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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 대학강사 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
일용잡급직에서 교원으로
임성윤 林盛潤
성균관대 강사노조위원장(서양사 전공). lim1933@lycos.co.kr
1. 얼마 전에 대학신문의 한 기자가 강사들의 인권문제를 취재하려고 강사노조 사무실을 찾아왔다. 사실, 현재의 한국 교육시장에서 강사들은 그보다 훨씬 더 절박한 생존문제에 직면해 있어, 인권문제를 앞세우는 것이 배부른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제를 바꾸자고 제안하여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는 「불안정한 신분, 열악한 연구환경 속의 시간강사」라는 제목의 기사로 실렸는데, 이 문구에 강사들의 모든 어려움이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
또 올 10월 5일자 『한겨레』에 실린 「서울대 교수 “연구는 언제?”」라는 기사를 통해 강사문제를 더욱 곱씹어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올 9월 현재 전임교원 1인당 주당 강의시간(강의+실험실습)은 1991년(8.9시간) 이래 최고치인 평균 10.2시간을 기록”하고 있고, 따라서 “서울대 교수의 강의부담이 해마다 가중되고 있어 연구중심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연구여건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읽은 강사라면 아마 어느 누구나 “나도 1주일에 10시간 정도만 강의하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연구와 교육을 제대로 해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한다.
2. 그러면 강사들은 1주일에 몇시간을 강의하며, 그들의 경제실상과 연구여건은 어떠한가?
대학강사들은 한 학기에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이 가능하고, 분야에 따라 개설과목 수가 많거나 적기 때문에 강사마다 총 강의시간이 다르다. 대체로 보아, 많게는 20〜25시간, 적게는 6〜9시간을 강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통 9시간을 강의하는 교수와 비교해 강사들은 왜 그렇게 강의시간 수가 천차만별이며, 무려 교수의 세 배나 되는 시간을 강의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것은 강의가 일정하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교수들처럼 9시간만을 강의할 경우, 생계를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는 만큼의 보수가 제공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똑같이 강의를 주당 9시간 했을 때, 강사의 급여는 교수들이 받는 월급의 1/5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강사가 주당 25시간을 모두 시간당 강의료가 제일 높은 국립대학에서만 강의한다고 칠 때, 월 3백만원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 급여는 강의한 시간만을 계산한 것이며 방학기간(1년에 넉 달)에는 급여가 한푼도 나오지 않으므로, 연봉으로 따져보면 2400만원에 그친다. 그러나 강의소득을 그만큼이나 올릴 수 있는 강사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25시간을 그렇게 ‘물 좋은’ 곳만을 골라 강의할 수 있다 해도 매주 전국 이곳저곳을 돌아야 할 테니 쉽지 않은 일이고, 설령 한 학기를 그런 조건 속에서 강의한다손 치더라도 그 다음 학기까지 강의 자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강사는 새벽같이 경부선에 몸을 싣고, 또다른 강사는 호남선에 올라 먼 남쪽 땅까지 달려간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먼 지방이 아니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불편한 곳에 있는 대학도 많아 서울 근교에 있는 대학에 이르는 데 오히려 지방대학에 갈 때보다, 또 강의하는 시간보다 더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 오늘은 안동 내일은 제천, 오전에는 인천 오후에는 수원, 이렇게 다니려면, 부득이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차를 몰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20〜25시간을 강의한다고 했을 때, 그 강사는 하루 3〜9시간씩 가르치러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부지런히 옮겨다녀야 하며, 가는 곳이 멀다보니 교통비가 만만치 않아 실질소득을 뚝 깎아먹게 된다. 자조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 강사들을 ‘강사재벌’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 ‘재벌’의 한달 수입이 200만원 넘기가 쉽지 않고, 그나마 방학기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강의 준비시간에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는 시간까지 합치면 여느 노동자들보다도 노동시간이 긴데 그 노동의 댓가는 참 얄팍하다.
그런데 같은 시간을 강의하더라도 사립대학은 국립대학보다 강의료가 낮아 더 열악하다. 또 사립대학은 학교에 따라 시간당 강의료가 그야말로 ‘자율적으로’ 책정되는데, 정확한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현재 평균강의료를 약 2만 3천원 정도로 추산한다. 이 액수로 교수의 의무시간인 9시간만을 강의하는 강사가 받는 연봉은 약 660만원이 된다.
민주노총은 2001년도 표준생계비를 단신 가구 114만 7596원, 2인 가구 173만 6680원, 3인 가구 219만 3807원, 4인 가구 305만 7972원으로 계산하고 있다. 이 정도의 수입은 되어야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문화생활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한 가정의 가장인 강사가 두 아이를 두고 있을 때, 최소한 인간답게 사는 일은 9시간 강의로는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강사 처우 수준 아래에서는, 교수가 될 때까지 강사가 강사로서 또 연구자로서 살려면 20시간 이상을 강의해야 한다.
그러면 강의를 많이 하지 못하는 강사는 어떻게 사는가? 살아가자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한다. 대학 때부터 하던 초·중·고 학생의 과외(100명 내외의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받는 댓가보다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서 공부하는 1〜2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얻는 수입이 훨씬 더 낫다)를 지도하거나, 번역(이것은 요즈음 돈이 안된다)을 하거나, 심지어는 막노동(이것은 요즈음 자리가 없다)까지도 한다. 더러는 3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부모에게 의지하거나 아내를 ‘등쳐먹는’ 생활을 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강사는 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올해 초에 귀국하여 지금 두 학기째로, 두 학교에 출강하면서 각 3시간씩 6시간 강의를 하고 있다. 처음엔 한국 물정을 잘 몰랐지만, 시간이 가면서 강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가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연구열정이 남달라 강의료는 대부분 책값(보통 한 권에 10여만원 한다)으로 쓰고 급여가 나오지 않는 방학 때는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꾹 참아야 했다. 가끔 번역이나 통역을 하여 부수입을 얻기도 하지만 이런 것으로 집에 생활비를 댄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부모님께 빚지는 마음으로 기대어 살고 있는지라 사십이 내일 모레인데도 결혼이 그에겐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연구자로서의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도 이제 차츰 연구보다는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시급함을 느끼며 그쪽으로 눈을 돌리려 한다.
결국 강의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강사들은 자신들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야 할 연구보다는 다른 곳에 힘을 많이 소모한다. 강사들이 맡는 과목은 보통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교양과목이라 강의준비와 연구를 따로 해야 한다. 그러니 전공과목을 주로 가르치는 교수의 경우도 10시간 강의가 연구를 하기에는 과중하다는 마당에, 여건이 비교가 안되게 열악한 강사가 연구에 몰두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보통 학기중에는 강의 준비와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에 매달리고 연구는 방학 때로 미루게 된다.
그런데 학문의 길을 가려면 연구활동은 학생시절부터 시작해서 교수가 되고 또 퇴임하고 나서도 ‘쭉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환경에서, 보통의 연구자라면 30대에 연구역량을 쌓고 또 그것을 기반으로 훌륭한 연구성과물을 내게 될 것이다. 수학자들 사이에서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드상에서 40세 미만으로 수상자격을 제한하는 이유는 학자의 이력에서 바로 30대가 분기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창 연구를 해야 할 사람들이 밥벌이를 위한 강의에 아르바이트에 짓눌려 빛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강사들이 연구 이외의 것에 더 마음을 써야 하는 현실은 법과 제도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대학강사들은 법적으로 교원이 아니다. 법률에서 교원의 자격을 교수·부교수·조교수·전임강사로 한정하고 있어(교육공무원법 제8조와 사립학교법 52조) 대학강사는 그 범주에 들지 못한다. 그 결과 교원으로서의 신분보장을 전혀 받을 수 없는 대학강사는 대학강의의 약 50%를 담당하며 교수와 마찬가지로 연구를 해야 하는 이들임에도, 강의시간에 따라 강의료를 받는 시간강사로서 일용잡급직으로 분류된다. 법의 이런 홀대는 그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제도의 부재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팍팍 밀어주는’ 사람이 없는 대부분의 강사는 자신의 연구비를 온전히 스스로 벌어서 마련하느라 오늘 해야 할 연구를 내일로 미루고 강의에 전적으로 매달리거나, 아니면 연구자이면서 교육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강사들의 연구역량을 오히려 축내는 일이다. 이런 모순을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들이 바로 대학 강사들이다.
신분이 불안정한 강사들은 경제활동 면에서 ‘잠재적 실업자’이다. 대학에서는 배정되었던 과목이 폐강되어 강의가 사라지는 일이 흔하여 강의를 한 과목도 맡지 못하면 당장 ‘참’ 실업자가 되는데, 아무런 하소연 한마디 할 데 없다. 신갈에 있는 어느 대학에 출강하던 한 강사는 영문도 모른 채 이번 학기 강의배정에 제외되었는데, 그 사실을 학교나 학과의 어느 누구도 통보를 해주지 않아 개강한 뒤 학교에 전화해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렇듯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의 고통스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어이없이 강사신분을 잃을 수 있는 것은 강사직이 학기마다 새로이 학교와 계약을 맺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도 유동성이 심한 대학강사는 대학(보통 학과장)이 그 학기 강의를 주면 학생들에게 ‘교수님’ 소리를 듣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연구자로서 연명할 수 있는 최소의 사회적 관계마저 끊어지는 것이다.
또한 실업자의 길은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듯 남자강사보다 여자강사에게 더 쉽게 찾아온다. 강의가 줄어들 때 연구업적 등에 관계없이 남편이 있다는, 집안이 살 만하다는 이유로 여성강사를 ‘해촉’ 1순위에 올리거나 여성강사에게 남자강사보다 강의를 적게 주는 곳도 있다. 최고의 학부를 자랑하는 대학에서 그런 전근대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강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런 힘겨운 여건 속에서 강사가 많든 적든 강의에 의존하며 연구를 끊임없이 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사들은 장기적인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싶어도 주변 상황이 그 포부를 바로 펼쳐볼 용기를 주지 않는다. 제도적으로 아무런 뒷받침도 해주지 않고 교육과 연구에 힘을 쏟으라고 격려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대학강사들이 같은 일을 하는 교수와 큰 신분의 차이를 맛보며 동분서주 여러 곳을 다녀야 하는 이 모든 문제들은, 우리 사회가 강사들을 대학사회의 교육자이며 연구자로 끌어안기에 인색한 결과이다. 일단 정식교원으로 인정받으면, 강의가 보장되고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된 강의료의 현실화와 적정한 연구지원이 이루어질 테니, 강사들이 지금처럼 교육과 연구에 별 도움이 안되는 일에 기운을 다 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강사로 지내며 연구자로서 명망을 드높이고 학계의 권위자로 인정받아온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 개인이 학문의 길을 자청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스스로 감내하라는 방관적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들 인적 자원이 개인을 넘어 곧 사회와 국가의 자원임을 안다면 말이다. 잘못된 교육을 개혁한다고 난리굿을 하고 있는 정부와 그동안 잘못된 법과 제도의 보호 아래 고급인력을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착취’해온 대학들은, 진정 좀더 나은 강의와 연구를 바란다면, 현재의 강사문제를 강사료 몇푼 인상이나 한 강사에게 강의 몰아주기 등의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선책을 확립하는 데 힘써야 한다. 즉, 강사들이 10시간 정도 강의하면서도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문화생활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적극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용잡급직의 강사들을 정식교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것은 인권문제를 자연 해결하며, 길고 크게 보아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바로 서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