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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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종은 金鍾銀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으로 「후레쉬 피쉬 맨」 「메모리」 「그리운 박중배 아저씨」 「미확인 비행물체」 등이 있음. youturn1@hanmail.net

 

 

 

세일즈맨의 하루는

 

 

창신동 반지하에서,

 

꿈으로 시작된다. 그는 꿈꾼다. 어둑하기만 한 방안, 위로는 축 처진 천장의 벽지, 아래 어린애 붓 장난처럼 마구 그어진 녹물 자국, 사이로 날벌레처럼 날아다니는 먼지, 가운데 술내와 담뱃내 가득한 방안에서. 그는 꿈꾼다. 그녀의 배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배꼽에 입맞추는 꿈. 보송한 털을 뺨으로 문지르다 시월 하늘 닮은 어떤 소리를 듣고야 마는 그런 꿈을 꾼다. 만약 그녀가, 당신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라고 한다면 그냥 소리없이 웃어주고 싶다. 당신 닮은 딸도 좋지 않겠느냐고.

그는 꿈꾼다. 책을 읽고, 또 읽고 읽어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꿈. 그녀가 무언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담배 하나 빼어물고 휘파람 불며 슬리퍼 꿰어 나서는 길, 총총한 별 아래 골목길을 즐겁게 걷고 싶은, 그런 꿈을 꾼다. 만약 그녀가, 당신처럼 뭐든 잘 먹어서 건강했으면 좋겠어,라 말한다면 그냥 소리없이 웃어주고 싶다. 당신 닮아 시디신 과일만 좋아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는 꿈꾼다. 그녀가 당신 사랑해요,라고 말끝 흐리며 내밀었던 새카만 비닐봉지 속 금붕어 두 마리 꿈. 봉지를 헤집어보기 전에는 결코 안을 확인할 수 없는 꿈을.

“하난 자기고, 하난 나야.”

조그만 어항 하나, 주리지 않게 내리 떨어지는 모이 가루와 밝은 햇살. 그 이상 바라고 싶은 것도 없어서, 동화 속 세 가지 소원을, 그는 떠올려본다. 순간 그녀가 말한다.

“살길이 없어. 수술비쯤은 내가 마련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아버지 빚을 청산하고 남은 것이라곤 감당하기 어려운 책뭉치뿐. 그나마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선다. 홀로 남은 그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소주 한병 주문한다. 결국엔 그런 꿈이다. 두 잔 반 만에 눈물나는 꿈. 아, 왜 우리는 세상 모든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것일까.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이고 싶다. 어이없게도 그의 꿈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세상 빛과 마주침과 동시에 어둠과 만날 모양이다. 멀리 그의 어머니가 보이는데,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침묵.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손을 뻗어보지만 잡지 못한다.

“아버진 벌받은 거예요. 사고도 아니고, 착실히 일하다 배신당한 것도 아니잖아요. 욕심이 지나쳤어. 뭐가 슬프다는 거예요. 어머니, 저도 어딜 가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면 그의 몸은 급속히 작아져 손바닥만한 태아로 변한다. 시커먼 색으로 변하고 만다. 이윽고 서늘한 빛 뿜는 금속 튜브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그는 헤엄치고 싶다. 헤엄쳐 달아나고만 싶다. ……그는 언제나 그런 꿈을 꾼다.

청년 김은 늘 같은 꿈을 꿨다. 처음에는 소스라치듯 놀라 일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요 바닥에는 보기 흉한 얼룩이 졌다. 하지만 계속되고 보니 그것은 그에게 더이상 악몽이지 않았다. 덤덤해진 것이다. 손에 잡힌다면 더이상 꿈일 수는 없다는 생각. 그런 것쯤이야 그저 길을 잃는, 식상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일 뿐이라고. 어느덧 그는 그렇게 가슴을 가라앉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실제 그런 사람을 몇 보았지만, 그는 다시 태어나기로 했다. 주저앉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누가 뭐래도 세일즈맨이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는 꿈, 21세기 프런티어 S전자에서, 아홉시를 알려드립니다.

 

어제는 근교 호수에 다녀왔어요. 날씨가 흐리긴 해도, 가을이 성큼 다가온, 그런 느낌. 알 수 있더군요. 그리운 사람들 얼굴 떠오르는, 그런 하늘과 바람 말이죠. 자, 이럴 땐 잠시 일을 접어두고 따뜻한 까페라떼 한잔. 그 부드러운 향 맡아보는 건 어떨까요. 아, 재스민 차도 좋겠군요. 출근하시는 분들은, 정체로 짜증나시더라도, 잠시 핸들에서 손을 떼고 눈 한번 감는 겁니다. 해보세요. 가을이 느껴지지 않나요. 자, 저와 함께 가을여행 떠나시죠. 첫곡 「오텀 리브즈」입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치 잔디 위로 흩어지는 물방울 같았다. 조그만 거울 앞에 선 청년 김은 침 뱉은 왼손바닥으로 연신 오른쪽 가르마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어제도 하루종일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때문에 가을이 대체 어디만큼 다가온 것인지 그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 양쪽 가르마가 보기 좋게 균형을 이루자 뒤돌아 라디오를 끌 뿐. 자가용 운전자도 아니고, 그리운 사람도 없으며, 재스민 차라면 구경도 못해본 그로선 당연했다.

프림 두 봉 사면 끼워주는 머그잔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설탕을 넣었다. 프림을 탈탈 털어 한 주먹 됨직 넣고 물을 부었다. 아침식사 대신 마시는 커피였다. 목이 조금 컬컬했기 때문에 눈물이 찔끔 맺히는 것도 마다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한결 나았다.

다시 거울 앞에 선 청년 김은 에에 아아, 하고 목청을 다듬었다. 그에게 가을의 시작은 이와 다름없었다. 가을. 그에겐 꼬박꼬박 걸리는 환절기 감기나 조심해야 할 그런 시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었다. 그는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이를 드러낸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럴 때마다 입술 사이로는 스스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거울을 보며 무언가 외우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살의라도 숨긴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청년 김은 방을 나서기 위해 열쇠를 찾아보았다. 늘 그렇듯 열쇠는 케이크 상자만한 어항 위에 놓여 있었다. 어항 위를 손으로 쓸다 그는 물위로 떠오른 붕어 두 마리를 발견했다. 허연 배가 물위로 드러나 있었다. 금붕어는 눈을 감지 못하는가. 쓰레기통에 버릴까 했지만 혹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세일즈맨에게 금붕어 따윈 필요없는 까닭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다. 건조한 동작이었다. 창밖으로 날아간 금붕어는 어디로 떨어졌는지, 아니 어디쯤 떨어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추락은 언제나 손쉬웠다. 그는 손끝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국물이 반쯤 담긴 즉석라면과 이쑤시개로 사용했던 부러진 나무젓가락, 제각기 흩어진 타월과, 구겨진, 게다가 얼룩까지 진 요가 어지러웠다. 포탄 맞은 베트남 마을 같은 느낌이다, 변함없이. 숱한 책들은 비닐테이프로 묶여 구석에 내동댕이쳐진 듯 버려져 있었다. 그는 책더미들을 바라보다 손을 바지춤에 쓱쓱 문질렀다. 아무래도 뭔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도화동 반지하 사무실의,

 

조그만 거울 앞에 서 있던 정씨는 시계를 올려보다 무료한 듯 왼손으로 괜히 오른쪽 어깨를 쓸어보았다. 정씨는 청년 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차 시계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간은 여전히 제 속도로 흘렀다. 체념한 듯 정씨는 가지고 온 커다란 담배상자에 셀로판테이프를 감기 시작했다. 이내 손잡이도 만들어 달았다. 파이지 않도록 모서리 부분은 더욱 신경써 둘둘 말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꽤 튼튼해 보이는 가방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윙윙 날아다니며 신경을 거스르던 모기도 한마리 잡았다. 도시의 모기는 철을 가리지 않았다.

“어이, 왔는가?”

정씨는 막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청년 김을 반겼다. 그는 손바닥 위에 짓이겨진, 형체 알아볼 수 없는 모기를 바지춤에 쓱쓱 닦아냈다. 청년 김은 박스를 보자마자 아,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뭔가 빠먹은 거 같더니만. 아저씨 줄 가방, 그걸 놓고 왔네요.”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정씨는 조금 낙담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자네가 지금 그런 거 신경쓸 처진가. 나중에 해. 거의 다 만들어가네. 이게 난 사실 더 편해. 이걸로 일주일은 버텨.”

정씨는 자신이 만든 상자를 텅텅 소리나게 두드리며 대꾸했다.

“어쩌죠. 제가 요새 이래요. 죄송해요. 그나저나 왜 혼자세요? 다들 어디 가고. 혼자만 안 나가고 기다리셨어요?”

“다들 나갔지. 지금 시간이 몇신데. 아니 뭐, 꼭 그게 아니고서두. 나야 일찍 나가봐야 뭐 있나. 건 그렇고. 그래, 괜찮은 거야? 거, 여자를, 만나는 봤나?”

정씨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청년 김은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아뇨. 그냥 집에 있었어요. 몸도 안 좋고 해서. 부장은 자리에 없나봐요?”

“요새 우리 사무실이 워낙에 잘 나가다보니까. 유성통상 쪽 사람들은 거, 물건 안 팔려서 죽을 똥을 싼다더만. 부장은 일 있어 늦는다는 거여. 도둑놈 잡는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또 그 일이겠지. 건 그렇고 자네 술 했나. 눈가에 떡 써 있네. 잘한 겨. 만나봐야 뭐 하겠냐는 거여. 여자란 아니다 싶으면 어서 빨리 잊는 게 국가적으로다 좋은 일인 겨.”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정씨는 청년 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정씨라고 해서 사랑했던 여인과 헤어진 일이 왜 없겠는가. 그렇대도 들썩인 정씨의 어깨는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냐는 투였다.

“아주머닌 어때요?”

“나야 뭐, 거 뭐여, 똑같지. 뭔 일 있으면 더 이상한 인생 아닌가. 자네 어디로 갈란가? 나는 까치산 쪽으로 갈까 싶은데. 그만 나가볼라네.”

정씨의 말에 청년 김은 문득 금붕어 이야기를 꺼냈다.

“금붕어는…… 죽었어요. 그냥 내던지고 오는 길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은 말에 정씨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박스를 들고 문을 여는 것으로 정씨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말고는 달리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까닭이다. 정씨는 지난달 일을 돌이켜보았다. 청년 김이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날, 청년 김이 처음 세일즈맨이 되기로 했던 날이었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아버지요? 자살했습니다. 여자가 애를 지우겠답니다. 그러니까 차인 거나 다름없죠. 내 생일도 잊은 모양이에요. 금붕어는, 요샌 금붕어 밥도 잘 주지 못해요. 화가 나서 그랬겠죠? 화가 나서 그랬을 거예요. 절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예, 맞습니다. 저도 사랑해요. 그래서 미안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예, 사랑하는가봐요. 요 붕어 두 마리 헤엄치고 있는 걸 보면요, 참 행복해 보입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언젠가 그 친구 다시 올 것만 같아요. 예전처럼, 사랑하는데, 왜 미안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랑하는데, 돈이야 벌면 되잖아요. 까짓 돈이야 벌면 되잖아요. 시팔.

 

그날 청년 김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얘기를 정씨에게 꺼내지 않았더라면 둘의 사이가 이렇게까지 가까워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문앞에서 머뭇거리는 정씨에게 청년 김은 말했다.

“아저씨 생일 축하해요. 점심이나 같이 해요. 가방은 내일 꼭 갖다드릴게요.”

정씨는 언제나 청년 김을 볼 때마다 자신의 젊은날을 돌이켰다. 자서전을 읽거나 전기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말이다. 청년 김은 정씨에게 그런 존재였다. 자신의 생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정씨는 뒤돌아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래, 그래. 거, 마흔셋이네 벌써…… 뭐 했나 몰라 이거여.”

정씨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형광등 하나뿐인 창고에서,

 

청년 김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 것은 테이프 리코더였다. 가방에 잔뜩 부려놓은 참이었다.

모서리를 다듬고 지퍼를 올렸다. 최씨가 사무실로 들어선 것도 바로 그때였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비틀거리며, 옮기는 걸음은 꽤 위태로웠다. 불안정한 움직임은 당장에라도 고꾸라질 기세였다. 최씨가 늘 쓰고 다니던 모자는 비틀어져 있었다. 두 눈은 고춧가루라도 쏟아부은 듯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른쪽 신발 밑창은 뜯어져 악어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채였다. 왼쪽은 아예 맨발이었다. 놀란 청년 김은 물건을 모두 내팽개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최씨는 청년 김의 가슴팍에 안기며 주저앉고 말았다. 단추가 모조리 뜯겨나간 최씨의 셔츠자락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생선처럼 위태롭게 꿈틀거렸다.

“왜, 이래요. 어디서 이런 거예요?”

다급히 물었지만 최씨는 대답하지 않은 채 숨만 몰아쉬었다. 간간이 밭은기침을 해대며 미간을 찡그릴 뿐이었다. 청년 김은 그를 철제책상 위로 대충 눕힌 후 정수기 물을 한컵 받아왔다. 물을 건네고 타월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낡은 모자를 벗긴 후 머리 언저리를 닦아내자 검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이거, 피잖아. 괜찮아요? 어디 좀 봐요.”

청년 김은 최씨의 뒤통수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새카맣게 탄 냄비바닥처럼, 피딱지는 뒤통수에 엉겨 있었다. 타월로 그 언저리를 닦아내자 최씨는 앗, 앗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청년 김은 최씨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그동안 최씨는 천천히 물 한컵을 비웠다. 어억, 어억 소리낸 후 머리를 흔들더니 힘겨이 몸을 일으켰다. 최씨는 길게 한숨 내쉰 후 청년 김을 바라보았다.

“돼, 됐어. 이제 조, 좀 살겠네. 고마우이. 누, 누가 따, 따라왔는지 좀 봐줘.”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랬다. 맥이 풀렸지만 청년 김은 사무실 문을 조금 열고 복도를 훑어보았다. 기계 돌아가는 저음만 텅텅 울리고 있을 뿐 복도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에요. 이제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잖아요.”

청년 김의 물음에 최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최씨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제가 이자 넣는 날이니까……”

“그래서, 그래서요, 아저씨. 매달 이러실 거예요? 형님한테 전화한다면서요. 안되겠어요. 이제, 제가 한다구요! 번호가…… 예? 왜 그래요 정말. 아님 신고라도 해야죠.”

청년 김은 어쩐지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됐어. 벌써 만났어. 나 같은 동생 둔 적은…… 없다는데 무슨.”

그리곤 최씨는 소리없이 울기 시작했다. 청년 김은 그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 말없이 곁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처량히 끔벅이고 있었다. 당신도 내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어. 바보같이, 이게 뭐 하는 꼴이야. 그러나 청년 김은 목구멍까지 치오른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팽 하니 코를 풀고 난 최씨는 이내 낡은 모자를 쓰더니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고 눈물을 바지춤에 쓱쓱 닦아냈다.

“인제 난 됐어. 일 나가봐.”

“모자에 피가 많이 묻었어요, 아저씨. 어떻게……”

“알아, 알아. 일 나가봐. 됐어. 자꾸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그냥 나가봐.”

“아저씨. 사실 저는요……”

“그래 알아. 자꾸 그러지 말아. 나한테 너무 잘해주려 하지 말아.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해. 너무 미안하잖아. 나한테 잘해주려 하지 말아.”

그 순간,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불빛이 칫 소리내며 어둠속으로 침잠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흐릿한 빛마저 사라진 셈이었다. 둘은 눅신한 어둠속 잡다한 상품들과 뒤섞여 흐려졌다. 창고에 가득한 물건과 그들을 구별해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갈아끼우면 그만 아닌가. 내가 할 테니까 그냥 나가봐. 많이 늦었네. 미안허이.”

최씨는 입술 꼬리를 설핏 올리며 실소하듯 말했다. 청년 김은 꽤 오랫동안 갑갑하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문을 나섰다. 복도에는 여전히 기계 돌아가는 저음이 텅텅 울릴 뿐.

건물 밖으로 나서려 할 즈음 청년 김은 자신의 손바닥에 최씨의 검붉은 피딱지가 묻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다시 최씨와 비슷한 처지로 자살한 아버지 얼굴을 싫지만 떠올려야 했다. 그 말라붙은 검붉은 피딱지가 마치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싫었다. 바지춤에 쓱쓱 털어내야 했다.

멀리 창고 문틈으로는 어느덧 빛이 새어나왔다. 최씨가 그새 형광등을 갈아끼운 모양이었다.

 

 

지하철 5량 칸 안(2호선 왕십리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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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의 말투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정씨가 일러준 대로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연습한 그였다. 문제는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일정하게, 한결같이, 같은 모습으로, 무관심했다. 학생들은 모두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정장 차림의 사내들은 색색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몇몇은 졸고, 몇몇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창을, 마치 임종을 기다리는 노인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청년 김을 부르는 승객은 없었다. 그럼에도 짐짓 설명 중간 예 알겠습니다, 기다리세요,란 말을 끼워가며 열중했던 그는 주문처럼 술술 쏟아져나왔던 자신의 말들에 서글픔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지만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는, 중국산 싸구려 테이프 리코더 기능을 설명하는 내내 연결통로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달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웃는 낯으로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보는 데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쾌하지 않았지만 유쾌해야 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낸 청년 김은 웃는 낯으로 가방을 텅텅 소리내 두드려보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의 왼손에 들린 중국산 싸구려 테이프 리코더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해도 그뿐, 사람들은 여전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싼 물건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들. 그 서늘한 눈초리들을 얼굴 전체로 느끼며 청년 김은 자신의 운명이 참으로 위태롭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세일즈맨의 운명이란 본래 위태롭다고, 이율배반적이며 때문에 희극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한다던 정씨의 말을 청년 김은 오늘도 지키지 못할 모양이었다. 불안했다.

청년 김은 다시 연결통로의, 위태롭게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았다. 반쯤 열려 있는 문이 꼭 비상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문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저 통로 어디쯤 놓여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지하터널에 매달린 형광등 빛은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지나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철에 몸을 실을 때마다 청년 김은 늘 갑갑했다. 혹 손으로 열 수 있는 문이 없는 까닭일까. 그렇게 자문해보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뿐. 저 문밖에는 지금 이 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또 한 칸이 있을 뿐이고, 그나마 열 수 있는 저 통로의 문을 연다 해도 건너편에는 전혀 다르지 않은 무심한 사람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며, 설사 그것이 조금 두렵다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청년 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건너편 칸으로부터 또다른 사내가 종이박스를 들고 허적허적 걸어왔다. 누군가 싶어 눈을 크게 떠보았더니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지쳐 보이는 표정의 박씨였다. 그보다는 사년 이상 선배였다. 청년 김은 그를 향해 어색하게 눈인사를 한 후 급히 물건을 챙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조심스레 출입구 자동문 앞에 바짝 다가섰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세일즈맨은 절대로 타인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차안에 남은 박씨는 조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청년 김을 바라보았고 청년 김은 상관없다는 의미로 밝게 웃어 보였다. 문앞에 서서 자리잡은 박씨는 이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플라스틱 파일을 펼쳐들었다. 오십팔 개들이 일회용 밴드가 일렬로 붙어 있었다. 박씨는 활기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어 꽤 유쾌해 보였다. 그것은 청년 김이 배워야 할 유쾌함이었다.

 

거어 참, 보시라. 보거라. 이 말이지. 거어 참, 이것이 무엇이냐. 거어 참, 약국 가면 밴드가 얼마나 하는지 아는 사람 다 안다아 그런 말이지. 거어 참, 천원짜리 사봐야 열 장 들어 있는데. 그러니까 뭣이냐 참, 이것은 또 뭣이더어냐. 그 말이지.

 

그렇대도 청년 김은 유쾌하지 않았다. 박씨의 표정이나 말투도 실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청년 김은 흔들리는 전철이 어디든 어서 빨리 당도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지하철이 멈춰서자 문이 열리고 이내 문이 닫혔다. 박씨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박씨가 웃는 얼굴로 밴드통을 꺼내 사람들 사이를 휘저으며 흔드는 모습만큼은 출입문의 조그만 창 사이로 비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지하철은 괴물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짙은 어둠속으로 다시 사라졌고 청년 김은 거기까지밖에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박씨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청년 김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 웃음소리 속에서 청년 김은 언젠가 아들에게 맞았다며 폭음하던 박씨를 보았다. 치매 들린 박씨의 노모와, 사진으로만 보았던 박씨의 가출한 딸아이도 어렴풋이 보았다. 손끝에선 다시 비린내가 풍겨왔고. 때문에 청년 김은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순간 휴대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청년 김의 표정은 돌변했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휴대폰에는 이미 수신된 메씨지가 네 통이나 들어 있었다. 청년 김은 그것이 요금을 독촉하는 통신사 직원의 목소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경쓰지 않아도 좋았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궁지에 몰려 넉달 이상 요금을 내지 않더라도 기껏 신용불량자나 될 뿐 별반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가 손을 떠는 것은 그런 전화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의 그에게 휴대폰은 누가 봐도 사치스런 것이었지만 그가 끈질기게 휴대폰을 갖고 다니는 것은 혹 걸려올지도 모르는 그녀의 전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부터 쏟아진 것은 정씨의 목소리였다.

“뭐라구요? 알았어요. 이쪽은 제가 찾아볼게요. 아저씬 그냥 거기 있어요.”

전화기를 주머니에 욱여넣기가 무섭게 청년 김은 짐짝 같은 커다란 가방을 족쇄처럼 질질 끌며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가방에 달린 바퀴는 지하철처럼 일정 간격으로 덜컹덜컹 하는 소리를 냈다. 거짓말처럼 그녀에 대한 생각들도 소리 맞춰 쉽게 사라졌다. 그는 다급하게 달릴 뿐이었다. 일이 또 터진 것이다.

 

 

지하철 환승통로(2호선 시청역) 앞으로,

 

전철 한대 지나치고 있었다. 정씨는 나무의자에 앉자마자 담배를 꺼내 불 붙였다. 막 전철에서 내린 열 명 남짓 사람들은 정씨를 마뜩찮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전철처럼 웅크린 채 지나쳤다. 청년 김은 헐떡이고 있었다. 정씨의 연락을 받자마자 전철과 각 역사무실을 헤집고 다니느라 꽤 지친 터였다. 바쁘게 뛰어다닌 탓인지 가쁜 호흡도 아직 고르지 못했다. 담배연기는 정씨 머리 언저리를 맴돌다 전철과 사람들이 지나친 쪽으로 빠르게 빨려들어갔다. 연기가 사라지자 환승통로 사방이 텅 비어버렸다.

“암만 찾아봐도 없어요. 역무실에도 들렀는데 신고 들어온 것도, 분실물도 없대요. 커피라도 한잔 뽑아올까요?”

“냅둬. 앉아 좀 쉬어. 나 땜에 고생했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정씨는 담배를 뻑뻑 소리나게 빨아댔다.

“씨바랄 새끼. 선풍기 카바 팔십장 가져가서 뭐 하겠다는 거여? 아니 팔십두장이여. 염병할 날이여. 어휴, 개새끼. 다리 아프지? 땀 좀 닦아. 나까지 이런 일을 당할 줄은.”

“이게 벌써 몇번짼지 몰라요. 별 희한한 사람들이 다 있다니까. 경찰에 신고할까요?”

“뭐라 신고를 해. 잠든 내가 미친놈이지, 신고는. 그럴 처지나 되나. 그나저나 영락없이 그 돈 내가 물 판이네. 개새끼. 에이, 개새끼. 씨바랄.”

“그나마 선풍기 커버가 낫죠. 아저씨, 어제까지만 해도 저처럼 카세트 들고 다녔잖아요.”

“그래. 시팔, 그렇게 생각하자고. 에이고, 일할 수도 없고, 일할 마음도 싹 가신다아. 자넨 좀 팔았는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까요?”

얼마나 팔았느냐는 질문에 청년 김은 그렇게 되물었다.

이십여일 전부터 부쩍 잦아진 분실사건이었다. 두세 건 벌어질 때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소홀함을 탓하며 스스로들 사건을 해결했다. 하지만 상황은 금세 달라졌다. 분실사건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네다섯 건으로 늘어나자 원인에 대한 직원들 해석도 분분해지기 시작했다. 재미삼아 학생놈들이 하는 짓이다, 유성통상 쪽 놈들이 우리를 해코지하는 것이다, 세상이 흉흉해서 그렇다, 운운, 내용은 참으로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어처구니없는 일인 까닭에 주장도 그만큼 다양한 것이었다. 그중 가장 그럴듯해 보임과 동시에 간담을 서늘하게까지 하는 의견을 내놓은 것은 박씨였다. 지하철 단속 귀찮은 공익놈들이 아예 들고 가분지는 거여. 글 갖고는 우리가 찾으러 오길 기둘리는 거제. 긍께 덫을 쳐놓는 거여. 대학생이 공익 많이 된다드만 겁나 쑹악해. 그렇게 해서 껀수 올리겄다 이거제. 시펄. 사람들은 박씨의 말에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사실은 아니었다. 박씨가 실제로 가방을 잃어버리던 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공익요원 둘은 툴툴거리며 초소를 찾은 박씨를 살갑게 맞았다. 만화책 읽고 있던 젊은 공익요원 둘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느냐며 젊은 녀석 둘은 발벗고 분실신고까지 마쳐주었다. 저희가 아저씨들 단속이야 하지만, 맘이 어디 그런가요. 이건 꼭 찾아드려야죠. 기다리세요. 연락드릴게요. 젊은 공익요원 둘은 합창하듯 말하곤 고개를 꾸벅 숙여 정중히 인사까지 한 후 다시 만화책에 코를 박았던 것이다. 일이 이렇고 보니 박씨의 주장도 설득력을 잃었고, 결국 남은 것은 부장의 중대발표였다.

“에, 참, 분실사건이 자꾸만 일어나다보니까 숭얼숭얼 그걸 갖고다가 회사 차원으로다 보상해달라는 목소리들이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들을 하십니까? 경제가 어렵단 이 말이다 이것이지요. 참, 우리 동네 시장판서 생선 파는 아주머니 쏘가리도 돌라가는 세상이라 이거지요. 경제가 어려우면 돌라가는 놈들 늘기 마련입니다. 저로선 돌라간 물건 배상을 받아야 하는 처지란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영부영하지 마시고 돈 물어내기 싫으면 단속을 잘하란 말이지요. 단속을 말이지요. 졸거나 그러지 말고요. 허어 별 이상한…… 그렇다고 내가, 회사 차원으로다가 팔짱 턱 끼고 가만히 있지는 않습지요. 나는, 그러니까, 목숨 다 바쳐 그 도둑놈 새끼를 잡을 테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잠잠해진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물건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정씨는 그간 나름대로 꼼꼼히 단속을 해온 터라 자신에게마저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는 것에 대해 더더욱 잔뜩 불만을 품은 모양이었다.

“가요. 아저씨.”

금붕어 탓인지 청년 김 기분 역시 좋지 않은 터였다. 이같은 기분이라면 그닥 물건을 많이 팔 수 없을 것도 뻔했다. 아니, 어차피 오늘은 일찍 정씨를 만나보려던 참이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곁에서 늘 도움을 줘온 정씨였는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한 기억이 없었다. 청년 김으로선 그간 너무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까닭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게다가 믿었던 그녀까지. 그래서인지 정씨의 생일만큼은 꼭 챙겨주고 싶었다.

“어디로?”

“저기요.”

청년 김은 시커먼 터널의 중앙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민의 쉼터(을지로3가역)에,

 

도착한 청년 김은 정씨를 가장 따뜻한 의자에 앉혀놓았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지하상가 끝에 위치한 제과점으로 향했다. 손가락으로 케이크 하나를 지목했을 때는 새삼스레 놀라야 했다. 그간 적어도 일년에 두세 번은 족히 구입했을 케이크 가격이 그를 놀래킨 것이었다. 먹음직스런 케이크 하나 선뜻 사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케이크 가격은 꽤 비쌌다. 청년 김은 괜스레 곁눈질하다 조각 케이크를 선택했다. 조각마다 초콜릿 무스가 잔뜩 발려 있는 것이었다.

“혹시 양초는 줄 수 없습니까? 마흔셋인데요.”

말을 뱉고 나서 청년 김은 스스로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여점원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 역시 쌀쌀맞았다.

“조각 케이크엔 초를 주지 않아요.”

청년 김은 입을 닫은 채 포장도 해주지 않는 조그만 케이크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받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러나 청년 김은 자판기 앞에 멈춰서서 정씨 몫으로 여왕의 향기 맥스웰 커피를, 자신 몫으로는 엔조이 코카콜라를 뽑았다. 구민의 쉼터에 어느덧 조촐한 상이 마련됐다.

“생일 축하해요 아저씨. 제과점에 초가 없다네요.”

“낫살 먹은 게 뭐이 자랑이라고. 이것도 정말 좋네. 비쌀 텐데 뭐 하러 이런 걸 사. 자네한테 생일상을 다 받고 염치가 없구만.”

그 순간만큼은, 정씨는 잃어버린 물건을 잊을 수 있었다. 함박 웃음지었다. 청년 김이 연신 권하자 정씨는 마지못한 투로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한입 덥석 베어물었다. 달콤함이 혀를 타고 전해들었고 청년 김과 정씨는 한동안 그 달콤함을 천천히 음미했다. 때마침 그들을 몇걸음 사이에 둔 안내표지판 앞쪽에서는 말끔히 차려입은 연인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아이라인을 두툼히 그려 마치 성난 것처럼 보이는 여인이 남자를 향해 무언가 재촉하는 중이었다.

“조카 줄 건데 저런 게 낫지 않아? 아직 어린앤데.”

“저런 거 사갖고 가면 형수가 뭐라 하겠어? 늘 말했잖아. 티도 나지 않는 선물은 하지 않느니만 못해.”

“그런 게 어딨어? 자긴 은근히 그런 거 있더라. 좋지 않은 버릇이야. 저런 사람들 물건도 팔아줘야 하는 거라구.”

“툭하면 고장날 거고, 써비스도 받지 못해. 야, 차라리 몇푼 더 보태서. 으이구 고집도. 참 못 말린다니까.”

승강이는 여인의 승리로 쉽게 끝났다. 이내 여인은 청년 김과 정씨 앞까지 바싹 다가와 있었다.

“아저씨 이거 얼마죠?”

여인의 물음에 청년 김은 잠시 정씨를 바라봤다. 정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 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팔지 않아요. 몇푼 더 보태서 좋은 거 사요. 우리 지금 쉬고 있어요.”

“아저씨, 안 들려요? 내가 이거 살려구 그런다구요.”

여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가씨, 안 들려요? 내가 이거 안 판다구요. 툭하면 고장나고 써비스도 없어요.”

청년 김이 그렇게 대꾸하자 정씨는 피식 웃었다. 그 바람에 빵가루가 옷섶으로 후둑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정씨는 귀찮다는 듯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낼 뿐이었다.

“별 웃기는 사람이 다 있어.”

여인의 말에 남자도 끼여들었다.

“이 사람아, 장사를 하려면 똑바로 해.”

남자까지 끼여들자 참지 못하겠던지 정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이 양반아, 물건을 사려면 똑바로 사, 좋은 걸로.”

“뭐야? 당신들 뭐 하자는 거야?”

“자기야 참아. 그냥 가자. 응? 그냥 가자. 내가 잘못했어.”

“꼬옥 꼭, 좋은 거 사슈.”

청년 김과 정씨는 웃어댔다.

그러나 웃음은 쉽게 사라졌다. 연인은 투덜거리며 계단 쪽으로 사라졌고 둘의 웃음도 연기처럼 슬며시 가라앉은 것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지하철 선로를 바라보던 정씨와 청년 김은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씨였다. 청년 김을 향한 충고였다.

“세일즈맨은 물건을 팔아야 해.”

“저 혼자 팔면 뭐 해요.”

“기분이다. 술 한잔 하자. 생일 턱으로 낼 테니까. 힘들다, 힘들어. 하루 지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정씨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을지로입구 전철역 사거리 앞에는,

 

노오란 불빛으로 가득한 포장마차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지만 정씨와 청년 김은 어느 천막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쉽게 결정 내리지 못했다. 정씨는 아무곳이나 내키는 대로 가자 했지만 청년 김은 이왕이면 맛이 좋은 집을 고르고 싶었다. 어쨌거나 생일파티인 까닭이었다.

갑작스레 핸드폰 벨소리가 다시 울린 것은 청년 김과 정씨가 ‘이모네’라는 이름의 포장마차로 막 들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청년 김과 정씨는 알전구 아래서 잠시 주춤해야 했다. 여보세요. 청년 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녀가 아니었다.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씨였다.

“거 뭣이냐. 자네 어딨나 지금. 지금, 거기 정씨랑 같이 있나 말이시? 거 뭣이냐. 지금,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거 뭣이냐. 거, 도, 도둑놈을 잡았다니까. 잘됐네. 코앞이네, 코앞. 광화문 사거리지. 얼릉 오라고.”

두서없이 말하는 박씨의 말을 청년 김은 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당황한 청년 김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자 궁금한 듯 정씨가 바싹 다가와 물었다.

“뭐여. 무슨 전환데? 일단 앉자고. 슬슬 추운데.”

“아저씨 물건…… 찾은 모양인데요?”

“그래? 어디서?”

엉덩이를 낮추던 정씨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청년 김은 사거리 왼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정씨의 손목을 끌었다. 둘의 발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광화문 지하보도 입구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널찍한 가판대가 있었다. 청년 김은 사람들 어깨 너머로 불쑥 드러난 박씨의 얼굴을 찾아냈다. 정씨와 청년 김을 알아본 박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급히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박씨는 재차 손목을 흔들어대며 말했다.

“거 뭣이냐, 여기를 지나다 말이시. 아무리 봐도 회사 물건 같아, 내가 여기 딱하니 섰어. 기다리자. 거 뭣이냐. 그래 기다리자 하고 말이시. 이눔이 필시 도둑놈인갑다 했지. 오냐 잘 만났다 싶어, 훔친 물건 팔 생각 다 하니 이런 맹랑한 놈 또 어딨냐 싶어서리. 근데 암만 기다려도 오지를 않는 거라, 암만 기다려도. 도둑놈은 보이질 않고 사람들만 왔다갔다하더란 말이시.”

“무슨 말이에요?”

“누가 그러더만. 사람이 차에 치였다고. 이것은 또 뭐인지 알겄나?”

박씨가 내놓은 것, 그것은 최씨의 낡은 모자였다. 호크 부근에는 여전히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청년 김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가판대를 봤다. 캠핑용 돗자리를 두 장 겹쳐 만든 널찍한 가판대였다. 위로는 볼품없는 물건들이 어지러웠다. 박씨의 싸구려 밴드통이 쌓여 있었다. 홍씨의 알람시계 박스가 흩어져 있었다. 김씨 아주머니의 열두가지 색 싸인펜 세트가 있었고, 이씨 아주머니의 옷걸이도 있었다. 선우씨의 다리미 커버도 몇장 보였다. 민씨가 물건 없어 팔지 못할 판이라며 투덜거렸던 흘러간 팝송 선집도 물론 몇개 남아 있었다. 모두가 잃어버렸던 물건들이 여봐란듯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최씨는 이곳에 앉아 물건을 팔고 있었단 말인가. 청년 김은 무언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청년 김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움직일 수 없었다. 입을 다문 채 거친 숨만 들이쉬고 내쉬었다. 청년 김은 낡은 종이박스 위에 씌어진 최씨의 글씨를 보았다.

‘오늘 하루만 더 싸게 800원에 팝니다.’

청년 김의 곁에 서 있던 정씨도 아무 말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답답했던지, 둘의 옷소매를 번갈아 잡아당기던 박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무실에 전화는 했다만, 이제 거 뭣이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여? 말 좀 해봐.”

“어떻게 하죠?”

청년 김도 한숨을 내쉬듯 정씨에게 물었다.

“신고를 해야 하나?”

박씨가 다시 물었다.

“염병. 내 선풍기 카바 팔십장은 없네. 다 팔았나보이. 나머지 물건이나 챙기지.”

정씨는 짧게 대답했다.

광화문 사거리, 사방으로 펼쳐진 씨티비전에는 아름다운 한국을 방문해달라는 대통령 메씨지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2500씨씨 뉴 세단 자가용 한 대가 소리없이 질주하는 중이었다. 미래를 약속한다는 국민연금 홍보 자막과 정치공방 계속이라는 짧은 뉴스 한 토막도 지나치는 중이었다.

 

 

창신동 반지하에,

 

청년 김은 누워 있었다. 사위는 이미 짙은 어둠에 감겨 있었고. 청년 김은 다시 꿈을 꾸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청년 김은 문득,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하루를, 바지춤에 쓱쓱 닦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감자 마치 형광등처럼 희미한 불빛 하나 드러났고, 일순 흐릿해졌다. 너무 피로한 탓인가. 눈물 한방울 떨어져내리며, 그의 하루가, 다시, 꿈으로, 끝나는 참이었다.

가만히 누운 채로 청년 김은 최씨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봐 김군, 내가 보험 하나 들까 하는데, 저축보단 보험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는 건가? 그게 돈이 많이 드나? 나, 그거 하면 안되나? 어떻게 하면 되나?

 

청년 김은 언젠가 최씨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을 기억해내곤 눈을 감았다. 순간, 머릿속 금붕어 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 지느러미를 펼치며 헤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