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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삶, 그 천편일률로서의 새로움
박완서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실천문학사 2000
박범신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창작과비평사 2000
성석제 장편소설 『순정』, 문학동네 2000
권보드래
문학평론가. 서울대 강사. 저서로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이 있음. bdr0047@hanmail.net
1. ‘내부를, 이면을.’ 일찍이 루쏘가 『고백록』 첫머리에 달았던 이 경구는 여전히 보편적인 설득력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와 외부, 이면과 표면을 가르는 이분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편에는 절실한 내면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현실을 증언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식이다. 1980년대의 소설이 좀처럼 이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1990년대의 소설 또한 이분법을 강화하는 데 주로 기여하였다. 이분법 안에서 맴도는 한, 상찬과 불만이 주기적으로 교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과 욕망의 재발견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던 1990년대 소설 역시 이즈음은 폐쇄적 독백의 단방향성으로 제법 악명이 높다. 내면으로 빨려들어가 시시콜콜 신변잡사를 털어놓으면서 세계와의 대면은 한사코 피하는 소설만이 1990년대를 지배해왔다는 것이다. 2000년 막바지에 나온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박범신의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성석제의 『순정』은 이런 주류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드문 성과들이다. 이미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들인지라 고유한 개성은 각자 분명하지만, 내면의 토로와는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셋은 서로 닮았다.
2. 박완서(朴婉緖)의 『아주 오래된 농담』은 이내 『휘청거리는 오후』나 『도시의 흉년』을 연상시킨다. 박완서 소설을 자전적 계열과 세태비판의 계열로 나누는 익숙한 독법에 의지해 보자면, 후자의 예로는 실로 오랜만에 나온 장편인 셈이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등이 그랬듯 졸부의 속물적 행태를 비판하는 데 있어 작가는 여전히 단호하다. Y그룹이라는, 제법 연륜을 쌓았고 “돈냄새를 자제할 줄 아는 양식”(80면)까지 자랑하고 싶어하는 준(準)재벌이 표적이 되었다는 점은 좀 다르지만, Y그룹 회장 가족의 면면이란 『휘청거리는 오후』의 말희 가족이나 『도시의 흉년』의 지대풍 일가가 20여년의 세월을 겪은 데 불과한 것 같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그 정도 위장은 할 수 있게 된 정도랄까. “운명이 짜릿하게 두 사람을 동시에 관통하는 느낌”(79면) 때문에 Y그룹 후계자 경호와 결혼하는 모험을 불사한 영묘는 “그 집은 좀 이상해. 우리 집하고 많이 달라. 그렇지만 우리 집이 옳고 그 집이 틀린 건 아닐 거야. 서로 다를 뿐이지”(82면)라고 자신을 다독이지만, ‘다르다’는 위안이 ‘틀리다’는 아우성을 오래 누르지는 못한다. 삼십대 초반의 싱싱한 나이에 암 선고를 받은 경호를 두고 Y그룹 일가가 보이는 반응은 그만큼 혐오스럽다. 허울만 멀쩡한 이 VIP 가족은 억지와 허세 부리기를 일삼는가 하면 비싼 치료비를 생색내고, 장례식장에서조차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영원히 저장될 슬픔을 위하여 연기”(211면)하기 바쁘다. 셈 약은 장사꾼 혹은 거짓에 취한 배우, 이들 틈에서 영묘와 경호는 사육당하는 처지에 빠져 죽음을 준비할 권리조차 빼앗기고 만다.
그렇다고 소설의 다른 한 축으로 서 있는 영빈이 기댈 만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영빈은 영묘를 지극히 사랑하는 오라비이지만, 그 자신은 삶의 어쩔 수 없는 속물성에 갇혀 있다. Y그룹 같은 속물적인 삶 외부에 있다고 해서 세상살이의 근본적인 속물성까지 피할 수는 없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의 젊은이들과는 달리 이미 사십대 중반에 접어든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젊음은 일체의 속물성을 멸시할 만큼 용감할 수 있겠지만, 중·장년에 접어든 나이로 속물을 면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영빈은 유능한 의학박사로 자리잡은 후 사십대 중반에 이르러 가슴 설레는 일탈의 경험을 갖지만, 흔해빠진 외도와 영빈의 경험이 그리 다르지는 않다. 추억 속의 계집애, 초등학교 동창 현금이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부터 통속적이긴 매한가지다. 영빈은 현금을 만난 후에 비로소 “무언가 불완전한 느낌”(29면)을 충족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비겁한 연인이자 위선적인 가장이며, 보기 드문 천진성을 갖춘 현금은 악녀(惡女)로서의 면모 또한 풍부하다. 일찍이 현금이 선택했던 결혼생활이 그것을 잘 보여준 바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활하게 움직여주는 힘은 결코 사랑 따위가 아니라 돈”(48면)임을 어린시절에 깨달은 현금은 돈과 육체의 쾌락만을 나누는 관계를 선택하였고, 수렁에 빠지는 일 없이 매끄럽게 거기서 빠져나왔다. 노동이 없고 생산이 없는 불모의 삶이 지나가고, 그러고 나서 현금은 일하고 자식 키우는, 살려고 발버둥치는 생활을 비로소 소망하게 된다.
삶은 절대적이다. 비합리적인 삶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합리성으로 삶을 재단할 수는 없다. 영빈의 외도, 현금의 방종, 그리고 영빈의 아내 수경이 보여주는 아들에의 집착까지, 모든 삶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간통은 죄악이며 남아선호는 덜떨어진 봉건의식이라는 판단이 낱낱의 착잡한 삶을 어찌 다 설명할 것인가. 적어도 거기엔 개인의, 집단의 유구한 역사가 역설적으로 얽혀 있는 게 아닌가. 한 사람의 평생을 결정하는 건 때로 “열정 없는 우연”(24면)이고, 자기 실존의 절대적 무게를 휘두르기엔 얽힌 인연이 너무도 복잡하다. 그렇다면, 종점(終點)을 자신할 수 없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2년여 전 나온 『너무도 쓸쓸한 당신』 어딘가에서 작가가 말했듯, ‘공식이 통하지 않는 난해함’이야말로 삶의 지긋지긋한, 삶의 찬탄스러운 가능성이다. “무(無)도 없는 무, 호기심조차 거부하는 미지(未知)”(126면)의 과정인 죽음이 예측불허라면 삶 또한 그렇다.
삶과 죽음의 불가사의에 대한 관심은 때로 작가 특유의, 세부에 대한 다소 산만한 관심을 불러오기도 한다. 의사생활의 애환을 장황하게 토로한다거나, IMF 시절에 부서져버린 서민의 초상을 그려낸다거나, 갑작스레 영빈의 형을 등장시켜 국제적인 기업사냥꾼의 이면까지 암시할 때가 그런 예에 속한다. 오래도록 사라져 있던 맏오라비가 나타나 남편의 죽음 이후 점점 황폐해지는 영묘를 구출해낸다는 설정은 좀 돌발적이기까지 하다. 끝까지 탐구를 지속하는 대신 적당한 선에서 두루 만족스런 결말을 짓고 남는 문제는 몇몇 에피소드로 처리하는 작가의 오래된 습관은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더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신하기 힘든 일이다. 결점처럼 보이는 이런 특징이야말로 혹 박완서다운 힘의 원천은 아닌지. 박완서는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세상을 깔끔하게 단장하기보다는 시야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내보인다. 갸우뚱거리고 자신없어하면서도 문제를 피해가려 하지 않는다. 단정한 서사보다 군데군데 균열과 과잉을 보이는 소설이 훨씬 박완서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겠다. “미련하고도 당당한 현실”(277면)을 고집스레 감당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세상은 천편일률로서 새롭고, 사는 일 또한 그렇다.
3. 『흰 소가 끄는 수레』로 돌아온 박범신(朴範信)이 다시 한권의 소설집을 냈다. ‘돌아온’ 탓일까,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에는 세상의 갖가지 모순과 희망에 분노하고 감격하는 청년의 모습이 역력하다. 머리말의 자평(自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20여년 전 낸 『토끼와 잠수함』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적잖다. 그때처럼 분노를 소박하고 열렬하게 털어놓는 건 아니지만, “서사의 길을 닦아 세상 속으로 가고 싶다”(6면)는 작가의 희망은 자못 수줍으면서도 무모하다. 진부한 환상이라는 핀잔이 한창인 마당에, 새삼 문학이 세상으로 길을 낼 수 있다고 믿다니. 이순(耳順)을 향해 치닫는 나이에 다시 거추장스런 속세의 짐을 자청하다니.
표제작인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를 비롯해 「세상의 바깥」 「소음」 「가라앉는 불빛」 등은 세상 속으로 가고 싶다는 작가의 소망을 직접 보여주는 작품이다. 부화(浮華)한 외적 가치에 눈멀어 있는 세상을 향해 비판의 시선을 던지고(「세상의 바깥」 「소음」), 혹은 골프장 건설 같은 더욱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면서(「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작가는 문제가 변한 것은 별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안과 바깥을 가르는 경계는 여전히 탄탄하고, 중심이 자기모순 속에 타락해가는 한편 거기서 내몰린 자들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는 이원성 또한 바뀌지 않았다. 바뀌지 않은 게 어디 그뿐인가. 인터넷이니 가상현실이니, 개성과 다양성이니 세계화니 하는 와중에 삶은 지독히도 복고풍이다. 계급구조는 느슨해지기는커녕 요지부동의 재생산체제로 진입중이고, 경쟁의 획일성은 날로 더해가고 있으며, 역사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꺼져가는 한편 좌절과 분노는 더 커진 듯싶다.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에서 기업의 회유와 협박이 마을의 ‘향기로운 우물’을 어떻게 오염시키는지 똑똑히 목격한 주인공이 지적했듯이, “달라진 건 겉옷뿐”일지도 모른다.
상상력이 젬병이에요. 삼년 전 써먹은 수법을, 이십년 전 삼십년 전 기업들이 써먹은 수법을 아직도 고스란히 전수받아 써먹고들 있다구요.
세상 달라졌다는 말 나는 믿지 못합니다.
민주화, 새천년, 인터넷, 모두 웃기는 얘기예요. 달라진 건 겉옷뿐이지요. (125면)
그렇지만 겉옷의 변화 역시 변화이긴 매한가지다.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에서도 ‘겉옷의 변화’는 찾아볼 수 있다. 볼품없는 외톨이로 죽어간 고아 처녀의 영혼을 세련된 커리어우먼의 육체 안에 집어넣고(「세상의 바깥」), 유일한 양식인 진통제를 구해 아파트 벽을 기어오르는 소녀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소음」), 작가는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기법을 벗어나 숨을 고른다. 그러면서도 “달라진 건 겉옷뿐”이라는 말을 다짐하듯, 세상의 모순과 문젯거리는 그대로이고 순결한 자가 희생되기 마련이라는 법칙 또한 그렇다고 전해준다. 「세상의 바깥」의 고아 처녀 박미숙, 고향의 감나무를 그리워하는 「소음」의 소녀, 골프장 건설 회사에 맞서 싸우는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의 마을사람들 등 박범신 소설의 주인공들은 일종의 비극적 순결성으로 빛난다. 그들은 순결하고 정의롭지만 패배할 수밖에 없으며, 미친 듯 질주하는 세상에서 내동댕이쳐질 수밖에 없다.
이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작가는 뜻밖에 고향의 존재를 상기한다. ‘강의 중심’ ‘감나무’ ‘향기로운 우물’로 상징되는 고향의 이미지야말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순결성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다. 「세상의 바깥」의 박미숙은 들어서고 싶어했던 세상의 중심 역시 타락과 절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고향 마을로 떠나고, 「소음」에서는 고향의 감나무를 기억하는 자들이 함께 저항을 기도하며,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의 화자 역시 마지막까지 고향의 치유력을 믿는다. 그렇지만 고향을 기억하는 세대는 이미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전국민의 90%가 도시인으로 살아가는 지금, 고향의 순결성이란 얼마나 힘있는 환각일 수 있을까. 고향의 존재에 기대지 않고 순결성을 주장하기란 또 얼마나 힘든 일일까. “작은창자나 맹장이나 쓸개나 간이나 심장이 원형으로서 꿈같이 우러러 동경해 마지않는 것, 장미, 새, 사슴, 토끼……”를 간직하고 있다면 “흉악범이든, 탈주범이든, 도적이든”(172면) 상관없다고 작가는 말하지만(「가라앉는 불빛」), 고향은 벌써 소멸되는 중이다. 강·우물·감나무나 새·사슴·토끼 대신 인터넷과 M-net 속에서 자라는 이들은 “허위와 위선과 이기적인 욕망”(44면)에서 자기를 분리해낼 수 없다. 순결은 속악(俗惡) 가운데 있고, 속악은 순결 속에서 숨쉰다.
그러나 돌아가본다면? 고향이 든든히 버티고 있었을 때라면 어떨까? 소설집 마지막에 실려 있는 「그해 가장 길었던 하루」와 「손님」에서 작가는 고향의 공동체가 건재했던 시절을 건드린다. 일제 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연작에서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능수능란하고 자유자재다. 고향의 말투는 자족적인 채 유창하고, 마을 풍경은 정답고 여유롭다. 도시화·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공출과 징용이라는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무렵인데도 서사는 강파르지 않다. 작가는 도시화의 이면, 제국주의의 횡포, 남녀차별과 가족 내 갈등의 문제까지 섭렵하면서도 고향이라는 준거를 잊지 않는다. 이 고향은 「세상의 바깥」 「소음」 「가라앉는 불빛」 등에서와 같은 부재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현실적인 고향이며, 그래서 한결 생동감과 활력에 넘치는 고향이다. 어머니는 속정 깊으면서도 우악스럽고, 가족 사이는 거칠면서도 따스하며, 고향은 입 삐죽거리다가도 결정적일 때 끌어안는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이렇듯 살아 있던 고향이 오늘날에는 부재와 결여로서 확인될 수밖에 없다는 것,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의 가능성과 한계는 여기 있는 듯 보인다. 넘치는 활력을 갖고 과거를 묘사할 수 있다면, 왜 오늘날에 대해서는 그런 능동성을 가질 수 없는가? 수십년 전 과거는 ‘이야기’이고 오늘날은 절박한 현실이기에 그런가? 진지함을 두려워해서는 안되겠지만, 부재하는 고향을 그리는 비극적 순결성이란 그저 무력함에 그치고 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또한 떨치기 어렵다. 부재하는 대상에 매달리는 대신 현실의 삶을 타개해나가는 낙관성과 생기는 이제 ‘이야기’ 속에서 가능할 뿐인가?
4. 상처가 아닌 진실은 있을 수 없을까? 본질에 육박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세상과 만날 수는 없을까? 이런 질문이 깜박거릴 때 한켠에서 성석제(成碩濟)가 떠오른다. 세상에 관심 두는 방식이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기법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작가 성석제의 존재는 이채롭다. 『새가 되었네』에서부터 『홀림』에 이르기까지 성석제는 일관되게 공감의 형식과 원근법적 서술을 배제해왔으며,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삶의 이질적인 층위를 관통해왔다. 소설에 각주 다는 기법(「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소설 쓰는 인간」)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이 날렵한 비행은 보르헤스를 연상시키는 바 있다. 보르헤스가 두어 문장으로 복잡한 심리나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내듯, 성석제 또한 변죽을 울리고 어물거리는 대신 빠르게 환부(患部)를 치고 지나간다.
세번째 장편 『순정』에서도 작가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인다. 『순정』은 “인간과 인간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피워내는 꽃봉오리”(144면)를 기대하던 소년이 상처입고 어른이 되어 세상을 편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애초의 소망과 상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피카레스크 풍의 소설답게 ‘도둑’으로 규정된 주인공 이치도는 순정을 간직할지언정 진실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작부 출신 어머니가 자기를 임신한 후 윤간당해 버림받았다는 출생담마저 이치도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는다. 출생의 내력을 알게 된 이치도는 생부가 월남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며, 출전하기 전 군함을 타고 마을 앞 시내에까지 들어와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고 떠벌리지만, 이 허구는 정신적 외상의 보상이라기보다 막강한 낙관성의 소산이다. 더욱이 이치도는 어떤 자의식의 찌꺼기도 없이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사실로 믿어버릴 줄 안다. 거대한 허구 또는 농담, 이 속에서 진실을 고집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이치도는 손에 넣으면 대권을 쥐게 된다는 태자관을 미끼로 하여 재벌 회장 비서로, 정치권 실세의 심복으로 변신을 거듭하지만, 태자관의 전설이란 애초부터 스승 왕확이 날조해낸 것에 불과하다. “기건 내가 심심해서 만든 짜가야. 물건도 짜가, 이야기도 짜가. 짜가!”(269면)라는 왕확의 선언은, 그러나 폭력적이라기보다 유쾌한 농담조이다.
『순정』의 모든 인물은 자기가 만들고 남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 이치도의 고향마을 은척은 곧 이야기의 공동체이다. 이 마을사람들은 “말 좋아하고 말 만들어내는 데는 선수”(29면)여서 이치도의 어머니 춘매가 남편이 죽은 후 한동안 술손님을 사절한 일을 두고 “대폿집에서 열녀 났다”(36면)고 떠들어대는 등 각종 새로운 언어 용례를 만들어내는 데 열심이다. 언어를 창조해내는 능력, 더 나아가 세계를 창조해내고 그 안에서 의좋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은척의 힘이자 비밀이다. 예외적인 우등생이자 이치도가 순정을 바친 대상이었던 왕두련만은 은척의 이러한 분위기를 경멸하였고, 왕확이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방황을 거듭했지만, 그 역시 마침내는 ‘이야기 속의 존재’이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고정된 자기, 고정된 진실을 유지하려는 고집을 버리는 순간 이야기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탈바꿈한다. 이야기의 공간은 죽음과 삶을 함께 허용하고 생생한 이질성과 타자성을 경험하게끔 한다. 이치도는 의부(義父)가 죽어간 현장에서 빈 병을 훔쳐내 엿을 바꿔 먹고, 한자리에 붙박이는 일 없이 전신(轉身)을 거듭하며, 마침내 세상 모든 것을 훔쳐내는 도둑이 된다. 이치도에게 도둑의 도(道)를 가르친 왕확은 도굴꾼이지만 일약 시민의 사표(師表)로 변신하고, 모범생 왕두련은 타락의 궤도에 들어서는가 싶더니 다시 말짱한 얼굴로 깨어난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이 유동성은 “정성껏 밥을 하고 지성껏 먹이고 힘껏 설거지를 한 다음”(37면) 같은 리드미컬한 어법에 의해 연결된다. 그러나 『순정』에서 작가의 어법은 때로 리듬의 창출과 무관한 습관적인 연쇄를 낳는 데 그치고 만다. “성당 종지기라면 성당 종이나 다름없고 (…) 성당의 종소리는 곧 성당을 대표하며 성당은 곧 선물을 주는 하느님이니”(26면) 같은 흐름은 종종 습관적이고, “게다가 학교 안으로 다시 들어올 때 수위가 ‘야, 담치기 재미있지, 열심히 하면 높이뛰기 선수도 될 수 있어 (…) 빨리 가서 또 해라, 응?’ 하고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었다”(113〜14면)라고 쓰는 가상적인 수다는 간결하지만 쉼없는 유동성을 방해할 때가 많다. 한편 작가 자신과 닮은 성억제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지만 사실은……’이라고 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지금까지 용케 피해온 심층과 진실에의 욕망이 언뜻언뜻 스쳐보이기도 한다. “도둑질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것은 역시 나라를 도둑질하는 것”(88면)이라고 적으면서 현실 비판의 어조까지 내비칠 때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공허한 유동성과 진실의 강박 사이에서 작가가 얼마나 몸을 잘 가눌 수 있느냐, 삶 자체로서의 유동성과 다양성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겠다. 『홀림』 말미의 후기에서 작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길, 세속의 다양함을 숭상한다”고 적었거니와, 숱한 길 중 하나에서 길 잃지 않고, 자기라는 질척한 늪에 빠져들지도 않고 편력을 계속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5. 한국 소설은 너무도 오랫동안 내부와 외부, 내면과 현실이라는 이분법 위에서 구동되어왔다. 진자운동을 하는 것처럼 내면에서 현실로, 다시 현실에서 내면으로 달음질쳐온 역사가 근대문학사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지금 또다시 개인의 음울한 내면에 갇혀버린 듯 보이는 한국소설에서, 필요한 것은 두 항의 종합이 아니라 이분법 자체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유이겠다. 박완서·박범신·성석제의 최근 작업은 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찾아나선 시도들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고독한 실존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겨난 배치임을 설득하고, 개인과 세계 사이의 비극적 대결 대신 활기 넘치는 상호 생산을 강조하며, 또 다양한 삶의 편력 속에서 생겨나는 개방적 역동성을 보여주면서, 이들 작가는 그러나 자기 안에서도 갈등하고 요동치며 굽이쳐 흐른다. 언제나 그러했듯, 작가의 가능성이란 이 굴곡을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