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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1세기 과학, 낙관과 비관 사이

 

실험실 속의 모반자들

과학에서의 최근 혁명에 관하여

 

 

한스 마그누스 엔쩬스베르거 Hans Magnus Enzensberger

독일의 대표적인 시인·평론가. 1929년 출생. 『쿠어스부흐』(Kursbuch) 편집인 역임. 1963년 뷔히너문학상 수상. 주요 시집으로 『양들에 대한 늑대들의 옹호』(Die Verteidigung der WBlfe gegen die LCmmer, 1957) 『국어』(landessprache, 1960) 『미래음악』(Zukunftsmusik, 1991) 등과, 평론집으로 『정치와 범죄』(Politik und Verbrechen, 1964) 등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Putschisten im Labor: Über die neueste Revolution in den Wissenschaften”(Der Spiegel 23/2001)이다.

ⓒ H.M. Enzensberger 2001/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1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가 사라진 데 대해 이구동성으로 아쉬움과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요 얼마 전의 일이다. 유토피아란 개념은 창안된 이후 줄곧 인류의 정신 살림살이 부분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하늘의 양식’(Manna)으로 간주되어왔다. 인간의 운명을 완벽하게 개선하기 위한 이 기획은 합리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동화적 소망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작성된 유럽의 청사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더이상 낡은 인간(der alte Adam)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유토피아를 현실화하려던 모든 시도는 이내 의기소침한 후회로 끝이 나고 말았는데, 이런 일은 1989년 그 ‘기적의 해’(anno mirabili)에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우리는 정신병리학의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 얼마나 쉽게 인간의 우울한 정신상태가 광기의 단계로 급변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함을 보아왔다. 혹자는 이러한 갑작스런 돌변이 환자 개개인뿐만 아니라 거대한 집단 전체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는 데 동감을 표시한다. 지난 세기 70년대와 80년대는 우울한 저기압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던 시대처럼 보인다. 세계 도처에서 몰락의 씨나리오가 다채롭게 시험되었다. 봉쇄정책과 세계패권 다툼으로 일관해온 냉전체제는 국제정치를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러 형태의 환경재앙이 세계 도처에서 출몰하기 시작했음은 물론, 로마클럽(Club of Rome)은 조만간 모든 유한한 자원들이 완전히 고갈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게다가 ‘핵겨울’이란 말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종말론적인 시대 분위기는 단지 할리우드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넓게 퍼져간 것은 아니었다. 서구사회는 너무 일찍 파국을 맞아들이려 했다. 주지하듯 새천년이 시작되기 이미 오래 전부터 광기의 조짐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인류에게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내놓은 쪽은 역사철학이 아니었다. 어떤 정당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새로운 유토피아의 설계도를 그려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공산주의의 붕괴는 구좌파 혹은 신좌파, 그 어느 쪽 이념으로도 메워질 수 없는 이념의 진공상태를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새로운 유토피아의 약속들은 자연과학자들의 연구소와 실험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하나의 환상적 낙관론이 사람들의 이목을 다시 사로잡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이 직면한 모든 위기와 궁핍, 무지와 몽매, 그리고 고통과 죽음에 대한 승리 같은 유토피아적 사고의 동인(動因)들이 갑작스레 다시 돌아온 것이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을 개량시킬 수 있는 ‘그날’이 멀지 않았다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생식(生殖)·출산·죽음과 같은 아주 오래된 생리적 굴레들이 사라지고, 진화된 로봇이 노동이라는 신성한 악업(惡業)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해방시켜주며, 인공지능(KI)의 혁명적인 발전으로 인해 불완전한 인간 종(種)이 흔적을 감추게 될 그날이 오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먼 옛날부터 인간이 품어온 전능(全能)에 대한 꿈은 이제 과학이라는 씨스템 안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유토피아의 꿈을 부화시킬 수 있는 자격이 모든 학문에 부여된 것은 아니다. 자본과 관심 같은 요긴한 밑천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몇몇 학문들의 위상은 더욱 또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데 반해, 신학·문예학·고고학 그리고 철학과 같은 전통적인 인문학들은 부차적인 역할, 좀 심하게 말하자면 장식적인 역할만을 떠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분히 국가와 경제 쪽에서 뒤집어씌운 그 천진한 무해함 덕분에 오늘날 인문학은 허용될 뿐 아니라 인정까지 받고 있다. 이들 학문들에서 유토피아적 구원의 메씨지를 기대하기 힘든 까닭은 여기에 있다.

또한 자연과학 내부에서도 지구물리학이나 기상학과 같은 몇몇 학문들은 이른바 주류학문들의 그림자 속에서 겸손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이론물리학이 주류학문의 몫을 충실히 수행해왔다면, 최근에는 컴퓨터학·인지과학(Kognitionswissenschaft)과 더불어 생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클라우스 코흐(Claus Koch)의 말처럼 오늘날 생물학은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사이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나갈 뿐만 아니라, 이윤창출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모든 체계를 전복할 수 있는 아주 빼어난 혁명적인 학문이다. 생명공학은 앞으로의 경제순환 곡선을 맨 앞에서 이끌고 나갈 테크놀로지임이 분명하다.”

분명 학문영역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근본적인 지각변동이 어떠한 이념적 당위성에 대한 요구 없이 밋밋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터이다. 이전에는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절을 위해 샤먼과 주술치료사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분자생물학자와 유전공학자들이 그 권한을 물려받았다. 이제 불사(不死)의 세계에 관해 설교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신부님’이 아니라 ‘과학자’이다.

 

새로운 유토피아는 전례 없는 광고와 홍보 캠페인을 통해 대중사회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여기서 허풍을 떠는 학자들이 대부분 미국 과학자들이란 사실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인 특유의 낙천주의, 선교자적인 사명의식, 그리고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이 갖는 헤게모니적 위상이 새로운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진보에 대한 오래된 믿음이 다시 의기양양한 부활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모든 학자들이 ‘인류의 구세주’란 새로운 역할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도, 그것과 친숙해지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조직화한 회의주의(懷疑主義)’(Robert Merton), 증명된 사실만을 이론으로 확립하는 철저함, 그리고 사려깊은 신중함 같은 전통적인 덕목들과도 어긋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존 학문체계의 객관적인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 까닭은 연구 자체의 순수한 가치와 연구결과의 경제적 이용가치 사이의 거리가 급속도로 좁아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학문의 존엄을 떠받들어온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말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연구사업 분야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가능하면 빨리, 높은 수익을 올려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자들은 자율적인 권위의 성역에서 빠져나와 요사이 급속도로 몸을 부풀리고 있는 ‘산학(産學)복합체’(wissenschaftlich-industriellen Komplex)의 공동 출자자나 경영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특허청 변리사, 공채발행은행, 주식투자 전문가, 광고 홍보요원 등을 고용하기도 한다. 주식자본이든 국가보조금이든, 연구사업으로 쏟아져들어오는 자본은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고 매스미디어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이 판에서 불이익을 보고 싶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약속해야 한다.

 

알다시피 광기와 혼돈의 정신상태는 단계적인 현실성 상실을 통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동안의 유토피아 실험에서 겪은 역사적 경험들은 우리의 의식 밖으로 쫓겨났고, 그것이 파산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허먼 멀러(Hermann J. Muller)의 우생학(優生學)적 몽상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변증법적 유물론’만 해도 얼마 전까지 소련에서 유토피아 실현의 확고부동한 학문적 근거로서 절대적 가치를 인정받아오지 않았던가? 누가 지난 세기 50년대와 60년대 핵산업이 전해주던 달콤한 약속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당시 우리는 핵개발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내다보지 못한 채, 핵력(核力)을 ‘에너지천국’의 문을 여는 최적의 열쇠로 여기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미 30여년 전부터 전문가들이 인간의 뇌 기능을 훨씬 능가하고도 남을 만한 장치로 주목해온 인공지능은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막대한 투자에 비해 아주 초라한 성적표만을 보여준 로봇인형, 즉 기껏해야 계단을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전기 거북이의 ‘오늘’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손쉽게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성과들, 특히 의학 부분의 획기적인 연구업적들은 연일 대서특필로 환영하는 반면, 그것이 초래할지도 모를 위험과 부작용은 학술면 한 귀퉁이에 붙어 있는 칼럼 속으로 구겨넣어버린다.

결국 일반 대중의 경신(輕信) 풍조와 완미(頑迷)한 욕망들의 창궐은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현상처럼 보인다. ‘거대과학’(Big Science)과 ‘싸이언스 픽션’을 구별짓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 가운데 일부 세대가 텔레비전 영화 씨리즈 ‘스타 트렉’(Star Trek)을 통해 자신의 문화적 시계(視界)를 확정짓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가볍게 흘리고 지나갈 일만은 아니다. 이들이 만일 싸이언스 픽션을 프랑켄슈타인류 과학자들의 ‘방종한 낙관주의’의 소산쯤으로 여긴다면, 이것은 분명 SF 장르를 부당하게 다룬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공상과학 영화의 역사를 대충 훑어봐도 알 수 있듯, 그곳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미래의 공포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표현된 ‘부정적 유토피아’의 몫이 단연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공지능, 유전공학 그리고 나노기술(Nanotechnik)의 복음을 널리 알리는 전도사들이 이런 비관적인 미래상에 애써 눈을 감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들의 이런 사려깊지 못한 무분별함을 통해 배가되는 광기의 상황 속에서, 이들에 대한 저항과 항의의 목소리가 반향을 얻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정치 역시 산학복합체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리는 무기력한 존재로 판가름났다. 산학복합체의 전술은 간명하다. 이들이 교묘하게 노리는 표적은 변경 불가의 ‘기정 사실’(Fait accompli)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그것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개의치 않고 어쩔 수 없이 절충하고 순응해야만 하는 그 확고부동한 사실만을 이들은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을 향한 모든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몰이해와 몽매에서 비롯된 학문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의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미신적인 불안감으로 몰아세워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배격해버린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우리가 정치가와 로비스트를 통해서 이미 귀가 닳도록 들은 변명이고 의도된 거짓말이다. 그들에게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차근차근 따지는 일이란 정말 쓸데없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공격을 감행하여 자신들을 전장으로 끌어내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로 몰아버린다.

그러나 새로운 유토피아의 선정적인 약속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모두 천진한 무학자(無學者)이거나 학문의 논리를 무조건 경멸하는 사람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과학자들 내부에서도 유토피아적 약속에 대해 의혹과 불신의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혹 이런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룻밤 동안만이라도 결정학(結晶學)자, 천체물리학자, 위상(位相)기하학자와 함께 허물없는 대화를 나눠보라. 이들 역시 동료 과학자들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생명공학 진영 내부에도 자신들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을 위태롭게 바라보는 ‘침묵하는 다수’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제기하는 이의의 목소리가 너무 예의바르고 얌전해 아직은 대중사회 속에서 어떤 여론을 형성해갈 만큼의 힘은 없어 보인다.

 

물론 최근 생명공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비약적인 발전 계획표 안에도, 깜빠넬라(T. Campanella)에서 스딸린(I.V. Stalin)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토피아 기획들의 ‘더 인간적인 사회’라는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인간의 장기(臟器), 곧 인간 신체조직을 구성하는 각종 ‘부품’을 실험실에서 사육해 보급한다는 기획은 인간을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켜주어야 한다는 ‘의학적 정언명령’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드디스크는 인간 의식의 영원불멸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아기를 원하는 것은 절대적인 인권에 속한다. 생명공학자들은 아무런 신체적 결함이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아이를 가지려는 부모들의 지대한 관심이 인간 종의 진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옹호자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인간 종의 폐기라는 프로젝트조차도 모든 생물체는 더욱 지능이 높은 고등동물로 진화를 거듭해간다는 진화의 목표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아마도 찰즈 다윈(Chales R. Darwin) 자신조차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발견하지는 않았을 다위니즘(Darwinismus)의 새 버전이 그 윤곽을 드러내는 대목이라 하겠다. 어쨌든 이 몽상은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유토피아적 논거에다 신성한 일자리가 위협받고 주둔지(Standort)의 경쟁력이 떨어지리라는 우려까지 덧붙여지면, 바로 그때에 새로운 진화론의 노림수가 천하에 드러난다. 여기서 군사 전문용어인 ‘주둔지’라는 말은 그냥 갖다붙인 수사만은 아니다.

요컨대 그러한 유토피아적 기획은 모든 민주적인 결정과정을 전복하려는 목적을 지닌 일련의 냉혹한 쿠데타 시도이다. 기업과 몸을 섞은 과학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불가항력적 권능으로서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제 과학은 바야흐로 ‘제3의 자연’(eine dritte Natur,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 이후의 경직된 사회적 자연이 ‘제2의 자연’[루카치]이라면,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해 실험실에서 가공·생산된 ‘진짜 같은 가짜’ 자연이 ‘제3의 자연’이다—옮긴이)을 생산해낼 참이다. 그것은 대체로 실제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듯이 보이지만, 필요한 에너지를 주변 환경에서가 아니라 맹위를 떨치는 자본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행동양태를 보여준다. 제3의 자연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건방진 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귀담아들으려는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 제한선을 준수하지 않을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그들은 양심과 윤리불감증이 만연한 곳이나 법적 제재조치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나선다. 여기서 이들의 모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돈세탁자나 무기상인이다.

이러한 공격을 보조하는 행위로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모든 중요한 결정으로부터 소외된 바로 그 대중들이 자신들의 활동과 의도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다는 한탄과 선정성만을 사냥하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불평이다. 이들은 미디어의 힘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적당히 주무르는 것을 익히 아는 호객 상인과도 같다.

따라서 매번 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불거진 중요한 정치적 쟁점들이 국회에서 신중히 취급되기 이전에 텔레비전은 한발 앞서 아주 희귀한 유전병에 걸려 신음하는 불쌍한 환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들에게 절실한 도움을 막으려 들겠는가? 비록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라 할지라도, 난치병과 싸우는 환자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는 기업을 비판하려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유전공학 신기술이,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지만 정작 치료제 개발에는 거의 진척이 없는 말라리아나 결핵 같은 질병의 퇴치를 위해 적절히 응용된다면, 그 ‘의학적 정언명령’의 정당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일 터이다. 그러나 이들 기업에서 의료기술의 사명감 있는 분배와 공평한 혜택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바로 이 점이, 정작 중요한 것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는 아주 장래성 있는 사업, 즉 ‘생물 종의 변형(재)배양’(die Umzüchtung der Spezies)이라는 혐의를 시사한다.  

 

이미 정치무대에서 지나칠 정도로 혹사당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그 원래 의미와 효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사기 혹은 속임수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개념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이제 속임수라는 말은 더이상 야바위꾼들과 고등 사기꾼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외자나 이단자들에게만 국한해서 적용할 수 있는 단어도 아니다. 엄격한 잣대에 의해 논리를 확립해가는 과학자들조차도 자신의 연구결과를 책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연구결과가 미칠 파장이 원칙적으로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 자신이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과 같이 역사적으로 결백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오늘날의 수학자들은 누구나 이론을 발표하기 전에 훗날 그것이 비밀 첩보요원들, 군인들, 혹은 범죄조직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는 요구를 부당하다며 거부할 것이다. 현대 문명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하찮은 과학적 지식이라도 없애버릴 수 없고, 그것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사태를 초래한다. 그런데 이에 대항해서 산학복합체의 수호자들은 오늘날 우리의 문명사회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빛나는 과학적 성과물들에 온전히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는 몇몇 종파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필요할 때에 구조헬리콥터나 핵자기공명 단층촬영 그리고 항생제 등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가피성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생명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불거진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관한 관례적인 토론들은, 그 억지 공론적인 성격은 차치하고라도, 아직 초보적 수준을 넘지 못하며 실제로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인상이다. 각종 전문협의회, 윤리감독위원회, 전문가심의회들은 매일 독자적인 자기 규범을 쏟아내는 산학복합체 앞에 단지 임시방편적인 조치만을 내놓는 데 급급해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속한 이익대표단체의 실리만을 챙기려는 로비스트로서 활동하고 있고, 다른 일부는 계속 이유를 번복하면서 최대한 자기 손실을 막을 수 있는 것만을 지키려고 할 뿐이다. 입법기관 또한 진보 자체에 대한 뿌리깊은 의구심과 세계경쟁력 강화에 대한 시대적 요청 사이에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치이면서, 고작 당면문제에 대한 임시결정 조항만을 급조해놓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힘들게 내린 결정조차도 세상에 공포되자마자, 새로운 쟁점들을 들고 쳐들어오는 과학에 의해 손쉽게 유린당하기 일쑤다.

 

인간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에서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윤리적 합의점을 끌어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른바 ‘적극적 안락사’와 ‘유전자 선택’의 가능성에 관해 펼쳐진 논쟁들은, 이러한 실상을 유전공학의 미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믿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켰어야 옳았다. 이를 통해 개개인 각자는 모든 ‘윤리적 쾌적함’이 상실되어버린 상황에 자신이 내동댕이쳐져 있다는 점을 예의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각자는 극히 중요한 일련의 결정사안들을 더이상 해당 주무기관에만 위임할 수 없게 된다. 당면한 현안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중대사라면, 그들은 정치와 기존의 권력화된 종교, 그 어느 편도 믿고 의지할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과도한 요구에 맞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산학복합체가 약속한 성과들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결정이 아직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인 한, 여전히 다음처럼 말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남아 있다. “나는 그것과 함께 하지 않겠어.” 어쨌든 지금까지 우리는 대리모, 이종간 장기이식(Xenotransplantationen), 복제(Klonen) 그리고 산전 선택(pränatale Selektion)의 도움 없이도 별다른 지장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물론 이 길을 정당방위로 선택한 사람들은 이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이 감수해야만 하는 희생의 댓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 그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 그 댓가를 몸으로 치르는 일이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개인의 결정이 다른 사람들의 관대한 용인 아래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수많은 과학자들과 그들의 경제적 후원자들이 함께 꾀하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기획이 아무런 마찰 없이 평화적으로 관철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환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모든 유토피아 실험과 맺어온 역사적 경험이 이를 잘 증명해주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것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세상에 대한 우울과 광기의 정신상태만이 맹렬한 ‘진보숙명론’(Fortschrittsfatalismus)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기업과 의기투합한 연구사업들이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현장 안에서도 심각한 분쟁이 돌발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손익계산이 맞지 않는 최초의 경제적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예측할 수 없었던 큰 위험들이 고개를 내밀면, 침묵하고 있던 소수파는 저항을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런 연구프로젝트를 앞에서 이끄는 주역들은 정작 이들의 반란에 대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소수 저항그룹이 취하는 최초의 반격은 다분히 투쟁적인 실력행사 쪽으로 가파르게 경도될 것이 예상된다. 예컨대 박커스도르프(Wackersdorf)와 벤트란트(Wendland, 독일에서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로 선정되었다가 시민들과 환경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계획이 중단된 곳—옮긴이)는 시위가 전투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제공해준 바 있다. 이미 동물보호자들은 테러를 동원한 격한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 투쟁의 대상이 추상적인 위험이나 한갓 자리싸움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들 실생활과 밀착된 문제들─예컨대 자신의 피부, 생식활동, 출생 그리고 죽음 등과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 된다면, 도대체 저항은 어떤 모습을 띠고 나타나겠는가? 저항의 강도가 세질수록 생명공학과 관련된 연구분야는 안전과 비밀이 철저하게 보장된 성채 속으로 점점 더 깊숙이 숨어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연히 무장경비원이 지키는 철통 같은 요새에 들어앉아 자신들의 생명을 걱정해야만 하는 과학자들의 숫자도 꽤 늘어날 것이란 추측은 분명 황당한 상상만은 아닐 터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모든 것에 결연한 소수파가 이 흐름을 저지할 수 있을지, 심지어 되돌릴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결국 인간과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유토피아의 기획은, 지금까지 모든 유토피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반대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 내에 잉태된 ‘자기모순’과 ‘과대망상’에 의해서 파멸하게 될 것이다. 아직 인류는 전능(全能)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꿈과 자발적으로 결별선언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런 오만함이 자신의 진로를 따라 내달린 후에야, 추측컨대 엄청난 희생의 댓가를 치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유토피아 자체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존경할 수 있고 또 그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과학의 새 길이 열리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柳信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