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맑스주의는 오래 지속된다

프레드릭 제임슨 『후기 마르크스주의』, 한길사 2000

 

 

이경덕 李景德

연세대 영문과 강사 malte0311@hanmail.net

 

 

이 책의 원제는 『후기 마르크스주의: 아도르노 혹은 변증법의 지속』(Late Marxism: Adorno, or, the Persistence of the Dialectic, 1990)으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 『계몽의 변증법』 『미학이론』을 다루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되, 아도르노 이론에 대한 입문서나 해설서라기보다는 아도르노를 경유한 맑스주의 내지 변증법에 대한 명상에 가까운 책이다. 제목의 후기 맑스주의(late marxism)라는 명칭은 제임슨을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1984)라는 글에서의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late’라는 말은 통상 ‘시대에 뒤늦었다’ ‘한물 지나간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그 이면에는 그렇기 때문에 ‘늦게까지, 집요하게, 오랫동안 지속된다’라는 뜻이 있다. ‘post’라는 접두어가 ‘탈’이나 ‘이후’라는 뜻을 갖는다고 할 때, ‘late’라는 말은 어떤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따라서 온갖 포스트주의의 환상을 거슬러 거기에 도전하는 셈이다. ‘late capitalism’이란 말은 자본주의가 곧 종식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면서 생겨난, 지겨울 정도로 끈질긴 자본주의의 생명력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을 담고 있는 용어이다. 또한 이 말은 자본주의가 탈산업사회니 소비사회니 하는 용어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외양을 바꾸긴 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임에는 틀림없다라는 생각을 애써서 전달하고 있다. 다른 한편 ‘late marxism’은 이처럼 끈질기게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그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인 맑스주의도 집요하게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표명하고 있는 말인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의 틀을 벗어나려는 포스트맑스주의에 대한 경계이면서 다른 한편 여기에는 달라지는 자본주의의 양상에 따라 맑스주의도 일정한 대응을 하게 마련이고 또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후기 마르크스주의』(김유동 역)에서 아도르노를 다루는 방식은 자본주의 및 맑스주의에 관한 이러한 생각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도르노는 ‘부정 변증법’과 반체계적 사유로 특징지어지거니와, 이는 ‘총체성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데올로기 편에서는 맑스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되곤 한다. 제임슨에 의하면 그러나 총체성에 관한 사유와 총체성이나 체계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은 서로 다른 것이다. 아도르노는 어디까지나 총체성과 동일성의 사상가이며 현대사회의 전체화하고 동일화하는 모든 경향이 사실은 자본주의의 교환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간파했다는 면에서 결국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가, 즉 맑스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가인 마틴 제이(Martin Jay)에 대해 제임슨이 비판하는 것도, 그가 은연중에 아도르노를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이 아도르노와 알뛰쎄(L. Althusser)를 연결시키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제임슨은 아도르노가 벤야민(W. Benjamin)을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는 성좌(constellation) 개념을 알뛰쎄의 구조적 인과성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성좌나 구조적 인과성 양자에 있어서는 각각의 요소, 혹은 차원이나 심급에 대한 인식이 전체 구조에 대한 인식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도르노의 ‘사회’는 제임슨이 알뛰쎄를 운용하여 발전시킨 ‘생산양식’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이 이러한 총체적인 ‘사회’를 ‘사회적인 것’ 즉 일종의 효과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버리는 데 대해서 제임슨은 거부의사를 나타낸다. 생산양식 대신에 사회구성체를 내세우는 일부 경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결국 실증주의 내지 경험주의에 빠지고 말리라는 것이다.

제임슨은 결국 맑스주의에 대한 주적을 실증주의와 경험주의(이것들은 그 자체 관념론일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초적인 형태로 간주된다)로 보고 있으며 이는 물론 아도르노의 실증주의와의 투쟁과 연계된다. 아도르노가 총체적 연관이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될 때,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모든 경향을 경계하면서 어떻게든 그 연관을 말하려고 하면서 걸었던, 저 악명높은 난해성으로 귀결되는 지난한 도정에 대하여 제임슨은 모더니즘에 있어서의 ‘재현’의 위기와 연관시킨다. 물화되고 파편화된 세계는 사실은 자본주의라는 지극히 총체적인 생산양식에 의하여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만 또 그 물화되고 파편화된 세계가 단순히 허상이 아니라 현실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순없이 단번에 전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 자체의 모순이 이론상의 아포리아(aporia) 내지 이율배반을 낳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해체론적이라 여겨지는 것은 그가 이처럼 아포리아와 이율배반에 주목하며 ‘개념’의 영원한 족쇄를 강조하고 있어서, 해체론에서 이항대립적 사유 즉 형이상학과 언어의 족쇄를 강조하는 것과 유사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해체론이 차연(différance)을 역사의 차원으로 열어놓는다면 더욱더 유사해질 것이지만, 그러나 해체론은 스스로 담지하고 있는 유물론적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발현시키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고 할 수 있다.

112-437마지막으로 아도르노의 미메씨스(mimesis) 개념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임슨에게 있어서 서사 혹은 예술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실재에 있어서의 모순이 개념상의 이율배반이나 아포리아로 귀결될 때 이를 상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제임슨은 아도르노의 ‘미메씨스’에서 유사한 작용을 발견한다. 미메씨스는 주관과 객관 간의 ‘친화성’, 다시 말해서 주체와 객체가 어떻게 서로 만나 작용하여 이 세계를 만들어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객관이 우위를 점하긴 하지만 거기에는 주체가 작용한 부분이 있기에 미메씨스적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이를 브레히트(B. Brecht)의 ‘낯설게 하기’와도 연결시키는데, 이를테면 자신이 만들어놓고도 자신이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물화된 삶이라면, 그것은 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메씨스 행위의 한 축이 객관에서 주체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다른 축이 주체가 객관을 만들어낸다라는 것일 때, 미메씨스 혹은 서사의 위기라 말해지는 것은 철저하게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시대의 징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제임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서로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역사나 실재의 작용이고, 이 작용을 보아내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또한 이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 모순에 대한 상징적 해결로서의 서사는 어떻게든 존속할 것인데, 사회와 절연된 자율적 예술의 원죄를 말하면서도 끝내 예술은 사회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설파하는 아도르노에게서 제임슨은 많은 것을 얻어왔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앉은자리에서 술술 이해가 되는 그런 책은 아니지만 힘들여 읽고 나면 그만큼 얻는 바가 많은 책이다. 여기에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특히 이성 및 합리성에 대한 고찰은 복잡하긴 해도 한번 쫓아가볼 만하다. 푸꼬 및 하버마스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와 관련되어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옮긴 이는 특이하게도 아도르노를 전공한 독문학자이다. 영문학도들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제임슨의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nes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 1981)도 번역을 못 내놓고 있는 사이에 독문학자가 제임슨의 아도르노론을 번역해낸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그를 여기까지 몰아온 것이리라. 글쓰기와 번역경험이 많은 학자라 일차적으로 유려하게 넘어가는 인상은 주는데, 그러나 따져보면 여기저기 구멍이 많다. 금방 눈에 띄는 것은 몇군데에서 이질성(heterogeneity)을 타율성이라고 번역한 것이고, 문맥상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언급인데 『후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언급으로 잘못 해석한 경우라든가(62〜63면) 레비 스트로스의 견해를 데리다의 견해로 잘못 본 것도 있다(455면). abandon(자유분방함, 거리낌없음)을 abandonment(자포자기)의 뜻으로 잘못 해석해서 말년의 푸꼬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64면). “아도르노의 유물론은 물화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에서 도덕적 정신주의를 감지해낸다”라는 뜻의 문장이 “아도르노의 유물론은 물화라는 슬로건을 비방의 도구로 사용할 때 일종의 도덕적 유심론으로 느껴진다”(84면)로 정반대로 번역된 것을 보면 난감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워낙 옮긴이의 아도르노에 대한 이해가 탄탄한데다 참신하고 독창적인 부분(이디오신크라시idiosyncrasy라는 원어를 그대로 고집한다든가)도 많아서 원문과 함께 찬찬히 읽어나간다면 뜻하지 않게 배우는 바도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워낙 단번에 술술 읽혀지는 책은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