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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예술교육의 대안, ‘국립예술대학’
이재현 李在賢
문학평론가. 문화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 저서로 『나는 삐끼다』 『만화 세상을 향하여』 등이 있음.
1. 우리나라에 ‘마음을 만드는 것’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예술학교)인데, 앞의 표현은 교가에 나오는 것이다. 예술학교는, 1990년에 출범한 문화부의 문화발전 10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설립된 학교다. 그 설치령이 1991년에 제정되고 음악원이 1993년에 개원함으로써 학교가 문을 열었다. 예술학교는 음악원·연극원·영상원·무용원·미술원·전통예술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원은 일반대학의 학부과정에 준하는 과정을 개설하여 졸업생에게 학사 학위를 수여하며, 각 원에 따라 일반대학의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2년 혹은 3년제의 전문사 과정을 두고 있다.
예술학교는 고등 예술교육 과정을 개설한 다른 국공립 및 사립 대학과 비교하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입학시험이 수능시험 이전인 8월부터 10월에 걸쳐 있다. 또, 고등학교 졸업학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영재로 선발된 이라면 예술사 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시험내용은 각 원과 각 학과에 따라 서로 다른데, 공통점은 철저히 실기 위주이면서도, 전공에 관계없이 대개 구술시험과 글쓰기 시험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특히 영상원과 미술원에서 글쓰기 시험을 중시하는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대학입시제도가 갖는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학생을 뽑고 있는 것이다.
예술학교의 교육과정도 전문적인 예술교육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특수 교육시설 및 기자재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한편, 예술학교는 예술영재를 조기에 발굴하기 위해 예비학교 제도를 운영하는데, 이러한 교육의 성과는 예술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국제 꽁꾸르나 영화제 및 연극제 등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술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순전히 국내에서 교육받은 이들이 이런 성과를 거두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예술학교는 몇가지 점에서 ‘대안학교’라고 할 수 있다. 예술학교는 우리나라의 입시제도와 고등 예술교육에 대한 대안이다. 예술학교가 1999년에 설치법을 제정하고자 추진했을 때, 예술학교가 갖춘 교육과정과 시설 및 기자재 등이 갖는 명백한 비교우위로 인해서 전국의 다른 대학·교수·학생 들이 거세게 반발한 것만으로도 예술학교의 대안적 위치와 효과를 잘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반발 때문에 1999년도의 설치법은 국회를 통과할 수 없었다. 늘상 표를 의식하는 국회의원들로서는 그러한 반발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학교를 국립교육기관으로 삼기 위해 대통령령의 수준으로서가 아니라 국회에서 제정하는 법 수준의 근거와 권위를 마련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저버린 꼴이 되었다. 한편, 예술학교 쪽으로서도 독자적인 설치법을 제정하는 일이 문화예술계 전체의 동의와 지지와 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자체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예술학교에서는 1999년도의 설치법과는 다른 설치법 시안을 구체적인 조문까지 성안하여 제출해놓고 있다. 문화예술계 및 국회의 동의를 구해서 빠른 시일 안에 입법해야 할 일이다.
2. 나는 1995년 영상원이 개원했을 때부터 강의를 나가서 지금은 영상원과 무용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영상원에서의 이번 학기 강의는 ‘현대예술의 쟁점’이라는 인터디시플리너리(interdisciplinary)한 과목이어서 연극원·미술원·음악원 학생들도 수강하고 있다. 무용원의 강의는 ‘예술과 경영’ ‘문서 작성’이라는 이름의 강좌인데 내 나름대로 각기 현대 인문학 입문과 글쓰기에 방향을 두고 강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예술학교는 앞으로 보완해야 할 몇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 인터디시플리너리한 특성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외국의 국립예술학교는 연극이면 연극, 무용이면 무용, 영화면 영화 등 단일학과의 연장 내지는 단과대학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우리의 예술학교는 기존 고급예술 제도의 장르 구분을 따라 만들어진 원(阮)들이 모여 있다. 그래서 학교 이름에 어색하게도 ‘종합’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인데, 어쨌거나 온전한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
구체적으로, 전통예술원이 하나의 원으로 독립해 있다는 것이 이런 문제의 일단을 드러낸다. 전통예술원의 각 학과는 각기 음악원, 무용원, 연극원 등으로 통합되어야 마땅하다. 전통예술원을 따로 두는 것은 언뜻 보면 전통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해당 예술교육과 예술적 실천을 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항 이후 서양에서 이식된 장르 예술과 우리의 전통 예술 사이의 분리와 분열과 소외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흔히 말하는 전통예술계의 봉건적 인맥관계를 개원 당시부터 재생산한 것에 불과하다. 이 경우, 전통예술원의 한국예술학과를 제대로 위치짓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제출된 설치법의 시안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술원 역시 밖에서 한국화·동양화라고 부르는 전공 영역과 예술적 실천을 미술원의 교육과정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전임교원을 확보하고 교과목들을 개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연장하면, 공공미술, 건축, 도시계획 및 도시공학을 아우르는 별개의 원을 설립하는 문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적어도 미술원의 건축과를 지금보다는 확대 발전시켜야 한다.
한편, 사진학과와 패션 디자인학과를 개설하는 문제라든가 미술원의 디자인과와 영상원의 영상디자인과를 발전적으로 통합·확대하는 문제, 현재의 한국예술연구소를 더 키워서 국립예술학교 부설 문화예술연구소로 확대 개편하는 문제, 문학원을 설립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문제 등도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각 원, 각 과, 각 전공, 특히 그중에서도 이론과와 이론 전공은 지금보다 훨씬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협동할 수 있는 씨스템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 또 이러한 문제들이 21세기 국가 발전전략 및 문화예술 발전전략, 그리고 문화산업 발전전략에 상응하도록 지금부터 여러가지로 안을 내고 이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어가면서 학교 전체의 발전전략을 다시 제대로 짜기 위해서는 각 원의 교수, 학생, 직원, 문화관광부, 외부의 예술가단체와 문화NGO 등을 아우르는 공론화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야 한다. 또한 예술학교를 분장하는 업무를 문화관광부 예술국에서 맡을 게 아니라 문화정책국이나 기획관리실에서 맡아 예술·교육·문화산업 등에 두루 걸친 사안들을 조정하고 해결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3. 내부적으로는 각 원, 각 학과, 각 전공이 근시안적 사고와 이기주의를 버리고 예술학교 전체가 커나갈 때 각 단위도 커나갈 수 있다는 전망과 믿음을 굳건히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공통으로 수강할 수 있는 과목의 개설, 공통으로 개설될 강의를 담당할 교원의 임용, 공통으로 쓸 수 있는 기자재와 시설 등과 관련해, 각 단위의 이기주의 때문에 적지 않은 중복투자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런 시각을 확대한다면,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그리고 고급예술의 각 장르별로 편제되어 있는 현재의 씨스템을 이른바 정보통신기술 패러다임에 걸맞게 고쳐나가고 적응해나가는 필사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알기로 새 설치법에 이런 문제의식이 일정하게는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부족하다. 무용원의 이론과 중 공연예술경영 전공의 개설 취지는 미술원이나 영상원으로도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미술원에서는 시각이미지 기획자나 큐레이터나 화랑 경영자를 기르는 과정을, 그리고 영상원에서는 영화제작자나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나 영화사의 스태프 등을 기르는 과정을 공식적으로 개설해야 한다. 국립예술대학이라고 해서 그 졸업생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
각 원간의 인터디시플리너리한 협동과 교류를 바탕으로 해서 다양한 형태의 산학협동 및 예학협동의 모델을 개발해내야 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또, 현재의 이른바 찾아가는 공연 프로그램이 갖는 엘리뜨주의적 한계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시민 상대의 열려진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제대로 세우고 알차게 실행하는 일도 바깥에서 요청하고 있는 과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도서관의 부실함, 작업실 공간의 절대 부족, 기숙사의 부재, 정보통신기술의 일상적 접근의 불가능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립예술학교의 발전전략을 제대로 세우고, 이에 따라 문화관광부가 예산을 마련하여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 전에라도 이런 전망 아래에서 시급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영상원은 그 특성상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 일찍부터 깨어 있은 편이다. 최근 영상원은 싸이버대학, 멀티미디어 콘텐츠 특성화 학과, 문화콘텐츠 전문 프로듀서 양성과정, 디지털 영상제작 연구소 등과 관련된 사업계획을 논의하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이런 일들 역시 다른 원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격과 이제까지의 성과를 염두에 두면서 씨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는 예술학교 전체와 다른 원에서 영상원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와 견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국립예술학교 설치법의 입법화가 시급하게 요청된다. 이 법에서는 예술교육의 특수성과 자율성을 국가가 보장한다는 원칙이 조항으로 당연히 들어가야 하며, 교육법상의 각종학교로 분류될 것이 아니라 국내 및 국외의 다른 학교로의 편입학과 진학이 가능하도록 정식으로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하고, 그 학위 명칭도 내용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설치법에서는 각종 쎈터와 연구소를 명시하여, 이들 하부조직이 국립예술학교의 내부의 인터디시플리너리한 일들과 산학협동 및 예학협동 등의 대외 코디네이션이나 협동과 관련된 일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대학들도 대승적 차원에서 국립예술학교 설치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정보통신기술 패러다임과 관련된 대학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관련하여 각 대학 및 각 학과를 특성화하는 전략을 짜고 이를 실천하는 생산적 경쟁의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잘되는 쪽의 발목을 잡을 게 아니라 각기 나름대로 창발적인 문화예술가 내지는 문화예술 기획자 및 생산자를 키워낼 수 있는 독자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식강국, 문화의 세기, 문화산업 등이 시대의 화두로 인구에 회자되는 이때, 이러한 구호가 노동자들을 무작정 직장에서 내쫓지 않도록, 또 디지털 디바이드를 확대재생산하지 않도록, 또 이른바 문화산업이 굴뚝산업 시대와 똑같은 어처구니없는 발상에 의존하지 않도록, 그리고 문화예술이 돈벌이로만 이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국가 차원의 고등 문화예술 교육기관을 제대로 자리잡게 하는 일은 문화예술인과 지식인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