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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통일과정과 개혁과제

 

북한 개혁의 ‘이륙’은 가능한가

중국 개혁·개방을 통해서 본 북한 변화의 가능성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주요 논문으로 「중국 문제와 아시아 위기, 출로는 어디에 있는가?」 등이 있음. lee87@mail.skhu.ac.kr

 

 

1. 중국의 경험이 의미하는 것

 

작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올해 초 중국 방문에서 보여준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파격적인 행동과 발언은 북한에서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이 과연 어떤 개혁모델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남한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국가의 개혁모델로는 소련과 동구사회주의 모델, 베트남모델, 중국모델 등이 예로 들어지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중국모델이다.

우선 중국은 공산당이 집권당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경제개혁과 발전을 성공적으로 추진해왔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북한 지도부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과 중국 사이의 우호관계로 인해 북한이 중국모델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적을 수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북한의 중국모델 선택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의 초기 조건이 크게 다르다는 점에서 북한의 중국모델 수용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견해도 많다. 국토와 인구의 규모, 공업화 수준, 정치제도 등의 차이로, ‘점-선-면’ 방식의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고 농업개혁을 경제개혁의 돌파구로 삼았던 중국모델을 북한이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북한이 처해 있는 이같은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이 중국모델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형식적인 모델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중국의 경험은 북한 개혁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사회주의국가들의 개혁은 어떤 선험적인 모델에 의해 진행된 경우가 거의 없다. 소련은 정치개혁을 앞세운 개혁노선을 추구하였는데, 이 과정은 동구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자국의 급작스러운 붕괴로 연결되었다. 이는 새로운 개혁을 시작했던 지도부의 예상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바랐던 미국 등 서방세계의 예상도 뛰어넘는 사태였다.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 다원주의 정치구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혁도 처음에는 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개혁은 전통적 체제의 제약을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이 과정의 개혁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데, 80년대 이후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는 초기의 제한적인 실험이 전체 씨스템을 변화시키는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체제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개혁의 ‘이륙 단계’가 나타난 것이다.

소련의 경우에는 정치개혁을 앞세웠던 이륙 이전 단계의 개혁이 정치씨스템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유발하면서 개혁의 ‘이륙’ 단계로 돌입했다.1 그리고 경제 영역에서의 빠른 사유화와 가격자유화를 통해 시장경제로 전환하였다.

반면 중국은 처음부터 정치개혁은 물론이고 ‘시장경제’라는 목표를 앞세운 것이 아니라 “돌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강을 건넌다는” 식의 점진적 과정을 통해 현재의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했다. 중국에서는 초기의 제한적인 실험이 전체 씨스템을 급격히 붕괴시키지 않으면서 기존 체제와의 공존 단계를 지나 새로운 체제의 형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체제의 틀 내에서 변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이는 북한에 중국이 체제 내에서 체제를 뛰어넘는 개혁의 동력을 어떻게 형성했는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제이다.

 

 

2. 북한의 새로운 모색과 실패: 좌절된 ‘이륙’

 

북한은 1984년 9월 합영법을 제정하여 외국인과 동포 들이 북한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면서 전통적 경제체제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고자 했다. 북한이 처음부터 모든 형태의 대외경제협력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김정일은 1982년 발표한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자력갱생의 원칙에서 민족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문을 닫아매고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외부와의 경제협력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외경제협력은 주로 사회주의 진영 내의 경제협력 혹은 발전도상국간의 남남협력을 지칭했다. 그러나 합영법은 서방세계 기업가들의 대(對)북한투자에 대해 좀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일보 전진된 정책이었다. 북한은 90년대 들어서 더욱 적극적인 개방의지를 보였다. 1991년 12월에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였고, 1992년 헌법개정시 외국인의 합법적인 권리와 이익을 보장한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외국인 투자를 위한 헌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외국인투자법’ ‘합작법’과 ‘외국인기업법’을, 1993년에는 ‘외환관리법’ ‘자유경제무역지대법’ ‘외국투자기업 및 외국인 세금법’을 제정하여 외국인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법적 환경을 정비하였다. 이와 동시에 북한은 1993년 12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 3차 7개년계획의 실패를 공식인정하고 완충기의 과제로 이른바 ‘3대 제일주의(농업제일주의·경공업제일주의·무역제일주의) 노선’을 제기하였다. ‘3대 제일주의 노선’은 1997년까지 계속 제기되었는데,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이 항상 중공업 우선 발전을 내세웠던 것과 비교하면 커다란 변화였다.

북한이 이처럼 새로운 모색을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보면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던 50년대와는 달리 80년대 들어서서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다.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가장 강조하던 북한도 이 점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김정일은 1987년 7월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에게 발표한 「반제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자」라는 담화에서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새 사회제도를 관리운영하는 데서 ‘좌우경적인 편향’이 발생했으며,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혁명과 건설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심중한 결함’이 나타났다고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국가들이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에서도 자본주의국가들간의 협력이 강화되고, 신식민지적 착취가 강화됨에 따라 생산성과 기술 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으며, 자본주의국가 내부에서도 정신노동자 수가 증가하는 등의 사회계급 구성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등 자본주의가 상당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인정하였다.2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여 80년대 들어서면서 사회주의국가들은 여러 형태의 개혁적 노력을 시작했다. 중국은 1978년에 이미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신노선을 추진하였고,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 정책을 시작했고, 소련은 1985년 고르바초프(M. Gorbachev)의 등장 이후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적극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북한도 1984년 이후 이러한 변화에 대해 소극적이나마 나름의 대응을 하였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소련의 개혁이 새로운 사회주의의 건설이라는 주관적 희망과는 달리 1989년 동구사회주의의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라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사회주의경제권의 붕괴로 북한은 90년대 초부터 서방세계와의 무역을 확대하고 침체된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시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동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사회주의국가들의 개혁 결과는 크게 달랐다. 소련과 동구사회주의의 붕괴는 차치하더라도 중국은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후 평균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였으며, 베트남은 1997년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로 경제성장에 제동이 걸리기 이전까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였다. 반면 북한의 경우 1984년 합영법 실시 이후에도 경제사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외자유치 실적을 보면, 각국이 개방정책을 시작한 이후 중국은 1994년 말까지 3천억 달러 이상, 베트남은 112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했으나, 북한은 1993년 말까지 144건의 1억 5천만 달러에 불과하였다.3 특히 90년대에 북한은 ‘3대 제일주의’를 제시하고 외자유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음에도 경제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한국은행의 ‘북한 GDP 추정결과’에 의하면 북한경제는 90년대에 들어 계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고, 총무역액도 1990년 약 47억 달러에 달한 이후 90년대 중반에는 20억 달러 선이 붕괴되고, 98년에는 14억 4천만 달러로 감소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아사자가 발생하는 식량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1999년에 접어들어서야 경제성장률이 플러스(6.2%)로 돌아서고 총무역액도 14억 7천만 달러로 약간 증가하는 등 호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4 물론 이러한 변화가 북한경제의 정상화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원조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 남아 있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난 일차적 원인을 찾으면 우선 북한의 제한적 개혁노선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과 비교할 때 북한의 개혁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우선 정치·사상적인 면에서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한 준비가 사전에 이루어진 중국과는 달리 북한의 경우 기존의 유일체제를 그대로 고수하였다.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의 핵심적 원칙은 물질적인 자극보다는 사상을 앞세우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경우 새로운 시도가 시장기능의 도입 등 경제체제의 개혁과 병행되지 않고 부분적인 대외개방 차원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개혁노선에 대해서 ‘개혁 없는 개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제한적인 개혁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경제체제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지 못하였고, 결국 북한은 사회주의경제권의 해체로 인한 무역체계의 붕괴와 자연재해로 인한 타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심각한 경제위기와 식량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즉, 북한의 개혁적 노력은 새로운 단계로의 이륙에 실패했던 것이다. 북한의 개혁은 왜 이륙에 실패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북한 지도부의 변화에 대한 거부를 주된 원인으로 지적하는 견해가 많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북한의 개혁적 노력의 좌절은 지도부의 주관적 의지만이 아니라 객관적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3. 북한 개혁의 딜레머와 그 근원

 

북한은 한편으로는 개혁을 위해 실용주의적 노선을 제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도가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여 사상단속과 정치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모순된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따라서 북한의 개혁적 노력은 ‘방충망식 개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된 정책은 개혁의 ‘이륙’을 제약하는 북한 개혁의 딜레머를 만들고 있다. 북한 개혁의 딜레머는 1998년 김정일 시대 북한의 총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강성대국론’이 제기된 이후에 더욱 뚜렷해졌다.

북한은 1998년 9월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취임에 즈음하여 이른바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건설을 주장하고 나왔다. “사상의 강국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여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튼튼히 세우고 그 위력으로 경제건설의 눈부신 비약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강성대국 건설론은 군사·사상을 중시하면서 경제발전도 강조하는 모순된 내용을 담고 있다. 강성대국론이 제시된 시기를 전후로 하여 북한의 경제정책은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98년 9월 17일 발표된 『로동신문』과 『근로자』의 공동논설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을 끝까지 견지하자」에서는 다시 중공업 우선 발전노선을 강조했고 ‘개혁’과 ‘개방’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199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2차 회의에서 통과된 ‘인민경제계획법’에서는 경제계획에서 내각에 의한 중앙집권과 통일적 지도의 강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북한은 새로운 변화를 향한 의지도 보여주고 있다. 우선 1998년의 헌법개정을 통하여 과거에 인정되던 ‘터밭’ 이외에 “그밖에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해 얻은 수입”도 정당한 사적 소유로 인정하고, “특수경제지대에서의 여러가지 기업창설 운영”을 장려하고, ‘사회협동단체 소유’라는 새로운 소유형태를 인정하는 등 다양한 소유형태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대외무역은 국가 또는 사회협동단체가 한다”고 규정하여 무역에서의 국가의 독점적 지위를 약화시켰다. 동시에 북한은 경제사업에서의 ‘합리적 계산’과 ‘실리’도 강조하고 있다. 즉 북한이 모순된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지만 북한의 지도부가 변화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제한된 개혁의 자기확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주의국가들의 개혁 경험을 감안하면 그동안 북한이 시도한 변화가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경우도 개혁개방을 시작한 지 14년이 지난 1992년 중국공산당 제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채택하면서 처음으로 공식 결정에서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름의 굴곡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 시장지향적인 경제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싯점을 1984년의 중국공산당 제12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로 잡을 수 있는데, 이 회의에서 과거 “계획이 주(主)이고 시장으로 보충한다”라는 공식입장이 ‘계획이 있는 상품경제론’으로 대체되었다. 1979년에서 1984년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외부에는 중국의 정책이 모순된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했다.5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돌파구도 정부에 의해 지도되던 특구정책이나 도시에서의 기업개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초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동력에 의해 집체농업을 해체한 농가경영책임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만들어졌다. 중국의 개혁파 지도부들은 농촌에서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1984년 더욱 적극적인 개혁·개방노선을 관철시킬 수 있었고, 중국 개혁은 이륙단계로 접어든 것이다.6

반면 북한의 경우는 새로운 변화의 시도가 앞에서 제시한 딜레머와 체제의 제약을 뛰어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북한의 규모를 고려하면 부분적인 지역개방이라 하더라도 전체 씨스템에 새로운 역동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새로운 시도가 개혁에 동력을 제공하지 못한 데는 체제이행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만큼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지도부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새로운 실험의 상승작용을 제약했던 외부요인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기득권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개혁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어야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데, 북한이 처해 있던 국제적 환경, 특히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는 북한 지도부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크게 좁혔다. 외부의 자본과 기술도 이러한 상황을 무릅쓰고 북한에 진출할 이유가 없었다. 즉 북한의 개혁적 노력은 자기발전의 동력을 형성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중국의 초기 경제개혁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이륙의 동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개혁·개방이 미국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된 시기에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선포한 중국공산당 제12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폐막된 날인 1978년 12월 15일 중미간의 관계정상화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당시 양국 관계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1972년부터 정상화의 과정에 접어들었고, 양국 관계의 발전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처하는 전략적 협력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안보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줄이고 내부의 경제문제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으며, 중국 지도부는 새로운 실험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동시에 미국으로부터의 자본·기술 도입과 미국 시장으로의 접근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 특히 1980년 미국이 중국에 최혜국대우를 부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중국의 대외경제부문의 발전에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중국은 사회주의국가들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80년 8월에 션젼(沈-) 등에 설치된 경제특구도 이러한 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북한이 개혁적 노선을 모색하던 80년대 이후에는 북미 사이에 적대적 관계가 청산되기는커녕 핵·미사일 개발문제를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이 계속 심화되었다. 1991년 이후 일련의 개혁조치는 곧바로 발생한 핵위기로 인해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제네바합의는 이러한 상황에 돌파구가 될 수도 있었으나,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제재조치가 계속되면서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여기에 심화된 경제위기로 북한의 위기의식은 더욱 증가하였다. 중국과는 달리 북한은 개혁적인 정책을 모색하던 싯점에서 체제에 대한 커다란 위협에 직면했던 것이다. 물론 북한의 핵위기는 자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핵위기가 없었다고 북한이 미국으로부터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카드인 군사적 카드를 가지고 외부압력에 대항했으며, 이는 북한의 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대를 중시하고 그를 강화하는 데 선차적인 힘을 넣는다”는 ‘선군정치’와 같은 구호도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정치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이 실용주의적 시도와 사상과 군사를 앞세우는 원칙을 동시에 강조한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들이 직면해 있는 내외의 상황을 고려하면 나름의 합리성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된 정책을 추진하는 한 북한이 개혁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국제환경의 제약을 이유로 삼아 변화에 소극적일 경우 다른 누가 아니라 북한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점은 그동안의 경험이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제환경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면서 북한의 노력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4. 북한의 선택: 중앙집권적인 개혁노선의 모색

 

북한의 개혁적 노력을 제약하던 국제정세는 최근 몇가지 점에서 북한의 변화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첫째, 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94년의 제네바합의와 페리보고서를 거치면서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북미관계가 정상화의 방향으로 발전하여 작년에는 최초로 미 국무장관의 북한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둘째로는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이들 국가의 개혁이 시작된 이후 북한은 이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99년 이후 북한과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을 뒤로 하고 현실주의적 이해관계를 기초로 활발한 고위급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관계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셋째, 남한도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비교적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발전은 북한에 대한 외부의 위협을 크게 감소시켰다. 최근 미국에 부시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북정책에 강경기류가 흐르고, 중미관계가 악화되면서 아시아에 대결구도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도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는 안정적인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지나치게 대결주의적인 정책을 계속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는 문제는 북한이 현재의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할 것인지, 그리고 변화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지 등이다. 북한은 목전의 외화획득이나 원조를 얻는 데 촛점을 맞춘 개방전략에서 벗어나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병행할 때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지나치게 서구식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개혁의 결과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을 개혁의 전제로 생각할 경우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보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따라서 북한의 개혁, 특히 초기의 개혁에 대해서 좀더 현실주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수령·당·인민대중의 통일이라는 이름하에 수령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든 유일체제는 현재 북한의 새로운 변화가 역동성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북한이 진정한 변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일체제가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북한의 개혁이 유일체제를 무너뜨린 뒤에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중국이 개혁·개방 초기에 진행한 정치개혁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소련이나 동구의 변화와 비교하면 중국은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을 추진한 경우에 속한다. 물론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을 추진하기 위한 일정한 정치적·사상적 정비가 선행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중국공산당 제12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가사업의 중점을 정치사업에서 경제사업으로 이동시킨 것과, 1978년에 진행된 이른바 ‘실천표준논쟁’에서 실용주의적 사고가 승리한 것을 들 수 있다.7 이에 따라 중국 내에서 각 부분과 개인이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농민들이 농가경영책임제의 도입을 시도했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제도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 붕괴된 정치·행정제도를 정상화시킨 것 이상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지금도 정치적 다원주의와 다당제의 도입을 반대하면서, 4개항 기본원칙의 견지(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무산계급독재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맑스·레닌주의와 마오 쩌뚱 사상의 견지)를 강조하며 전통적인 사회주의 정치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식의 안정적인 변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본다면, 북한의 정치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더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8 정치적 다원주의나 다당제의 도입은 개혁의 전제이기보다는 개혁의 결과로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다. 북한의 정치적 변화와 관련해서는 경제개혁과 경제발전을 확고한 사업의 중점으로 삼는 것에 대한 정치적 합의의 형성, 경제적 실용주의의 등장 여부를 더욱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어느정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우선 강성대국의 건설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중요성도 크게 강조되고 있다. 2001년 1월 1일 발표된 당보, 군보, 청년보의 공동사설에서는 “국가경제력은 사회주의 강성부흥의 기초이다. 불패의 군력과 정치사상적 위력은 반드시 강력한 경제력에 의하여 안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 정치의 원리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21세기에 상응하는 국가경제력을 다져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업은 없다”라고 경제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가경제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월 4일자의 『로동신문』은 “21세기 조선은 새로운 관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반드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높이에서 모든 문제를 보고 해결해야 한다”는 등의 김정일의 말을 보도하였으며 남한에서는 이를 ‘신사고’라고 불렀다. 또한 그동안 사회주의국가들의 개혁을 강하게 비판해온 북한의 태도도 변화하고 있다. 쥬 빵짜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올해 1월 20일 외신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김 위원장은 특히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샹하이의 눈부신 발전 모습을 보고 중국공산당과 인민의 선택이 옳았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제적 실용주의의 가능성이 경제개혁의 추진으로 발전하지 않고 있는 것은 현재 북한 개혁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북한은 최근 2〜3년간 중공업 노선을 다시 강조하고, 경제관리에 있어서 중앙의 권한을 강화하는 등 경제개혁에 역행하는 듯한 움직임도 보이는데, 이는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다. 물론 이는 심각한 전력부족으로 공장의 가동 자체가 불가능하고, 경제위기의 와중에 경제질서가 혼란에 빠졌던 상황에 대한 일시적인 대응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사업에서 실리를 강조하면서도 시장 기능의 도입에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북한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고, 비교우위를 지닌 산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따라잡기 전략’보다는 정보통신산업 등 선진적 산업의 집중적인 발전을 통한 ‘도약식 발전전략’에 주력한다는 인상도 주고 있다. 그러나 정보통신 분야는 시장의 변화도 많고 경제 주체의 창조성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 요구되기 때문에 정부의 통일적인 지도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개혁이 이륙단계로 돌입하기 위해서는 설계된 프로그램에 의존하기보다는, 경제주체들의 자율적인 선택의 폭을 넓히고, 여기서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필요하다. 이를 무시한 중앙집권의 강화는 개혁의 ‘이륙’을 늦추거나 또다른 자원낭비만을 가져오는 경착륙으로 끝을 맺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북한의 시장화는 중국과 비교하면 좀더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경우 초기 대외개방과 함께 지방정부의 경제적 권한을 높여 시장화를 촉진하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협소하고 중앙집권적 씨스템이 계속 유지되어온 북한의 경우 중국과 같은 지방분권화 전략이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나진·선봉과 같은 지역의 개방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전국적인 파급력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파급력을 걱정하여 개방의 폭을 제한하면 지역개방전략 자체가 큰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게 된다. 그리고 내부시장의 규모나 사회간접시설이 경쟁적 위치에 있는 중국·베트남 등의 국가들에 비해 뒤처져 있기 때문에 지방분권적인 개혁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주변부에서 시작해 중심을 포위하는 전략보다는, 중심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개혁에 요구되는 자원을 증가시키고, 이를 필요한 곳에 배분하는 전략이 더 적합할 것이다. 중앙의 주도 아래 새로운 경제관리방식을 도입하는 동시에 일정한 경제적 자원과 권한을 시장에 넘겨주고 중심부에 가까운 지역을 과감하게 개방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개성공단 건설계획은 북한이 주변부의 개방을 넘어서는 전략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경제개혁과 병행된다면 정보통신 분야 중심의 정책을 실시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즉, 중앙집권적 개혁이 반드시 시장화와 배치되는 것은 아니며, 시장화와 함께 추진될 때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5. 북한 개혁을 넘어서

 

앞에서 강조했듯이 북한의 의미있는 변화는 시장화로부터 시작될 것이고, 이는 북한경제의 세계시장 편입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화 개혁의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북한의 시장화가 통일시대의 남한과 북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현재 북한문제와 관련해 ‘시장’의 극복을 고민하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 사치일 수 있다. 그러나 분단구조 속에서 형성된 남북간의 상호의존적 관계로 인해 북한의 변화는 단순히 북한이 아니라 한반도 사회의 새로운 질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변화에 대한 좀더 미래지향적인 고민도 필요하다.

전통적 체제를 고수한 북한의 실패는 시장화를 순조롭게 추진한 중국의 성공과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이 나라의 경제적 실력과 대중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키고, 잠자는 거인을 국제무대의 주역으로 다시 등장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경제개혁의 성공적 추진은 다원적인 경제구조와 일원적인 정치체제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것 이외에도 다른 사회적 부작용을 가져오고 있다. 빈부격차, 실업, 범죄, 환경 문제들은 시장화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당분간은 그 심각성이 더해갈 것으로 보인다. 남한도 금융위기 이후 과거의 성장모델이 붕괴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시장화·세계화의 가속화를 통해 이를 해결해가자는 자유주의적 대안과 시장화·세계화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좌파적 대안이 여전히 충돌하고 있으나, 입장의 차이를 떠나서 시장에 대한 지나친 개입에 의해 발생한 문제와 시장화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구별이 필요하다. 그리고 후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시장’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변화는 시장의 확산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되며, 분단구조의 질곡을 깨고 남과 북이 상생하는 새로운 통합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이미 식상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민족경제’라는 화두를 다시 끌어낼 필요가 있다.

남북정상은 작년 6·15공동선언에서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킨다”고 합의한 바 있다. 물론 여기에 사용된 ‘민족경제’의 개념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민족경제는 세계경제의 일체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더이상 의미가 없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족의 통합이 현실적인 과제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민족경제라는 개념은 남과 북의 경제협력이 시장의 확산과 통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목표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하나는 남과 북의 경제협력과 통합이 또다른 불균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현재 남과 북의 경제협력 모델로서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과 자원을 결합하는 것이다. 남과 북의 상이한 발전단계와 경제구조를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발상이며, 양 지역에 적지 않은 경제적 이득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자원배분의 효율성만을 고려한 결합은 남과 북 사이의 불균형을 구조화하고 북한지역을 내부 식민지화하여 또다른 사회적·민족적 갈등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북한의 우려가 커지면 경제협력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 존재하는 자원만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뛰어넘는 경제협력, 민족경제의 발전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이 현재 국제경쟁에서 특별한 잇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이 양자가 결합된다고 민족경제의 경쟁력이 크게 향상될 가능성도 높지 않다. 따라서 현존하는 자원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결합의 파급효과를 극대화하고 민족경제 역량의 강화에 공헌할 수 있는 협력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제협력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동안 남한이 추구해온 외향적 발전모델을 북한이 그대로 적용하더라도 성공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다. 우리 주변만을 보아도 이미 중국이 수출대국으로 등장하였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나름의 비교우위를 가지고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지역의 국가들 사이에 국제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과잉생산·무역마찰 등의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2〜3년 전부터 내수 중심의 발전전략을 제시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과 북은 단순히 해외시장에서의 경쟁만을 고려한 경제협력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기회를 찾아나가는 노력을 더욱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 남북간의 경제협력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면 북한도 더욱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며, 남한경제도 강요된 시장화와 세계화를 넘어서는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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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80년대까지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정치적 민주화, 사유화와 가격자유화 프로그램을 성공적인 개혁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꼬르나이는 60년대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전통적 사회주의체제 내에서 진행된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Janos Kornai, The Socialist System (Oxford: Clarendon Press 1992).
  2. 80년대 북한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전환은 스즈끼 마사유끼(鐸木昌之), 유영구 옮김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서울: 중앙일보사 1994) 240〜50면 참조.
  3. 「북한, 중국, 베트남 투자환경 비교」, 『연합뉴스』 1996.7.18.
  4. 통계수치는 『북한연감(2001)』 607〜609면 참조.
  5. 예를 들면 1979년 일부 학자들은 이미 ‘계획이 있는 상품경제론’을 제기하였으나 곧 쳔윈(陳雲) 등의 제지를 받았고,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당대회에서 ‘계획이 주이고, 시장으로 보충한다’는 것이 공식입장으로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중국 내에서는 ‘자산계급 반대화’ 등의 사상운동이 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80년대 중국의 사상통제에 대해서는 李洪林 『中國思想運動史(一九四九〜一九八九)』(香港: 天地圖書 1999) 참조.
  6. 중국식 개혁의 특징으로 점진적 과정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개혁정책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즉, 중국에서는 지도부의 설계에서 벗어난 영역으로부터 개혁의 주된 동력이 형성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턴은 이러한 발전과정을 “계획 밖에서의 성장”이라고 요약하였다. Barry Naughton, Growing out of the Pla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7. 특히 후자는 노선과 정책을 실천적 결과에 따라 재평가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마오 쩌뚱(毛澤東)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이 논쟁을 주도한 후 야오빵(胡耀邦)과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80년대 중반부터 보수파의 반격으로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8. 물론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존재한다. 주로 미국 내에서 제기되는 ‘중국위협론’은 중국의 정치체제가 계속 독재체제로 유지되고 있으며 미국과 다른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을 중국이 장래 미국의 이익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등장할 근거로 제시한다. Richard Bernstein and Ross H. Munro,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 (New York: A.A. Knopf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