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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 | 테러, 전쟁 그리고 그후

 

빈 라덴과 탈레반, 그리고 반복된 경고

 

 

카와바따 키요따까 川端淸隆

UN본부 정치국 정무관(아프가니스탄 문제 담당). 1954년생. 미국 컬럼비아대학 대학원 졸업. 1988년부터 UN 근무. 저서 『PKO 신시대』(공저, 岩波書店 1997).

ⓒ川端淸隆 2001/한국어판 ⓒ창작과비평사 2001

 

 

아프가니스탄이 진원지로 보이는 테러는 국제정치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세계는 지금 국경을 넘어서 활동하는 국제테러조직과 그 지원국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UN이 체현하는 보편적 안전보장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번영과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던 냉전시대 종언 후의 체제는, 미국에서 9월 11일에 일어난 미증유의 동시다발테러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버렸고, 세계는 새로운 질서와 협조의 테두리를 찾아 불확실하고 위험에 찬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 반복된 경고, 그리고 UN 가맹국의 무관심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화재〔內戰〕는 이제 국경을 넘어 한정된 지역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테러리즘, 마약, 난민의 유출, 민족, 종교에 기인하는 긴장의 증대 등으로 그 모습을 바꿔가면서 심각한 위협으로 닥쳐왔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1997년 가을,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Kofi Annan)은 아프간 분쟁 해결을 위해 더욱더 많은 지원을 해줄 것을 가맹국들에 요청함과 동시에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면서 만일 분쟁이 해결되지 못할 경우 발생할 잠재적 위협에 대해서 이례적인 경고를 했다.1 또 2년 후인 1999년에는 한층 더 그 강도를 높여서 “아프간 분쟁이 국제사회에 미친 악영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불길은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국제사회는 아프가니스탄이 국경의 테두리를 넘은 테러활동이나 과격주의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고, 거듭 분쟁 해결의 중요성을 호소함과 동시에 여러 악영향 중에서도 특히 아프가니스탄을 기점으로 하는 테러활동이 촛점이 되어가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2 뉴욕과 워싱턴이 테러공격에 노출된 9월 11일의 불과 3주일 전에 “확고한 계획이 없는 임시변통의 대응으로는 테러·난민·인권문제 등 국제사회의 개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라며 아프간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풀이된 가맹국에 대한 경고는,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중심으로 한 테러조직과 관계를 단절하라는 탈레반에 대한 충고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이것은 미국이나 일본 등 UN 중요가맹국에 있어 아프가니스탄이 전략적 가치를 냉전종결 때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원유 등 천연자원도 별로 없는 아프가니스탄은 ‘잊혀진 분쟁’의 나라로 전락해버렸다.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아프간 분쟁의 해결을 위해 “진지하면서도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자는 결의를 하게 된 것은 테러로 인한 수천명의 희생자와 미국에 의한 군사조치에 직면한 후의 일이었다.4 아프간 분쟁은 냉전이 종결된 지 13년, 구 소련군의 침공으로부터 2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방치되어왔지만,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방기가 만든 수렁 속에서 태어난 국제테러의 망령은 지금 현대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2. 탈레반과 UN─테러문제를 둘러싼 교섭의 시작

 

UN과 탈레반의 관계는 오래된 것이다. 탈레반이 1994년 가을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도시 칸다하르에서 발족된 이래, UN 사무총장은 역대 아프가니스탄 담당 특사를 통해 밀접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교섭을 거듭해왔다. 교섭의 촛점은 당연히 오래 끌던 아프간 내전의 조속한 중지와 국민화해정부의 수립을 향한 UN 평화유지활동에 대한 탈레반의 협력 요청이었다. 이러한 UN과 탈레반의 교섭에 오사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한 국제테러활동 문제가 중점 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탈레반이 1996년에 수도 카불을 제압한 뒤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육박하며 기세를 떨쳤던 1997년 여름 이후의 일이다.

이것은 1995년과 1996년 싸우디아라비아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미군시설 폭파사건에 빈 라덴의 조직 알카에다(Al-Qaeda)가 관여한 혐의가 짙어져서, 미국 등 서방국가의 우려와 압력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에 반정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존재하는 이집트·알제리·모로코·요르단 등도 이 시기 그 세력들과 탈레반의 결속을 진정으로 우려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국경을 접하는 우즈베끼스딴이나 따지끼스딴, 그리고 체첸 등 까프까스 지역의 분리·독립운동에 시달리는 러시아도 각각 국내의 반정부운동과 탈레반의 연대를 염려하고 있었다. UN총회에서는 매년 가을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UN 평화유지활동의 지침이 될 결의안을 채택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집트가 주도해서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국제테러조직 활동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조항이 결의문에 포함되었다.5 그후 같은 이유로 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도 빈 라덴의 조직과 아프간 정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UN은 가맹국에서 심각해지는 국제테러활동에 대한 우려를 누차에 걸쳐 탈레반에 전달함과 동시에 이러한 테러조직과의 관계 단절을 촉구했다. 사무총장 특사는 탈레반 간부에 대해 “어떤 나라도 아프가니스탄에 내정간섭을 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인접국가들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테러활동의 위협에 떨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온 힘을 다해 설득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우리의 목적은 진정한 이슬람교를 수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지만, 이같은 신념을 타국에 강요할 생각은 없다. 더구나 국제테러리스트의 훈련시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테러지원 사실 자체를 완강히 부인했고, 오히려 UN에 아프가니스탄의 인접국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주도록 요청했다.

테러지원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탈레반의 완고한 태도에 당시의 사무총장 특사 라크하다르 브라히미(Lakhdar Brahimi)는 통상적인 외교관행을 넘어 더 직접적이며 명백한 경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98년 3월에 이웃나라인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탈레반과 교섭한 직후 탈레반의 대표단 수석이며 모하마드 오마르(Mohammad Omar) 다음가는 실력자인 모하다드 라바니를 회의실 한 구석에 불러 “빈 라덴은 이미 미국뿐만 아니라 이집트나 싸우디 등 이슬람국가에도 우려의 원천이 되고 있다. 멀지 않아 그 전쟁은 탈레반 자신에도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하며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탈레반 지도부가 결단을 내리도록 촉구했다. 아프간인으로서는 몸집이 큰 라바니는 뜻밖에 경고를 받아 순간적으로 긴장된 표정을 보였지만 “오마르 등 다른 지도자와 논의해보겠다”고만 대답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미국은 1998년 8월에 터진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대사관 폭파사건의 주범이 빈 라덴이라고 단정하고, 그 보복으로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에 있는 테러훈련시설 몇 군데를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로 공격했다. 실로 라바니와의 회담 5개월 후의 일이었다.

 

 

3. 오마르와의 직접교섭

 

UN이 탈레반 최고지도자인 모하마드 오마르와 직접 교섭할 기회는 1998년 가을에 실현되었다.6 UN 사무총장 특사 브라히미를 비롯한 UN파견단이 탈레반의 근거지인 칸다하르를 방문한 것은 10월 14일이었다. 탈레반운동의 창시자로서 알려져 있는 오마르는 그때까지 서방의 외교관이나 저널리스트 등 비(非)이슬람교도와의 접촉을 모두 거부해왔고, 이슬람의 교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진이나 영상 촬영도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그래서 이것이 국제사회와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이 직접교섭의 복선이 된 것은 같은해 여름 탈레반의 군사적인 성공과 그 결과로서 일어난 주변국가의 반발이었다.

탈레반은 1998년 여름에 반(反)탈레반인 북부동맹이 지키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대공세를 취했다. 탈레반은 무기와 탄약의 보급, 병사의 수송 등 기동력 면에서 북부동맹을 능가함으로써, 8월에는 우즈베끄민족계인 도스툼 장군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자르 이 샤리프를, 9월에는 하자라민족계인 카림 하리리가 지키는 중앙부 바미안을 제압했고, 국토의 약 90%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때 탈레반에 대한 저항세력은 판지시르(Panjshir) 등 북동부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마수드 사령관이 이끄는 따지끄민족계밖에 없었고, 올해 9월까지 이 상황은 바뀌지 않고 있다. 탈레반의 두드러진 성공의 이유는 이웃나라 파키스탄 군부가 작전 입안, 지휘나 병사 수송 등 병참 면에서 직접 탈레반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또 빈 라덴이 북부동맹의 지휘관을 매수하기 위해 탈레반에 고액의 자금을 제공했다고 하는 소문도 전해져왔다. 사실 반탈레반 세력의 많은 지휘관들이 싸우기 전에 탈레반 측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탈레반의 성공은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부족과, 문화·언어·종교적으로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이란 등 주변국가의 경계심을 자극했고, 분쟁이 일제히 지역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탈레반에 대한 이란의 반발은 8월에 마자르 이 샤리프 주재 이란 외교관 8명이 탈레반 병사에게 살해당하자 폭발했고, 공칭 27만명의 이란군이 국경지대에 집결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침공할 태세를 보였다. 절박한 위기에 직면한 오마르는 조정을 위해 현지를 찾아와 있던 UN 특사에게 이례적으로 초청장을 보내고 이란과의 중재를 요청했다.

이란과의 긴장 완화를 촛점으로 한 교섭은 세시간 반에 달했지만 오마르 한 명만 발언했는데,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다른 고관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음으로써 명실공히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 테러문제에 관해서 브라히미 특사는 “탈레반이 테러활동을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빈 라덴 등 탈레반의 손님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라고 했고, 그들 ‘손님’에 대한 가맹국의 우려를 전했다. 오마르는 테러활동을 저지하는 것이 국제사회에도 아프가니스탄에도 중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했지만, 탈레반이 테러리스트 훈련시설 등을 국내에 만들고 아랍 등지의 국제 테러조직을 지원하고 있다는 주장은 강하게 부정했다. 특히 빈 라덴에 대해서는 그는 80년대의 소련에 대한 지하드〔聖戰〕 이래의 동지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프간 국민 전체의 손님”이라고 단언하면서, “국외추방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에 대해 UN 특사는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 없이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최근의 빈 라덴의 TV 인터뷰 내용을 예시해 “손님이라 하지만 빈 라덴 등이 하고 있는 것은 초대해준 집의 마당에서 이웃집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도저히 손님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끈질기게 버텼다. 그러나 오마르는 “이미 빈 라덴은 인터뷰에서 했던 과격한 발언에 대해 탈레반에 사죄했다”고 한 뒤 “그가 실제 테러활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오마르는 테러문제에 관한 의논을 일방적으로 중단했을 때 “우리가 (비판받고 있는 여러 행위를 계속함으로써) 뜻을 이루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국제사회)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만약에 그 때문에 이상을 버린다면 이번에는 우리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하며 국제적 비판과 종교적 정열 사이에서 흔들리는 신념을 내비쳤다.

오마르와의 직접교섭은 결국 이란에 대한 사죄 등 탈레반의 타협을 이끌어냈으며, 이란과 탈레반의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고 분쟁의 지역화를 피했다는 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테러문제에 대해서는 양자의 주장이 엇갈리면서 전혀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후 오마르는 2000년 9월에 현 UN 특사 프랑세스크 벤드렐(Francesc Vendrell)과 짧은 회담을 가졌지만 테러문제에 관한 실질적인 의견교환은 없었다.

 

 

4. 미국의 대응─교섭에서 대결로

 

미국은 싸우디아라비아에서 연속된 미군시설 폭파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빈 라덴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지만, 1998년 중반까지는 탈레반과 그의 지지자인 파키스탄 군부와의 교섭에 문제해결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미국이 탈레반에 대한 대결자세를 명확히 보여준 것은 동아프리카 미대사관 폭파사건이 터진 1998년 8월 이후의 일이다. 냉전시대 때 동맹국이었던 파키스탄에는 UN을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서 탈레반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꾀했지만 본격적인 압력 행사를 결단하게 된 것은 바로 지난달에 일어난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공격 이후의 일이었다.

미국이 탈레반 지도자에게 빈 라덴에 대한 우려를 직접 전한 것은 1998년 봄이었다. 그 당시 미국 UN대사 빌 리처드슨은 4월 17일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UN 평화유지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 카불을 방문하고 미국의 각료급 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탈레반과의 직접교섭에 임했다.

교섭은 카불의 구 대통령관저에서 행해졌고, 라바니가 탈레반측을 대표했다. 교섭이 시작되자마자 리처드슨 대사는 빈 라덴과 그 조직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전함과 동시에 당시 빈 라덴이 미디어를 통해 전하고 있던 리처드슨 일행에 대한 공격을 지령하는 파트와(종교령)를 즉시 철회하도록 탈레반에 요구했다. 탈레반은 빈 라덴이 탈레반 지배하의 아프가니스탄에 잠복하고 있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는 종교지도자가 아니며 종교령을 낼 만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미국의 요구를 일축했다.

리처드슨 대사는 또 “탈레반은 테러리스트 훈련시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미국은 전문가를 (훈련시설이 있다고 전해지는 아프간 동부에) 파견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현지조사를 허락해달라”고 촉구했다. 라바니는 UN 특사가 경고했을 때와 똑같이 “다른 간부와 의논한 다음 후일에 대답하겠다”고 하고서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8월 중순에 UN 사무총장은 유럽의 어느 가맹국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유럽인과 미국인을 표적으로 하는 테러계획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UN은 요원들의 퇴거도 포함한 대책을 검토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경고를 받았다. UN 사무국은 경고의 진위를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며칠 후 모든 것이 드러났다. 동아프리카 미대사관 폭파사건의 보복으로서 미국이 미사일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빈 라덴은 그 직전에 공격을 알아차리고 거처를 옮겨 간발의 차이로 화를 면했다. 훗날 미국은 “이제 군사적 수단을 취할 경우에는 지난번처럼 제3국을 통해 경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통고했고, 앞으로는 미국 국적을 가진 UN 직원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 조치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보복공격을 계기로 미국과 탈레반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되었고, 급속히 대결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미국은 1998년 공격 이래 안전을 위해 미국인 외교관의 아프가니스탄 입국을 금지했기 때문에, 칸다하르 등 아프가니스탄 국내에서 행해지는 탈레반 지도자와의 교섭은 UN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밖의 경우에는 미국은 탈레반 지도자를 이슬라마바드로 불러와 회담을 하거나, 중앙정보국(CIA)이 탈레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파키스탄 군의 정보부(ISI)를 통해서 서로 연락했다.

그후 1999년 여름까지 아프간 정세는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동안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외교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때까지 미국은 구 소련군 철수 후의 아프가니스탄에 이차적인 중요성밖에 부여하지 않았지만, 아프가니스탄 문제는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하는 테러문제를 계기로 하여 인도·파키스탄 관계나 핵확산 문제와 함께 미국의 남아시아정책의 중요 부분이 되었다. 이 점을 반영해 미국은 그때까지 일정한 선을 긋고 있던,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마수드 사령관이 이끄는 북부동맹을 탈레반의 전국지배를 저지하는 최후의 유력한 저항세력으로 인정하고 물밑에서 긴밀한 접촉을 하게 되었다. 한편 로마에 망명중인 자히르 전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국외의 그룹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전 국왕과 같은 부족인 다수파 파슈툰족을 기반으로 한 탈레반의 결속에 쐐기를 박기 시작했다.

1998년 11월에 미국은 빈 라덴을 동아프리카 미대사관 폭파사건의 주모자로 뉴욕 연방재판소에 기소했다가, 다음해 7월에는 대통령령이 내려져 단독으로 대 탈레반 제재를 과하는 동시에 같은 제재결의안을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하도록 촉구하기 시작했다. 결의안은 같은해 10월에 채택되어 안전보장이사회는 탈레반에 대해 국제테러조직과의 관계 단절과 빈 라덴을 인도하도록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의 아리아나항공(Ariana Airlines)의 비행제한 등 한정적인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의에 동요한 탈레반은 ① 빈 라덴을 싸우디 등 이슬람교 국가와 공동으로 이슬람법 샤리아로 심판한다, ② 빈 라덴을 가택연금하고 이슬람의회기구(OIC) 등에 의한 국제감시하에 둔다 등 여러가지 타협책을 UN에 제시했지만, 지목받은 싸우디아라비아가 ①의 제안을 즉시 거부하는 등 둘다 알맹이 없는 임시변통의 미봉책에 불과했다.

탈레반과 미국 고관의 마지막 직접교섭은 2000년 5월에 이슬라마바드에서 행해졌다. 교섭에서는 국무성 제3인자인 토머스 피커링(Thomas Pickering) 정무담당 사무차관이 탈레반 대표 압둘 아쿤드(Abdul Akhund) 외무차관에게 빈 라덴의 혐의 전모를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의 완전실시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잘릴(Jalil)은 교섭 후 미국측의 강경한 태도에 압도당해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는데, 종래의 주장을 반복했을 뿐 결국 어떤 타개책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교섭이 결렬되자 미국은 같은해 8월과 10월에 역시 탈레반의 테러활동 지원에 속을 끓이던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차관급실무회의를 워싱턴과 모스끄바에서 각각 개최하고 공동으로 제2차 대 탈레반 제재 준비를 시작했다. 제재 결의는 같은해 12월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결되었고, 탈레반에 대한 요구로서 빈 라덴을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테러훈련시설의 폐쇄도 포함시키는 동시에, 무기 등 군사물자의 전면 금수, 탈레반의 해외사무소 폐쇄, 간부의 도항 금지, 항공기의 국제운항 전면금지 등 제1차 제재 때와는 사뭇 다른 엄격한 추가조치가 결정되었다.

그후 미국과 탈레반의 교섭은 실무 수준에서 단속적으로 행해졌지만, 아무런 진전도 볼 수 없었다. 올해 들어서 부시 공화당 정권이 탄생했는데, 미국이 직접 테러를 당한 9월의 싯점에서는 신정권이 한창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재검토하는 중이었다.

 

 

5. 탈레반의 변모─높아지는 빈 라덴 의존

 

결국 탈레반은 국제사회의 설득과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전에 “우리의 관심은 진정한 이슬람국가를 건립하고 조국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뿐”이라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그들이 왜 빈 라덴에 집착해 자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태도로 국제사회와 대결하는 길을 선택한 것인가?

탈레반의 변모 이유는 그 성립과정과 ‘비아프간적’ 성격에서 찾을 수가 있다. 원래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토착의 정치·종교운동이 아니며 그 통치형태나 정책도 그 나라의 전통이나 문화와는 이질적인 것이다.

탈레반의 원천은 아프간 난민이 많은 파키스탄 북부에 산재한 디오반티파 이슬람교 신학교이다. 현재 탈레반이 추진하고 있는 중앙집권적인 절대적 종교권위에 의한 지배도 복고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이 종파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방분권을 특징으로 하는 종래의 통치제도나 전통적인 부족·장로제를 기반으로 한 지역공동체와 이슬람교의 공존을 기둥으로 한 아프가니스탄 고유의 사회제도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이슬람교는 8세기에 아프가니스탄에 뿌리를 내렸지만, 이것은 소수민족, 이질적 문화나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온건한 이슬람이지 탈레반이 주장하는 엄격하고 배타적인 이슬람 해석과는 명백히 다르다.

탈레반은 비아프간적인 성격 때문에 그 내부에 본래의 약점, 즉 국내정치 기반의 취약성을 내포해왔다. 아프간 국민은 처음에는 탈레반의 엄격한 이슬람법에 의한 통치를 골육상잔을 계속하는 무자헤딘(Mujahedeen)에 대한 ‘나은 선택’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그들의 전통과는 도저히 같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탈레반의 공적으로서 1979년 분쟁 발생 이래 처음으로 국토의 대부분에 안전과 질서를 가져왔다고 자주 지적되지만, 극단적인 여성차별 등 광범위한 인권침해와 압정에 시달리는 일반국민의 입장에서는 ‘묘지의 평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탈레반은 수도 카불 제압 이후 5년여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이슬람법 샤리아의 엄수 이외에는 아무런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상도 국민 앞에 제시한 적이 없는데,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피지배자로부터 괴리되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탈레반의 약점을 보충해준 것이 빈 라덴 등 아랍의 과격세력이 가져온 원리주의이다. 그들이 탈레반에 원래의 탈레반운동의 목적과는 사뭇 거리가 먼 ‘서구의 반이슬람국가와 대결한다’는 사상적인 뒷받침과 정치적 방향성을 제공해주었다.

탈레반과 빈 라덴의 관계는 수단으로부터 추방당한 후자가 아프가니스탄으로 재입국한 199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자금원조가 주된 일이었다. 윤택한 빈 라덴의 자금 일부가 반탈레반 세력의 매수공작에 사용된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외에 무기, 탄약의 구입이나 아프가니스탄산 아편의 밀수에도 빈 라덴의 자금과 조직이 이용되었다고 한다.

1998년 이후 탈레반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국민들 사이에 전쟁에 대한 염증이 확산되면서 심각한 병사 부족 사태에 직면했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빈 라덴이 세계를 망라한 테러지원망을 아랍계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 병사 도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아랍계 병사의 총수는 8백명부터 2천명 사이라고 추정되는데, 이웃나라 파키스탄으로부터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수천명의 신학생과 함께7 이제 탈레반에 없어서는 안될 전력이 되었다. “전투에서 항상 제일 먼저 도망가는 자는 탈레반 병사이고 두번째는 파키스탄인(신학생)이다. 끝까지 완강하게 저항하는 자는 언제나 아랍계 병사들이다”라고 어떤 반탈레반 세력의 사령관이 말했는데, 빈 라덴이 공급하는 병사의 중요성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자금과 병사뿐만 아니라 금년 들어 탈레반은 그 정치적 정통성의 지주로써 빈 라덴에 대한 사상적 의존도를 높였다. 최초의 징후는 작년 겨울에 나타났다. 오마르는 2000년 2월에 갑자기 러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운동으로 흔들리는 체첸을 국가로서 승인한다고 발표해 물의를 빚었고, 실제로 체첸의 ‘대사관’ 개설을 허가했다. 이 움직임은 까프까스 지방이나 중앙아시아의 반정부 세력과 탈레반의 연대를 염려하는 러시아의 노여움을 샀다. 러시아는 같은해 5월에 탈레반이 체첸에서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게릴라 기지에 대한 예방공격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수년 전에 아랍 여러 나라를 방문한 탈레반 간부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러한 그들이 ‘팔레스타인 해방’이나 ‘이슬람 동포’라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올해 3월에 탈레반은 바미안의 큰 석불 등 국내의 비이슬람 문화유적을 파괴했지만, 이러한 발상도 아랍계 원리주의자가 수입하고 탈레반 사이에서 뿌리를 내린 것이며, 이질적 문화나 이교도에 관용적인 아프가니스탄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8

첩보에 능통한 전문가는 탈레반이 빈 라덴에게 집착하는 이유로서 오마르와의 “일심동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물심양면으로 분리하기 어려운 밀접한 관계”를 지적한다. 대미 테러사건 이틀 전에 일어난 북부동맹 마수드 사령관 암살사건의 배후에 빈 라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오마르에게 빈 라덴을 잊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은 일이다.

〔靑柳優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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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프가니스탄 정세와 그것이 국제평화와 안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사무총장 보고서」(A/52/682-S/1997/894), 1997년 11월 14일 제출.
  2. 「아프가니스탄 정세와 그것이 국제평화와 안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사무총장 보고서」(A/54/536-S/1999/1145), 1999년 11월 16일 제출.
  3. 「아프가니스탄 정세와 그것이 국제평화와 안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사무총장 보고서」(A/55/1028-S/2001/789), 2001년 8월 17일 제출.
  4. 9월 11일 대미 테러사건 후 UN 안보리는 12일과 18일에 이 문제에 관하여 공식·비공식 협의를 열고, 테러의 온상으로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주변지역에 대해 앞으로 “진지하면서도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자는 결의를 했다.
  5. UN총회결의 A/RES/51/195B, operative para 17, 1996년 12월 17일 채택.
  6. 「오마르 회견기」, 『세까이(世界)』 1999년 3월호 172〜79면 참고.
  7. UN 사무총장은 1999년 9월 “탈레반의 군대는 2천에서 5천명에 이르는 주로 파키스탄 국내의 신학교로부터 징용된 병사로 보충되어 있고, 그중 많은 자들은 비(非)아프간 사람이다”라고 UN 안보리와 총회에 보고했다(A/54/378-S/1999/994). UN 안보리는 1999년 10월 25일의 의장성명(S/PRST/1999/29)에서 “(파키스탄의) 신학생이 주축이 된 비아프간인 수천명이 탈레반 쪽에 서서 전투에 가담하고 있다는 보도”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8. 「왜 탈레반은 불상을 파괴했는가」, 『세까이』 2001년 5월호 161〜6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