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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선의 혁명인가, 선의 변질인가

무심 편집 『온 세상은 한 송이 꽃─숭산 선사 공안집』, 현암사 2001

 

 

박성배 朴性培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불교학 교수 sbpark@notes.cc.sunysb.edu

 

 

숭산(崇山) 스님은 충남 예산 수덕사에 오래 주석하셨던 송만공(宋滿空, 1871〜1946) 스님의 도통을 이어받은 우리 시대의 대선사이다. 만공 스님은 천품이 걸출이었다. 그래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총독 미나미 지로오(南次郞)에게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린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통쾌하다. 스님은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이른바 조선불교진흥책의 입안자들은 아비지옥에 떨어질 놈들이라고 면전에 있는 총독을 질타하셨다. 일본 세력이 천하를 휩쓸 때,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총독을 이처럼 질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시세(時勢)에 편승, 이권을 노리는 점잖은 종교인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선(禪)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기에 민족시인이기도 한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는 만공 스님의 불호령을 “과연 사자후!”라고 칭찬했다.

만공 스님의 사자후 이후, 6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며 세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제도 가고 동구 공산권도 무너져 이제는 자본주의 미국이 세계의 초대강국으로 군림하는 세상이 됐다. 지금 미국의 세력은 가지가지 형태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시세에 아부하지 않는 선사가 그리운 세상이다. 송만공 스님의 도통을 계승한 우리 숭산 스님은 지금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국적 힘의 논리에 어떻게 저항하고 있을까. 그것이 새삼스럽게 궁금해진다.

숭산 선사의 공안집 『온 세상은 한 송이의 꽃』을 한번 살펴보자. 이 책에 실린 365일의 공안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숭산 선사의 가르침 아닌 것이 없지만, 이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머리글」과 그 다음에 나오는 글 「선의 가르침, 공안 수행(公案修行)」은 숭산 선사가 직접 썼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한다. 두 글에 따르면 이 책의 핵심은 숭산 선사가 예전의 공안 수행을 비판하고 ‘선의 혁명’을 부르짖는 데 있다.

“옛날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러 해 동안을 오직 공안 하나로 정진하는 것이 수행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수행하는 방식은 공안을 일상생활에 적용해서 올바르게 진리를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할 때는 그냥 그것만을 하라. 그냥 그것만을 할 때 아무 생각이 없게 되고, 주체도 객체도 없어진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공안 수행이다. 매일의 찰나찰나가 바로 우리의 공안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혁명이다.”(25〜26면)

113-385공안 하나로 정진하는 옛날의 수행방법을 버리고 매일의 찰나찰나가 우리의 공안임을 깨닫고 그 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결국 숭산 선사가 말하는 선의 혁명이다. 매일의 찰나찰나가 공안이라면 자연 일상생활이 중요해진다. 산속으로 들어가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사람들을 돕는 일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숭산 선사의 가르침을 따라 매순간 ‘오직 할 뿐, 그저 할 뿐’의 수행을 실천하려 할 때, 적지 않은 문제들이 생길 것 같다. 만공 스님이 일본인 총독을 불호령으로 꾸짖을 때, 전국의 큰 절 주지스님들은 침묵을 지켰다. 1937년의 ‘조선총독부 회의실 사건’은 지금도 한반도의 도처에서, 아니 세계의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또한 일어날 것이다. 바람직한 것은 만공 정신의 실현이다. 그러나 오늘날 ‘오직 할 뿐’의 실천자들이 과연 만공 정신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까? 산중으로 도피하는 불교가 아니라 장바닥에 뛰어들어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불교, 개인의 특수체험이 문제가 아니라 매일의 찰나찰나가 공안이라는 숭산 선사의 혁명적인 외침은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정신을 크게 일깨워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것은 말하기는 쉬우나 이를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숭산 선사가 주장하는 ‘선의 혁명’이 진정 ‘선의 혁명’이 되려면 거기엔 뭔가가 더 밝혀져야 할 것 같다.

숭산 선사는 말한다. “어떤 사람이 공안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 선사가 ‘만 가지 물음이 모두 한 물음’이라고 말했다. 한 물음으로 수행하는 것은 ‘모를 뿐’인 마음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저 할 뿐. 공안에만 집착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데, 이것은 ‘선병(禪病)’이라는 큰 병이다. 공안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손가락에만 집착하면 달을 보지 못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목표이다. 목표가 바로 ‘모를 뿐’이다.”(25면)

‘모를 뿐’은 숭산 선사가 우리에게 주는 공안이다. 공안은 화두와 같은 말이다. 화두의 근본적인 성격은 의문에 있다. 의문이 없다면 화두가 아니다. 계속되는 의문은 점점 자라서 ‘의문덩어리’ 즉 의단(疑團)이 된다. 의단이 홀로 드러나 있을 때(疑團獨露), 참선자는 시공을 초월, 항상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존재가 된다. 의문덩어리는 의지의 산물도 아니고 지식의 산물도 아니다. 오히려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끊어지고 뜻길이 끊어지고 도리의 길, 이치의 길이 모두 다 끊어졌을 때 스스로 나타난다. 배고픈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사람 물 찾듯이, 어린아이 어미 찾듯이 자연적 간절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말은 거기에 조작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배고픔이나 목마름의 행위가 바로 의단이나 이언절려(離言絶慮)의 모습이란 말이다.

숭산 선사의 ‘모를 뿐’ 참선이 화두의 이러한 치열한 의문 정신과 말길과 마음길이 다 끊어진 이언절려의 경지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만공 스님이 가르친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잘라 말해서, 참선할 때 아직도 말길이 있고 마음길이 있다면 그런 참선은 사구선(死句禪), 즉 죽은 참선일 뿐이다. 숭산 선사가 주장하는 선의 혁명은 선의 변질과 백지장 하나의 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숭산 선(禪)의 실천자들이 의단과 이언절려에 투철할 때 그들은 자본주의적 힘의 논리를 거부하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있는 그 자리에서 각자의 부처님 됨을 마음껏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선의 혁명’이라 찬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그들의 ‘모를 뿐’이 의단과 이언절려에 등을 돌리고 있다면 그땐 ‘선의 변질’이라는 지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