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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전시기획 부재 속의 명품 관람
오르쎄미술관에서 온 ‘인상파와 근대미술’전
김영나 金英那
서울대 교수, 미술사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을 보장하는 전시는 인상파 전시, 공룡 전시, 그리고 이집트 미술전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상주의’는 일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사조이다. 아마 그 이유는 알아보기 쉬운 풍경화나 도시의 모습, 또는 일상생활을 다룬 주제가 많고 색채가 신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인상파와 근대미술’이라는 전시가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 포함된 미술가들은 인상파 화가인 끌로드 모네나 오귀스뜨 르누아르뿐 아니라, 이들보다 한 세대 전인 19세기 중반의 귀스따브 꾸르베와 장 프랑수아 밀레, 까미유 꼬로의 작품에서부터 19세기말의 삐에르 보나르에 이르고 있어, 사실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 작품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한 시대나 특정한 주제를 조명해보려는 전문적인 시각에서 출품작품들이 선정되었다기보다 다수의 유명작가들을 포함시키고 전시 제목에는 ‘인상파’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흥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이 전시는 이벤트회사에서 기획한 전시이다. 국립현대미술관측에서는 단지 장소만 빌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른바 ‘블록버스터’(Blockbuster) 전시는 최근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미술의 대중화와 맞물려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폼페이유물전’이라든가 ‘러시아황실보석전’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전시가 전문적인 도록이나 전시와 관계되는 강연회나 학술심포지엄과 연계되어 실행된다면 굳이 비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싼 보험료를 지불하고 성사시킨 이번 ‘인상파와 근대미술’ 전시에 그런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줄을 지어 관람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과연 작품 옆에 있는 몇개의 설명문만으로 이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할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간다.
전시의 주제 설정이나 기획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고 또 인상파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밀레의 「이삭줍기」 외에는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는 프랑스 미술의 전성기였던 19세기 후반의 작품들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모두 빠리의 국립 오르쎄미술관 소장품들이다. 이 오르쎄미술관은 1900년 빠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세워진 기차역을 개조하여 1986년에 개관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이 주로 1848년 이전까지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면 이 미술관은 그 이후에서부터 1905년경, 추상미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작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다. 여기서 1848년을 기점으로 한 이유는 그해 2월에 있었던 혁명과 관계된다. 즉 혁명 이후 미술사조가 영웅이나 역사, 또는 문학적 주제를 대상으로 삼던 과거와는 달리 노동자나 농민 등 일상생활의 인물들을 그리는 사실주의 미술로 바뀐 것을 근대미술의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때까지 19세기 미술의 명품으로 알려진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의 주요 작품들은 비좁은 3층 전시실로 밀려나고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아카데믹한 살롱화들이 대거 넓은 공간에 전시되었으며,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예와 디자인 전시 공간이 대폭 늘어났다. 이것은 이 미술관이 개관할 무렵에 집권한 미떼랑 사회당정권의 역사해석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으로 이러한 전시계획은 ‘미술관은 역사책이 아니다’라는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오르쎄미술관 전시가 1848년 이후의 사실주의 미술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인상파와 근대미술’ 역시 꾸르베, 밀레, 꼬로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시작하고 있다. 꾸르베와 밀레는 1848년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 포함시키려 각별히 노력했다고 알려진 밀레의 「이삭줍기」 앞에는 늘 많은 관람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노동의 아름다움이나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이 작품에서, 전경의 이삭줍는 세 극빈 농민들이, 배경의 수확한 낟가리를 잔뜩 쌓아놓은 부농과 대비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당시 이 그림에 대해 왜 그렇게 격렬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실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인상파 화가들은 농민이나 노동자보다는 부르주아의 여유있는 일상생활을 그렸다. 모네, 르누아르 등 잘 알려진 화가들은 당시에는 과격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었고 화단의 이단아들이었다. 교훈적인 역사화가 아직도 최고의 미술이었고 뛰어난 구성과 드로잉, 그리고 완성도를 높이 평가하던 당시의 기준에서 인상주의 작품들이 본질보다는 표면적인 인상만을 추구하는 일종의 스케치에 불과한 그림으로 비쳐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상주의가 역사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부터였다. 특히 최근의 미술사에서는 인상주의를 빛의 관찰에 의한 유동적인 색채 구사라는 이른바 모더니즘적 시각보다는, 도시의 근대화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질적인 삶의 변화를 겪은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던 시대를 정말 아름다운 시대라고 믿었던 근대성의 표현으로 인식하는 많은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다.
빈쎈트 반 고흐나 뽈 고갱, 뽈 쎄잔느, 조르주 쐬라의 경우는 빛에 대한 인상주의의 관심을 공유하면서도 투명한 빛을 통해 자연을 재현하는 데서 벗어나 색채나 구조를 통해 자신의 주관을 강하게 드러내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이들에게는 인상주의와 구별하는 의미에서 후기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의깊게 볼 만한 작품들은 주로 이 후기인상주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갱이 타히티에서 일시 귀국했던 1894년에 그린 「브르따뉴의 여인들」에서는 이미 인상주의의 분할주의를 벗어나 넓은 색면으로 화면을 채워가는 고갱의 독자적인 양식이 보인다. 이 그림의 고운 보라색과 주홍, 그리고 맑은 빨간색 등은 이 화가가 얼마나 뛰어난 색채감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또 몇달씩 걸려 완성된 쎄잔느의 「바구니가 있는 정물」에서도, 화가가 관찰한 시각적 진실과 화가가 느끼는 구조를 동시에 표현하기 위한 거의 투쟁에 가까운 작업과정이, 완성된 작품에서는 다만 색채와 구조의 자연스러운 질서와 조화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한마디로 경이로운 경험이다.
아무리 많은 음반이 나와도 실제 음악회에 가서 듣는 음악만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작품도 책을 통해 보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주제보다 점점 더 색채, 형태, 선의 조형성이 강조되는 인상파 이후의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처음으로 하얀 캔버스와 공장에서 생산된 튜브에 든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정확한 색채를 얻기 위해 빨레뜨에서 색을 섞어 사용하기보다는 강렬한 원색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은 알아볼 수 있는 이 세계의 재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9세기 미술이 20세기초, 추상미술로 전환하기 위한 중요한 계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