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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도올 논어’의 재미와 함정

김용옥 『도올 논어(2)』, 통나무 2001

 

 

성태용 成泰鎔

건국대 철학과 교수 tysung@hanmail.net

 

 

『도올 논어(2)』가 나왔다. 『도올 논어(1)』은 김용옥(金容沃)씨의 『논어』에 대한 이해의 틀과 해석의 방법을 총론적으로 전개하고, 그 틀과 방법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맛보기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한 감질나는 맛보기에 아쉬움을 느낀 독자들과 시청자들은 당연히 좀더 전개된 그의 『논어』 해설을 통해 그의 튀는 『논어』 해설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다림은 김용옥류의 고전 해설에 대한 지지자와 비판자 모두가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도올 논어(2)』를 처음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도올 논어(1)』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의 감탄이다. 이 책에서 소화하고 있는 것이 『논어』의 「위정」과 「팔일」 두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김용옥씨의 종횡무진하는 필력에 대하여 경이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보통의 필자라면 두 권 분량의 책에서 『논어』 전체를 그 안에 다 담아내고도 남을 것이다. 어쩌면 한 권만으로도 될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김용옥씨는 그 안에 겨우 『논어』의 1/10만을 담고 있다. 마치 야마(野馬)가 평원을 종횡하듯 하는 김용옥씨 특유의 필치는 『논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끌어 인용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그 속에 몰입시키게 만든다.

김용옥씨가 『논어』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피력하기 위해 참조하고 있는 고금의 주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주자 집주’는 물론 기본이고 다산의 『논어 고금주』, 오규우 소라이 등의 일본 학자들, 서양의 학자들의 『논어』 주석에 대한 것들을 충실하게 참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마도 이처럼 많은 주들을 참조해가면서 자신의 관점을 잡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러한 작업을 해본 사람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논어』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동원되는 주석서 이외의 자료 종류만 보더라도 그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기』의 공자 세가 등 역사적인 자료는 기본이고 『순자』 『시경』 등을 연관되는 대목대목마다 적절히 인용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막스 베버의 『중국의 종교』, 칸트의 『실천이성 비판』을 원문까지 실어가면서 인용하고 있다. “일흔살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는 공자의 술회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의지와 도덕률에 한순간도 도달할 수 없다”고 한 칸트와 대비된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君子不器)라는 말에 대한 막스 베버의 비판을 반성적으로 수용하면서, 스페셜리스트가 존중되면 될수록 제너럴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져야 할 현대적 필요성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새롭게 부각시킨다. 이러한 동서양의 비교는 김용옥씨의 독점물은 아니지만, 김용옥씨처럼 감칠맛 나는 글 속에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사실이다. 독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독일어 또는 영어의 인용에 참신한 충격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며, 그러한 충격이 김용옥씨가 제시하는 결론에 쉽게 수긍하는 효과로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권위를 빌리는 설득방식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그 효과는 의심할 수 없다.

이러한 김용옥씨의 작업에 일단은 누구나가 감탄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말 재주 좋은 사람이 맘껏 재주 뽐내는 무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김용옥씨의 『논어』 해설에 찬사와 비판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은 김용옥씨가 이러한 자료들을 구사하는 방식과 그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내놓는 결론에 있지 않을까?

우선 김용옥씨는 너무나도 다양한 자료들을 너무도 자의적으로 끌어다 쓰거나 자신의 실존적(?) 논어 이해를 너무도 쉽게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도올 논어』가 어떤 수준의 독자를 겨냥한 어떤 수준의 책인지가 문제가 된다. 이러한 정도의 주장을 하는 데 꼭 독일어 원문을 그대로 옮겨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를 묻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칸트의 말까지 원문으로 인용하는 수준 높은 해설을 통하여 동서양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었다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부풀려 이야기해도 한 면이면 족할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있겠느냐라는 말이다. 독일어 원문의 적시가 여기서 꼭 필요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 지면을 낭비하는 일종의 과시욕이 아니냐고 묻는 독자도 있으리라. 이것은 독자의 취향과 수준에 따르는 문제이기도 하다.

김용옥씨의 실존적 『논어』 이해로 들어가면 취향의 문제가 아닌 좀 근본적인 물음이 나올 수 있다. 김용옥씨의 주관적이고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주장에는 거칠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닌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대목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교통법규를 어겨 경관에게 적발되었을 경우, ‘교통경찰과 쓱싹’ 하는 방식은 유교적이고, ‘딱지로 만족’하는 것은 법가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양보해도 납득하기 힘든 내용이다. 유교는 그러한 범법을 하는 것 자체를 개인적으로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와 풍속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법가는 엄한 처벌로써 범법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이해이리라. 그런데 갑자기 거기에서 ‘교통경찰과 쓱싹’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유교적 측면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일까?

112-450또다른 예를 보자. 맹의자(孟懿子)가 효를 물었을 때 처음에는 무심히 “거스름이 없는 것이다”고 대답했다가 무언가 꺼림칙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번지(樊遲)의 반문을 받고 ‘번개와도 같은 깨달음’이 엄습하여 효라는 것은 무조건의 복종이 아니라 예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게 되었다는 김용옥씨의 해설은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극적인 재미가 있다. 그러나 김용옥씨가 구성한 극적인 무대 설정의 생생함이 바로 사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만으로 전통적인 주석들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문제이다.

이것은 무엇이 정답이냐 하는 논의 이전의 문제이다. 어떤 답을 내기 위한 과정과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이야기와 곁가지의 이야기가 혹 합당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거나 그 분량과 강조점에 있어서 균형을 잃은 것은 아닐까? 『도올 논어(1)』에서도 제기될 수 있었던 물음을 다시 이 『도올 논어(2)』에서도 물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