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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함석헌의 민족적 정체성과 우찌무라 칸조오
양현혜 梁賢惠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저서로 『윤치호와 김교신─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등이 있음. yanghh@dreamwiz.com
1. 들어가는 말
함석헌(咸錫憲, 1901〜89)은 수입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부박함과 폐쇄적인 교단주의 틀을 벗어나 한국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동양 종교사상과 연관시켜 더욱 깊이 이해함으로써 서구적 기독교의 편협한 틀을 탈피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새로운 한국 현대역사의 창조를 도모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함석헌은 한국 개신교 120년 역사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기독교적 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함석헌이 그의 나이 53세에 「흰손」 「대선언」을 발표하기 전까지 일본의 우찌무라 칸조오(內村鑑三, 1861〜1930)가 주창한 무교회주의 풍토 속에 있었다는 것은 언뜻 불가사의하게 보인다. 알다시피 근대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은 일본제국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자각된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함석헌 연구에서 함석헌과 우찌무라의 사상적 관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것은 이 점과도 관련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무교회주의자로서 함석헌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인 『성서조선』 시대의 그의 글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우찌무라의 사상에서 무엇을 수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우찌무라의 사상적 틀을 돌파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우찌무라와 함석헌의 사상적 연관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자아 정체성의 추구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출발점으로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 국민국가로서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변혁하기에는 주변정세가 너무나 불리했다. 조선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1901년 함석헌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독립 애국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 10세 때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조선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지만, 애국·독립의 기상은 결코 잃지 않았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3·1독립운동은 함석헌의 삶을 대지진과도 같이 뒤흔들어놓았다. 함석헌 역시 평양경찰서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목이 다 타 마르도록” 독립만세를 불렀다. 후일 함석헌은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불가사의했다고 회고했다.1
그러나 규모나 내용에서 말 그대로 거족적인 운동이었던 3·1독립운동은 가시적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조선사회에 또다시 허탈감과 절망감이 엄습했다. 특히 천도교와 더불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개신교 내에도 이런 분위기는 만연하였다. 현실에 눈을 감으려는 탈역사주의가 ‘정교이원론(政敎二元論)’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교회의 대세를 점해간 것이다.
하지만 3·1독립운동을 경험한 함석헌은 “무슨 새것을 발견하고 잃었던 커다란 것을 찾은 듯”했기 때문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니던 평양고등보통학교의 학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2 함석헌은 자신과 새로 자각한 민족의식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고향에서 2년간을 혼자 번민했다. 이런 함석헌에게 돌파구가 된 것이 오산학교였다. 3·1독립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소굴’로 간주되어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오산학교가 1921년 다시 문을 연 것이다. 오산학교에 입학한 함석헌은 민족의식을 더욱 확고히하면서,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다. 이승훈은 당시 학생들에 의해 “참새 무리의 가슴속에 백두산 호랑이의 혼을 넣어주는” 선생으로 존경받고 있었다.3 함석헌이 남강의 가르침을 직접 받게 되는 것은 토오꾜오 유학을 마치고 1928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서 부임하면서부터이나, 이미 재학 시절 함석헌에게 남강의 존재는 크게 각인되어 있었다.
한편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또 한 명의 생애의 스승이 된 유영모(柳永模)를 만나게 된다. 오산학교의 교장이던 유영모의 가르침을 통해 함석헌은 단순히 성경의 자구에만 구속되어 있던 당시 교회의 성서읽기와는 달리, 깊은 생각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성서읽기의 입체적인 책임을 인식했다. 함석헌의 의식세계에 민족·삶·진리·기독교 등의 커다란 화두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민족정신을 계발하는 데는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토오꾜오 유학길에 올라 1924년 토오꾜오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비합법적이기는 하지만 일본공산당이 결성되어 있었으므로 지식인과 학생 사회에 유물사관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민족운동의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이 적합한지, 아니면 유물사관이 더 적절한지 등 삶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석헌은 민족, 자신의 삶과 진리,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유물사관 등의 문제를 올바르게 규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절박한 내면의 요구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내면의 고뇌를 안은 채 우찌무라와 만나게 된다. 후일 함석헌은 우찌무라와의 만남에 대해 “인생문제와 민족문제가 한데 얽혀 맘에 결정을 못하던 내게 그의 강연을 듣는 동안 많이 풀린 것이 있고 참믿음이 참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회상한다.4 그는 5년간의 우찌무라의 성서 강의를 통해 민족과 자신의 삶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가 하나로 관통하여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찌무라로부터 함석헌은 무엇을 발견했던 것일까.
3. 우찌무라와 ‘두 개의 J’
토꾸가와막부(德川幕府) 이래 250년 동안 기독교는 일본을 위협하는 사교(邪敎)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일본 기독교인에게는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관계지어야 하는가가 커다란 사상적 과제였다. 우찌무라에게도 이 문제는 젊은날 기독교에 입신한 이래 가장 절박한 과제의 하나였다. 우찌무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두 개의 J를 사랑하고 그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또 하나는 일본(Japan)이다. 예수인가 일본인가, 나는 그중 어느 쪽을 좀더 사랑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모든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예수와 일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와 일본, 나의 신앙은 하나의 중심을 가진 원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나의 심정과 지성은 이 두 개의 사랑하는 이름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하게 하는 것을 안다. 예수는 일본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강하게 하고 고결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예수에 대한 나의 사랑에 명확한 목표를 부여한다. 이 두 개가 없다면 나는 단순한 몽상가가 되거나 광신자가 되어 무정형(無定形)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5
즉, 우찌무라의 문제해결 방식은 기독교 신앙과 애국심이 상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이 하나의 고유한 극점으로서 서로를 상대화 내지 구체화한다는 변증법적인 종합관계였다. 따라서 타원형의 두 극점과 같이 양자는 진리의 양극으로서 동시에 성립하는 두 개의 중심으로, 그중 어느 하나를 부정해도 우찌무라의 실체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과 예수 이 양자에 대한 우찌무라의 사랑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는 곳에 그의 고유한 사상과 행동이 형성된 것이다. 무교회주의도 이 ‘두 개의 J’에 대한 헌신이라는 그의 사상적 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제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언사(言辭)도 아니다. 기독교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가 만일 이런 것이 아니라면, 늘 있어서 살아있는 그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6
기독교를 영원히 살아있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본 우찌무라는 기독교인은 어떠한 매개도 거치지 않고 직접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구원은 율법적 행위나 의식과 제도 등의 어떠한 인간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에게만 의지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신의 섭리와 경륜을 의식하고 어떠한 인간적인 능력이나 원조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유·독립의 단독자(單獨者)로서 서는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신에 대한 신앙에 의거한 독립, 즉 ‘의뢰적(依賴的) 독립’이야말로 기독교의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고 본 것이다.7
그런데 이 독립은 어디까지나 실존적 실험에 의해 스스로의 것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누구와 함께 하거나 누구를 대신해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우찌무라는 자유·독립의 정신은 기독교인과 신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중개하려는 모든 인간적인 종교제도와 의식 또는 교리나 성직제도에 대한 철저한 거부를 통해 추구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즉, 자유·독립의 정신은 그것을 억압하는 모든 인간적인 권위나 제도, 형식 그리고 권력에 대해 항거하는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에 의거해서 우찌무라는 제도적 교회를 인위적이며 기교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라고 배격하고,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만들어낸 사랑의 공동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8
한편 우찌무라의 자유·독립의 비판정신은 일본 기독교 교회의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는 외국선교부의 일본지부와 같은 행태를 보인 당시 일본 교회의 존재양식을 거부했다. 그는 성경이 독일에서는 루터교회를 영국에서는 감리교회를 출현시킨 것처럼, 일본에서도 선교사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신이 세운 일본의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다.9 우찌무라는 그가 주관한 잡지 『성서의 연구(聖書之硏究)』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나 외국선교사에게 의지할 아무런 필요도 없다. 우리들은 신(神)만을 의지해 복음을 전하여 그것을 일본인 고유의 것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외부로부터 이식되는 것이 아니고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10
우찌무라에게 기독교 복음은 외국선교사에 의지하지 않고 일본인의 심성 안에서 체득되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서구 기독교로부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독립한 일본 고유의 기독교 존재양식을 만들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찌무라는 일본 고유의 기독교는 어떠한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을까. 그는 교회제도·예배의식·교회건물 등은 비본질적인 요소로 판단하고 기독교를 신앙과 성서만으로 단순화하여 평신도의 성서공부 모임이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배제하려 했다. 이런 우찌무라의 사고방식 배후에는 정신적 내실과 형식적 표현을 준별하고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기 위해 형식을 무시하는 일본 선종(禪宗)의 영향도 침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주장하는 무교회주의는 결국 ‘두 개의 J’에 대한 헌신의 극적 긴장관계로부터 형성된 산물이었다.11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는 평신도에 의한 성서연구가 주축이 되었다. 그의 성서연구 방법은 복음의 진리와 그 자신의 ‘주체적인 실험’을 양극으로 하는 타원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여기서 실험이란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역사가 모두 그 자신의 현실적 체험 위에 생겼기 때문에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 자신이 성서의 말씀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이 실험은 주관이 없는 과학적 실험이 아니고 그 자신의 주체적 삶의 실험이며,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서 체득된 체험의 성과를 말하는 것이었다.
우찌무라는 성서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를 신이 인류에게 자기를 계시하는 세 가지 축으로 보고, 이것이 기독교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했다.12 따라서 그의 ‘실험’은 성서의 자연적 실험, 역사적 실험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성서의 자연적 실험’은 성서의 진리가 결코 자연법칙과 모순되지 않고 또한 단순히 이를 초월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양자는 상호 조화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하려는 유신론적 진화론의 관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찌무라가 더 중요시한 것은 그가 ‘성서의 예언적 연구’라고도 표현한 성서의 ‘역사적 실험’이었다. 이것은 성서의 말씀과 인류의 역사가 지향하는 것이 일치한다는 확신 아래 인간의 역사를 성서적 진리의 실험으로서 해석하고, 나아가 성서의 말씀을 역사에 대입하여 현재를 분석하고 그 장래를 예언해가는 것이었다. 성서가 증언하는 신의 역사, 경륜의 섭리는 역사 안에서 실현되기 때문에, 이것을 역사적 실험에 의해 분명히하는 것이야말로 성서 해석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 방법에 의거하여 우찌무라는 세계사 속에서의 일본의 사명을 규명하고자 『지인론(地人論)』을 저술하기도 했다.
한편 ‘성서의 예언적 연구’를 일본역사 속에서 검증하려는 것이 『만조보(萬朝報)』 『동경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 등을 통해 전개된 그의 사회평론이었다. 그의 논리의 핵심축은 ‘정의’와 ‘평민’이라는 개념이었다. 전쟁과 영토확장은 흥국(興國)이 아니고 망국(亡國)의 길이며, “정의는 국가보다 큰 것으로 국가의 기초를 정의 위에 세우는 나라만이 영원히 번영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따라서 정의 위에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참된 애국자의 책임이고 그외의 것을 가지고 나라의 융성을 도모하려는 것은 위선적 애국주의라 하여 준열한 사회비판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에게 ‘평민’이란 “신과 자력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의 칭호”로, “강자의 비호에 의지해 자기를 일으켜세우려 하지 않고, 정부의 위력을 이용해서 부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며, 위계(位階)를 이용해서 그 몸의 천함을 덮으려고 하지 않고, 단지 공평한 경쟁과 자기의 역량만을 가지고 세상에 대처하려고 하는 자”를 의미했다.13 이러한 ‘평민’이야말로 사회를 정화하고 변혁하는 힘을 가진다는 것으로, 이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종교적 개념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평민’은 신에 의한 전인격적 변혁에 의해 자유와 독립을 부여받음으로써 정의와 진리에 살게 된 예언자적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찌무라의 ‘평민’적 특성은 ‘우찌무라 불경사건’에서 잘 보여진다. 1891년 1월 토오꾜오제일고등학교(토오꾜오대학 교양학부 전신) 개학식에서 행해진 ‘교육칙어’ 봉독식에서 우찌무라는 종교적 ‘예배’에 해당하는 ‘봉배’는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여 메이지 천황의 서명에 대해 깊은 경례를 하지 않은 채 강단을 내려왔다. 이것이 전국을 들끓게 한 ‘우찌무라 불경사건’인데, 우찌무라에 대한 공격은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그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드디어 기독교와 국가의 충돌 문제로 발전하였다.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근대 국민국가를 확립하려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국적(國敵)’이란 박해를 감내해야만 했다.14 그는 권력의 우상화에 대한 예언자적 부정의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러일전쟁 개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도 그는 러일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전쟁의 이익은 강도의 이익으로, 검을 가지고 국운(國運)의 전진을 꾀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고 절대적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환영받지 못했으며, 그 결과 그는 근무하던 『만조보』사를 사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5
메이지시대 일본 기독교인 대부분은 애국심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양자의 상극 속에서 번민하며 정교이원론의 명분 속에서 대결을 회피하거나 혹은 양자를 절충하는 방식을 도모하다가 결국 기독교 신앙의 고유성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또한 부국강병을 국시로 하여 근대적인 절대주의국가와 자본주의체제를 확립하려는 근대 일본을 대변하는 사상가였던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가 이윤추구를 위한 대외적 침략을 주장하면서 탈아론(脫亞論)을 전개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면, 우찌무라의 ‘예언자적 사상과 행동’은 근대 일본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6
4. 함석헌의 ‘예언자’로서의 자아상
함석헌은 토오꾜오고등사범학교에 다니던 6명의 동료와 함께 우찌무라로부터 성서를 배우면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했다. 6명의 동료 중 함석헌을 우찌무라에게 소개한 김교신(金敎臣)과는 ‘그의 마음 내가 알고 내 마음 그가 안다’고 할 정도로 사상적 교감을 나누는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17
함석헌과 김교신 등은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자각 속에서 우찌무라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27년 김교신의 귀국을 계기로 이들 그룹은 무교회주의적 성서 잡지를 6인의 동인지로 간행하기로 하고, 1927년 7월 『성서조선』을 발간하였다. 이 잡지의 취지는 성서라는 보편적 진리를 조선이라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장(場)에서 받아들이고(Bible and Korea), 성서의 진리를 조선의 문화와 역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사상적 원점으로 세우는 것(Bible to Korea)에 의해, 조선을 신의 세계 질서를 대망하며 증거하는 존재(Korea on the Bible)로 형성시켜가고자 하는 것이었다.18 이것은 ‘두 개의 J’라는 우찌무라의 사상과 행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개의 중심축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서와 조선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함석헌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참조선인이며 참기독교인인 예언자로서 정립하고, 나아가 조선인 하나하나를 예언자적 실존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자의 위임을 받은 예언자는 진리 파지(把持)에 의한 용기에 근거해 최후의 악의 근본에까지 돌격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따라서 예언자의 애국은 편파적인 국수주의가 아니라 “영원의 진리, 보편적 정의”에 동포를 이끄는 애국이라고 주장했다.19 민족해방이 최우선 과제인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예언자로서의 삶은 허공을 치는 소득 없는 행위같이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적지 않은 자칭 ‘애국자’들이 눈앞의 성과에 좌우되어 독립의지를 상실하고 자기연민과 피해의식 속에서 스스로의 나약함을 합리화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골리앗’과 같은 장대한 대적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조선민족이 이겨내는 길은 보편적 진리에 근거하여 싸우는 끈기있는 투쟁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함석헌에 의하면 이를 위해서는 영원이라는 긴 단위로 역사를 볼 줄 아는 근기(根氣)가 필요하며, 따라서 눈앞의 현실과 영원 사이의 긴장을 이겨내기 위해서 주재자에게 모든 결과를 위탁하는 자기초월의 자유함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했다. 동시에 독립을 수확한다는 자세보다는 다만 독립을 위한 씨앗을 뿌린다는 겸허함이 필요했다.20 초월적 신뢰와 겸허함 속에서 올곧게 민족을 위해 헌신하려는 모습은, 예언자로서의 우찌무라의 사상과 행동을 식민지 청년지식인으로서 주체적으로 계승하려 했던 함석헌의 자아상이기도 했는데, 사실 우찌무라가 십자가에 근거하여 예언을 통해 국민에게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두 개의 J’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적 실존이 기독교의 진리 파지(把持)와 불가분의 관계였음은 물론이다. 함석헌이 무교회주의를 수용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는 우찌무라가 주장한 ‘의뢰적 독립’, 즉 신과 자신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자신을 세상에 대해 자유롭고 독립한 자아로 세우는 것이 기독교의 근간이며 예언자의 기본적 소양이라고 보았다. 이 자유·독립의 정신은 형식에 가둬질 수 없으며,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형식이 아닌 정신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제도나 의식, 그리고 성직자는 있어도 이 정신이 없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천박한 종교적 도락(道樂)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21 즉, 신 앞에 선 자유·독립의 단독자로서 스스로를 정립해야 하는데, 이 절대적 책임과 의무를 중개하여 대신해주겠다는 모든 교회제도와 조직을 교회주의적인 우상으로서 함석헌은 배격한 것이다.
성서와 신앙만으로 간소화된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적 사상의 핵심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 다시 말해 자유·독립의 비판적 항거의 정신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를 움직인 진정한 동인은 무교회주의의 전도사가 되어 교회와 대적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예언자로서 민족에 대한 책임과 불가분의 연관이 있는 조선역사의 세계사적 위치와 의의 그리고 사명을 해명해야 한다는 강렬한 소명의식이었다.
5. 조선의 사명: 창조적 수고자(受苦者)
함석헌은 조선의 사명을 해명하기 위해 역사연구에 몰두하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히브리서 강의」 등을 집필했다.22 그의 역사연구는 만물의 창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창세기」와 더불어 「요한복음」을 텍스트로 창조를 설명하면서, 우주는 “신의 로고스가 자기를 포기하고 그 영원무궁의 자리에서 내려와 만물 속에 거함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신이 스스로를 기꺼이 포기했기 때문에 만물이 탄생한 것이라 보았다.23 즉, 우주는 신의 로고스의 죽음에 의해 탄생된 것으로, 이것은 자기 포기라는 고통을 수반한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함석헌은 파악한 것이다.
또한 그는 만물이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은 신이 그 자신의 무한성을 표현한 것이지만, 이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하나’를 예상한다고 보았다. 진화의 과정은 복잡화인 동시에 신이라는 일자(一者)를 향해 가는 통일의 노력이기 때문에 다양한 만물은 창조 이래 ‘하나의 개체’였다고 그는 인식했다. 이러한 만물의 진화과정은 결국 신의 아가페에서 “흘러나오는 과정이고 또 거기로 흘러 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신의 사랑은 만물의 연원이고 동시에 만물의 귀착점이었다.24 동시에 그는 만물의 시작에서 귀착점에 이르는 역사과정은 기계적인 신적 법칙을 통해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생명 역시 자신과 같이 스스로의 자유로 아가페에 이르기를 원하여 다만 그 종자를 심을 뿐 만물에 자유를 위임했으므로, 생명이 스스로 자라 신의 아가페에 도달하는 자유의 과정이라고 인식했다.
함석헌은 우주의 모든 현상이 이러한 신의 아가페를 발하지만, “자연보다 이 음성을 발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진보란 물질의 향상이 아니라 가치의 실현을 의미하며, 따라서 인류의 현재 상황은 타락·후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큰 견지에서 보면 인류사는 신을 향한 진보의 걸음이며, 신을 알아가는 지식이 자라는 역사요, 도덕적 성장의 역사였다.25
이런 역사관에 서서 함석헌은 세계사의 운영단위는 하나의 영웅이나 계급 같은 것이 아니라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민족이란 그 자체로 자기완결적일 수는 없고 세계와 우주라는 질서 속에 통일되어 있는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즉, 민족이란 신의 아가페를 배워가는 세계사의 도상(途上)에서 도덕적 완성의 의무를 궁극적으로 책임지우는 단위로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의 자기 주장은 동시에 세계의 일원으로 무엇을 통해 세계에 공헌할 것인가라는 의식에 의해 한정되어야 하고, 세계사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배타적인 ‘민족심’이며 가장 큰 죄악은 집단적 배타주의와 이기주의라고 지적하면서 모든 국가주의를 종식시킬 것을 역설했다.26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에 대해 인(仁)이라는 좋은 바탕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점진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퇴락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 과정에서 사육신(死六臣)이나 임경업(林慶業) 등 의인(義人)이 없지 않았으나, 이상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유와 독립을 잃어버려 이제 독립을 잃은 자로서의 고난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이 져야 할 고난까지 연약한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노예의 처지를 감내하려고 하거나 부끄러움 속에서 남의 일처럼 외면하려고 하는 조선민족의 현실 속에서, 이 고난의 역사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사명을 조선민중에게 해명하는 것이야말로 함석헌의 예언자적 의무였다.
이런 함석헌의 민족에 대한 예언자로서의 사명감으로부터 그의 독특한 역사해석의 방법으로 ‘고난’ 이해가 전개된다. 그의 고난에 대한 이해의 근거는 예수의 고난이었다. 죽음이 없는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물로 바치는 제사를 집행했고 이로써 예수는 인간에게 신의 아들이 되는 길을 열었으나 신의 아들인 그가 왜 죽음이란 고난의 길을 통해 인간 구원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 함석헌의 고난 이해의 출발이었다. 함석헌은 고난이란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그 본래적 모습을 자기 안에 획득해가는 고유한 방식으로, “영(靈)이 물질에 대하여, 양심이 욕(慾)에 대하여, 생명이 죽음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으로 이해했다.27 즉, 고난은 인간을 정화하여 진리를 향해 성장시키는 원리인 것이다. 따라서 고난을 스스로 기꺼이 지는 수고자(受苦者)만이 신의 아가페에 귀착하여 참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에게 고난은 저주스러운 운명이나 죄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여 자유에 이르게 하는 ‘창조적 수고(受苦)’였다. 여기에서 그는 “영이요 의요 진리”의 나라인 장차 올 ‘신의 나라’는 이러한 창조적 수고자들에 의해서만 도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민족은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여 세계가 신음하는 제국주의의 악을 정화함으로써 장차 도래할, 도덕적으로 완성되는 새로운 세계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언자적 자아상을 추구했던 함석헌은 조선의 사명을 탐색하면서 ‘창조적 수고자’라는 새로운 자아상에 도달한 것이다.
6. 결론을 대신하여
함석헌은 예언자적 사회비판을 통해 보편적인 기독교 신앙과 개별적인 민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 했던 ‘두 개의 J’라는 우찌무라의 사상의 틀을 주체적으로 계승하여 ‘창조적 수고자’라는 자아상에 도달했다. 식민지 종주국 ‘국민’인 우찌무라와 식민지배하에 있던 조선인 함석헌은 사상세계에서는 깊은 관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전개과정에서는 필연적인 괴리가 존재했다.
우찌무라는 일본의 현실에 대해 엄격한 예언자적 비판을 가했으나, 일본사회가 만들어낸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무지할 만큼 둔감했다. 우찌무라는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 “영국의 스코틀랜드와 같이 되면 좋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지님으로써 함석헌과 조선 무교회주의자들을 적지 않게 실망시켰다.28 함석헌 등의 기대와 달리 우찌무라의 예언자적 사회비평이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데까지 확대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그의 강한 애착 때문이었다. 우찌무라에게 일본의 현실은 예언자적 비판의 대상이었으나, 일본 자체는 예언자적 비판의 대상 밖에 있었다. 그는 일본 자체와 그 국민성에 대해서는 평생 강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졌던 것이다.29 이 점에서 우찌무라 역시 메이지시대 일본인의 한계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한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內原忠雄)와 마사이께 히또시(政池仁)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우찌무라 제자들이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의전(義戰)이라 하여 협력하는 현실에 직면해서 함석헌과 조선 무교회주의자들은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성서조선』의 주필 김교신은 정치적 불의에 대해 예언자적 비판을 포기하고 종교라는 폐쇄적인 영역에 들어앉아 ‘복음’만을 논하겠다는 입장의 무교회주의자들은 무교회주의의의 정신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므로 ‘멸절’되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30
그런데 우찌무라의 비전론을 그의 제자들이 철저히 관철하지 못한 책임은 사실 우찌무라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는 비전론을 주장하면서도 소집영장을 받은 비전론자는 병역을 거부하여 타인을 자기 대신 희생시키기보다는 참전하여 ‘비참한’ 전사를 해야 한다는 ‘비전론자의 양심적 전사’를 주장했던 것이다. 즉, 그의 비전론은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권력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을 동반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참전’하여 국가권력에 협력해버리는 자기모순적 논리구조를 지녔던바,31 이는 그의 일본민족에 대한 강한 애착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우찌무라의 비전론의 모순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야나이하라·마사이께 등 비전론을 관철한 그룹에서조차도 징병 거부를 호소하는 등의 정치적 행동을 취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들 역시 자신의 애국심 때문에 국가와의 충돌을 피해 스스로의 평화주의를 순수하게 비정치적 차원에 제한한다는 ‘애국적 평화주의’의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우찌무라를 비롯한 일본 무교회주의자들의 한계를 함석헌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 속에서 ‘창조적 수고자’라는 사상을 전개하면서 극복해나갔다. 그가 도달한 자아상이며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이기도 한 ‘창조적 수고자’는 고난을 타자에게 떠밀지 않고 스스로 짊어짐으로서 새로운 세계사를 열어간다는 의미에서, 우찌무라를 비롯한 일본 무교회주의자들이 극복하지 못한 ‘민족심’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함석헌을 번민하게 하는 사상적 과제가 남아 있었다. 1940년 3월 『성서조선』에 함석헌은 「코이노니아」라는 글을 실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 무교회주의는 지금까지 마치 ‘방탕하지 않은 맏아들’처럼 고답적으로 밑을 내려다보며 조선의 현실을 비판해왔지만, 식민지라는 ‘세계사의 하수구’를 정화해낼 실력은 없었다고 지적하며,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숙고하자고 제안했다. 함석헌은 ‘창조적 수고자’라는 그의 새로운 자아상이 초월적인 종교적 입장에서 나온 비정치적 급진주의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어떠한 정치적 행동양식으로 구체화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의 사상이 충분히 확대되기 위해서는 민족분단의 경험과 더불어 퀘이커주의와 간디 사상과의 대면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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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삼중당 1964, 76면.↩
- 같은 책 78면.↩
- 같은 책 122면.↩
- 같은 책 162면.↩
- 內村鑑三 「二つの J」, 『Japan Christian Intelligencer』 1926年 9月 9日; 『內村鑑三全集』 第30卷, 東京: 岩波書店 1980, 53면.↩
- 『內村鑑三全集』 第15卷 376〜79면.↩
- 土肥昭男 『內村鑑三』, 東京: 日本基督敎團出版局 1962, 31〜36면.↩
-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 한울 1994, 126〜32면.↩
- 『內村鑑三全集』 第13卷 6〜7면.↩
- 『內村鑑三全集』 第19卷 531면.↩
- 鈴木範久 『內村鑑三とその時代』, 東京: 日本基督敎團出版局 1975, 189면.↩
- 鈴木範久 『內村鑑三』, 東京: 岩波書店 1984, 190면.↩
- 土肥昭男, 앞의 책 99〜100면.↩
- 양현혜, 앞의 책 170면.↩
- 鈴木範久 『內村鑑三』, 133〜35면.↩
- 丸山眞男 『忠誠と反逆』, 東京: 筑摩書店 1992, 273〜92면.↩
- 노평구 편 『김교신전집』 제1권, 일심사 1964, 3면.↩
- 「창간사」, 『성서조선』 1927년 7월호; 「성서조선의 해(解)」, 『성서조선』 1935년 4월호.↩
- 함석헌 「선지자」, 『성서조선』 1928년 1월호.↩
- 함석헌 「물위에 씨 뿌리는 자」, 『성서조선』 1928년 7월호.↩
- 함석헌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성서조선』 1930년 9월호; 함석헌 「히브리서 강의」, 『성서조선』 1939년 4월호.↩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총독부 검열로 인해 ‘도요토미의 난’ 부분과 ‘고난의 의미’ ‘역사가 제시하는 우리의 사명’ 부분이 완전 삭제되었으나, 함석헌의 글을 ‘현대의 예언서’라고 생각했던 『성서조선』의 주필 김교신에 의해 등사되어 가까운 지우(知友)들에게 배포되었다.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후편으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를 집필했으나, 종교편(『성서조선』 1938년 8월호)으로 도중 중단되었다. 아마 총독부 검열이 중단의 직접적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함석헌은 못다 쓴 글을 「히브리서 강의」(『성서조선』 1939년 4월호〜1940년 3월호)에 실어 역사연구를 아쉬운 대로 마무리하였다.↩
-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성서조선』 1936년 10월호.↩
-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성서조선』 1937년 1월호.↩
-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조선』 1934년 5월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성서조선』 1937년 4월호.↩
-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성서조선』 1937년 7월호.↩
- 함석헌 「히브리서 강의」, 『성서조선』 1939년 9월호.↩
- 咸錫憲 「私の知っている內村鑑三先生」, 『內村鑑三全集 月報』 39號, 4면.↩
- 土肥昭男, 앞의 책 85〜89면.↩
- 함석헌·政池仁 대담 「감정을 넘어선 가교」, 『사상계』 1964년 11월호; 『함석헌전집』 15권, 한길사 1986, 352면; 『김교신전집』 제6권, 125〜26, 238면.↩
- 太田雄三 『內村鑑三』, 東京: 硏究社出版株式會社 1977, 384〜8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