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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상문고 사태의 ‘가족 로망스’
김도훈 金度勳
연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재학중. dhohoon@hanmail.net
1. 지난해 초 서울시 교육청이 비리재단의 복귀를 승인하면서 촉발된 상문고 사태는 이제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상문고 사태가 그간 전국 어디에나 비일비재하게 있어온 사학문제에 대해 이토록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데는 재학생들의 적극적인 비리재단 퇴출운동의 영향이 컸다. 지난해 6월 말 비리재단의 복귀를 용인하는 서울지방법원의 판결에 항의하여 분연히 일어난 학생들이 공권력에 맞서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 광경만큼 대한민국의 변화하는 시대적 조류를 극명히 드러낸 사건도 없을 것이다.
‘무서운 십대’들의 시민적 권리 주장이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고 경직된 기성사회에 미친 파급효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가부장적 아버지들’의 충격이 컸던만큼, ‘발칙한 학생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까지 만든 상문고 사태에 대해서는 온갖 억측과 ‘음모론’이 횡행했다. 그만큼 상문고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운동에 한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사태의 전모와 의의에 대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킬 책임감을 느낀다. 어디까지나 재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운동인만큼, 투쟁기간 동안 근거없는 ‘음모론’에 빌미를 제공할까 두려워 재학생 이외의 주체들의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온 것도 사실이지만, 상문고 사태가 비단 한 고등학교만의 문제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상문고 사태의 성격과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비리재단 아래서 20년 넘게 유지되어온 ‘상문고 체제’의 특수성과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 불가피하다. 다만 이미 언론에 의해 자세히 보도된 각종 찬조금 불법징수와 내신성적 조작, 그리고 교장을 위시한 재단측 인사들의 교사·학생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는 다시 장황히 열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교사·학부모·학생 어느 누구도 진심으론 달가워하지 않았던 상문고 체제가 지난 20여년 동안 유지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친 한국사회의 토대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심도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교장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억압체제가 강남 8학군의 한 공간에서 재생산될 수 있었던 토대는 물리적인 것 이상으로 상징적인 것이었다. 학교의 파행적 운영과 관련하여 ‘이상한 말’을 꺼내는 교사와 학생 들을 학생부에 보고토록 각 반에 ‘학생프락치’를 심어놓고, 각종 체벌로 분위기를 잡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억압만이 학생과 학부모를 입다물게 하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학교의 구성원들이 상식적 규범을 거스르면서까지 상춘식 전 교장의 횡포에 자발적으로 복종한 과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 탄압과는 별도로 상문고 체제라는 공고한 구조물 속에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충성을 가능케 한 문화적·상징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과 눈치보기를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문화, 높은 명문대 진학률에 대한 집단적 환상과 열망─단순암기가 입시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한국의 낙후된 교육제도하에서, ‘선생은 못 가르치는데 몽둥이는 잘 가르치는(?)’ 환경이 조성되기란 참으로 손쉬운 일이다─그리고 정의를 소리내어 갈구하는 개개인의 몸부림에 대한 뿌리깊은 집단적 냉소가 그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그 모든 부정적인 한국적 이미지들과 소시민적 욕망이 한데 엉키자, 도덕성과 합리성 대신 군대식 동원으로 당장의 성과를 보여주기에만 급급했던 상문고 교장은 ‘위대한 아버지’의 상징에 휩싸인 ‘카리스마의 화신’으로 둔갑하였다. 물론 촌지를 주지 못해 교사들로부터 노골적인 차별을 받았던 학생들이나, 반대로 촌지를 잘 줘 겉으로는 학교당국과 밀접한 공생관계를 유지했던 학생들이나 가장 소중할 법한 성장기에 대한 기억이 상처 깊은 악몽으로 남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준 그 일들이 입시에만 매달리는 교육의 이름으로 진행되었기에, 상문고 사태 발생 당시 대부분의 재학생과 졸업생 들이 잘못된 체제에 대한 저항의지보다 현실순응적 태도를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3. 1994년 초 일부 교사들의 양심선언으로 퇴출된 재단이 새 천년의 벽두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구성원들의 이합집산에서 한국사회의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났다. “그분이 오신다!”고 외치며 과거의 ‘상전’을 다시 맞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교사들의 모습은 학생들로 하여금 도덕적 분노보다는 차라리 길들여진 개인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지난 시절 교장의 권력에 유착해 학부모와 학생 들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일들을 가장 앞장서서 자행한 교사들 일부가 재단 반대측에 가담한 것은 시대상의 변화와 이들의 노회한 처세술을 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깃발만 바꿨을 뿐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일부 교사들에 대해, 과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다수 졸업생 동문들이 보인 반응은 다분히 냉소적이었다.
1999년 사학재단을 소유한 일부 교육위원회 위원들의 주도로 개악된 사립학교법의 기준으로 보면 별다른 하자가 없는 비리재단의 복귀를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대세로 받아들였고, 심지어는 수업결손을 우려한 나머지 재단 반대파 교사들에게 강한 압력을 넣기도 했다. 상춘식 전 교장의 일가친척과 친구 등으로 재단이사진이 구성되었지만, 이에 대한 별다른 제동장치가 없음으로써 비리인사가 임원임명 취소 후 2년 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허용한 현행법에 도전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런 일이었던 것이다. 대다수 동문들의 방관과 학부모들의 체제순응적 전략은 비리재단에 대한 저항운동을 어렵게 했다. 전교조와 상문고 교사들의 외로운 투쟁은 정치권·관청·언론의 집단적 외면 속에 좌절될 뻔했으나, 급격한 반전이 인터넷상에서 시작되었다.
상문고 홈페이지(www.sangmoon.hs.kr)에 연일 수십건이 넘는 글들이 올라오면서, 모교의 위기상황에 뛰어든 몇몇 졸업생 선배들과 재학생들 간에 사태의 심각성과 투쟁의 정당성에 관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비리재단과 유착한 교사들과 현실순응적인 학부모들이 대세순응론, 가부장적 권위 등을 내세우며 ‘불온한’ 재학생들을 뒤늦게 을러댔지만, 싸이버공간에서 이들의 조악한 논리는 여러 사람들의 논리적인 반격과 야유를 받으면서 무너졌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싸이버공간에서 몇몇 재학생들이 웬만한 기성세대도 흉내내기 힘든 훌륭한 논리를 전개하자 “고등학생들은 아직 어려서 사리분별 능력이 없다”는 식의 편견으로 대응한 기성세대는 비웃음만 사게 되었다.
2000년 2월 7일, 개학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일어난 상문고 학생들의 최초의 시위는 대한민국의 부패하고 무능한 교육체제와 통제 일변도의 청소년정책에 경종을 울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자발적인 시위를 계기로 학생지도부의 위상이 강화되면서 구 재단 시절부터 자행되어온 학교당국의 학생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제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3월 18일 상문고 운동장에서 거행된 학생인권선언을 계기로 짧기로 악명높던 상문고 학생들의 두발길이에 대한 제한이 대폭 완화되는 상징적 조치가 이루어졌고, 이후 주로 상문고 홈페이지를 통해 교사와 학생들 간에 활발한 상호비판과 진지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이들간의 신뢰가 제고되었다. 교내의 실질적인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교사와 학생들 모두 지난날의 비리로 얼룩졌던 학교에 대한 새로운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의 변화는 싸이버공간을 넘어 일상생활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급식 등 교내 행정에 대한 사소한 불만사항이 게시판에 올라오기가 무섭게 시정 노력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복지부동’ 관행에 대한 쇄신의 의지를 느끼게 했다. 이제 학생들은 학교에 대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잘못된 교육관행 및 한국 교육체제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의 기운 속에서 학생들의 의식은 나날이 성장했다. “상춘식 교장선생님은 너희들의 아버지 같은 분이고, 재단이사장님(상춘식 전 교장의 처)은 너희들의 어머니 같은 분이다”던 재단측 교사들의 억지주장은 신세대들에게 더이상 어떠한 상징적 권위도 가질 수 없었다.
다른 한편, ‘유교적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그래도 어른들인데 어린 우리가 이렇게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게 온당한 일인가’라는 불안감이 학생들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밀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불안감이 잘못된 순응을 조장하는 내면적 굴종이 되지 않도록 학생들은 몇몇 의식있는 학부모 및 졸업생 선배들과의 관계에서 피어나는 유대와 학우들끼리의 ‘형제적 결속’─특히 작년에 시위를 주도했던 3학년 학생들 여러 명은 자연스레 친구간에 의형제 관계를 맺기도 했다─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비리재단 반대투쟁을 위시해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의 의사소통 경험을 통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환경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면서, 그들 십대들은 조금씩 민주시민의 정체성을 키워갔다. 상당수의 교사들 역시 변화된 환경에 발맞춰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면서 학내민주화를 이끌었다.
4. 한창 학교의 좋은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2000년 6월 29일, 서울지방법원의 관선이사 파견 무효 판결문은 학생들에게 더이상 어떤 권위도 가질 수 없었다. 학생들의 안위를 염려해 교문을 막아선 전교조 교사들의 스크럼을 뚫고 상문고 학생들은 분연히 거리로 나섰다. “상식과 정의를 무시한 ‘슬픈 조국’은 각성하라!”는 외침이 메아리쳤다. 전경의 무자비한 곤봉 세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자식들 앞에서, “한참을 더 산 우리가 너희들보다 백배는 더 사회를 잘 안다”고 타이르며 ‘현실론’을 폈던 대다수 중산층 학부모들은 억장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더이상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한참을 덜 산’ 어린 자식들의 핏방울 앞에서는 통할 수 없었다.
상문고 사태가 일어난 지 반년이 넘도록 침묵으로 일관했던 대다수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법원 앞 시위를 계기로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길고 지루한 대치가 해를 넘기면서 신입생들의 타학교 재배정을 기도한 교육청의 행정조치로 폐교의 위기상황까지 직면했던 상문고 사태는 모처럼의 결실을 얻어냈다. 2001년 3월 말, 고등법원이 1심 판결을 뒤집고 상문고의 비리재단 복귀 취소와 관선이사 파견의 결정을 승인한 것이다.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조건 위에 상존하고 있는 부패사학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환기하면서 사립학교법 개정, 더 나아가 교육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선 상문고였기에 고법의 판결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사립학교법의 개정을 통해 구조적인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상문고를 비롯한 수많은 사학들의 몸부림은 여전히 불안한 현재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번의 상문고 판결은 엄밀한 법리해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전과자를 교장으로 임명한 재단측의 중대한 실책, 언론플레이 등 다분히 외부적인 상황변수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상문고가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사학들의 선례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2001년 4월 현재 구 재단측은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복, 다시 대법원에 상고를 해놓은 상태이다. 법률이 일반상식의 수준에 맞게 다시 개정되지 않는 한, 상문고를 비롯한 사립학교들의 운명은 그때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상문고 사태에서 보여지듯, 사립학교법 개정투쟁은 단순히 교육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문화적·상징적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주체가 학내 이해당사자들과 전교조의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아득한 개발독재 시절부터 지금까지 권력의 한자리를 붙들고 있는 한 노정객이 “사립학교법 개정운동이 지닌 깊은 함의에 맞서 우리 보수세력들이 공고히 단결해야 한다”고 호소한 일은, 유감스럽게도 그의 깊은 혜안(?)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물러나야 할 가부장적 권위주의자들의 공모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사립학교법 개정운동이 좀더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 높은 사회의식 속에 ‘형제적 연대’를 꽃피운 어린 희망들의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각계각층 지식인들이 좀더 조직적·체계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교육문제에 대해 전문적 안목을 갖추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