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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치와 역사 읽기로서의 소설읽기
나까무라 후꾸지 『김석범 “화산도” 읽기』, 삼인 2001
박명림 朴明林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mlpark@korea.ac.kr
사회과학도에게 소설읽기는 사회과학이 종종 갖게 되는 일반화와 몰(沒)인간적인 속성을 구체적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완해주는 것 같다. 일본어로 된 전7권의 대하소설을 분석한, 일본 리쯔메이깐(立命館)대학 나까무라 후꾸지(中村福治) 교수의 『김석범 “화산도” 읽기』는 하나의 소설을 여러 측면에서 분석한 문학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텍스트 해부에 촛점을 둔 좁은 의미의 문학평론을 넘어, 해당 텍스트를 하나의 창(窓)으로 삼아 그 텍스트가 담고 있는 제주 4·3사건은 물론 당시 한국의 정치와 사회, 나아가 인간행태에 대한 폭넓은 관찰을 담은 수준높은 인문에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나까무라 교수로부터 책을 전해받아 읽은 뒤, 1980년대 말 『화산도』의 한글 부분번역본(전5권)을 읽은 기억과 비교하여, 그의 정치읽기의 혜안과, 삶의 품새에 대한 넉넉한 마음씀씀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소설의 줄기와는 약간 다른 주제들인, 한국사회에서의 가족·결혼·계약·재산·여성·남녀평등·가부장제 문제를 끌어내어 논평하는 눈은 가히 일급이었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나아가 기존의 모든 권위와 교조주의에 대한 비판을 소설에서 읽어내는 가운데 저자는 당시 한국 사회와 정치라는 넓은 문제를 압축적으로 짚어낸다. 그러나 기실 그는 원래 한국문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일본 지주제와 부라꾸(部落)문제 연구가였던 저자는 소설 『화산도』와 1993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뒤 전공을 아예 한국문제로 바꾸었다. 그후 그는 최장집 교수의 연구와 시인 김남주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 소개하는 등 한일간의 지적 교류에 큰 기여를 해왔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번째 의미는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50년간 4·3사건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이념적 논란은 우리들의 화해의지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리적 위치와는 반대로 4·3 인식에 관한한 변방은 오히려 육지였다. 그 점에서 제주를 고향으로 가진 김석범(金石範)이 일본에서 1976년부터 97년까지 20여년에 걸쳐 필생의 작업으로 쓴 『화산도』는 바로 주체의 자기 상대화를 위한 치열한 내적 투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까무라는 객관화를 위한 김석범의 자기 상대화의 노력을 그의 내면의식까지 추적하며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다.
필자가 4·3 연구를 위해 87년 처음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중산간 부락의 노인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큰 충격이었다. 그것은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대화의 단절 문제라는 점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주사회의 치유할 수 없는 내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이 거대한 사건을 완벽하게 망각한 채 40년을 지낼 수 있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직무유기와 비교할 때, 『화산도』는 4·3의 희생자들에 대한 레퀴엠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고, 나까무라의 이 책은 그 레퀴엠 해설을 통한 4·3과 한국현대사 독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사실 『화산도』, 4·3, 한국현대사라는 상호연결된 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나까무라가 독해하기에 『화산도』는, 따라서 김석범의 4·3 이해는, 내적 충돌을 동반한 ‘객관적 운명’과 ‘주체적 가능성’ 사이의 하나의 역설의 변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이방근의 자살이라는 소설의 귀결은 작가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을 통해, 4·3과의 자기일치를 시도한 뒤 이를 다시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까무라는 이방근의 이 행위를, 일반적으로 우리가 오독할 수 있는 ‘영웅주의자’의 행위가 아니라, 거꾸로 ‘자유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의 행위로 파악한다. 나까무라가 이해하기에 그것은 곧 인간의 궁극적 존재이유의 하나인, 제도와 계약조차 넘어서려는 자유의 문제이자, 평화와 생명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끝없는 존중의지의 산물이었다.
나까무라는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를 상세히 대비하며 읽어내는 텍스트 재구성을 시도한다. 그의 분석지평에서 ‘사실’은 ‘픽션’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책은 『화산도』를 텍스트로 한 ‘소설읽기’인 동시에 ‘역사읽기’이자 ‘정치읽기’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정치행위의 의도와 진행, 효과에 대해 묵직한 비교이해를 보여준다. 이 경우, ‘픽션’과 ‘사실’을 너무 일대일로 비교하여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 공간을 너그러이 배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적 항변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까무라가 이해하는 『화산도』는 이념의 맹신에 대한 비판에 관한한 유보가 없다. 그는 김석범의 4·3 이해가 우익은 물론 좌익의 시각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비판적이라고 해석한다. 4·3 당시의 행위자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러한 관점은 지속된다. 즉 김석범 및 나까무라의 역사이해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한 도덕과 정치, 목적과 수단의 분리 위에 진행된다. 때문에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행위는 가차없이 비판받는다. 그들에게는 무고한 인명살상에 관한한 혁명적 살인과 비혁명적 살인의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나까무라가 해석하듯 김석범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했던 바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모든 억압(자기 내적 억압을 포함한)의 극복과 평화에 대한 희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까무라는 김석범의 서술 중 친일파/민족주의 문제와 북한 분석 부분에서 현실주의적 이해가 약화되고 있지 않나 질문을 던진다. 이 점은, 자유주의가 허무주의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암묵적 문제제기와 함께 아마도 한국현대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좁혀 말하면, 『화산도』에 나타나 있는, ‘남로당’에 대한 비판과 ‘북한’에 대한 비판 사이의 차이조차 나까무라의 현실주의의 사정(射程)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 점은 사실 둘의 현실주의 사이의 작지 않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나까무라가 이해하기에 『화산도』는 제주 4·3에 관한한 최고의 대하소설이다. 우리 사회 최대의 비극인 4·3에 대한 최고의 장편소설이 일본에서 나오고, 한국전쟁에 대한 최고의 연구가 미국에서 나와야 했던 지난 현실은, 그들의 지적·문화적 폭과 깊이에 대한 부러움을 넘어 이러한 작업이 불가능했던 우리의 문화와 학문의 저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후적(ex post facto) 서술이란 결국 무엇인가? 진정으로 열린 사유가 가능했다면 4·3과 한국전쟁 같은 사건들이야말로 비극의 승화를 통해 우리가 매우 일찍이 세계의 문학, 학계와 대화할 수 있는 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세계 보편적 대화주제로의 발전은 이성의 자유로운 발현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사고의 표현과 언어 선택을 미리 조심해야 하는 움츠러듦과 억압이 일반화되어 있다. 좌우 냉전주의의 위력은 발랄하고 창의적인 지적 고안물을 내놓기 어렵도록 했다. 『화산도』와 4·3을 냉철한 눈으로 바라보는 일본학자의 강력한 은유적 암시 속에 이 책은 이러한 우리 사회와 학문공동체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곰곰이 생각케 한다.
필자의 경우 자료·집필과 싸움하면서 시간절약을 이유로 점점 이기적이 되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한 점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던, 한국을 알고자 하는 정감있는 이 일본인 학자, 원고를 마칠 때쯤 큰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그로부터 전해들었다. 식민과 전쟁,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 학자들의 고뇌를 이해하고자 고민하는 한 이웃나라 학자의 건강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