서 청소년들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을 행동으로 증명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인권캠페인을 벌였다.
물론 ‘청소년이 권리행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이론적 연구의 대상이 돼야 할 것으로 보이는 이 문제가 전혀 이론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해 10월 한 방송사에서 방영된 토론회에서 벌어진 교사와 학생들의 논전이 한 예가 될 듯하다. 당시 일부 성인 토론자들은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기보다는 ‘건방진’ 십대들에게 불쾌감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십대의 인권은 유보돼야 할 것으로 주장하는 쪽이니 십대들과 같은 수준에서 토론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라면 최소한 일관성은 갖추고 있다.
이런 ‘보수진영’의 태도는 생산적인 토론을 가로막았고, 소통의 단절을 가져왔다. 두발문제를 둘러싸고 어른들이 십대들을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를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당사자가 토론에 참여하지도 못한다. 당연히 평등한 토론은 없고, 요행히 다른 소통수단이 발견되지 않으면 단절과 힘겨루기만이 남는다.
사회적 약자들을 토론상대자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참여의 길을 열어줄 때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정글에 살지만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성숙도는 소통의 가능성에 있다.
4. 두발자율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른들이 오해하는 대목이 있다. 제한을 없애면 모든 학생들이 장발족에 현란한 염색으로 ‘난장판’이 될 것이라는 걱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실제 고등학생들에게 교복자율화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면 의외로 교복을 입자는 학생들이 더 많다고 한다. 비록 교복을 변형해 힙합스타일로 늘리거나, 쫄바지로 줄여 입는 학생이 많지만 교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복이 편하고, 학생으로서의 품위를 표시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우기도 한다.
두발문제에 있어서도 학생들은 ‘완전한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한도를 정하자는 쪽이 더 많다고 현장 교사들은 전한다. 청소년 웹 연대 ‘위드’(with) 박준표 대표(한국외국어대2)의 말은 이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두발규제 반대운동은 단순히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염색을 허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학생·교사·학부모 등이 대화를 통해 머리카락 길이 기준을 정하고 이를 지키는 민주적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일시적인 부작용이 있더라도 학생들의 판단력과 책임에 맡겨 자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교육을 순종적인 인간을 기르기 위한 통제와 훈육으로 생각하지 않는 교사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다. 전국국어교사모임 대표 김주환 교사는 “물론 중고생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이는 수직적 위계질서가 엄격한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지시와 명령만 받은 탓”이라며 “학생회를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논의하는 민주주의 훈련을 쌓는다면 점차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해결 과정의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 새로운 의미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사실 많은 교사들은 이러한 참여교육이 현재 위기를 맞은 학교교육을 되살릴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있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더이상 학생들의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인터넷 등 다매체의 시대와 획일성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사회에서 학생 참여가 없는 일방적 ‘칠판 수업’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7차 교육과정에서 더욱 강조되는 체험학습, 모둠학습, 적성교육 모두가 이런 시대와 학생들의 변화에 맞춰 교육이 쫓아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학교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부족해 보인다. 교육부 방침에 따라 두발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학교별로 열었다지만, 많은 학생들은 그 토론회가 부적절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대부분의 토론회가 교사와 학부모들의 일방적인 교화의 장이 됐다는 것이다. 역시 갈 길이 아직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