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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허만하 許萬夏
1932년 대구 출생. 1957년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해조』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등이 있음.
슬픔이 의지가 되는 때
우랄의 산정에서 눈사태처럼 무너진 바람이 지상에서 거세게 너울대는 바람의 속도에 부딪혀 거대한 포르테처럼 밤하늘에 솟구쳐올라 부서지는 것을 보고 있다. 치열하게 내리는 눈발이 중천의 높이에서 커튼처럼 펄럭이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어둠속으로 몸을 던지는 눈부신 눈송이들은 최후의 몸짓을 스스로 지운다. 탄생의 흔적을 뒤에 남기지 않는다.
자욱한 눈보라 속을 느릿느릿 나를 바라보며 걸어오던 한마리 순록이 갑자기 돌아서서 자작나무 숲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한줄기 발자국이 은백색 적설을 밟고 뒤를 따르고 있다. 상처를 입어 무리를 떠나야 했던 다리 절던 한마리 순록의 외로운 결심도 숲그늘 속으로 함께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아득한 설원 끝 저무는 지평선이 달빛처럼 얼기 시작하는 것은 슬픔이 의지가 되는 때다. 광포한 쏘나타처럼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멎고 자작나무숲이 다시 먼 섬 그림자처럼 떠오를 때 순록들은 잎 진 나뭇가지 같은 갈색 뿔을 머리에 이고 밀치락거리며 떼지어 첨벙첨벙 은하를 건너고 있다.
집단을 따르지 못한 한마리 순록의 고독한 주검을 부드러운 아마포처럼 덮는 함박눈이 다시 조용히 내리기 시작한다.
경운기와 말과 가을의 사상
1
억새풀이 늦가을 바람을 흔들고 있는 길가에 빈 경운기 한대가 서 있다.
길 건너 마른 풀밭에 종의 절멸을 예감한 말이 두마리 불안한 그늘처럼 서 있다.
2
한마리 말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세계는 두마리 말 사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망아지 한마리가 비틀거리며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보았던
눈부신 야생의 풍경이 된다.
사람의 눈길이 머문 적 없는
시원의 풍경에 일던 연두색 바람.
군청색 가을하늘 해맑은 깊이 위에
떠 있던 한점 구름의 아득한 가벼움.
검은 석탄은 살아서 움직이는 양치류숲
초록빛 서걱임이 되고
이끼 묻은 바위에 부서지는 자욱한 물소리는
절벽 끝 물길 시퍼른 번뜩임이 되고
가지를 휘는 눈부신 야생의 사과는
봄 가지 끝에 달린 흰 꽃이 되고
모두가 돌아가는 길 위에 있는
정신의 가을.
돌아가라. 돌아가라.
새로운 목숨의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하여
최후의 집으로 돌아가라.
3
황갈색 가랑잎 뒹구는 소리가 말이 사라진 빈자리에 흩어져 있다.
쌓아올린 짚단 무게에 눌린 경운기 한대가 기우뚱거리며 멀어져가고 있다. 챙이 긴 홍시색 운동모를 눌러쓴 사나이가 경마 기수처럼 핸들에 매달려 있는 것이 오후 두시의 따가운 눈부심 속에서 검은 덩어리처럼 보인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