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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통일과정과 개혁과제

 

침묵과 기억의 역사화 : 여성·문화·이데올로기

 

 

조은 曺恩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절반의 경험 절반의 목소리』 등이 있음. chouhn@benfranklin.hnet.uci.edu

 

 

이야기를 시작하며

 

원고청탁을 여성·문화·이데올로기라는 주제로 받고 고민했다. 남북정상회담 1주년 특집이라는 점에서 탈냉전 또는 탈분단(포스트분단) 시대의 여성과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켜 문제화하는 것인지 여성의 입장에서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문제화하는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모두 필자 자유라고 했다. 망설이다가 그 자유라는 말에 청탁을 받아들였다. 우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기로 했다. 통상적인 사회과학적인 논증적 글쓰기나 정책 제안을 내놓는 대신 탈분단(포스트분단)시대의 여성·문화·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일상 속의 분단/탈분단을 읽어보는 일로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 지점을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로 잡았다. 정치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탈분단의 서막이라면 사회문화적으로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그 지점이 될 것이다.1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의 메타포를 읽고 일상을 통해 분단/탈분단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텍스트를 읽어보기로 했다. 이는 여성·문화·이데올로기에 대한 복잡한 지점과 접점을 읽는 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1.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 뒤집어 읽기: 피와 눈물의 메타포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많은 언론들이 ‘눈물의 드라마’로 표현했다.2 그러나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는 ‘눈물의 드라마’가 아니라 이중 삼중의 이율배반적 메타포로 구성된 ‘피’와 ‘눈물’의 드라마다. 민족상잔의 피를 흘린 지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이 ‘드라마’는 ‘피 흘리고 눈물 흘린’ 드라마치고는 너무나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 피와 눈물로 문제를 호도한.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사회의 리얼리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드라마 자체는 정직하기는 하다.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하여 가장 흔하게 등장한 단어들은 한민족, 핏줄, 혈육간의 정, 눈물, 수절, 어머니였을 것이다.3 이는 다시 아버지(아들)의 피와 어머니(여성)의 눈물로 구체화된다. 화제가 된 기사들을 요약해보면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가 봅니다. 50년간 한번도 뵙지 못했는데도 바로 ‘아버지구나’ 했어요”4라는 아들 옆에서 50년간 수절한 어머니는 울고 있다. 또는 남쪽에서는 딸뿐이어서 큰딸이 제사를 지내왔는데 월북한 남동생이 나타났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외아들인 동생이 제사를 모시게 되어 기쁘다”는 기사와 북쪽의 장남이 나타나 차남이 제사를 북쪽으로 보낸 이야기가 이산가족 상봉 후의 추석 화제 기사이다.5 한편 어머니는 북에 간 아들을 그리워하던 심정을 담은 시로 아들을 통곡하게 하고, 북의 계관시인은 「어머니」라는 시로 울음바다를 만들었다.6 역사적 가족 상봉이 있던 날 신문 1면은 온통 ‘노인이 된 아들 눈물 닦아주는 노모’의 사진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신문 하단이나 한귀퉁이에는 감동적 사연만 있지 않다. 상봉자 명단이 알려지면서 적십자사에 걸려온 전화에는 북에 아들을 두고 월남한 뒤 이혼하고 각자 가정을 꾸렸는데 북의 아들이 가족상봉 신청을 하자 “아버지 성을 물려받은 우리가 아니면 누가 만나느냐”는 아버지 쪽 가족의 주장에 어머니 쪽은 가슴앓이만 한다는 사연이 접수되었다. 그리고 북한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 월남한 사람과 결혼해 3남매를 낳고 50평생을 보낸 한 70대 할머니가 “요샌 바깥사람이 나와 우리 아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재산도 불쌍하게 살아온 북의 가족들에게 다 물려주겠다’고 한다”는 하소연을 해오기도 했다.7

한편 “50년 수절 하며 당신만 기다린” 또는 “3일 자고 떠난 남편 50년 기다린”8 부인들이 1,2차 상봉 때 모두 화제가 된 반면, 10년이나 35년밖에 수절하지 못한 부인들은 ‘미안해서’ 상봉장소에 나오지 않아 화제에 올랐다. 남쪽 언론에서는 아들을 두고 내려와 재혼해서도 서로 아이도 갖지 않은 부부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남편은 상봉기간중 남에 와서 재혼해 얻은 부인과 북에 남아 50년간 재혼하지 않고 살고 있는 부인을 함께 싸안고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한편 남편이 왔다는데 재가했기 때문에 ‘미안해서’ 상봉을 거절하며 상봉장소 주변을 맴돌던 한 부인의 얼굴을 가린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북에서 재혼한 그 남편은 “이해하디요”를 연발하는 아량을 베풀었고. 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신청자 북측명단이 나왔던 날 저녁 프라임타임 뉴스시간에 TV 화면은 ‘50년 수절’이라는 대문짝만한 글씨에 번쩍번쩍한 스포트를 주면서, 북측 상봉신청자의 남쪽 가족 중 유복자 딸과 50년간 수절한 부인을 비춰주었다. ‘50년 수절’한 부인에게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좋겠다”고 말했고 그 부인은 “좋아요?”라고 되물었다. 50년 만에 남편을 만나는 일이 과연 “좋은 일인가?”라고 이 시골 부인은 담담하게 되묻고 있었다. 부인은 울지 않았고 유복자 딸만 울고 있었다.

페미니스트그룹 일부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가족드라마화한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9 그러나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가족드라마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구조가 극 안에서 드러나지 않은 데 있다. 아니 갈등구조를 드러내는 대신 이를 은폐하는 메타포를 동원한 데 있다. 피와 눈물의 메타포. 미디어의 보도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피와 눈물로 그동안의 모든 문제를 감싸안는 아니 덮어버리겠다는 언설의 정치성이다. 여기서 피와 눈물이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눈물로 형상화되거나 구체화된 것은 별로 특기할 일도 아닐지 모르겠다. 피와 눈물은 국가·민족과 고향, 초남성적 국가와 초여성적 모성, 이념에 산 아버지(아들)와 울고 견디는 어머니(딸), 남과 북에 모두 자식을 둔 남편과 50년씩 수절한 아내로 끝없이 확장된다. 후자는 전자를 때로 감춰주고 때로 정당화시켜준다. 따라서 우리는 ‘피와 눈물’의 드라마 대신 눈물의 드라마만 보게 되고 이에 감동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를 뒤집어 읽지 않는다면, 피와 눈물이 어떻게 경합하는가를 볼 수 없다.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는 피와 눈물이 그리고 민족과 모성이 얼마나 이율배반적 드라마의 장인가 또는 이율배반적 공모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드라마이기도 하다. 민족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상상공동체’인가 또는 이율배반적 담론의 장인가를 굳이 여기서 논증할 필요는 없다.10 또한 모성 자체가 얼마나 이율배반적 담론의 장인가를 논증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모성이 어떤 때 어떻게 국가·민족의 문제와 묶어져 담론화하는가이다.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를 보면서 몇몇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학자나 작가 들이 쓴 칼럼에서조차 ‘모성의 힘’을 분단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지점으로 부각하고 있다.11 모성으로 분단을 싸안을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모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다. 모성은 대체로 정치적 담론에서는 추앙받는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모성이 신성시되거나 추앙받는 것은 아니다. 전쟁과 위기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모성은 가장 추앙받아왔는데, 그 예로서 나찌 때는 모성이 엄청나게 찬양되었다. 특히 군대에 보낸 ‘공화국의 어머니들’은 신성한 모성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젖먹이와 돌볼 아이가 있는 어머니는 신성한 모성으로 추앙받지 못했다.12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들을 위한 정책도 없었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그렇게도 감동을 주던 모성은 ‘모성보호법’에 와서는 보호가 유보되는 모성이 된다. 즉, 모성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도 신성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민족 또한 마찬가지다. 신성하게 하는 담론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컬트(cult)가 있을 뿐이다.

 

 

2. 상봉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 가족사: 여성들의 이야기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에 나올 일이 없는 두 가족 아니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첫째 사례는 학생지도 노트에서, 그리고 둘째 사례는 서울의 한 가난한 가족에 대한 현장연구 구술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는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자기들 좋아하는 연속극이나 TV 프로그램 못 본다고 불평했다는 젊은 세대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20대의 딸과 60대의 어머니, 그리고 20대의 손녀와 70대의 할머니가 분단을 매개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철없는 젊은 세대’는 분단의 역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이다.

 

사례 1: 20대의 딸과 60대의 어머니

가족사회학 수업을 들은 여학생이 한 학기 남겨놓고 휴학을 해야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다. 머리는 블리치를 해서 빨간 물을 들였지만 수업은 열심이고 성적도 좋았다. 등록금 준비가 어렵거나 남자친구와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해외연수를 가기 위해서거나 대강 그럴 것이었다. 세번째였다. 그런데 다른 고민거리를 상담해왔다. 유학가는데 호적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원조회에 결렸다고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 물론 일종의 ‘신원조회’에 걸리기는 했지만.

재학중 해외연수를 가려고 한 것은 대한민국을 우선 빠져나가고 싶어서였다. 졸업하고 유학가려면 재산보증을 서줄 사람도 마땅찮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20대 여자들에게는 미국 비자가 잘 안 나온다고 해서 재학중 단기 해외연수로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모두들 쉽게 떼어오는 호적증명서 공증을 받는 일에서 그녀에게만 문제가 생겼다. 스물세살의 그녀가 여권수속을 하면서 부딪친 문제는 뜻밖에도 보호자의 부재 아니 부모의 부재, 그리고 호주의 소재 불명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세 번 결혼했고 그 세번째 결혼에서 그녀를 낳았지만, 본부인이 아니어서 그녀를 생부와 본부인의 호적에 올려놓았다. 법적으로는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는 관계가 없다. 그녀의 생부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까지 호주는 생부의 큰아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이복오빠도 3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의 호주는 그녀 생부의 큰아들의 큰아들이었다. 그런데 생부의 자식들과 연락이 끊겨서 호주가 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여권을 신청하기 위해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호주가 된 조카의 고모라는 신분을 찾기 위해 그 조카의 도장을 받는 일이었다. 그 조카 호주는 그녀보다 열다섯살이 많았다.

그때부터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녀 어머니의 삶의 궤적을 거슬러 밟아보기 시작했다. 그녀 어머니의 첫번째 결혼은 열여덟살 때였다. 1952년 11월이라고 되어 있다. 그때 그녀 어머니는 서른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열여섯에 혼자 월남했다. ‘월남’이 뭔지 모르고 융단폭격 속에서 가족과 헤어져 배를 타게 되었고 인천항에 내렸다고 했다. 혈혈단신 월남해서 몸 붙일 데도 없고 춥고 배고프고, 몸을 파는 것보다는 그래도 영감한테라도 몸을 의탁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시집을 갔다. 그녀 어머니의 첫번째 남편은 스무살 된 아들을 데리고 월남해서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큰오빠와 큰언니는 이 집 소생이다. 그런대로 생활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9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떴다. 남편이 죽자 그녀 어머니는 아들딸을 데리고 약간의 재산을 받고 그 집에서 나와야 했다. 장성한 영감의 아들이 재산을 거의 차지했으므로. 아이 둘 데리고 재산도 별로 없고 일가친척도 없고 학벌도 없이 스물일곱에 혼자 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별로 없었다. 정식으로 혼인을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지만, 작은언니의 성이 큰오빠, 큰언니와 다른 것으로 보아 재혼을 했던 것 같다. 그녀 출생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작은언니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큰언니와 작은언니가 열세살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곧바로 재혼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작은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나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는 전혀 모른다. 사별했는지 이혼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생부를 만났을 것이다. 그녀와 작은언니는 여섯살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은 혼자 어떻게 지냈던 것 같다. 서른아홉에 예순한살의 남자와 그녀를 낳았다. 본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5년 만에 헤어졌다고 했다. 그 뒤로도 그녀 어머니는 몇번 더 남자들과 살림을 차렸다. 의탁할 곳이 없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녀가 대학에 온 뒤로는 지방에서 의류총판을 하는 아저씨와 살고 있다(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없다). 딸이나 아들 집에 얹혀사는 것보다는 그쪽을 택했다. 물론 얹혀살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대학 오면서 주민등록을 아예 작은언니 집으로 옮겼다. 작은언니와 그녀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성씨는 같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학생의 가족사 쓰기 숙제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았다. 가족사 숙제 리포트는 아버지는 3남 2녀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단신 월남했고 자기는 1남 3녀의 막내라는 얘기로 시작해서,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오빠 언니들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가와 가족관계가 얼마나 돈독한가 등을 쓴 것이 주 내용이었다.

 

사례 2: 70대의 할머니와 20대의 손녀

상계동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일흔여덟의 한 월남한 할머니. 이 할머니는 남북이산가족 상봉 드라마에 나올 일이 없다. 북쪽에 혹 남동생이 생존해 있을까 연락을 취했지만 확인불가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50년 수절하기는 했다. 남편은 월남 도중에 병사했다. 세살·여섯살짜리 아들딸을 데리고 혼자 된 것은 스물여덟이었다. 이 할머니 친정과 시댁은 모두 청진에서 여관을 하는 집이었다. 6·25 나기 전 소련군이 북쪽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관에 몰려와 색시를 내놓으라고 소리지르는 바람에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버지가 “여기 있으면 젊은 며느리 큰일 당하겠다”면서 경상도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등을 떼밀었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의 개인사를 구술받았다. 서울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용산 판자촌에 살면서 마장동에서 고기를 떼다가 노점에서 팔던 때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월남한 여동생도 만났다. “사모님, 고기 사세요. 사모님, 고기 사세요. 얼굴도 안 보고 무조건 사모님 사모님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아줌마 청진에서 안 왔어요? 그러는 거라. 그래 청진에서 왔는데 왜 그래요. 그때까지도 얼굴도 안 쳐다보고 퉁명스럽게 대꾸했지. 고기 파는 데만 관심있으니까 그런 질문은 귀찮아서. 그런데 그 다음에는 누구누구 모르냐고 우리 아버지 이름을 대는 거라. 그때서야 얼굴을 바짝 들고 아줌마가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알아요, 그랬지. 빤히 보더니 내 이름을 대는 거라. ◯◯◯ 아니냐고. 난 그때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이…… 그래 보니 내 여동생인 거라.” 그렇게 만난 여동생이지만 서로 먹고 살기 바빠 잘 만나지도 못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유치장 신세를 진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루는 나를 포승으로 묶은 거라. 허가 없이 야미(암거래)로 장사했다 이거지. 하도 화가 나서 남한 오면 좋다고 해서 왔는데 다른 대책은 다 있는데 과부대책은 왜 없냐고 대들었지. 그랬더니 ‘잡아넣어’ 그러는 거야. 김일성 물 먹었다고. 요는 내가 거기서 중학까지 나왔으니까 김일성 물 먹어서 말을 잘한다 이거야. 그 전까지는 잡아넣으라고 안했어.” 노점상 단속한다고 몇시간씩 잡아놓기는 했어도 유치장으로 보내지는 않았는데, 그렇게 해서 며칠인가 유치장 신세를 졌다고 했다. 물론 그 뒤로는 그런 식으로 따지는 일은 그만두었다. 더이상 유치장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이 할머니는 사당동 달동네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재개발로 밀려날 때까지 그곳에서 산, 거의 유일한 사당동 산동네의 산증인이다. 지난 50년 동안에 이 할머니의 주거사를 보면 첫 15년은 부산 초량 판자촌을 시작으로 용산, 양동 난민촌에서 살았고, 다음 25년은 사당동 달동네에서 살았다. 나머지 10년은 현재까지 상계동 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이 아파트에서 쉰세살의 건설노동을 하는 아들과 스물아홉, 스물여섯, 스물세살의 손자·손녀 등이 함께 살고 있다. 손자·손녀만이 아니라 손녀가 낳은 두 증손녀까지 도합 일곱 명이 살고 있다. 며느리는 가출한 지 오래다. 손녀는 이제 스물여섯인데 결혼식은 안 올렸지만 결혼해서 한살·세살짜리 딸이 있다. 자기들의 단칸 셋방보다는 할머니 임대아파트가 아이 키우기에 훨씬 나아 지하 셋방에 남편은 남겨두고 아예 거처를 옮겨와 있다. 아이가 둘이나 되어 일거리를 못 찾아 집에서 핀 만드는 부업을 조금씩 하고 있다. 50년 전 스물여덟 때의 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이 있다는 것을 빼면.

 

3. 탈분단 텍스트로서 일상

 

연구년을 지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어바인(Irvine) 내 아파트 방에 월북 시조시인 『조운(曺雲) 시조집』이 우연찮게 놓이게 되었다.13 내 방을 찾아온 사람들은 내 방 탁자에 놓인 그 책을 무심결에 보게 되어 있다. (방에 다른 책은 거의 없으므로 눈에 띄게 되어 있다). 내 방에 자주 놀러 오는 사람들은 아이들만 데리고 이곳에 온 ‘젊은’ 엄마들이다. 그들은 내 방에 와서 그 책을 보고 잠깐 눈을 반짝였다가 곧 시선을 옮긴다. 그 순간을 포착하게 되었다. “아, 그거 조운 시조집이에요. 제 책 아니에요.” 그러면 대개 “아, 선생님 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라고 말끝을 흐렸고. 나는 마치 큰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아 다시 덧붙였다. “그 책이요. 서문 쓰신 분이 그 지은이와 제 이름이 비슷하다고 보내주신 거예요. 사실은 굉장히 유명한 시조시인인데, 우리는 잘 모르죠. 월북 시조시인이거든요.” 한 열흘 동안에 거의 같은 이야기를 네 명의 엄마에게 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이들 네 명이 모두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난 이들을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그리고 네번째 엄마라고 불러야겠다. 이들은 모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두고 있는 30대 후반이다. 1960년대 초반에 출생했고 19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다. 세대로 말하자면 386세대다. 내 책이 아님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이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거예요. 월북한 시조시인이거든요. 우리 문학사에 이름이 오를 만큼 유명한 분인데. 얼마 전 복권이 되어서 이쪽에서 나온 시조집이에요”라고 덧붙였다. 첫번째 엄마의 반응은 아주 명쾌했다. “그분 (북쪽) 가서 후회했겠지요.” 그게 다였다. 물론 시조집을 들춰보지도 않았다. “글쎄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나는 보통 때 이 엄마를 좋아한다. 모든 것이 참 단순 명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이를 초등학교부터 미국에 유학시키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뭐 그런 거였다. 이틀쯤 뒤에 두번째 엄마가 왔다. 이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약간 우물쭈물했다. “아 그래요. 사실은……” 뜸을 들였다. “이런 이야기 하면 안되는데……” 다시 뜸을 들였다. “사실은 저희 친정아버지가 약간……” 그러면서 시조집을 몇장 뒤적였다. 그러고는 말끝을 흐렸다. “모르겠어요. 젊었을 때, 엄청 당했다는데…… 우리한테는 이야기도 안하시고. 언젠가 몸이 아주 편찮아 거의 돌아가시게 되었을 때, 어머니한테만 유언 비슷하게 이야기하셨대요. 모년 모월 모일 무슨 신문에 난 기사를 보라고.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었어요. 아버지는 회복되셨고 우리는 각자 일로 모두들 너무 바빴거든요. 아직도 우리는 그 기사 내용을 묻지도 않고 찾아보지도 않았어요. 짐작만 할 뿐이죠. 뭔가 사상문제와 연관되었을 거라고.” 그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한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는데 갑자기 털어놓게 되었다면서 난처하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월북 시조시인이라는 말에 그리고 그 책을 갖고 있는 내게서 약간 친근감을 느낀 나머지 너무 나가지 않았나 하는 걱정 같은 것이 그 얼굴에 스쳤다. 아마 미국땅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잠깐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번째 엄마는 “아 그래요”가 다였다. 안다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네번째 엄마 차례다. 그도 『조운 시조집』이 내 책인 줄 알고 관심을 보였다가 이름이 달라서 아니구나 했다고 그랬다. 그런데 월북 시조시인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아무 이야기도 안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아무 말도 안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절벽 앞에 선 느낌과 비슷한. 그러다가 나는 “「향수」라는 노래의 정지용 시인은 아세요? 왜 이동원과 박인수가 같이 부른 「향수」라는 노래……” 하면서 그들의 굳은 표정을 풀어보고자 했다. 다행히 「향수」라는 노래를 안다고 했다. 좋아한다고는 안했지만.

한참 뒤에 이 네 엄마들의 반응은 이들 세대가 ‘월북한 사람들’ 그리고 북한에 대해 갖는 네 가지 심정적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들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1년이 지난 지금 북한에 대한 그리고 월북한 작가나 지식인에 대한 전반적인 우리 의식이나 태도의 현주소일 수도 있다. 이들이 단지 ‘아줌마’들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덧붙인다면 이들 엄마들은 모두 초등학교 아이들을 미국에 데리고 와 교육시키고 있고, 아이들을 아니 아들들을(우연히도 이들 엄마들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 계속 이곳에서 교육시켜야 할까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국적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유연적 시민권(flexible citizenship)14의 최전선에 있다. 민족 또한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 중 한 엄마가 말했다. “우리들이 모이면 그래요. 우리 애들 안됐다고요. 실제로 애들한테 이렇게 말도 해요. ‘너희도 참 안됐다. 태어나려면 미국땅 백인 가정에 태어날 것이지’라고요.”

이들에게 남북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적은 없다. 이들이 처음 북한기가 나온 TV를 보았을 때는 어땠을까를 상상해볼 때는 있었다. 만약 집안에 어른들이 함께 산다면 60대 중반에서 70대쯤은 될 텐데. 6,70대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30대 부부,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함께 그 붉은 별과 푸른색 줄이 선명한 북한기가 처음 뜬 9시 뉴스를 보았다고 해보자. 초등학교 아이들은 ‘저게 어느 나라 깃발이지’라고 엄마 아빠에게 물었을 것이고(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런 것은 당연히 모를 것으로 생각하고) 엄마 아빠는 미루어 짐작하지만 그런 깃발을 본 적도 없고(보았다면 큰일이다) 배운 적도 없어서 우물쭈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거 인공기(인민공화국기) 아니야?”라고 아는 척하고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공기는 그냥 쉽게 발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발음해서는 안되는 단어이다. 북한기도 발음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이들 가족은 뉴스를 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4. 기억·상처·침묵·말하기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국의 매스컴을 타게 되었을 때 한 어머니의 당장 급한 걱정은 그동안 “괴수라고 우리 아이에게 설명했는데 다시 물으면 뭐라고 말해야지요?”였다.15 탈분단시대의 가장 큰 숙제는 어쩌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로 축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숙제는 ‘말할 수 없음’ 또는 ‘말하고 싶지 않음’을 어떻게 풀 것인가이다. 냉전구도가 깨지면서 새로운 역사의식,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와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16 이 문제를 제기한 한 여성학자는 최근 한국의 ‘정통’ 역사학에서는 “현대사가 금기가 아니라 여성사가 금기라고 말해진다”고 지적한다.17 이는 현대사와 여성사를 따로 분리시켜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여성화’(gendered silence) 또는 ‘여성화된 침묵’이 현대사의 민감한 축 뒤에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여성의미에 대한 침묵 그리고 여성들의 침묵’이 현대사의 폭력성의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곧 새로운 역사의식과 언어와 감수성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침묵의 여성화’ 또는 ‘여성화된 침묵’을 깨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침묵의 여성화’ 또는 ‘여성화된 침묵’의 폭력성은 쉽게 그리고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가부장적 유교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에 의해 은폐되어왔다.18 여성적 주체가 새로운 역사의식과 언어와 감수성과 맺는 관계는 분명 하나의 숙제이다. 냉전을 경험한 한국사회 여성 의식의 식민화는 훨씬 복합적이고 다중적이다. 이때 여성적 주체에 주목하는 것은 여성이 그동안 분단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이중 삼중의 피해자이면서 타자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여성·문화·이데올로기는 문제의 영역이고 여성의 주체성은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이때 여성적 주체는 전통적 모성 이미지를 확대하거나 그 이미지에 안착하는 의미가 아니라, 주변적 하위민중(subaltern)으로서이다. 헤게모니를 쥐지 못했던 집단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와 감수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감수성만이 구체적이고 비판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탈분단의 일상은 ‘침묵’만이 아니라 ‘기억’을 문제화해야 하는 중요한 역사적 지점이기도 하다. 세대는 역사적 격변기를 산 우리에게 생물학적 의미의 연령차가 아니며 연령차의 의미보다 훨씬 크며 역사적 경험이 다른 그리고 기억의 차이를 갖는 범주이다. 전쟁의 기억이 없어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남의 일 같은 ‘철 없는 젊은 세대’는 정신적 상처(trauma)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전쟁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정신적 상처에서 자유로울지는 모르지만, 그 자유는 분단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기억의 부재, ‘기억 없음’의 자유이다. 그 ‘기억 없음’의 자유는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이거나 ‘현재의 과거’를 침묵시킨 ‘망각의 정치’의 산물이다. 지배집단은 필요한 순간에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의미와 목적을 위해서 어떤 향수(nostaligia), 예를 들면 가족·모성 등, 정치적·문화적 생략 장치, 보편적 망각 등의 장치를 동원해왔다. ‘망각’과 ‘역사적 오류’는 19세기말 국민국가의 형성, 그리고 20세기 나찌 독일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19 21세기 한반도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는 오류이다. 분단세대의 죽음으로 분단의 구조가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중요한 것은 기억이 현재의 일부분일 뿐 아니라 미래를 드러내는 현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눈물의 드라마는 온 국민을 상대로 한 씻김굿의 효과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오랜 침묵을 또다시 제도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피와 눈물의 메타포는 감상을 가치증식시킬 수는 있지만 기억과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망각의 정치에 포섭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를 방치하고 분단의 기억과 경험을 역사화하지 않는다면 분단세대와 탈분단세대들은 소통할 수 없다. 역사를 공유할 수 없으므로. 그리고 정체성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침묵을 깨는 일 그리고 재기억화(re-memory)하는 일은 분단의 경험을 역사화하는 장이다. 기억이 없는 정체성과 주체의 형성은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이 없이 문화 또한 있을 수 없다. 문화산업 때문이 아니라 정체성 때문에 문화는 점점 중요해지고, 또한 정치이론의 중요한 영역이 되고 있다.20 정체성과 주체에 대한 관심은 기억과 역사와 상처의 연관성에 주목하게 할 뿐 아니라, 주체와 상처를 개인화하지 말고 역사화할 것을 요구한다. 산자만이 기억하고 침묵을 깰 수있다. 기억하고 침묵을 깨는 일은 살아 있는 자들의 역사의 상처에 대한 채무이기도 하다. 분단에 관한 기억과 침묵을 역사화하지 않고 탈분단시대 문화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침묵과 기억을 역사화하는 일이 여성과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문제화시키는 접점이라고 할 때 ‘어떻게’라는 다음 과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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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반인들은 정상회담보다 이산가족 상봉에 더 관심을 보였다. 실제 이산가족 생중계 시청률이 남북정상회담 생중계 시청률을 훨씬 상회했다(『중앙일보』 『한국일보』 2000.8.17).
  2. 예를 들면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눈물의 드라마’가 펼쳐져……”(『조선일보』 2000.8.19) 또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또하나의 드라마”(『한국일보』 2000.8.16), “이산가족 상봉은 각본 없는 드라마”(『중앙일보』 2000.8.16) 등 도하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이 ‘눈물의 드라마’로 표현하였다.
  3. 10대 일간지에서 2000년 1월 1일부터 2001년 4월 30일까지 다룬 남북이산가족 기사 색인을 보면 1천건 중 어머니를 소재로 한 기사가 587건, 아버지 497건, 성묘와 차례상 99건, 수절 45건 등이지만, 사진이 들어간 기사나 화제의 기사는 단연 ‘어머니’와 ‘수절’이라는 소재에 집중되어 있다.
  4. 『경향신문』 2000.12.2.
  5. 『조선일보』 2000.9.10.
  6. 『경향신문』 2000.12.2.
  7. 『동아일보』 2000.8.12.
  8. 『한국일보』 2000.10.9.
  9. 『여/성이론』 3호(2000)에 실린 좌담 「탈분단시대의 가족과 여성—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며」에는 ‘이산가족 상봉은 한민족의 ‘패밀리드라마?’’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10. 박명림 「한국전쟁의 구조, 기원, 원인, 영향」, 박현채 엮음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소나무 1996, 128면 및 최근의 민족주의논쟁 참조.
  11. 예를 들면 이효재(「모성의 힘」, 『한겨레』 2000.8.22)나 정현백(『여/성이론』 3호의 좌담)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작가 박완서(『한국일보』 2000.6.19)와 이경자(『문화일보』 2000.9.7)는 이들 여성학자보다는 훨씬 완곡하게 모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12. Elizabeth D. Heineman, “Whose Mothers?: Generational Difference, War, and the Nazi Cult of Motherhood,” Journal of Women’s History 12권 4호, 2001년 겨울호.
  13. 이 시조집의 서문을 쓴 김재용 교수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유씨 어바인(UC Irvine)에서 어느날 이 대학 동아시아학과 최정무 교수, 교환교수로 머물고 있는 김우창 교수, 그리고 잠깐 겨울방학에 이곳을 들르게 된 원광대의 김재용 교수가 점심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하게 내 이름이 조운씨와 비슷한데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질문을 김우창 교수로부터 받게 되었다. 내 이름을 볼 때마다 조운 선생을 떠올리게 되는데 무슨 관계가 있냐고. 내가 김우창 교수의 수업을 처음 들은 것은 1966년이었다. 내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궁금증을 가졌다면 35년 만에 미국땅에서 그 궁금증에 대한 질문을 받은 셈이다. 35년까지는 아닐지 모르겠다. 어느 싯점에서 그러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는지 확실히는 모르므로. 흥미로운 것은 서울이 아닌 캘리포니아에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서울이 아니어서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답은 “글쎄요. 저희 선친과 가까운 분이셨어요.” 정도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35년 전에 내가 서울에서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그 별게 아닌 대답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집안에서 소곤소곤 듣던 이름이 국문학사에 ‘조×’로 표기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미묘한 느낌 같은 것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조×’로나마 이름이 오른 것은 60년대 후반에 본 어느 문학사였다고 기억한다. 혹시 그보다 뒤일지도 모르겠다.
  14. 이 용어에 대해서는 Aiha Wong, Flexible Citizenship: The Cultural Logics of Transnationality, Durham &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1999 참조. 이른바 세계화시대에 정부(국가)가 유연한 주권 개념을 갖듯이 개인(국민)도 ‘유연한 시민권(국적)의 개념’을 갖게 되는데, 이는 곧 자본축적·여행·이민 등 변화하는 세계적 정치경제 상황에 기회주의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초국적성의 문화적 논리이다. 이들 교육에 열성인 한국 엄마들은 그들이 의식하건 안하건 바로 이 초국적성 문화논리에 포섭되어 있는 셈이다.
  15. 정현백 「통일운동과 여성주의」, 『창작과비평』 2000년 가을호 97면에서 재인용.
  16. 김은실 「초국가적 경계에서 일어나는 지식/언설의 정치학을 생각하며」, 『당대비평』 2001년 봄호.
  17. 같은 글 5면.
  18. Choi, Chungmoo, “Politics of War Memories toward Healing,” in Fujitani et al., eds., Perilous memories: The Asia Pacific wars, Duke University Press 2001.
  19. Amritjit Sing, Joseph Skerrett and Robert Hogan, eds., Memory and Cultural Politics,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1996, 5면.
  20. Seyla Benhabib, "the meaning of culture in political theory," presented at UCI Critical Theory Symposium(2000.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