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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국제통화체제와 우리의 경제현실
차명수 『금융공황과 외환위기, 1870〜2000』, 아카넷 2000
노택선 盧宅善
한국외대 경제학부 교수
지난 1997년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IMF라는 말이 한 국제기구의 명칭이 아니라, 외환위기에서 시작된 경제적 위기, 심지어는 역경과 고통을 상징하는 말처럼 쓰여왔다. 사람들은 경제가 정치인들이 늘상 구호처럼 내세워온 ‘성장일로’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야 했고, 더구나 그동안 보아온 경제 침체가 단순한 불경기 정도를 넘어 ‘위기’나 ‘공황’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체험해야 했다. 위기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정책대안을 논의하기 위해 경제이론에 대한 설명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그 와중에서 사람들은 달러가 그저 해외여행을 위해 공항에서 환전해야 하는 대상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왜 우리나라의 원화가 달러화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고, 이로 인해 엄청난 고통이 현실로 나타났는지에 대해 현상적인 설명은 많지만, 이같은 일이 국제통화체제의 어떤 흐름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앞으로 이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설명이 없다. 우리가 겪은 경제위기의 시작에 외환위기가 있었고, 따라서 위기의 대내적인 제반 요인뿐 아니라 대외적 요인으로서의 국제통화체제의 변화라는 것이 어쩌면 위기의 큰 틀을 규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경제사가 현실경제에 대한 해명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혜안을 제공한다는 교과서적인 경구가 아니더라도, 이 싯점에서 우리는 과거의 도도한 변화의 흐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30년대초의 대공황을 거론하고 단편적인 비교를 시도하는 등의 선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론과 사실(史實)에 근거해 차분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역사적 굴곡과 변화의 원인을 고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차명수(車明洙) 교수의 『금융공황과 외환위기, 1870〜2000』은 대단히 시의적절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시의적절하다는 말은 차교수의 연구가 단순히 우리가 위기상황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때에 나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위기의 원인에 대한 단견이 난무하고 처방을 둘러싼 정치적 이해가 빈번히 상충하는 것을 목격하는 때에 역사를 돌아보게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세계경제체제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그 근저에 자리잡은 국제통화체제로서의 (고전적) 금본위제도가 잘 작동하던 시기부터 급격한 환율변동으로 국제경제의 위기가 발생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국제통화체제의 변화과정을 그 원인에 촛점을 맞춰 정리, 해명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국제통화체제의 변화과정에서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국내 혹은 국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요소의 침투’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1870년대부터 1차대전 이전까지의 시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전적 금본위제는 권력에 의한 임의적 주조이득(seignorage)을 막고, 국제적으로 분산적 체제의 확립을 통한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초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후 이른바 전간기(戰間期)라고 불리는 양차대전 사이의 극심한 정치경제적 변혁기에도 전쟁과 그에 따른 국가간의 정치경제적 득실에 대한 저울질이 국제통화체제의 불안정과 사상 초유의 경제공황을 가져온 것으로 파악했다. 전간기의 불우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2차대전 이후 출발한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체제 역시, 고정환율과 변동환율의 장점을 모아 국제통화체제의 이상(理想)을 지향했으나 각국의 대내적 정치압력과 이로 인한 독자적 통화 및 경제정책의 추구로 인해 그 한계가 드러났고, 마침내 1973년 이래 완전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동환율제 역시 여러가지 문제점을 노출하면서 목표환율제나 세계 단일통화와 같은 대안적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이 역시 현실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볼 때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다. 이같은 분석을 토대로 저자는 세계화의 진전과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의 등장이 앞으로 국제통화체제의 향배를 결정할 것으로 분석한다.
물론 이같은 주장이 논란의 여지를 완전히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학 또는 경제사를 연구하는 다양한 입장의 연구자들에게도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경제현실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 세기를 넘는 시기에 대한 분석에서는 흔히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오히려 저자는 광범위하고 세심한 경제적 분석을 그 안에 녹여냄으로써 이를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 주장으로 반전시킬 수 있었고,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서평의 상투적 형식을 피해갈 수 없다면 사소한 몇가지 아쉬움을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책의 제목과 서문에서 연상되는 기대감, 즉 우리나라의 외환위기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의 기둥이 국제통화체제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고, 이를 오늘의 우리와 연결시키는 것은 순수하게 독자의 능력과 책임이겠지만, 외환위기를 국제자본의 이동과 그 배후의 정치적 고려 등과 연결시켜 설명하고자 하는 논의들을 소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차후 이에 대한 저자 혹은 경제사학계의 연구를 기대하는 것은 평자의 지나친 욕심일까? 둘째로 경제사에 있어서의 논의는 명확한 결론보다 논란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몇몇 부분에서도 너무 단정적으로 결론을 제시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대공황의 회복과정에서 국가별 차이를 금본위제와 연관지어 설명한 것 등이다.
또한 이 책은 전문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자 하였다. ‘돈과 권력’ ‘금과 야경꾼’ ‘집착과 파멸’ ‘불가능한 트리오’ ‘가능한 미래들’ 등 각 장의 제목에서 이러한 저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고, 또 일정부분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그러나 저자가 양해를 구한 대로 ‘역시 경제학’이라는 불평의 소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이는 이 책이 아니라,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딱딱함의 굴레일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세계금융사에 관한 방대한 자료와 연구물을 소화해낸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에 후학들을 위해 킨들버거(C.P. Kindleberger)의 A Financial History of Western Europe과 보도(M.D. Bordo)의 The Gold Standard and Related Regimes: Collected Essays를 추가로 소개했으면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