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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와 현실, 그 고통으로서의 존재

정철훈 시집 『살고 싶은 아침』, 창작과비평사 2000

김승희 시집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민음사 2000

신대철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문학과지성사 2000

 

 

박영근 朴永根

시인. 시집으로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취업공고판 앞에서』 등이 있음.

 

 

1. 지금 우리 시들은 현실에 대한 지적 성찰을 거의 보여주고 있지 않거나, 이 세계를 살고 있는 구체적 인물로 자신들이 치렀을 고통을 애써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해진 시형식과 더 세련된 시언어라는 일견 긍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시들은 그것 자체에 매달려 있는 나머지 시가 의당 가져야 할 소통과 공감의 자리를 좁히고 있다. 한마디로 공유할 수 있는 현실이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의 변화가 아니라 문학이었다. 흔히 자본의 전면적 지배로 요약되는 새로운 현실에 거의 모든 시들이 압도되었으며, 자신의 시적 사유로 그 의미와 지형을 읽어내지 못했다. 패러디와 야유, 냉소와 비명이 있었을 뿐, 해체와 혼란으로서의 현실을 창조의 과정으로 끌어들이는 문학적 태도는 매우 드물었다. 우리 시에 자주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일상과 농경적 사유의 기이한 공존, 그리고 죽음과 허무의식의 과잉은 변화를 현실로 감당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현상일 것이다. ‘생태시’라고 분류되는 시들의 경우도 그렇다. 그 시들이 ‘탈자본주의적 상상력’이라는 매우 의미있는 기획을 제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세계를 제대로 들여다보면 자본의 세계와의 구체적 관계를 고민하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 시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자기성찰의 태도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 혹은 생활세계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일 것인데, 그것이 제대로 행해지는 경우 앞에서 말한 바 ‘새로운 현실’의 지형과 그 의미가 매우 폭넓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성찰은 소박한 차원의 자기고백이나 또는 어떤 이념적 지향을 전제로 한 고발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삶의 방식과 가치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면서 현실과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자본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시인들의 그러한 성찰로서의 시적 행위는 좀더 지적이고 전위적인 운동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비판적 사유의 회복이라고 부르고 싶거니와, 그 정신은 우리 시의 주류가 되고 있는 피안과 비의의 세계로의 도저한 탐닉에 대한 매우 의미있는 부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2. 정철훈(鄭喆熏)의 시집 『살고 싶은 아침』의 근본에 해당하는 지점을 나는 시인의 80년 광주체험이라고 읽는다. 그 체험은 과거의 재현을 거의 생략하고 있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시인의 의식의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과 현실의 의미를 끊임없이 캐묻게 하면서 시집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광주 시편’에서 불임과 침묵, 망각의 상황으로 제시되어 있는 광주의 현재의 모습을 광주에 한정된 분노와 연민으로 읽어서는 매우 작은 의미밖에 구할 수 없게 된다. “그대의 침묵이 불안하여 잠을 잘 수가 없구나”(「금남로에서」)라는 구절의 탄식과 “아주 잊기 위한 저 검은 흐름들”(「극락강」)이라는 구절의 절망적 상황이 잘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그 분노와 연민은 시인 자신의 삶을 향해 던져지고 있으며 동시에 고통의 의미를 묻지 않는 현실 전체를 문제삼고 있다.

그의 시 「백야」에 이르면 그 광주체험이 “밝으면서 어두운 채로 날이 새는” 백야를 배경으로 매우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폭우와 백학들의 비상, 하얀 자작나무숲 등 세 장면으로 구성된 그 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씌어진 감상적 서경의 세계가 아니라, 고통을 충분히 의식화한 자에게 획득된 내면풍경이다. “죽지 않는 빛이 갈무리되고 주라블리들은/떼지어 우주를 향해 날았다/잠들지 못하는 백야의 길고 긴 꼬리처럼/하얀 날들은 밤을 꼬박 새며 날갯짓하고” 그 속에서 시인은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의 모습을 보게 되고, “숨을 쉴 수”(강조─인용자) 있게 된다.

 

111-365

 

정철훈 시의 ‘광주’가 단순히 개인적 체험에만 의지했다면 이와같은 지점에 다다르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시들이 저항적 담론이 거의 무너져가는 시기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의 시 「선운사에 가서」와 「목」이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듯이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역사 혹은 현실에 대한 어떤 태도 때문이다. “동백이 피고 죽는 날/나는 갓 피어 흔들리는 꽃송이보다/상춘객들의 발에 밟혀/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꽃들과/눈을 마주친다/(…)/평생 한번도 피지 않은 꽃도 있을 것이다/차라리 아름다울 것이다”(「선운사에 가서」), “목을 자르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나는 순교의 목 하나를 강에 처박는다”(「목」). 선운사나 한강이라는 오늘날의 익숙한 정경을 타고 수난받는 민중의 모습과 역사 속의 진보적 지식인의 형상이 그대로 떠오르는 시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집은 그러나 ‘가족사 시편’에 이르러 분단현실에 대한 매우 상식적인 시각을 되풀이해 드러냄으로써 현저하게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미 근년의 문학사가 수없이 반복해서 보여준 월북자 가족의 애사를 그의 시편들은 어떤 반어(反語)도 없이 거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날의 변화된 분단현실의 눈으로 그 세계를 재구성하지 못함으로써 체험된 사실만 완강하게 남게 되는, 그런 결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또한 ‘광주의 침묵과 침몰’(「곱창집에서」)의 경우도 그의 시 「금남로에서」나 「극락강」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으로 자본의 세계를 헤쳐가면서 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집의 불빛’이나 ‘철심을 박는 기중기’(「금남로에서」) 정도의 비유로는 그 리얼리티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포로가 되어가는 현실세계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시 「대설주의보」에 의하면 최근의 정철훈은 그의 지난 삶을 적막하게 반추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 속에 격리된 산촌의 점방 안에서, 노인들로 표상되는, 현실의 어떤 절박한 문제와도 소통이 되지 않는 단절의 세계에서 “입김을 불어 성에 낀 유리창을 닦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전언은 확실치 않지만, 그런데 그 곁 난로 위에서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다. ‘나’의 깊은 침묵 속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의 물! 내가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가 생의 부끄러움을 넘어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시의 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떠돌았던 지난 생이 부끄러웠다

무엇이 우리를 그 밤에 살게 하였을까

어허, 눈이 내리는데

눈이 내가 걸어온 길을 지우는데

내가 무엇을 더 서러워할 것인가

텅 빈 점방에서 주인장도, 주전자도 깜박 잠이 들고

물이 혼자 끓고 있었다

─「대설주의보」 부분

 

3. 김승희(金勝熙)의 시집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격렬한 해체와 풍자의 세계이다. 그의 시들은 우리의 욕망이 이미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자본주의적 생활세계, 그리고 권력화된 남성적 문화와 담론을 기지에 찬 직설의 언어로 해체하여 허구로 다시 읽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익숙한 세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를 폭로한다. 그의 시들이 “식탁이 밥을 차린다/밥이 나를 먹는다/(…)/CNN이 나를 시청한다/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식탁이 밥을 차린다」) 혹은 “크리스찬 디오르가 너를 부른다/불란서 멋쟁이로 꾸며주겠다고/피에르 가르댕이 너를 부른다/나이키가 너를 부른다//(…)//저렇게 많은 세계적 유명 인사들이/너, 너, 너를 부른다//아, 나는 그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제국주의가 간다」)라고 전도된 사유와 언술을 펼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그 세계가 어떤 놀라운 사건 따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거의 의심한 적이 없는 중심적 가치와 우리의 욕망이 늘 동경해 마지않던 것들을 한순간에 거짓과 비극의 세계로 돌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에서 중심적인 영역으로 가로놓여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이른바 여성시들이다. 그의 시들에 의하면 애당초 신화의 시대로부터 여자는 “하늘의 밝은 빛과는 관계가 없는/캄캄한 진흙 같은, 더럽고 물컹물컹한/희망 없는 피조물”(「사랑 6」)로 남성에게 지음을 받는다. 그 남성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여자는 당연히 자신의 언어가 없으며 오직 남자의 “말을 따라 하는”(「사랑 3」) 수동적 존재일 뿐이다. 남성의 한 부분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는 여자는 그래서 이렇게 절박하게 자신을 고백한다. “주인님을 만나기 전엔/나는─아무─것도 아니었기에/(주인님을 만난─인용자) 그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영광이었어요.”(「사랑 8」) 김승희의 시들 중에서 오늘날의 여성 현실을 가장 육성에 가깝게 토해내는 것은 「사랑 11」에서이다. 그 시에서 시인은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운전중 “핸들을 움켜잡고” 죽은 여자에게 외친다. “더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말을 그저께 들었던,/시부모로부터 네가 인간이냐는 말을 어저께 들었던,/친정어머니로부터 전세값이 올랐는데/이사 날짜는 다가오고 어쩌면 좋으냐는 말을/아침에 들었던/그 여자였을까,/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더 기어갈 수가 없었을까.”(강조─인용자)

김승희 시의 여성은 그러나 자신의 소외와 비참을 인내하고 수락하기보다는 그 현실의 의미에 분노하거나, 또는 그 세계에 길들여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풍자함으로써 시라는 의식화된 공간에서 타자의 위치에서 주체로 이동해간다. 시 「사랑 13」이 보여주듯이 그의 여성은 자신에게는 “한낱 하나의 문법적 요소”였던 주체로서의 “일인칭”의 세계를 회복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대립과 모순의 관계를 “용해시키는 4인칭의 즐거운 바다”(「사랑 13」)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때 여성에게 ‘아버지’의 세계는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사랑 9」).

김승희의 시들 속에서 여성의 모습과 그 의미는 남성이데올로기나 그것이 지배하는 현실과의 싸움이라는 평면 위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 여성은, 첫째 여성성을 상품화하는 제국주의 문화, 특히 광고 이미지로 나타나고, 둘째 제국주의에 억압되어 있는 식민지 혹은 제3세계의 진실을 밝히는 ‘원주민’의 언어로 드러나며, 마지막으로는 어머니의 모성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 「신촌 맥도날드 점」을 살펴보자.

 

① 반도에까지 맥도날드가 왔구나./나보다도 더 먼저/도착해/금빛 유방을 보란 듯이/반도의 하늘에 걸어놓은 맥도날드여.

 

② 피식민의 유방들은/어디에서도 지금도 능욕되고 있을 것이다./대로에서 잘려진 유방은/1980년 5월 19일 광주/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관통상/열아홉살 처녀 손옥례만의 것은 아니다.

 

③ 어느 숲을 돌자 네온의 피가 와락 쏟아져 내리던/금칠한 맥도날드의 네온 유방이여./어머니의 피 흘리는 밥상이여.

 

한편의 시에서 그 ‘여성’은 저마다 찢긴 채 다른 의미로 부딪쳐 넘나들면서 긴장과 싸움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③의 예에서 젖(생명)을 수유해야 할 어머니의 유방이 금칠한 네온 유방으로 되고, 그 유방의 네온의 피가 쏟아져 피 흘리는 밥상이 되고, 그 밥상이 다시 어머니의 유방으로 돌아오는 시적 연상과정은 참으로 끔찍하다.

온갖 대립과 갈등이 해소된 “13월 13일”을 묘사하는 김승희의 시는 대단히 환상적이다. “문턱을 넘어 보리밭이 들어오고/보리밭은 황토를 끌고 들어오고/(…)/코요테와 늑대들은 부엌 식탁에 걸터앉아/남은 음식들을 은박지 종이에 싸고/욕조에서는 검은 고래가 춤추”는(「13월 13일, 마지막 축제」) 그 세계가 나에게는 낯설다. 낙원의 이미지들이 풍요롭게 넘쳐흐르는데도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언어가 매우 개인적인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몇몇 시들에서 내가 읽었던, 상상력의 활달함이 지나칠 때 구체적 현실이 증발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비록 미래에 올 시적 전언이라 하더라도 지금 여기의 현실을 딛고 있는 시인의 것이라면 고통스러운 현실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겠는가.

 

4. 신대철(申大澈)의 두번째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는 한 개인의 내면에 기록된 분단의 고통과 그 의미를 시집 전체에 걸쳐 묻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극지’라는 한계상황에서 시인이 어떻게 그 고통을 뛰어넘어 그것과 화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의 시 ‘수각화(水刻畵)’ 연작은 이 시집 전체의 밑그림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그 시들이 말하는 외양적인 의미는 화전민들 특유의 생활풍속과 자연체험이지만, 그러나 그 시들을 중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시인이 힘들게 드러내고 있는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의 숨겨진 어떤 모습이다. “살고 싶으면 때를 놓치지 말게”(「水刻畵1-3」), “마지막 살길 놓치지 않으려고”(「水刻畵2」), “생을 용서할 수 없었던 나날들”(「水刻畵5」) 등의 단장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한국전쟁 시기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와 주변인물들의 삶의 실체에 대한 진술이 이처럼 힘든 것은 그가 시인 혹은 시로서 그 세계를 온전히 살아내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할 만큼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서 “나는 왜 아직 처마 밑에 깃들여 온몸으로 귀기울이고 있는가”(「水刻畵2」, 강조─인용자)라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이 생겨나거니와 그것이 극단적으로 진행될 때 “더 쫓길 데 없어 아주 몸 속으로 기어들고 싶”(「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다는, 자신을 아예 지워버리고 싶은 자의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쫓기는 자의 심리와 함께 이 무렵 신대철의 시에 나타나는 또다른 것은 시 「무슨 일이지?」 「또 무슨 일이지?」의 새 울음소리이다. “폭설 때 구멍 술술 뚫린 산막 한 지붕 밑에서 별빛까지 나눠 쓴” 쇠박새(「무슨 일이지?」)와 “들쥐에 몰려 가다 내 품에 뛰어든” 날개 다친 뜨내기새(「또 무슨 일이지?」)의 울음소리가 그것인데, 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상황이 제시된다. 해설을 쓴 김주연은 그 새의 의미를 “나 아닌 낯설고 거북한 존재”(115면)로 읽고 있는데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슬픈 울음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길이 안 난’ 어렵고 힘든 상황 속을 떠돌고 있는 ‘누군가’의, 그러니까 분명하게 호명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의 울음으로 된다는 것, 그렇다면 그 새는 제대로 된 이름과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고통의 세계를 떠돌고 있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물들이 아니겠는가.

이후 신대철의 시들은 “쫓기는 아들 한번 스치려고 인공 때 대치 참나무댕이에서 막걸리 빚고 주먹밥 뭉치던”(「넉배 고란초」) 어떤 할머니의 생애와 북녘 “고향에서 잔잔히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빨래를 널고 명아주풀을 말리는”(「가금리에서1」) 임진강 근처 노부부의 ‘기운 집’을 지나 “내 피 네 피를 달구어 섞는 뜨거운 숨결”(「백두대간을 타고2」)의 백두대간을 거쳐 극지로 이동한다. 이 시들이 중요한 것은 신대철이 어두운 자의식을 벗어나 다른 이들의 상처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은 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지’에서의 그의 시의 놀라운 변화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33도, -23시

모든 시간은 태초로 되돌아가고

툰드라엔 광물질만 남는 고독, 휘몰아치는 폭풍설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부분

 

신대철의 시가 다다른 지점이다. 이 지점이 가리키는 의미는 참으로 각별하다. 역사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이루어놓은 일체의 이데올로기와 생존을 포함한 모든 욕망이 무화되어 이 세계의 본래의 자리인 태초로 돌아간다고 시인은 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이 세계 속에 분명히 있는 현실이기도 하고, 그가 끌고 온 시적 고통의 경로와 의미를 결산하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 공간에서 그는 놀랍게도 북한에서 온 한 친구와 함께 “幻月”을 본다. 그것은 극야의 하늘에 든 “광륜을 단 두 개의 달”로서, 그것이 환월(幻月)인 것은 그 달이 그들이 “어린 시절 개마고원과 금강에서 맨 처음 구릉에 올라 마주친 달빛”을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또한 “저절로 맞춰진 우리의 환한 얼굴”(「극야」, 강조─인용자)로 떠서 그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환월은 “극야를 넘어 개마고원에서 금강에서 동시에 떠오른 해”로 또다시 그 존재를 드높인다. 그곳에서는 “서울이나 평양” 따위의 서로 다른 정치적 현실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로 가족사진을 바꿔보기도 하며, “당신의 아이는 (금강의) 강가에서 내 아이는 (개마) 고원에서 마주보고 웃고”(「금강의 개마고원에서」) 있다는 진술에까지 이른다.

이 시집의 가장 뛰어난 성취는 그러나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 「파도벽을 타고」에서 시인은 북한의 친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방한모도 없이 눈보라에 얼굴을 묻는 당신, 뒷걸음으로 점 점 점 멀어져가는 당신, 밀수꾼으로 암달러상으로, 얼음장에 엎드려 두만강을 넘나든 당신, ……아 무수한 당신, 길모퉁이를 돌아서며 무수한 무수한 당신을 한 줄로 확 잡아끌고 사라지는 당신.”(강조─인용자) 여기서 “한 줄”이란 평양 혹은 분단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줄 끝에 내가 매달려, 혹은 당기면서/파도벽을 타고 있는” 시인 자신의 현실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幻月”과 “파도벽”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 긴장된 공간의 역동성과 그 의미야말로 이 시집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일 것이다.

 

5. 나는 이 글의 머리에서 우리 시에 자기성찰의 태도를 요청했었다. 나는 그 성찰을 통해서 우리 시가 우리 현실과 역사의 고통에 가닿기를 희망한 바 있다. 나는 그 눈으로 정철훈 시집 『살고 싶은 아침』에서는 살아있는 ‘광주’의 의미를, 김승희의 시집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에서는 여성의 왜곡된 현실과 주체로의 이동과정을, 그리고 신대철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에서는 분단의 고통을 밀고 가 발견한 극지의 의미를 읽었다.

세 사람의 시집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시들이 낯선 세계를 펼쳐보이거나 전혀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 울림은 바로 우리 자신이 경험한 혹은 우리의 삶과 관련된 어떤 세계를 다시 읽게 만드는 힘으로부터 생기는 것일 터이다. 그때 생기는 시의 깊이가 시집을 읽는 우리 몫의 자기성찰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