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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통일과정과 개혁과제

 

남북한의 의료체계에 관하여

 

 

황상익 黃尙翼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의학사 전공. 저서로 『첨단의학시대에는 역사시계가 멈추는가』 『역사와 사회 속의 의학』 등이 있음. hwangsi@plaza.snu.ac.kr

 

 

1. 들어가는 말: ‘보건의료인 정성운동’과 ‘2000년 의사파업 투쟁’

 

“그 집에 며칠 더 있었는데, 왼발이 점점 더 썩기 시작해요. 그 다음에는 오른발도 심하게 썩어들어가더라구요. 이래선 안되겠다 하면서 그 사람들이 남양병원에 저를 입원시켰는데, 의사 선생님들은 우리는 약도 없으니까 제대로 일 못하겠다고 제게 털어놔요. 그러니까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병원에 들어가서 발이 나아야 되는데 오히려 더해지는 거예요. 입원실에, 그 추운 냉방에 저 혼자 입원을 하니까 이 손마저 동상에 걸렸어요. 그때는 제가 죽을 각오를 했거든요. 이렇게 골 아프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그런데 제가 다시 살겠다는 생각을 한 데에는 정말, 병원 선생님들, 의사 선생님들의 신세가 많았어요. 비록 약은 없어도 치료는 못 해주어도, 선생님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저에게 밥을 날라주시고 여러가지로 위로를 해주셨어요. 제 생일을 기억해서 축하해주기도 했구요. 이 어려운 시기에 그렇게 한다는 게 참 보통 일이 아니에요, 조선에서는. 제가 거기서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다 해도, 조선사람들 사이에 인정이 돌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거든요.”

이 이야기는 재작년 여름 중국에서 만난 한 북한출신(이 글에서는 남한에서 흔히 사용하는 ‘탈북자’나 ‘북한이탈주민’ 대신 ‘북한출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여성에게서 들은 것이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살던 이 젊은 여성은 국경지역이 먹고사는 형편이 낫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강추위가 몰아치던 1998년 11월, 두만강변의 남양으로 가려고 기차를 탔다고 한다. 초만원 기차 속은 발디딜 틈도 없어 거센 바람과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아가며 승강대에 매달려 갔고, 게다가 정상적으로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기차가 움직이는 것보다 서 있는 때가 훨씬 많아 일주일이나 걸린 탓에 두 다리와 발에 심한 동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과 같이 입원했던 남양의 병원에서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손에까지 동상이 생겼다. 고등중학교 시절 육상 장거리 선수였다는 이 여성은 결국 중국에 가서 양쪽 다리와 손가락 몇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크게 악화된 것과 병원이 제구실을 거의 못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여성의 구체적인 체험담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반면, 그 여성이 전한 북한 의사들의 모습은, 체제가 다른 사회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북한 의사들의 직업적 자세와 관련하여 많이 이야기되는 것으로 ‘보건의료인 정성운동’이 있다. ‘환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백번 물음에 백번 웃음으로 대답하자’ ‘중환자는 나에게로!’라는 구호가 말하듯이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의 헌신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남한과 중국에서 만나본 북한출신 의사나 일반인들은 한결같이 이 점을 확인해주었다.

한 여성의사는 의학대학에 다닐 때 이식용 피부가 필요한 경우 조직적합성을 확인한 뒤에 자신의 피부를 떼어준 적이 몇차례 있다고 증언했다. 거기에 대해 그런 행위가 북한에서 칭송의 대상이냐고 묻자, 그 의사는 의학대학생이나 의사로서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어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며 따라서 그 사실을 감추느라 힘들었다고 대답하였다. 남한사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 그러한 행동이 정말로 자발적인 것인가고 거듭 묻는 필자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 의사의 모습은 한해가 가까워오는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북한 의사들의 자세가 남한 의사들에 비해 훌륭하다고 말하려고 두 가지 증언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행동이라는 것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총체적 특성과 분리해서는 이해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인’ 북한에서 당연한 모습이 ‘개인주의적인’ 남한에서는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자신의 피부를 떼어주는 행위가 북한 의사들에게는 남에게 자랑할 거리도 아닌 당연히 해야 할 것일 수 있지만, 남한 의사들에게는 결코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며 남이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요구해도 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익히 보았듯이 남한사회에서는 지난해 의약분업 실시를 계기로 하여 의료현실의 개선을 요구하는 의사들의 ‘파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러한 남한 의사들의 관점에서는, 의료현실의 개선을 위한 ‘투쟁’이 북한에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현대적 의료설비는 말할 것 없고, 마취제와 항생제 등 기본적인 의약품의 공급조차 턱없이 부족하여 많은 환자들이 실질적으로 의료에서 소외되고 있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 그곳의 의사들이 저항하지 않는 것이(북한의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대체로 그러할 것으로 여겨진다) 의사들의 당연한 의무를 방기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남한과 북한 의사들의 모습은 많은 점에서 다른데, 그것은 남과 북의 의료체계, 더 넓게는 사회체제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2. 남북분단과 보건의료

 

남과 북은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되어 있으며, 그러한 분단은 남북한 양쪽의 의료체계와 남과 북 주민들의 건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남과 북은 단순히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극도의 군사적·정치적 대립상태에 놓여 있고 그 댓가로 엄청난 ‘분단비용’을 치르고 있다. 독일통일 이후 한반도에서도 ‘통일비용’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고조되었으며, 일부 수구세력은 통일을 반대하는 논거로 엄청난 통일비용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남과 북은 이미 그러한 통일비용을 훨씬 능가하는 분단비용을 치러왔거니와, 앞으로 분단과 긴장이 지속되는 한 통일비용에 버금가거나 그보다 더 많은 댓가를 계속 지불해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분단구조를 지속하기 위한 분단비용 지출의 댓가로 남과 북은 그만큼의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대체로 보건의료 등 복지부문의 축소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보건의료 부문의 축소는 자연히 남북한 주민들의 건강 수준을 각각의 경제력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남과 북 전체를 논의의 대상으로 할 때, 분단의 해소와 통일, 또는 그에 앞서는 남북 긴장관계의 이완이 주민들의 건강 수준을 한층 높일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분단과 긴장은 남북한 양쪽에 억압적 정치체제를 통해 남과 북 주민들의 건강, 특히 정신건강에 매우 유해한 영향을 미쳐왔다. 서재진은 북한출신 사람들의 면접조사를 통한 『북한의 사회심리 연구』(통일연구원 1999)에서 최근의 경제난(식량난)이 더욱 악화시켰거니와 오랜 기간 지속된 정치적 억압이 욕구불만 및 박탈감, 공격적 행동, 절망, 고착 등 결핍증후군을 낳았으며, 감정정체, 성격변형, 불안 등 사회심리적 병리현상을 초래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필자는 「국가폭력과 트라우마」(『동아시아와 근대의 폭력 2』, 삼인 2001)라는 글에서 남한사회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진단을 내릴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0세기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끊임없이 지속된 국가폭력은 직·간접적으로 공동체(의식)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벌거벗은 국가와 그 폭력은 우리 모두를 파편화시켰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횡적 연대와 유대감은 직접적 피해에서 벗어나려는 의식·무의식적인 심리와 행위 가운데 오간 데 없이 사라졌으며, 독립된 개인이라는 근대사회의 인간형도 성립되기 어려웠다. 그 대신 군림하는 국가와 국가에 충직한 ‘국민’이라는 종적 관계가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고, 주체적인 개인의 자리에 타자화된 이기적인 존재만이 남게 되었다. 또한 그러한 관계를 통해 국가폭력은 우리 자신들 속에 내면화되었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터이지만, 분단구조와 그에 동반되는 억압과 폭력은 남과 북 모든 주민들에게 직접·간접적으로 정신적·신체적 상흔을 남겼다. 이 점 또한 분단과 긴장의 해소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3. 해방 이후 남한 보건의료의 성장과정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래 남한의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는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한 성장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바, 여기에서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경제성장과 보건의료비 지출의 증가

남한의 의학과 보건의료가 짧은 기간 동안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국민경제의 급속한 성장이 가장 든든한 밑받침이 되었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생활이 윤택해짐으로써 보건의료 분야의 수요가 커졌으며, 또 그만큼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에 대한 지출과 투자도 증대한 것이다. 화폐가치 변동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1950년대 초의 67달러에서 1997년의 9511달러로 140배 가량 증가한 것이 보건의료 분야 성장의 기본적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의료비 총액은 1975년의 2980억원에서 85년의 3조 5205억원, 97년의 25조 8000여억원으로 늘어났으며, 국민소득 대비 의료비지출 비율은 1975년의 2.8%에서 85년의 4.3%, 97년의 6.7%로 급팽창하여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게 되었다(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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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제도의 확립

남한의 보건의료 제도가 아직까지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정부수립 이후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제도정비가 이루어진 것이 의학 및 보건의료 분야의 발전과 남한 국민의 신속한 건강 증진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국민의료법 제정(1951; 1962년에 의료법으로 전면 개정), 의사·치과의사·한의사 국가시험령 제정(1952), 약사법 제정(1953), 전염병예방령 및 검역법 제정(1954), 보건소법 제정(1956), 학교보건법 제정(1967), 모자보건법 제정(1973)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의료보험법의 제정과 실시는 보건의료 분야 수요의 확대를 통해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의 성장을 추동한 중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바,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의료보험법 제정(1963), 500인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대상의 의료보험 실시(1977), 모든 공무원과 교원에 대한 의료보험 실시(1979), 전국민 대상의 의료보험 실시(1989) 등이다.

의료보험의 도입과 급속한 확대는 일차적으로 남한사회의 산업화 및 의료화 과정에 따르는 현상이지만, 북한과의 체제경쟁이라는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1960년대 이래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구한(이 또한 분단구조와 체제경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남한사회는 건강한 노동력의 확대재생산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의료보험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방안이었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 비해 충분히 지적되고 있지 않지만, 의료보험은 의료시장의 확대(사회의 의료화)라는 의료계와 제약산업의 의식적·무의식적 요구를 수용하는 통로의 구실을 해왔다. 오늘날의 의료보험(국민건강보험) 체계는 주로 의료수가 면에서 많은 의료인들의 불만의 표적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그들 의료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의료인들에 대한 면죄부 구실마저 하고 있지만, 의료보험의 도입과 확대가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거대한 의료시장의 형성과 의료인의 사회적 파워, 그리고 의료 이용의 보편화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의료보험은 ‘무상치료제’를 근간으로 하는 북한 의료체계에 대한 남한사회(지배층)의 전략적 대응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으며, 우리는 그 지점에서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나마 분단구조의 긍정적인 점을 발견하게도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적하여야 할 것은 국민들의 의료이용 기회를 확대하고 그럼으로써 건강을 향상시키는 장치로서의 의료보험이 그 순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의료보험에 대한 국가의 재정부담이 턱없이 부족하여 국가에 의한 국민의료보장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거니와, 국민들 사이의 공정·공평한 비용분담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질병 발생에 따르는 위험을 분산시킨다는 의료보험의 최소한의 기능조차 실현되지 못한 채 소득역분배 현상마저 나타나는 ‘의료비 할인’ 제도에 머무른 것이다. 그리고 의료보험의 도입과 더불어 확장되었어야 할 공공의료기관은 오히려 날로 축소되었고, 국가의 질병예방 기능도 상대적으로 소홀해짐으로써 의료와 국민보건은 시장에 맡겨졌으며, 국가는 주로 의료수가 조정(억제)이라는 안이한 방법으로 의료에 개입할 따름이었다.

 

평균수명의 증가와 질병발생 양상의 변화

국민의 건강상태와 질병 양상은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의 발전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다. 국민의 평균수명(출생시 기대여명)은 경제성장만큼이나 획기적으로 늘어났다(이하 남한의 보건 의료와 관련해서는 보건복지부 각 연도 통계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즉, 1945년의 45세 가량에서 55년의 53세, 75년의 67세, 96년의 74세로 증가하여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수명 연장은 중장년과 노년의 건강관리가 개선된 데도 기인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아사망률의 감소이다. 1955년의 134(출생 1천명당)에서 75년의 41.4, 96년의 7.7로 불과 한 세대 남짓 만에 거의 1/20로 떨어진 것은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이며, 남한사회의 발전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보건지표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평균수명의 증가와 영아사망률의 감소와 더불어 질병발생의 양상도 선진국형으로 바뀌게 됨으로써 보건의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로써 보건의료 분야의 발전이 가속화되었다고 평가된다. 이같은 평균수명의 증가와 질병발생 양상의 변화는 보건의료 분야의 발전을 가속화시킨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그 발전의 결과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의료인력과 의료기관의 성장

경제성장, 의료제도의 확립, 평균수명의 증가와 질병발생 양상의 변화 등 객관적인 조건 속에서 주체적으로 국민건강을 담보하고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의 성장을 추동한 것은 의료인력과 의료기관들이다. 지난 50여년 동안 의료인력과 의료기관이 급성장함으로써 보건의료 분야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의료법에서는 약사를 의료인에서 제외하고 있지만, 실제로 국민건강 증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해왔으므로 여기에서는 약사를 포함하여 검토하기로 한다. 의료인 총수는 통계자료가 남아 있는 1949년의 1만명 남짓에서 1997년의 58만명으로 60배 가까운 증가를 보이며, 인구당 의료인력도 약 30배 증가했다. 의료인력의 구성은, 초기에는 의사가 가장 많았던 반면 오늘날에는 간호사·간호조무사·의료기사 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의료공급의 중심이 의원에서 대규모 병원으로 바뀌고 있는 사정을 반영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의료인력의 직종에 따라 변화추세를 살펴보자. 보건복지부에 면허가 등록된 의사의 수는 1949년의 4375명에서 98년의 6만 5431명으로 15배 가량으로 증가했으며, 인구 1만명당 의사 수는 1949년의 2.2명에서 98년의 14.1명으로 6배 이상 늘어나 선진국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치과의사도 1949년의 740명에서 98년의 1만 6126명으로 22배 가량 증가했다. 한의사 역시 1949년의 1657명에서 98년의 9914명으로 6배 가량 늘어났다. 약사는 1949년의 1003명에서, 98년 4만 6998명으로 50년 사이에 46배 남짓 늘어났으며, 특히 병원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크게 늘어나 보건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약사보다도 더욱 급격한 팽창을 보인 것이 간호직이다. 1949년의 1549명에서 98년의 35만 9812명으로 230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특히 70년대와 80년대에 비약적으로 증가해 전체 의료인력 중 60% 내외를 점해오고 있다. 의료기사는 의료기기가 진료에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1970년대 이래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1970년에는 2504명에 불과하였지만 98년에는 10만 6570명으로 42배 정도 늘어났으며, 전체 보건의료인력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0%를 육박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구당 보건의료인 총수는 1949년에 비해 30배 가량 증가하여 국민들의 보건의료 접근도가 대단히 높아졌으며, 병원급 중심의 의료체계가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인력의 변화양상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전체 의료기관 수는 1953년의 4792개에서 98년의 3만 4587개로 7배 남짓 늘어났다. 그 가운데 양적으로 가장 뚜렷한 변화를 보인 것은 약국으로 약 30배 증가했다. 그리고 종합병원은 21.3배(1970년 대비), 병원은 7.4배, 의원급은 6.9배로 늘어났다. 1960년대까지 의원급의 병상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총 병상수의 정확한 변화추이는 알 수 없지만,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의 병상수는 1955년의 7975개에서 98년의 17만 3823개로 21배 가량 증가하였다. 1998년 현재 총 병상수는 23만 6387개이고, 이 가운데 병원급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75%이며, 앞으로 그 비율은 더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40여년 동안 의료기관이 급격히 팽창했으며 점차 대규모 병원이 중심이 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교육기관 및 시험·연구기관의 성장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고 연구인력을 양성·배출한 것은 의과대학 등 교육·연구기관이었다. 이들 기관이 양적으로 성장하고 질적으로 충실해진 것이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 발전의 동력이었다.

1950년 이전 9개에 불과하던 보건의료 분야 대학(4년제 이상, 간호대학 제외)이 1950년대에 13개, 60년대 7개, 70년대 14개, 80년대 26개, 90년대 14개 대학이 신설되어 오늘날 의과대학 41개, 치과대학 11개, 한의과대학 11개, 약학대학 20개 등 총 83개로 크게 늘어났다. 초기에는 약학대학(1950〜70년대에 15개)의 설립이 왕성했던 데 반해 1980〜90년대에는 의과대학(23개)과 한의과대학(8개)의 신설이 활발해졌다.

대학 외에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 연구의 주역을 맡아온 것이 정부 출연·지원의 연구·시험기관으로서, 대표적인 것으로 국립위생시험소(1954년 개소), 국립보건원(1959년 발족), 인구보건연구원(1981년 발족), 대한결핵협회(1953년 창립)와 산하 결핵연구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럭키중앙연구소, 녹십자사, 목암생명공학연구소 그리고 여러 제약회사 연구소 등 민간연구기관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 연구의 성과 가운데 많은 것은 외국에서 성취된 것들을 도입한 것으로,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최초로 밝혀지거나 이루어진 것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즉, 지금까지의 의학과 보건의료 분야의 연구는 주로 모방에 치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창조를 위해서는 우선 모방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동안의 활발한 모방과 도입이 앞으로 창조적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단순한 기술모방과 도입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의 건강 증진과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 의의가 적지 않을 것이다.

 

 

4. 해방 이후 북한 보건의료의 성장과정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1945〜50)

해방 당시 북한에는 병원이 42개소에 1135병상이 있었으며, 의사의 수는 한지(限地) 의사를 포함하여 인구 1만명마다 1명 안팎이었고, 전체 면의 65%가 무의면(無醫面)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 아래에서 1946년 3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국가병원의 수를 확대하는 동시에 전염병을 근절하고 인민들을 무상으로 치료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보건분야의 당면과업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46년에는 국가예산의 6.2%를 보건부문에 지출하여 각 군(郡)에 1개소 이상의 국영병원을 설치했고, 1950년 상반기에는 무의면을 완전히 해소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47년부터 ‘사회보험법’에 의거하여 노동자, 사무원 및 그 부양가족에 대한 무상치료를 실시했으며, 1948년부터는 병원 분만과 3세 미만의 어린이, 지정전염병 환자, 양로원 수용자, 극빈자 등에 대해서도 무상치료원칙을 적용하였다. 이밖에 1946년 5월의 ‘공장, 광산의 의료시설 통제규칙’, 1949년의 산업의학연구소 설치 등을 통해 노동자와 광원 등의 건강 보호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장한다.

이 기간 동안 의료기관을 공유화(사회화)하는 정책이 실시되는데,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집행되었다. 즉, 국가 병원을 확대하고 개인 의료기관에 대한 국가 보건기관의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는 한편, 개업의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의료수가를 국가가 장악하고 누진적인 세금제도를 적용함으로써 사적 의료부문을 무력화시켰다. 이 시기 동안 국가의 방침에 저항하는 의료인들이 월남함으로써 사회화정책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북한 보건의료제도의 기본토대가 마련되었다.

 

한국전쟁 시기(1950〜53)

전쟁을 치르면서 보건의료체계도 자연히 군(軍) 의료시설 중심의 편제를 가지게 되었으며, 개전 초기인 1950년 7월부터 이재민에 대한 무상치료를 실시하였고, 전선이 고착되어 있던 1952년 11월 ‘무상치료를 실시할 데 대한 내각 결정’을 내리고 이에 따라 1953년 1월부터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실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51년 10월에는 종군중이던 의과대학 교원과 학생을 대학으로 복귀시켜 전후 복구사업에 대비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개년계획 시기(1953〜56)

휴전 직후인 이 시기에는 “복구건설의 힘겨운 전투를 맡아 하게 될 인민들의 건강을 보호 증진시키는 인민보건사업을 강화”하는 데 보건의료의 목표를 두고, 노동력 수급을 위한 인구증가 정책, 전쟁고아 등 아동들에 대한 보육시설 확장, 각급 의료기관의 복구와 확장, 의료요원의 자질 향상 및 인적 자원 증대, 의학교육과 연구 사업에서의 주체 강조, 의료기구 및 제약공업의 성장, 민간요법 및 동의술의 발굴 등의 당면 과업을 수행했다.

3년간의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보건의료자원의 복구, 그리고 전후건설을 담당할 국민들의 건강증진이라는 중대한 역할을 이 시기의 북한 보건의료인력은 충실히 감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북한 사람들의 주체적인 노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겠지만, ‘사회주의 우방’의 지원도 작지 않은 몫을 차지한 것 같다.

 

5개년계획 시기(1957〜61)

이 시기 북한은 보건사업의 기본방향을 모든 질병의 철저한 예방, 농촌 리 단위까지 진료소 설치, 의료시설과 의약품 생산 확대, 주요한 보건의료 연구·교육기관의 설립, 민간요법 및 동의술의 발굴 등에 두었다. 그리고 북한 당국은 1958년에 비사회주의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하여 사회주의적 보건의료제도가 확립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1960년에는 모든 리에 진료소를 설치함으로써 완전하고 전반적인 무상치료제가 실시되었다고 선포했다. 이 시기에 북한 보건의료제도와 자원의 기본틀이 완전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주민들은 폐허 위의 건설이라는 벅차고 힘든 과업을 수행했지만, 전쟁중의 파괴로 인해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가로막는 인적·물적 요소가 대부분 제거된 것이 체제의 확립에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겠다.

 

7개년계획 시기(1961〜70)

북한 당국은 이 기간에 완전하고 전반적인 무상치료제와 의사담당구역제 등을 실시할 수 있는 제도적 체계를 확립하고 그 내용을 채움으로써 이전 시기에 수립된 사회주의 보건제도를 공고, 심화시켰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1961년 100% 해산방조 실시, 1964년 의사담당구역제 실시, 1968년 간염연구소 및 모든 군(郡)구역에 간염 격리병동 설립 등의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보건의료의 그러한 방향과 성과를 당시 수상이던 김일성은 1966년에 「사회주의 의학은 예방의학이다」라는 논문을 통해 정리하였다.

 

6개년계획 시기(1971〜77)

이 기간의 성과로 북한이 내세우는 것은 위생방역사업의 강화, 의사담당구역제의 전면적 실시와 의학 및 간호교육 체계의 확립, 제약공업과 의료기기 생산의 확대가 있다. 그리고 의료기관을 확장하고 현대화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아동병원과 산원시설을 강화하고 리 진료소에 전문과와 입원실을 두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한 의료인과 학생을 외국에 대거 유학시켜 새로운 보건의료 지식과 기술을 흡수하는 데 노력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동의학적 지식과 기술도 함께 수록한 『림상의전』을 간행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리고 대중사업으로는 약제채취의 전 군중적 운동화를 주요한 성취로 꼽고 있다. 20년 가까운 복구와 건설사업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어 그 결과가 보건의료사업에도 나타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관심을 외부세계에까지 확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2차 7개년계획 시기와 그 이후(1978〜  )

2차 7개년계획 시기(1978〜86)에는 이전 시기 사업을 더욱 확대 강화하고 심화시켰다고 하며, 그동안의 성취와 북한 보건의료사업의 지향을 총정리하여 1980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보건법’을 제정했다. 그 이후인 3차 7개년계획 시기(1987〜96)와 1997년부터 현재까지는 보건의료체계상의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북한의 경제난으로 보건의료 물자의 공급과 보건의료인력의 재생산에도 작지 않은 차질이 생겨 어려움을 겪어온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이같은 발전과정을 겪어온 북한 보건의료체계의 원칙과 특징은 ① 무상치료제, ② 예방의학 중시, ③ 의사담당구역제, ④ 동의학(고려의학)과 신의학(현대의학)의 병행, ⑤ 대중의 보건사업 참여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5. 남북한 의료체계의 통일, 통일시대의 의료체계를 향하여

 

남한이 국민건강보험을 근간으로 하는 민간의료 중심인 데 반하여, 북한은 무상치료제 원칙하의 공공의료체계이며, 남한이 ‘양·한방 2원화’로 요약되듯이 근대의학과 전통의학이 별도로 존재하는 데 비하여, 북한은 동의사(고려의사)가 별도로 존재함에도 의사가 동의술(고려의술)을 시술하는 것이 허용되는 정도를 넘어 의무화되어 있는 등 남북한 의료체계의 차이점은 여러 측면에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필자는 「북한의 보건의료」(『과학과 사회』 창간호, 김영사 2001)에서 표2와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이러한 여러 측면 가운데에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의료기관 운영 주체(민간: 남한/공공: 북한)와 의료비 부담 주체(개인: 남한/국가: 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한의 의료체계는 대체로 1970년대 후반 이래 민간의료기관 중심으로 재편되어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생산적 복지’를 내세우는 김대중정부 아래에서 역설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얼마 안되는 국·공립병원조차 공사화 또는 민영화되고 있거니와, 공공병원의 형태를 유지하는 경우라도 정부의 재정부담은 날로 줄어들고 있어 내용상으로 민간병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보건소·보건지소·보건진료소 등 1차 공공의료기관의 역할도 날로 축소되고 있다. 이렇게 의료의 공공성이 약화됨에 따라 의료기관의 지역적 편중도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역대 정부의 공약과는 달리 국민건강보험(의료보험)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아 국민건강보험은 소득재분배와 위험분담이라는 기능조차 상실하고 오히려 역분배의 모습마저 보이게 되었다. 즉, ‘본인부담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계층이 부유층의 의료비를 대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남한사회의 특성인 의료의 고급화 경향은 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필자는 남한 의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최대의 과제는 의료의 공공성을 회복·강화하는 것이며, 그 점은 공공의료 중심의 북한 의료체계와의 통일을 생각할 때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대의 과제는 공공재원의 확보일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현금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전망이 결여된 공허한 구호로 들릴 수 있지만, 분단구조가 어느정도 이완되고 있는 한반도 정세는 그러한 구호를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남한사회에서 1,2,3차 의료기관의 역할분담이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는 등 의료전달체계가 미비한 것은 국민들의 의료이용에 파행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1,2차 의료기관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심적 요인이다. 의사들은 지난해의 파업투쟁에서 저수가를 의사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교과서적인 진료’를 훼손하는 거의 유일한 요인으로 꼽았지만, 의료전달체계의 미비가 더욱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3차 의료기관과의 불공정한 무한경쟁은 1,2차 의료기관에 과다한 투자를 강요해왔으며, 그것은 대체로 의료기관의 수지 악화나 국민들의 불필요한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민간의료 부문의 경우 적정한 이윤을 보장하기는커녕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가는 당연히 개선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단기적 처방과 더불어 각급 의료기관의 적절한 역할분담이라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의료전달체계의 미비로 3차 의료기관도 본연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바, ‘석달 대기에 3분 진료’라는 말로 요약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환자와 의사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은 공정한 의료시장을 형성하는 등 현실적으로 상당히 유용한 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기대된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의료기관 사이의 수입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고 따라서 3차병원 등의 저항이 예상되지만, 국민 전체로 보아서는 의료비 상승을 제어하고 좀더 바람직한 의료이용이 가능한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오랜 동안 의료전달체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것이 확립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실현할 주체가 없었던 데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주체는 의료인과 국민이어야 하며, 정부는 그 과정에서 생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정도만의 개입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파업’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의료계 내의 ‘개혁세력’과 시민단체의 연대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지점이 이곳이며, 그러한 연대와 성취의 경험은 더욱 본질적인 과제인 의료의 공공성 확보를 향해 나아가는 지렛대 구실을 할 것이다.

통일시대의 의료를 전망하면서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은 북한의 의료체계가 원칙적으로는 국가 부담의 무상치료제이지만, 최근의 극심한 경제난으로 (지역과 계층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 대원칙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즉, 병원이나 진료소 등 각급 의료기관의 설비와 의약품이 극도로 부족하여 적지 않은 주민들이 그 공급을 장마당 등 암시장에 의존하고 있으며, 불법적으로 피임용 루프 삽입과 임신중절수술 등을 하는 무자격 의료행위자마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취제가 없어 수술을 못하거나 마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난소종양제거술 등 개복수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엑스선 필름과 방사능보호복이 없어 방사선촬영시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되는 의사들마저 상당수 있다는 것이 북한에서 직접 활동하는 국제기구 요원과 북한출신 의사 및 일반인 들의 증언이다. 이렇듯 ‘완전하고 전반적인 무상치료제’는 그 내용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치료의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자랑해온 예방의학 부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북한 당국이 오래 전에 방역사업의 성공으로 거의 퇴치되었다고 발표했던 결핵·간염·말라리아·파라티푸스·콜레라·발진티푸스 등 전염성 질환이 북한 주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1995년의 ‘큰물 피해’를 비롯하여 연이은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경제난이 북한 의료체계를 더욱 압박하고 인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지만, 북한 의료에 위기가 나타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것처럼 보인다. 위기의 시작은 짧게 보더라도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중국 등 우방이 교역에서 당시까지의 물물교환 대신 경화결제를 요구하던 1980년대 말로 거슬러올라가며, 그 무렵부터 치료와 예방 모든 분야에서 극심한 물자(의료설비와 의약품 및 그 재료와 원료)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북한 의료는 동력을 많이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북한 의료의 위기는 최근의 자연재해에 따른 우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좀더 구조적인 데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북한의 의료가 최소한의 구실을 하고 있는 요인으로 글머리에 언급했던 ‘집단주의적 헌신성’으로 무장한 의료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과, 북한사회가 폐쇄화되어가던 1960년대 이래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와 현실적인 조건 아래에서 동의학을 의료의 한 축으로 삼기 시작했던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동의학을 강조한다는 사실에서 피상적으로 유추되는 것과는 달리, 북한 의료의 주축은 인력 면에서는 의사이며(동의사에 대한 신뢰도와 인기도는 남한의 한의사보다 훨씬 떨어진다), 의술체계 면에서도 현대의학이다. 그러면서도 보조적인 동의학이 상대적으로 큰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북한 의료의 현실이며 동시에 모순이다. 북한 의료가 건전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위기상황에나 허용될 수 있는 지금의 역설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은 북한체제 전체의 지향과 관련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난의 행군’을 끝낸 북한사회가 의료체계를 재건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남과 북의 장점을 살려 더욱 바람직한 통일시대의 의료체계를 논한다는 것은 한가하거나 현실회피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남한의 국민건강보험이 재정적 위기에 처한 오늘날, 북한에 대한 지원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에 걸친 북한 의료의 경험과 성과를 통일시대 의료체계 구축에 활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유지, 증진하는 제반 조건이 갖추어지고 또 병에 걸렸을 경우 별다른 경제적 부담 없이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 바가 없을 것이다. 남한사회는 이미 국민소득의 약 7%를 의료에 사용하고 있으며, 특별한 노력이 없다면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아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어느 정도가 적절한 의료비 수준인지를 말할 수는 없지만, 국민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제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한편, 의료배분의 평등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 점은 남북이 통일되는 경우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것이 틀림없다. 필자는 남북한 모두 그동안 분단과 긴장구조를 유지하는 데 낭비한 부분을 모든 주민의 의료보장을 위해 되돌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적이자 이상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 사회구조와 개인의 생활태도를 확립하는 것이 의료비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며, ‘의사 위주’ ‘치료 위주’라는 현대의학의 고질적 병폐를 극복하는 방안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길을 찾는 데 예방의학을 강조해온 북한 의료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며,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대체의료(보완의료)’의 근본적 의의도 ‘새로운 묘방 찾기’가 아니라 바로 그 점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