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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홍일선 洪一善
1950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80년 『창작과비평』 여름호로 등단. 시집으로 『농토의 역사』 『한알의 종자가 조국을 바꾸리라』 등이 있음.
구절초
해 저물 무렵
바위 틈 사이
흰 구절초 한 송이
신행길 나선 새아기씨처럼
볼 발그레히 수줍어 피어 있다.
저만 지켜줄 수 있느냐고
살짝 물으려다가
저만 오래도록 아껴줄 수 있느냐고
다짐 받으려다가
그만 인기척에 놀라
입 다물어서
이슬 한 방울
슬픔 한 방울 떨어트렸다.
近畿詩篇
빈집
아주 오랜 날
아프게 비어 있어야 해서
적빈의 이슬 몇방울
눈물이 되어 풋것 속살 촉촉히 적시면
月面佛 그대 크신 그림자 하나
근기 화성땅 양감면 정문리
늦은 밤 빈집 찾아가시네.
아주 오래된 우물
더는 맑은 물 길어올리지 못하는데도
텃밭 끄트머리
아욱이나 쑥갓 따위 남새 무성하신 게
그대 보시기에도 참 고마웠을 것이다.
그렇게 어진 씨앗들 세간 나서
며칠 지상에서
이름 겨우 구했다가
꽃 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잊혀진 사람 꿈엔 듯 옛집에
시 한 편 살아도 괜찮았으리.
그늘이 따뜻하던 때 있었네
주봉 야윈 산그림자가
외딴집을 한품에 꼬옥 끌어안으면
그 집 모녀 덜 외로웠으리
비바람에 많이 상했어도
한 세월 더 견딜 수 있는 토담 너머
붉은 앵두꽃이 측은했던 외딴집을
한 소년이 오래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은 또 미욱한 사람들
정든 고향을 등지게 해서
멀리서 바라보아도 가슴 두근거렸던 것들
이젠 너무 늙어 푸른 잎 틔울 수 없는 나무들
형형하던 눈빛 다 지워져서
옛 무덤이나 무단히 바라보다가
대보름날 망우려 망우려 한점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늘 깊은 산모퉁이 묵정밭
외딴집터를 요행히 찾은 초로의 사내
지친 눈이 회한처럼 머물 때
그때 또 달빛은 환장하게 눈부셔서
지난날들 불러내어
어디 멀리 도망이나 가라고 보채는 것인지
혹 모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