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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우리말과 음양오행의 인지과학적 특성
소광섭 蘇光燮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저서로 『대통일이론』 『물리학과 대승기신론』 등이 있음.
1. 음양오행의 짝과 우리말의 순서
음양(陰陽)은 서로 대립하는 반대의 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움과 더움, 어둠과 밝음, 무거움과 가벼움 등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자연과 생활 가운데 음양의 짝을 파악하여 하나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인식과 사고의 기초를 이룬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사고활동의 매체인 언어의 규칙에도 이 점이 은연중 스며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우리말의 음양적 규칙성을 찾아보면 실제로 뚜렷한 순서의 규율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음양의 짝에서 순서상 음이 먼저 오고 양이 뒤에 놓인다’는 법칙이 우리말에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안’과 ‘밖’은 안이 음이고 밖이 양이므로, 묶어서 말할 때 ‘안팎’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느낀다. ‘오고 가는 것’ 역시 음양의 짝이므로 ‘오가며’라고 말하지 ‘가고 온다’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이 음이므로 ‘드나든다’로 줄여서 음양순서의 법칙이 지켜진다.
이러한 음양의 규칙은 한자어와 비교하면 더욱 뚜렷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우리말에서는 어버이(어머니와 아버지), 연놈(여자와 남자), 처녀총각과 같이 음이 먼저 오는데, 한자어에서는 양이 앞에 서고 음이 뒤따른다. 부모, 남녀, 신랑 신부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 규칙이 한자어에서 철저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예를 들어 天地·乾坤·父母·男女·明暗·輕重·增減·强弱·出入·動靜)에는 양음 순서를 지키지만, 음양·자웅(雌雄)·내외(內外)와 같이 순서가 바뀌는 예외도 없지 않다. 이 바뀐 순서의 경우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 어휘일 수도 있겠고, 또는 한국에서 기원된 것(예를 들어 음양)을 중국에서 그대로 받아들였을 경우(중국에서는 외래어인 셈)도 상상해볼 수 있겠다.
우리말의 경우도 어순이 대부분 음양의 순서이지만(예를 들어 어버이, 연놈, 암수, 처녀총각, 안팎, 오가며, 들락날락, 드나든다, 쥐었다 폈다, 옴짝달싹, 우툴두툴)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닫이’는 양인 열다와 음인 닫다의 순서이고, ‘미닫이’도 마찬가지로 순서가 반대이다. 발음상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많은 경우에 음양의 짝으로 낱말을 만들지 않는다. 어둡고 밝음, 춥고 더움, 차갑고 뜨거움, 달과 해, 땅과 하늘, 무겁고 가벼움, 부드럽고 단단함, 속과 겉 등 한자 어휘는 있으나 하나로 된 우리 낱말은 없는 예들이 많다. 한자어에서는 음양의 적용을 상하·고하·전후·좌우·대소·다소·장단·광협·원근과 같은 이분법적 구분에 확대적용한 데 비하여, 우리말의 음양 순서는 그렇게까지 일반화되지 않았다. 왜 철저하게 만들어나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어쩌면 이런 일반화는 경험에서 벗어나는 관념적 확장이라고 보았는지 모른다. 예로 ‘오르내린다’ ‘위아래’를 음양의 짝으로 볼 수 있느냐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말의 음양순서 규칙을 좀더 체계적으로 살펴보자. 이 글의 첫부분에서 ‘음양은 서로 대립하는 반대의 짝’이라 정의하고 그 예로 온냉·명암·경중 등을 들었는데, 이 예들은 한자어의 이분법적 표현을 음양에 확대적용한 것이고, 우리말의 음양순서 규칙을 조사해보면 음양은 극히 제한된 두 가지 경우에 한함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성(gender)의 분별로, 어버이, 내외(內外=夫婦), 처녀총각(處女總角), 연놈, 암수 등이다. 단 오누이(오라비와 누이), 아들딸처럼 음양의 어순이 바뀐 것은 영어에서 어린이(child)를 중성(he 또는 she가 아닌 it)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하나는 안과 밖,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운동과 밖으로 나가는 운동에 음양 어순이 지켜진다. 안팎, 들락날락, 드나든다〔入出〕, 오간다, 오락가락, 오므렸다 폈다, 옴짝달싹, 들쭉날쭉, 들숨날숨〔呼吸〕 등이다. 요즈음 만들어진 낱말로 고속도로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곳을 ‘나들목’이라고 하는데, 출구만 가리키면 맞지만 입구도 함께 의미한다면 ‘드나들목’이라고 해야 우리말의 규칙에 맞는다 하겠다. 또하나 흥미로운 점은 운동이라도 안과 밖의 중간 경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다. 미닫이와 여닫이는 안팎으로 열고 닫는 면도 있지만 옆으로 밀고 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의 중간인 ‘겉’도 또한 음양의 구분에 속하지 않으므로 ‘겉과 속’은 짝이지만 음양의 짝으로 보지 않는다.
오행과 우리말의 관계를 논하기 전에 음양과 관련하여 한두 가지 생각을 보탤까 한다. 언어에서의 음양 순서가 행동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숫자를 셀 때 손가락을 안으로 꼽으면서 다섯까지 센 후 밖으로 펴면서 나머지 열까지 센다. 화가 나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도 우리말의 순서와 일치한다.
남녀·천지·상하·강유를 양과 음으로 분류하는 언어체계를 갖는 사회에서는 남자는 하늘처럼 높고 단단하며, 여자는 땅처럼 낮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남녀차별의 사고가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말은 음양을 성과 안팎으로의 운동에 국한하고 일반화된 이분법으로 확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부터 남녀차별의 사고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안사람, 바깥 양반’은 우리말과 생활이 일치하는 것인데, 이를 꼭 남녀차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여성 먼저’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한자 언어권의 영향으로 흐려졌을는지도 모른다.
한자어에서 이분법으로 음양을 확대한 경우 우리말은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해당하는 낱말이 없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천체와 기상: 천지, 건곤, 일월, 온냉, 한서(寒暑), 춘추, 수화(水火), 명암.
─방향과 크기: 상하, 전후, 좌우, 동서, 남북, 선후, 대소, 다소, 고저, 심천, 경중, 강약, 강유, 장단, 원근, 광협.
─변화와 운동: 동정, 출입, 왕래, 굴신, 증감, 생멸.
─기타: 흑백, 가부(긍정과 부정), 수족(손과 발), 심신(몸과 마음), 희비, 고락, 애증(愛憎), 인의(仁義).
우리말에서는 음양을 암수의 구분과 안팎으로 오므라들고 나가는 운동의 구분이란 구체적 현상에만 제한하고, 이를 일반화하여 하나의 범주로 확장하는 보편성이 부족한 듯하다. 흑과 백, 쓴맛과 단맛을 음양으로 볼 수 있는 추상적 사고의 단계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흑백을 음양으로 보는 관점이야말로 흑백논리로 세상을 갈라보는 지나친 단순화이며 세계는 좀더 복잡하다는 것이 우리말의 세계관인 듯하다. 즉 음양말고 다섯 가지 다른 범주가 있다는 것이니, 이를 오행(五行)이라 하며, 흑백도 오행 중의 두 요소란 관점이다.
2. 오행
오행(五行)에서 행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와는 같지 않다. 고대의 물·불·바람·흙 4원소나 현대의 원자(수소·헬륨·우라늄 등)는 물질의 분해와 조합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분명한데, 오행의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는 물질의 요소도 아니고, 관념적 범주로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행은 한·중·일의 극동 문화권에서는 한의학을 비롯하여 철학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류의 틀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오행이 널리 쓰이므로 우리말과 글에도 오행적 요소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음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말에는 오행의 사상이 원초부터 깊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행 사상을 따라 우리말의 체계를 세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예로 색깔에 대해서 살펴보자. 오행체계에서는 각 행마다 해당하는 색이 있다. 즉,
목: 청(靑), 화: 적(赤), 토: 황(黃), 금: 백(白), 수: 흑(黑)
이다. 색은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녹(綠), 감(紺), 남(藍), 자(紫), 갈(褐), 홍(紅), 주(朱) 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에는 색깔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 낱말만이 뚜렷한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오행에 맞춰져 있으니,
목: 파랑, 화: 빨강, 토: 노랑, 금: 하양, 수: 까망(검정)
과 같이 ‘-앙’으로 끝나는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있다. 한자어에 기원을 갖고 있지 않은 색깔 관련 낱말은 이 다섯 외에는 없는 듯하다. (‘풀색’은 청색과 녹색을 잘 구분하지 않는 우리의 습관으로 볼 때 파랑과 하나로 칠 수 있겠고, ‘보라색’은 한자어에 기원이 있지 않은가 의심이 든다. 흔히 듣는 연두색은 연두`軟豆이니 원래 우리말이 아니다.) 낱말뿐만 아니라 색깔의 사고와 표현에서도 여러가지 빛깔이 섞여 황홀하도록 아름다움을 ‘오색찬란’ ‘오색영롱’이라 하고, 갖가지 짓을 다하는 놈을 ‘오색잡놈’이라고 한다. 색깔에 관한 인지가 오행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한자어에서는 흑백, 적청이 음양의 대립으로도 파악되지만, 우리말에서는 이를 오행의 요소로만 보았다.
맛에 관해서는 색깔에서 보듯 뚜렷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에서는 역시 다섯 가지가 주로 쓰인다.
목: 신맛, 화: 쓴맛, 토: 단맛, 금: 매운맛, 수: 짠맛
이밖에 우리말로 어떤 맛이 더 있는지 모르겠으나, 일상적으로는 이것이 전부일 듯싶다.
혀의 감각으로는 신맛, 쓴맛, 단맛, 짠맛 네 가지가 기본적인 맛이다. ‘매운 맛’은 맛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고, 영어에는 ‘맵다’라는 단어가 따로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매운 것도 맛으로 인식한다. 한편 ‘떫은 맛’은 기본 맛이 아니고 그것들의 조합인데, 이 점이 반영된 듯 우리말에서도 기본 맛의 조어규칙에 벗어나 있다.
냄새에 관련된 우리말 또한 오행규칙이 없지 않다. 오행의 냄새 분류를 보면,
목: 누린내(5), 화: 노린내(탄내, 焦), 토: 향(香), 금: 비린내(腥), 수: 고린내(썩은냄새, 腐)
와 같이 써볼 수 있다. 향(香)냄새는 본디 우리말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 ‘〜린내’의 규칙에 맞도록 향내의 원래 단어가 있었음직하기 때문이다. ‘〜린내’가 모두 좋지 않은 기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향’만 특이하게 벗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 끼여든 것이고, 따라서 ‘구린내’가 이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상의 예를 보면 우리말과 오행은 인지체계의 기초인 감각, 즉 색·소리·냄새·맛에서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님을 볼 수 있다. 소리만 예외인 듯하지만 오음(五音, 각`角·치`徵·궁`宮·상`商·우`羽)과 오성(五聲, 호`呼·언`言·가`歌·곡`哭·신`呻)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라진 옛말에는 오행적 소리의 분류가 있었을 것이다. 소리와 오행적 특성은 한글의 창제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감각의 다섯번째 요소인 닿음(촉각)에 대해서 우리말의 오행적 규칙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옛말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것일까?
목: 무름, 화: 부드러움, 토: ? , 금: 굳음, 수: 단단함(딱딱함)
에 상응하는 옛 낱말들로 규칙적인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감각 또는 인지의 분류기준으로 오행을 취했다면, 이것은 세계를 객관적 존재로 파악하여 그 구성요소를 분류하는 원소론과는 세계관이 아주 다르다고 하겠다. 원소론에서는 관찰과 인식을 하는 주관과는 관계없이 자연현상들이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본다. 이것은 고전물리학에서의 자연관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시작된 현대물리학에서는 관찰과 현상에 관한 법칙을 논할 뿐이라고 보며, 관찰 또는 관측이 법칙 구성에 핵심적 원리를 제공한다. 그 예로 ‘관찰수단인 빛의 속력은 관찰자의 움직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광속일정의 원리)’는 상대성이론의 기본원리나, ‘관찰수단인 빛의 원천적 교란작용 때문에 관측대상인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는 데는 부정확성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를 들 수 있다.
관찰이 자연현상을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면, 관찰을 도외시하고 사물 자체의 구성요소를 원자로 파악하는 원자론적 사고체계는 문제가 있다 하겠다. 우리말이 보여주는 오행체계는 인지의 기초에 관한 분류란 점에서 매우 의미깊고, 현대적이라고까지 하겠다. 오행은 대상 그 자체의 분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인식자 주관의 분류도 아니다. 예를 들어 칸트의 범주와도 다르다. 선험적이고(apriori), 초월적이며(transcendental), 경험을 가능케 하는 직관의 형식(시간과 공간)이나, 오성(understanding)의 12범주와는 달리 경험의 내용에 관한 분류이기 때문이다. 오행은 사물과 주관이 만나는 현상 인지에 관련된 기본적 분류라 하겠다.
3. 오행의 인지과학적 측면
우리말이 오행의 분류체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가장 뚜렷한 예는 색깔·냄새·맛이며, 인지활동의 기본인 감각에 관한 분류임을 보았다. 이것은 고전물리학이 대표하는 실재론적 대상의 분류(예를 들어 물질적 원소)도 아니고, 그 반대인 관념론적 주관의 분류(예를 들어 칸트의 범주)도 아닌 중간에 해당하는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오행의 색깔 분류는 자연현상으로서 색깔이 객관적으로 다섯 가지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며, 또는 우리의 관념체계가 경험 이전에 이미 5개의 색깔범주를 갖도록 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빛이라는 대상과 인간의 신경구조와의 상호작용을 통한 인지적 활동에서 나오는 분류라는 것이다.
이러한 중도적 인지론은 인지과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메를로뽕띠(M. Merleau-Ponty)가 그의 저서 『행위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 1942)에서 제시한 바 있는데,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다음의 인용문은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대상의 속성과 주관의 의도는 상호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전체를 구성한다.(…)자극과 반응의 주고 받음에서 “어떤 것이 먼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자극의 형태는 생물체 자체에 의해, 즉 외부로부터의 행동에 그 자신을 맡기는 적절한 방식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다. 확실히 (그런 방식을─인용자), 지속하기 위해서, 생물체는 주위에서 일정한 수의 물리적·화학적 요인들을 만나야만 한다. 그러나─수용체들의 본성과 신경쎈터의 역치(threshold)와 기관들의 운동들에 따라서─물리적 세계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자극을 선택하는 것은 생물체 자체이다. “환경은─생물체가 세계 내에서 적절한 환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을 때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생물체의 존재 또는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에서 창발(emergence)되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바렐라(F.J. Varela), 톰슨(E. Thompson), 로쉬(E. Rosch)가 저술한 『인지과학의 철학적 이해』(석봉래 옮김, 옥토 1997; 원제 The Embodied Mind: Cognitive Science and Human Experience, MIT Press 1992)의 제8장 ‘발제(發製, enaction) 체화된 인지’(279면)에서 재인용한 글이다. 요컨대 생물체는 수동적으로 환경에 의해서 구성될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환경을 이끌며, 따라서 생물과 환경은 상호 규정과 선택을 통해 서로 결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근거는 색깔·냄새 등의 지각이 단순히 바깥세계에 속해 있고 그것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주변세계의 발제에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고전물리학적 실재론과 그 반대되는 주관적 관념론에 관하여 이 책은 닭의 입장과 달걀의 입장이라는 표현을 써서 다음과 같이 대조적으로 설명한다.
닭의 입장: 밖에 존재하는 세계는 미리 주어진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속성들은 인지체계에 던져질 이미지보다 먼저 존재한다. 이때 인지체계의 역할은 이러한 외부세계의 속성을 적절히(…)재현하는 것이다.
알의 입장: 인지체계는 그 자신의 세계를 투사한다. 이 세계의 명백한 실재는 이 체계의 내적 법칙의 단순한 반영일 뿐이다. (같은 책 276면)
외부세계의 재현으로서의 인지(실재론)와 미리 주어진 내적 세계의 투사로서의 인지(관념론) 사이의 중간 길로서 저자들은 ‘체화된 인지’라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인지는 여러가지 감각운동 능력을 지닌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경험에 의존한다’는 점과 ‘개별적 감각운동 능력들은 더욱 포괄적인 생물학적·심리학적·문화적 맥락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의 견해는 ‘세계가 우리의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환경은 지각자의 행위의 결과로서 끊임없이 변하고, ‘세계라고 보이는 것’이 실은 ‘지각 의존적 세계’란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자연현상을 구성의 기본요소인 원소로 분석하겠지만, ‘인지된 세계’란 관점에서는 인지체계와 관련된 분류체계를 도입할 것이다. 실제로 생물들의 인지활동 중 기초적인 것으로 범주화를 손꼽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개별 생명체의 구체적 경험이 의미있는 학습된 범주를 구성하게 된다. 이러한 범주는 임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으나, 로쉬 등은 생물학, 문화 그리고 정보내용과 경제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구체적 대상들의 분류법에 범주의 기본단계가 존재한다고 제안하였다(Rosch et al., Basic Objects in Natural Categories; 바렐라 외, 앞의 책 283면). 일련의 실험에서, 로쉬와 연구자들은 범주의 기본단계는, 범주에 속한 원소들이 ① 비슷한 신체운동에 의해 이용되거나 상호작용되는, ② 비슷한 지각 형태를 지니고 시각상을 떠올릴 수 있는, ③ 구별 가능하며 인간에게 의미있는 속성을 지닌, ④ 어린아이들에 의해 분류되는, ⑤ 언어적 원초성(linguistic primacy)을 지닌 가장 포괄적인 단계라는 점을 발견하였다.
우리말에서 오행의 분류는 사물의 범주화도 아니고 주관적 관념의 범주화도 아닌 눈·귀·코·혀의 지각의 범주화이며, 이들이 인간에게 의미있는 속성을 지니고, 어린아이에 의해 분류되며, 언어적 원초성이 있다는 점에서 로쉬 등이 제안한 인지범주의 기본단계와 어느정도 일치된다고 하겠다. 물론 오행과 로쉬의 기본단계를 비교하는 것은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어린아이도 분류하는 언어적 원초성이란 점에서 우리말의 색깔·소리·맛·냄새의 오행적 범주화가 우연적이거나 이차적이며 시시한 일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인지요건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오행이 로쉬 등의 기본단계에 해당하듯이, 음양은 마크 존슨이 제시한 기본범주에 대응한다. 그는 인간은 용기(容器) 스키마(Schema), 부분-전체 스키마, 그리고 수단-경로-목표 스키마와 같은 이른바 운동이미지 스키마라는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용기 스키마의 구조적 요소들은 ‘내부·경계·외부’이며 그 기본적 논리는 ‘안으로, 바깥으로’이고, 이 스키마의 비유적 투사는 시각의 마당(visual field, 시선에 들어오고 나가는 대상), 인간관계(관계의 맺음과 끊어짐), 집합의 논리(원소의 포함) 등에 관한 개념구조를 제공하게 된다고 말한다(Mark Johnson, The Body in the Mind,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바렐라 외, 앞의 책 283면).
우리말에서 음양은 정확히 이 용기 스키마에 맞추어져 있다. ‘안팎’이라는 구조적 요소에서 ‘들고 나고’ ‘오고 가고’라는 기본적 논리에 정확히 대응하며, ‘이곳 저곳’ ‘이놈 저놈’과 같이 시각의 마당에까지 비유적 투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는 안사람, 바깥양반으로 남녀에게 투사되었고, 집합의 논리에로의 투사는 없지만 음양 스키마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말이 현대적 인지이론인 존슨의 기본범주와 상응함은 경탄할 만하다 하겠다.
4. 오행과 상극
오행적 범주화는 바렐라 등의 다음 글과 관련하여 더욱 뚜렷한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범주화의 기본단계는 인지와 환경이 동시적으로 발제(enaction)되는 지점인 것으로 보인다. 대상은 지각자에게는 일정한 종류의 상호작용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이며, 지각자는 그의 신체와 마음을 통해 그 대상을 그러한 허용된 방식으로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반대되는 속성이라고 알려진 형태와 기능은 같은 과정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생물체들은 이 두 가지 속성의 조화에 매우 민감하다. (바렐라 외, 앞의 책 284면. 강조는 인용자)
우리는 앞에서 음양을 서로 대립하는 반대의 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출발했다가 우리말에서는 음양 순서의 규칙에 따라 음양은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적용되고, 흑백·명암·냉온 등으로 일반화되지는 않았음을 보았다. 이것이 추상화와 보편성을 결여한 우리말의 단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반대되는 속성이 한 과정의 다른 측면’이라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사고체계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말에서 음양은 남녀와 안팎으로의 운동이라는 두 경우로 한정되고, 일반적으로 대립되는 쌍은 상극(相剋)이라는 역학적(力學的) 개념을 써서 분류의 개념인 오행 범주에 상호작용을 도입한다. 즉 오행을 단순히 정적인 분류체계가 아닌 동력학적인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행의 다섯 요소들 중 서로 상극인 대립적 짝이 반대되는 속성으로 비춰지나, 실은 오행이라는 전체를 한 체계로 볼 때 이 큰 하나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상극은 오행의 순환적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파악된다.
물과 불은 서로 대립되지만 음양의 짝이 아니라 상극의 관계이다(물은 불을 끈다). 쇠와 나무도 서로 상극이다(쇠는 나무를 자른다). 나무는 자연·생명·부드러움·따뜻함 등을 연상시키며, 쇠는 문명·살상·단단함·차가움 등을 떠올리게 하므로 서로 대립적이지만 음양의 짝은 아니다. 물은 불을, 쇠는 나무를 제압하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상극은 단순한 이분법의 분류와는 달리 동적인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들 네 요소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물·불, 쇠·나무라는 두 개의 짝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이제 불은 쇠를 녹인다는 점에서 불과 쇠를 상극으로 보면 이들의 연결이 이루어졌으나, ‘물→불→쇠→나무’의 직선구조를 갖게 되었으므로 물과 나무는 양 끝에 놓여 제압당하거나 제압할 짝을 갖지 못해 불완전한 체계이다. 이를 쉽게 해결하는 방안은 고리로 만들어
와 같이 나무가 물을 상극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상적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무가 물을 먹고 잘 자라는 것은 상생의 관계이므로 나무가 물을 제압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러한 사행(四行)체계에는 또다른 문제점이 있다. 물은 불을 제압하고, 불은 다시 쇠를 제압하므로 물과 쇠의 관계는, 이중부정이 긍정이 되듯이, 상생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불과 나무도 상생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쇠·나무·물’에서 다시 ‘물·쇠’의 상생관계가 나오는데, 앞서의 ‘물·불·쇠’에서 ‘쇠·물’의 상생관계와 겹치므로 쇠와 물은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생(生)’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동등한 ‘생’ 관계로 된다. 그리고 상극관계는 한쪽 방향으로 순환성을 갖는데, 상생은 ‘물·쇠’ ‘불·나무’의 두 짝으로 분리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상생 측면에서 사행체계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못한다.
위의 두 가지 점(나무와 물을 상극으로 보는 부자연스러움, 상생의 측면에서 두 부분으로 분리되는 점)에서 네 개의 ‘행’으로는 하나의 순환적 체계를 이루지 못한다. 이에 적어도 하나의 ‘행’이 더 필요하며, 상극의 순환체계로 ‘오행’을 구성하기 위하여 ‘흙’을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상극의 고리를 만들어보자.
나무는 흙을 ‘극’하고, 흙은 물을 ‘극’하는 것으로 보면 이중의 극에서 물은 나무를 ‘생’하는 것으로 되며, 같은 방식으로 나무는 불을 ‘생’하고, 불은 흙을, 흙은 쇠를, 쇠는 물을 ‘생’하게 되어 또하나의 고리가 형성되며, 오행 전체가 하나의 상생의 고리체계가 된다.
오행체계는 상극과 상생이 대칭적인 순환의 고리로서, 짜임새 있는 하나의 동력학적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어떤 체계가 상극의 고리처럼 순환하며 계속 졸아든다면 이를 싸이버네틱(cybernetic)에서는 음적 되먹임(negative feedback)이라 하고, 상생의 고리처럼 순환하며 부풀린다면 양적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되먹임이 대칭적으로 균형을 맞춘 체계가 오행체계이고, 아직까지 이런 체계를 수학적으로나 공학적으로 연구한 예는 없는 것으로 안다(졸고 「오행의 수리과학적 이론」, 『과학과 철학』 제5집, 통나무 1991 참조). 상생·상극의 오행체계에 대하여 체계이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연구를 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서로 대립되는 짝을 음양의 짝으로 보지 않고 상극의 짝으로 볼 때 어떻게 상극·상생의 동력학적 체계가 이루어지는가를 보았다. 물이 불을 극하고 쇠가 나무를 극할 때 상극의 고리의 완성자로서 흙이 필요함을 보았는데, 이는 일종의 중재자로 도입된 것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이 상극이 뚜렷한 두 짝의 중앙에 위치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이러한 ‘중앙’의 관점은 특히 방향(공간)과 계절(시간)에 다음과 같이 투사될 수 있다.
계절에서 중앙이 무엇이냐는 답하기 곤란하다. 적당히 얼버무려서 환절기나 여름의 후반부쯤으로 보는 예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 계절에서 여름과 겨울이 대립이고 봄과 가을이 대립인데 이를 음양으로 보지 않고 오행의 일부로 보는 것은 봄·여름·가을·겨울이 한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므로 적절한 듯한데, 그래도 오행의 체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계절과 방향에서 투사하여 온도의 짝을 오행으로 대응시켜,
와 같이 쉽게 상극의 두 짝이 찾아지는데, 역시 중앙에 무엇이 있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서(寒暑)를 음양으로 보지 않고 상극으로 본 것은 우리말의 음양규칙에는 합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도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 요소도 역시 매우 유사하게 인·의·예·지·신으로 오행의 짝에 맞출 수가 있으며, 이러한 관념은 서울의 4대문 명칭에도 그대로 반영이 된다. 경복궁의 문의 이름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같이 오행은 언어로부터 출발하여 자연관과 심리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이 꼭 합리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5. 과학적 오행과 한의학
앞에서 오행과 상극의 논의는 매우 그럴듯하게 이어지고 있으나 실은 전형적인 비과학적 전개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논리적 필연성이 결여되고 있음은 물론 경험적 입증도 가능하지 않으며, 다른 말로 그럴듯하게 꾸미면 얼마든지 다른 구조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나 온도 등에서 제5의 행이 결여된 것도 억지로 오행에 맞춘 때문일 것이다.
원래 오행은 객관적 대상과 주관적 관념의 접점인 지각의 분류였으므로 이에 충실한다면 이와같은 억지 오행에 빠지지 않고 과학적인 오행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은 논리적 타당성과 경험(또는 실험)적 입증성을 의미하는 폭넓은 의미이고, 꼭 서구의 수학적·기계적 근대과학의 의미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오행의 범주화 중 ‘맛’의 다섯 가지가 그중 쉽게 과학적 접근이 가능할 듯하다.
쓴맛·단맛을 대립의 짝으로 보아 음양으로 구분하기 쉽겠으나, 음양 분류는 남녀·안팎과 같이 단 두 개의 종류(혹은 그 중간까지 포함해서 세 종류)만 있을 때 적용되는 것으로 여러가지가 있는 맛에는 적합한 분류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쓴 것을 먹을 때 설탕과 같이 단 것으로 중화를 시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은 쓴맛을 이기는 것은 짠맛으로 쓴맛 짠맛이 상극관계이다. 그리고 이 짠맛을 이기는 것이 단맛이다. 너무 짜게 먹었다 싶으면 꿀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또 단맛은 신맛이 이기고, 신맛은 매운맛이, 매운맛은 쓴맛이 이긴다. 이렇게 해서 오행의 상극의 순환고리가 다음과 같이 완성된다.
이러한 맛의 상극관계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므로 과학적 오행이라 할 수 있다. 이 관계에 의하면 쓴맛은 단맛을 돋구는[相生] 것이므로 쓴맛·단맛은 음양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상생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맛간의 상생의 관계들은 혀의 생리와 맛의 인지의 측면에서 좀더 주의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유의하면서 훗날의 숙제로 미룬다.
맛에 관한 또하나의 경험적 사실은 단맛이 다른 맛들의 중화(中和)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점이다. 이에 신맛·매운맛·쓴맛·짠맛의 상극관계 짝을 고려하여 단맛을 중앙에 놓으면 아래와 같이 흔히 보는 오행의 배치가 된다.
신맛·단맛, 단맛·짠맛이라는 상극의 두 짝과, 쓴맛·단맛, 단맛·매운맛이라는 상생의 두 짝과 단맛의 중화작용이 서로 상치되는 것은 아닌지, 정확한 생리적·인지적 관계는 무엇인지를 상세히 조사할 필요를 느끼면서 훗날의 숙제로 미룬다. 맛의 경우와 비슷하게 색깔과 소리, 냄새에 대해서도 고찰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이 역시 과제로 남겨놓는다.
신맛이 나는 음식을 먹으면 인체의 장기 중 간(肝)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옛날의 한의사들은 밝혔다. 이것은 체험과 관찰적 사실에 속하므로 과학적 생리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쓴맛은 심장에, 단맛은 비장에, 매운맛은 폐에, 짠맛은 신장에 영향을 끼친다고 전통적으로 알려져왔다. 장기의 오행적 속성은 감각의 오행범주에 대응하여 나타나며 한의학의 과학성은 인지과학적 오행범주론에 뿌리를 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오장은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능을 하는 음의 기관이고, 이에 대응하는 양의 기관이 있어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의학의 음양 장상론(臟象論)이다. 참고로 이들 기관을 오행의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괄호 속의 기관이 양의 기관인 부腑이다).
비와 위는 음양의 짝이고, 간과 담도 역시 음양의 짝이다. 우리의 말에 ‘비위(脾胃)가 약하다. 비위가 좋다’는 말이나 ‘간담(肝膽)이 서늘하다’ 등의 표현을 보면 음양의 순서가 잘 지켜지고 있음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음양의 짝을 우리말이 원래 의미하는 대로 남녀와 안팎으로의 운동에 국한하여 그와 관련된 것만으로 확장해야 함에도, 모든 대립하는 짝으로 잘못 일반화할 경우 혼란이 야기되듯이, 오행도 인지적 감각의 다섯 범주와 그에 경험적으로 연관된 오장과 육부 등으로 합리적인 확장을 해나가면 과학적인 한의학의 체계가 성립될 것이다. 합리성과 검증가능성을 무시하고 애매모호한 말로써 거의 모든 것을 오행에 두드려 맞추는 식으로 적용할 때는 오히려 신뢰성을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기초이론인 오장육부 장상론의 과학적 근거를 감각기능의 인지적 오행범주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인지과학과의 연계란 측면에서 뇌신경 체계의 구조 및 기능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뇌에 관한 논의가 거의 없지만, 실은 한의학의 근본인 오행론이 뇌의 인지구조와 밀접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의학은 뇌의 인지기능을 토대로 성립한 표층구조로 볼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뇌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할 때에 감각기관·언어기능·장상론과 연관하여 오행적 측면을 살펴보는 것이, 서구적 접근을 보완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유용할 것이다.
6. 소리
우리말에서 색깔·냄새·맛에는 오행에 따른 낱말이 명확하게 있음에 반하여 소리에는 뚜렷한 어휘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행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으니, 오음(角·徵·宮·商·羽)과 오성(呼·言·歌·哭·呻)의 분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말 중에는 이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가무도(詠歌舞蹈)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오음 발성법은 수련과 건강의 증진에 쓰이는데, 우리말의 모음 중에 오행의 배속을 다음과 같이 한다.
음(土, 宮), 아(金, 商), 어(木, 角), 이(火, 徵), 우(水, 羽),
‘음·아·어·이·우’를 차례로 발성법에 따라 수련하면 오장의 장기가 껴울리면서〔共鳴〕 강화되어 건강해지고 수행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과학적 검증이 가능하다고 본다. 즉 오음의 발성법에 따라 해당 장기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측정하면 될 것이다. 음-비/위, 아-폐/대장, 어-심장/소장, 우-신장/방광의 짝을 발성수련과 기능측정으로 확인하면 되는데, 실제로 임상실험을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소리의 측면에서 우리말과 음양오행의 깊은 관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解例)의 「제자해(制字解)』를 들 수 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과 땅의 도는 하나의 음양오행일 뿐이다(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그러므로 사람의 소리와 말에도 모두 음양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이치가 이미 둘이 아닌즉 어찌 천지신명으로 더불어 그 응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정음 28자의 각 모양은 (발성기관의) 형을 본떠서 만들었다(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음양오행을 천지의 근본원리로 파악한 점과 그 이치가 음성에도 그대로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응용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으며 글자의 모양은 발성기관의 형(形)을 본떴음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이어서 초성(初聲) 17자 중 기본음 5개(ㄱ, ㄴ, ㅁ, ㅅ, ㅇ)를 발성기관인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를 본떠 만들고, ㅋ, ㄷ, ㄹ 등 나머지는 획을 더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한 후 대저 사람의 소리는 오행에 근본한다(夫人之有聲本於五行)고 말한다. 오행의 배속은 다음과 같다.
한글의 자음 구성이 오행의 범주화를 따른 것이 우리말의 색·냄새·맛의 오행과 연계해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단지 당시 유행하는 학설인 오행론이 적용되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지 알 수가 없다. 세종 당시에 학자를 중국에 파견하여 동북아 지역의 언어연구 전문가에게 자문했다는 점으로 보아 자음은 위에 언급한 17자 외에도 더 있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중국어에는 사성(四聲)이 있는데 훈민정음에서는 이를 다루지 않고 있다. 이로 보아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우리말의 발음·발성의 특성을 면밀히 조사했음에 틀림없고, 나아가 발성기관을 관찰하고 그의 형태를 본떠서 글자의 모양을 만드는 탁월한 착상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말의 발성을 철저히 궁구하여 최대한으로 모두 표현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다섯 가지로 분류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오행이론의 틀에 맞춰 거기에 맞는 자음만 골라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색·냄새·맛과 같이 기본 인지언어가 오행의 구조에 맞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표현과 통신의 기본인 발성까지도 오행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글자까지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발성이 오행으로 되었을까? 짐작컨대 인지한 대로 생각하고 표현함이 자연스러우니 오행으로 인지하고(색·냄새·맛), 오행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 아닐까?
이러한 일련의 추론은 상상에 불과하고 검증되지 않은 것이기에 좀더 과학적인 접근을 해본다면 발성기관 아·설·순·치·후의 오행분류를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이 일 또한 실제로 해보이기는 어렵겠지만 원칙으로는 오장(五臟)과의 생리 또는 병리적 관계에서 객관적 입증이 가능할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심장[火]의 병은 혀[舌]에, 비장[土]의 병은 입술[脣]에 그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훈민정음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아·치·후가 간·폐·신에 상응하는지는 확실치 않으므로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에서 자음 17자는 오행분류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는데, 모음 11자는 전혀 다른 원칙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이치를 따라 ㅇ(天), ㅡ(地), ㅣ(人)를 기본으로 삼았다. 이들을 결합할 때는 다시 음양오행을 적용한다.
여기서 1, 3, 5, 7, 9 등 홀수는 양의 수로 하늘[天]에, 2, 4, 6, 8, 10 등 짝수는 음의 수로 땅[地]에 대응시켰다. 홀수와 짝수, 하늘과 땅을 양과 음으로 보는 것은 한의학과 동양사상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원초적인 우리말에서 나온 것은 아닌 듯싶다. 또 1, 2, 3, 4, 5 는 낳는[生] 수로 6, 7, 8, 9, 10은 이루는[成] 수로 보는 것도 이른바 『주역』의 해설에 나오는 생각들이다. 그리고 1·6=水, 2·7=火, 3·8=木, 4·9=金, 5·10=土에 대응시키는 것도 역시 『주역』의 하도(河圖)에 나오는 내용이다. 훈민정음의 모음 배열은 하도의 형태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 그림의 왼편은 훈민정음의 모음 배열이고 오른편은 하도인바, 서로 닮았음이 바로 눈에 띈다.
훈민정음에서 자음은 오행만을 반영하고 있으나, 모음은 음양오행과 천·지·인 삼재 및 하도 등 『주역』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한글의 과학성이 여러가지로 논의되고 있으나, 한글이 동양의 사상을 압축·포함하고 있는 점은 별로 부각되지 않는 것 같다. 음양오행과 『주역』은 한의학과 심리학, 철학 및 문화 등에 두루 적용되어왔으나, 근대과학적 검증방법론과는 괴리되는 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신비주의적 유사과학으로 미신에 가깝게 취급되기도 했다. 따라서 한글이 이러한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이 없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이 더욱 발달하면 한글을 만들 때 바탕이 된 자연관과 사상이 상세히 드러날지도 모른다.
7. 맺음말
음양오행을 근대과학의 기준에 따라 보면 비과학적이고 이해조차 되지 않는 그리고 자의적인 분류양식이란 생각이 들 수 있다. 물리적 대상을 원소로 분류하는 것은 실험적이고 객관적이며 확실한 지식을 얻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제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등 많은 응용이 가능하다. 음양오행설은 원자론에 비하면 아무런 실질적 내용도 활용성도 없어 보이고, 다분히 주관적이며 꿰어맞추기식 분류방법으로 보인다. 하늘에 오성(五星,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있어 기상상태와 사람의 정신과 기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오늘날의 천문학적 사실과도 어긋나고(이외에도 행성은 더 많이 있음), 기상학적 관측과도 현대 의학과도 전혀 부합되어 보이지 않는다. 무지개가 오색 찬란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일곱 가지 색깔(빨·주·노·초·파·남·보)이 있다고 하니 이 역시 사실을 무시하고 오행식 사고를 잘못 적용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음양오행설의 틀렸음을 보여주는 과학적 사실은 이외에도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학적 사실’이란 것들은 얼마만큼 궁극적 진실에 가까울까? 과학적 지식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그에 따라 세계관과 자연관도 바뀌고 ‘무엇이 과학적이냐’를 판단하는 기준도 바뀌게 마련이다. 이른바 ‘과학적’이라고 하는 거의 모든 예는 객관적 대상으로서 사물이 갖고 있는 속성에 관한 명제일 것인데, 이는 관찰자의 주관과 분리된 사물 자체의 존재와 속성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가 바로 문제이며 미심쩍다는 것이 오늘날 과학사상의 큰 흐름이다. 주관과 객관의 완전한 분리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관찰과 대상의 겹침이 일어나는 곳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의 입장에서는 ‘물질은 92가지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대상중심 명제가 결코 궁극적 진리로서 또는 상황의 적실한 기술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의 중심에 놓일 수가 없다. 그 명제는 마치 자연에 그런 것들이 절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제한된 상황에서만 성립할 것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원자론적 명제는 언젠가는 그 한계가 드러날 것인데, 그것은 아마도 원자들의 궁극적 기원과 주관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밝힐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음양오행을 사물의 분류로 본다면 원자론보다 훨씬 유치한 수준의 유사과학으로 비판받을 것이다. 반면에 인지과정 중 언어활동의 기본범주로 본다면 그것의 과학성은 원자론보다 더 수준이 높을 수도 있다. 음양오행 범주화의 적실성은 단순한 대상의 분석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깔로 나뉜다는 것만으로는 색깔의 오행범주화를 부정할 수 없다. 색 감각과 판단을 관장하는 뇌신경들의 구조와 기능과 조직, 그리고 심리학과 언어학 등의 종합틀에서 이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무지개의 색깔을 일곱가지로 나누는 광학적 명제와 오행 색깔론 중 어느 것이 더 과학적인가? 이것은 아마도 과학을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쩌면 둘은 각각의 제한된 적용범위 내에서 모두 맞을 수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둘 다 과학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음양오행과 우리말과 글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과 그것의 과학성은 인지과학적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어느정도 논의하였으나 총론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각론적인 상세한 연구를 진행한다면 음양오행의 과학성이 좀더 명확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색깔의 오행론을 색깔과 뇌신경 조직과 오행장부와의 관계 측면에서 깊이있게 고찰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또 오행범주를 일체 만물에 적용하는 방법론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수단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고, 오행체계의 상극상생의 동력학적 특성도 수학적으로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