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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꾸바특산 문화상품의 예술적 감흥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설준규 薛俊圭

한신대 영문과 교수 jksol@hucc.hanshin.ac.kr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파리, 텍사스」에서 음악을 맡았던 미국의 기타연주자 라이 쿠더(Ry Cooder)가 꾸바의 잊혀져가는 대중음악인들을 모아, 주로 1930년대에서부터 195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곡목들을 엮어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이하 「부에나비스타」)이란 음반으로 내놓은 것은 1997년이었다. 이 음반이 그래미상 열대라틴 부문을 차지하면서 수백만장이 팔려나가자 1999년에 쿠더는 벤더스 감독을 앞세워 음반 제작과정을 중심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만든다. 전세계를 순회공연하고 있는 이들 음악인들은 올해 초 국내에서도 성황리에 공연을 가졌고, 곧이어 영화 「부에나비스타」가 뒤늦게나마 국내에 개봉되었다.

최고령자가 90세이고 대개 60은 넘긴 꾸바 대중음악인들의 음반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대했을 때 나의 반응은 호기심 반 냉소 반이었다. 이윤을 찾아 온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는 전지구적 자본이 미국의 40년에 걸친 봉쇄정책 덕분에 극도로 옹색한 처지에 몰린 사회주의 꾸바의 대중음악을 고령의 연주자라는 희소가치와 묶어 신상품으로 포장해낸 것이려니 하고 접어두었던 듯하다.

인터넷서점에서 영화 「부에나비스타」의 DVD 가격이 예상보다 매우 싸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서야 까짓것 어디 한번 사서 보자고 작정했던 것인데, 주문한 것도 잊고 있던 어느날 배달되어온 DVD를 15인치 모니터로 곁눈질하듯 보기 시작한 지 5분 남짓 되었을까, 간명하면서도 깊숙한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이 부드러운 타악기 소리와 침착하게 어우러지는가 했더니 중년 또래 남자의 기름진 테너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주름살 투성이 노인의 베이스 위로 힘차게 뻗어나갔다. 한 소절을 부르고 젊은 테너와 마주보며 지그시 웃는 노인의 눈이 만년임에도 현역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람만이 지닐 법한 당당함으로 반짝였고 트럼펫의 유장한 애드립이 그 눈빛에 화답했다. 이 노인이 바로 90세를 넘긴 꼼빠이 쎄군도(Compay Segundo)이고 노래는 최근에 그가 직접 지은 「찬찬」(Chan Chan)이었는데, 꾸바의 전통적인 대중음악 양식 중 하나인 쏜(son) 풍의 이 곡은 일상사의 와중에서 남녀가 성적으로 끌리는 모습을 위엄에 찬 가락에 실어 거리낌없이 펼쳐보이고 있었다. 문득, 감전된 듯, 온 감각을 곤두세워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3세계 대중예술은 초국적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사냥감이게 마련이라는 나의 섣부른 ‘사회과학적’ 선입견이 영화의 초입에서부터 민망스럽게도 무색해졌던 셈이다. 크게 보면 전지구적 자본이 자신의 외곽에서 새로운 문화상품을 발굴해가는 과정을 추적한 것이 이 영화이고, 이 영화 자체도 그 과정에서 산출된 또하나의 문화상품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부에나비스타」는 대중들의 소박한 정서에 밀착한 민요적 건강성이 살아 있는 음악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일회용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은 대중예술의 가능성을 실감으로 일깨워주었다.

영화는 암스테르담 르카레 극장과 뉴욕 카네기홀의 연주회, 아바나에 있는 스튜디오의 연습 및 녹음 장면, 음악인들의 인터뷰, 쿠더가 음악인들을 찾아나서는 과정 등을 이렇다 할 연출 없이 엮어나간다. 대부분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음악인들이 꽃다운 사랑과 걸쭉한 육담이 실린 곡들을 때로는 애절하게 또 때로는 텁텁하고 흥겹게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오래 전에 끝난 줄 알았던 자신들의 음악인생을 숨길 수 없는 희열로 되살리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서 더할 나위 없이 극적이므로 이 영화의 다큐멘터리 형식은 매우 효과적이다. 꾸바의 냇 킹 콜(Nat King Cole)로 불리는 1927년생 이브라힘 페레르(Ibrahim Ferrer)와 1919년생 루벤 곤살레스(Rubén González)는 이같은 다큐멘터리 형식이 특히 빛을 발하는 경우다.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로 자란 페레르는 가수로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수년 전 은퇴하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묻어버리고 구두닦이로 늙어가던 중이었고, 꾸바 3대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하는 곤살레스는 동구권 몰락 이후 피아노가 제때 수입되지 않아 5년 가까이 연주를 못하고 있었다. 페레르가 구두약처럼 검은 얼굴 가득 은근한 흥겨움을 담아 불러젖히는 구성진 볼레로의 서정과, 곤살레스의 앙상한 손끝에서 튀겨나오는 선율의 물방울 같은 맑음은 그들이 살아온 삶의 우여곡절과 신산함이 녹아 있어 더욱 감동적이다. 이같은 감동은 분명 음악과 영상이 잘 결합된 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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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봉쇄조치를 불러온 미사일 위기가 도입부에서 다소 장난기 있게 다루어질 뿐, 이 영화는 꾸바의 현실을 정색하고 대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꾸바사회에 대한 이 영화의 다소 복잡한 관점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져내릴 듯한 건물들과 전기가 모자라 깜깜해진 아바나의 골목길을 비추는가 하면 거리에 한가히 늘어선 사람들의 선량하고 넉넉한 표정을 잡아내기도 한다. 꾸바의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라 불리는 오마라 뽀르뚜온도(Omara Portuondo)가 볼레로 한 곡조를 애절하게 부르며 허름한 골목길을 거니는 모습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함께 노래를 부르며 낯가림 없이 그녀의 곁을 따라걷는 한 흑인 중년여인의 환한 얼굴을 보여주고, 혁명 전 카지노로 쓰이다가 체육관으로 개조된 건물 안에서 곤살레스가 연주하는 재즈 선율에 맞춰 천연덕스럽게 어깨춤을 추는 어린 여자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매도 담아낸다. 요컨대 이 영화는 꾸바사회의 물질적 궁핍과 꾸바 사람들의 낙천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카네기홀 공연차 뉴욕을 찾은 음악인들이 영락없이 갓 상경한 시골노인들 행색으로 “좋구나, 좋아”를 연발하는 모습에서 미국자본주의의 꾸바 사회주의에 대한 일방적 승리를 읽어내는 평이 적지 않은데, 이건 좀 순진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시골노인들이 난생 처음 보는 대도시의 휘황찬란함에 감탄하는 것이야 당연한 노릇일 텐데 이를 두고 대도시의 승리를 운위하는 것은 촛점이 빗나간 일이거니와, 찬사를 연발하는 제3세계 악사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보여준다거나 케네디(John. F. Kennedy)와 닉슨(Robert Nixon)을 위시해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레이 찰즈(Ray Charles) 등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밀랍인형이 놓인 진열장을 들여다보며 이 나라는 모든 것을 다 상품으로 만든다는 투로 재미있어하는 악사들의 반응을 유독 눈에 뜨이게 처리한 대목 등에서는 미국에 대한 영화의 곱지 않은 시선이 감지되는 듯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찾던 곤살레스가 여신상의 생김새가 50년 전에 보았을 때와 다르다고 한사코 우기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잘 울리는 스피커와 큰 화면으로 제대로 감상해보겠다고 극장을 찾아나섰지만 결과는 실망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다큐멘터리 효과를 극대화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손에 드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는 화면의 노이즈가 거슬렸고, 비교적 뒷자리에서 보았는데도 인물들의 표정이 화면 가득 확대되곤 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부담스러워 실감을 깎았다. 한글자막은 비교적 정확했지만 노랫말의 은근한 성적 암시가 담긴 부분들을 죄다 점잖게 풀어버려서 재미가 가셔버렸다.

CD로 음악만 들어도 훌륭하긴 한데 연주자들의 표정이며 몸짓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묘미가 없어 퍽 허전하다. CD가 좋아 뮤직비디오를 구해보면 연출된 영상이 음악을 잠식해들어와 실망할 때가 많은데 「부에나비스타」는 그 반대인 것이다. 스페인의 마누엘 도밍게스(Manuel Dominguez)가 쿠더보다 몇해 앞서 노령의 꾸바 음악인 다섯을 모아 비에하 뜨로바 싼띠아게라(Vieja Trova Santiaguera)라는 악단을 꾸려 여러 장의 음반을 내고 그 과정을 1997년에 「검은 눈물」(Lágrimas Negras)이란 영화로 만들었다는데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비에하 뜨로바의 음악과 「부에나비스타」를 비교해서 들어보니 꾸바 대중음악의 저변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과 아울러 음악적 개성의 다양함이나 기량의 정정함에서는 아무래도 후자가 윗길이라는 느낌이 든다. 더구나 꾸바혁명의 대의를 대중음악으로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는 빠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és)의 방부제 처리한 듯 말쑥한 음악과 견주면 「부에나비스타」의 걸쭉함과 텁텁함, 흥겨움과 애절함이 어우러진 민요적 활력은 단연 돋보인다. 이 음반이 꾸바 대중음악의 예술적 경지를 독보적인 수준에서 대변한다고 보아도 그다지 틀림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