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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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백석문학상 발표

 

백석문학상의 제3회 수상자가 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선정되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은 백석(白石) 선생의 뛰어난 시적 업적을 기리고 그 순정한 문학정신을 오늘에 이어받기 위해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가 출연한 2억원의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제정되었으며, 상금은 1,000만원입니다. 시상식은 만해문학상·신동엽창작기금·창비신인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11월 30일(금) 오후 6시 한국프레스쎈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제3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김영무(金榮茂) 시집  『가상현실』

 

심사위원

본심: 신경림 백낙청 황현산  

예심: 고형렬 이문재

 

2001년 10월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 수상자 약력

 

1944년 경기도 파주 출생. 현재 서울대 영문과 교수. 1975년 『창작과비평』에 「이육사론」을 발표하며 평론활동 시작. 1993년 『녹색평론』과 『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색동나무숲을 노래하라』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 등이 있음. 1993년 평론집 『시의 언어와 삶의 언어』로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2001년 9월 5일 모임에서 제3회 백석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신경림·백낙청·황현산 3인을 위촉하고 예심위원 선정을 지난해처럼 운영위원 중 문단인사에게 위임하였다.

이에 예심위원은 선례대로 중견시인 중 수상대상 시집이 없는 인사로 고형렬·이문재 2인을 위촉하고, 각자가 4〜5권의 후보작을 추천토록 의뢰했다. 양인은 각기 4권을 추천했는데 그중 일부가 중복되어 다음 7권이 본심대상이 되었다.

고두현 『늦게 온 소포』, 김영무 『가상현실』, 박영희 『팽이는 서고 싶다』, 신대철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안도현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가나다순).

본심은 10월 17일 창작과비평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일곱 권 모두에 대한 위원 각자의 견해를 밝히는 가운데 3〜4권이 먼저 제외되었고, 다시 『가상현실』과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로 범위를 좁혀서 한동안 토론을 벌였다. 후자의 매력도 만만찮았으나 『가상현실』의 탁월한 성취를 기려 마땅하다는 데 전원이 쉽게 합의하였다.

 

 

심사평

 

申庚林 시인, 동국대 석좌 교수

김영무의 『가상현실』을 읽으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해본다. “일급수 아니면 살지 못하는/산천어 열목어 같은 암환자들”(「오늘의 예언자는」)로서 우리 앞에 닥친 위험을 제일 먼저 감지하여 이웃에 알리는 존재, 본질적으로 이것이 시인이 아닐까. 이 시집은 곳곳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슬기와, 환경의 오염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감각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맞이한 문명의 위기를 경고한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사막의 별밤」 혹은 「울루루를 꿈꾸며」처럼 자연의 아름다움과 황혼을 노래한 시들을 통하여 그 극복의 길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시집의 감동은 여기에만 연유하지 않는다. 「채마밭」 「봄처녀」 「바람 부는 날」 등의 아름답고도 활기찬 삶의 재구성은 오히려 그가 삶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 많은 시들이 시적 재기를 뛰어넘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데, 그가 삶을 대하고 시를 다루는 치열성 때문인 것 같다. 예컨대 「수술」 「가상현실」 「난처한 늦둥이」 등은 독자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삶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묻게도 만든다. 시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죽음의 세계를 예감하는 그에게 있어 시는 이미 말의 예술 운운에 그칠 수는 없을 것이다. 메타포가 어떻고 이미지가 어떻고 하는 소리가 그의 시에 이르면 다 헛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좋은 시란 어떠한 시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윤제림의 『사랑을 놓치다』는 시를 읽는 재미를 여간만 맛보게 해주지 않는다. 뛰어난 말재간 때문일 것이다. 일상적인 것에서 소재를 구하는데도 시가 천박하거나 뻔한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것도 바로 이 말재간이다. 길거리에서 바람에 날려다니는 비닐봉지를 소재로 한 「가벼운 안녕」이며, 친구의 초상집에서의 경험을 시로 만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또는 점쟁이가 된 옛애인을 노래한 「옛사랑」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시가 무겁지 않은 것도 큰 미덕이다. 연작시 ‘청산옥’은 짐짓 청승맞고 구질구질한 내용들인데도 시 한편 한편이 모두 깔끔하고 날렵한 것은 역시 무겁게 다루지 않는 탓이 아닐까 여겨진다. 하지만 이 시집은 전체적으로 시의 지향성 같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란 재미있고 읽기 좋으면 다인가,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가.

신대철의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도 끝까지 수상대상에서 제외하고 싶지 않은 시집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시가 다루지 않는 소재들을 다루어 신선하고, 시를 대하는 진지성도 높이 살 만하다. 무언가 좀 발빠르지 못한 느낌을 주는 대목도 없지 않으나 시를 통해서 그가 생각하고 고뇌하고 추구하는 것들은 크게 공감이 가는 것들이다. 방법이 전통적 또는 재래적이 아닌 것도 돋보인다. 하지만 좀 읽기가 뻑뻑하다.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예심위원들이 골라준 일곱 권 모두에서 얻는 것이 있어 올해도 심사의 즐거움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즐거움이자 보람은 김영무 시집 『가상현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을 확인받은 일이었다. 한 분의 적극적인 주창과 다른 한 분의 흔쾌한 동의 사이에서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한 표를 보태기만 하면 되었다.

이 시집은 제4부의 ‘장편 굿시’가 다소 밀도가 떨어질 뿐 1,2,3부 모두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그중에서도 암 선고와 수술 및 투병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담은 제1부야말로 백미이며, 그 체험과 이에 따른 깨달음이 2,3부의 성취에도 밑절미가 되고 있다. 충격적인 ‘선고’ 이후 오히려 “세상은 환해”지고 몇날 며칠 지속되는 지독한 통증이 “찬란한 불꽃놀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전혀 허세나 역설(逆說) 자랑으로 읽히지 않는 것이 희한하다. 아픔과 두려움은 그것대로 절절히 기록하면서 그런 일을 직접 겪지 않은 독자들도 공감할 삶 본연의 어떤 경지를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으레 그렇듯이 시인의 언어는 진부하고 고지식한 진술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이 환해지는’ 경험을 말한 시 「가상현실」에서도 정확한 표현은 “너의 세상은 환해진다”이다. 암 선고를 받은 나의 새로운 경험이면서 나와는 거리가 있는 ‘너의 세상’─

 

환하디 환한 나라

시간의 뿌리와 공간의 돌쩌귀가

뽑혀나간 너의 현실은 안과 밖 따로 없이

무한복제로 자가증식하는

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최첨단

암세포들의 세상

 

이다. 순명(順命)을 내세워 이것저것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찬미하는 생활은 아닌 것이다.

동시에 순명의 지혜가 기발한 시상과 결합된 시들을 거듭 만나게 된다. 「불꽃놀이」나 「마니피카트」 연작이 좋은 예이며, 「난처한 늦둥이」에서는 간병하고 투병하는 부부 사이의 은근한 정마저 느껴져 더욱 감동적이다. 어찌 보면 죽음은, 너무 일찍부터 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과 끝내 생각 없이 무명(無明) 속에 죽는 사람을 뺀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항상 ‘늦둥이’로 다가오게 마련인데, 시인은 “어이없게도 우리들 이불 속으로/파고 들어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갓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지혜와 기술을 터득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이 ‘난처한 늦둥이’는 이미 어느정도는 “순둥이로 자라 효도”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시집들에 대해서도 반가움과 고마움을 간략히 밝히는 것으로 심사평을 마치기로 한다.

『팽이는 서고 싶다』에서는 오랜 수난 끝에 되돌아온 저자의 시심이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는 다른 의미로 오래 방황하고 침묵했던 시인이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역시 한동안의 침묵 끝에 나온 시집인데, 아직은 시로의 귀환이 온전히 이루어진 느낌은 아니나 고무적인 바 있었다. 그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의 경우는, 타고난 서정시인이면서도 너무 쉽게 쓰는 게 아닌가라는 염려를 더러 갖게 하던 이 시인이 한층 밀도높은 언어를 선보인 것이 그야말로 고무적이었다.

고두현, 윤제림 두 분의 시집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게는 발견의 기쁨이 주가 되었다. 특히 『사랑을 놓치다』는 여유 속에 긴장을 놓지 않는 솜씨가 탁월한 훌륭한 시집이다.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 있고 꼭 상을 주어야 할 작품이 있다. 잘 쓴 작품이 있고, 잘 썼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기운이 드러나는 작품이 있다.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라면 예심을 통과한 일곱 편의 시집이 모두 거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고두현의 시집 『늦게 온 소포』는 말이 순탄하고 표현이 명확하여 읽기에 편하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재빠르고 거기에 대응하는 시어들도 날렵하다. 그런데 읽는 사람의 눈을 오래 붙잡아두게 하는 응집력 같은 것이 아쉽다. 이는 시편들의 상당수가 여행기의 형식을 띤 계기의 시라는 점에도 원인이 있을 것 같다. 시가 일종의 탈출이라면 여행은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탈출이 아닐까.

안도현의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는 이 시인의 시집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집이라고 평가된다. 이 시인은 어디서나 타고난 재능을 잘 이용한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에서도, 어떤 하찮은 풍경에서도 적절한 주제를 발견하여 반듯한 시를 만들어낸다. 적절한 의성어와 의태어가 늘 생동감을 준다. 그런데 이 생동감이 생각을 그 자리에서 끊어버리기도 한다. 읽는 사람은 시가 좀 덤벼들어주기도 바랄 것이다.

일곱 권의 시집 가운데 기교가 가장 출중한 시집을 고르라고 한다면 아마도 윤제림의 『사랑을 놓치다』를 골라야 할 것이다. 시가 어떤 주제를 다루건 적확한 비유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말이 알맞은 속도를 얻어 가볍게 풀려나간다. 그렇게 풀려나가던 말이 갑자기 뒤엎어지며 높은 흥취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시집을 다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시인의 기가 약한 것이 아니라, 기교에 밀려 기가 전달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박영희의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는 아름답고 진솔하다. 긴 노동운동과 감옥살이의 기억을 이렇게 생생하면서도 균형있게, 의지와 유머를 동시에 유지하면서 읊어내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시어들은 진지하지만 따뜻하고, 높은 열기를 전하면서도 투명하다. 비슷한 주제나 소재를 다룬 시집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집이라는 것이 내 개인의 생각이다. 그런데 너무 늦게 나온 시집이다.

허수경의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는 그가 앞서 발간했던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나 『혼자 가는 먼 집』과 비교된다. 새 시집에서는 생동하던 감정이 가라앉았고 도발적이었던 언어들도 기세를 낮추었다. 대신 사고가 더 진지해지고 그에 따라 말들도 지적으로 운용되어, 이 시인에게 또다른 재능과 깊이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남은 것 같다. 시구들은 때로 필요 이상으로 난해하고 시집 전체에 통일성이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신대철의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는 의기가 가득하다. 이 시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극도로 가난하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횡포함을 물질적으로 뼈저리게 느끼는 산간 농민들의 삶을 다룬 시편들을 담고 있으며, 뒷부분은 조국의 북녘에서 온 사내를 극지의 혹한 속에서 만나 분단조국의 비애를 절감하는 시편들을 담고 있다. 사실성을 높이 확보하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거침이 없다. 그러나 늘 간명하지 못하고 같은 말들이 자주 중복된다는 것이 이 시집의 약점일 것이다.

김영무의 『가상현실』은 우리 시대에 발간된 가장 거대한 시집에 속한다. 부피도 부피이지만, 주제의 폭이 넓고 그에 대한 사고의 깊이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 시대의 문화적·정치적·역사적·사회적 병고를 적확하고 기민하게 파악하고 분석할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신병에서 오는 비애를 통해 그 표현의 ‘육체’를 얻어낸다. 한 학자의 지식이 한 시인의 시정으로 되는 계기를 이 시집에서 읽을 수 있다. 결심 과정에서 한 심사위원이 “한 사람이 시인이 되려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던 말을 여기 적어둔다.

새삼스러운 말이 될지 모르나, 작금의 우리 시가 혼란에 빠져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일곱 시집을 찬찬히 읽으면서 얻은 감회이다.

 

 

 

수상소감

 

늦깎이 신인의 오래된 미래

 

김영무

 

 

 

커다란 영광입니다. 처음 수상소식을 듣고 백석(白石)이라는 귀한 이름이 붙은 과분한 상이어서 과연 이 영광을 선뜻 받을 자격이 있는지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송구스러움이 조금 진정되면서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이왕 기뻐하려면 내친김에 흠뻑 취하는 것이 오히려 도리라면 도리인 듯싶어, 취흥에 몸을 실어서 몇마디 소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땅의 문학마을 시동네에 제가 주민등록을 신고한 과정에는 남다른 바가 없지 않습니다. 나날이 가위눌린 악몽의 연속이었던 70년대 중반에 삶의 쇄신과 희망과 구원의 가능성을 저는 오직 문학에서만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심자의 열정과 용기로 거칠기 짝이 없는 글들을 문학평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가뭄에 콩나기로 드문드문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에 그때까지의 평론활동을 『시의 언어와 삶의 언어』라는 책으로 정리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 방문교수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합법적·비합법적 광란과 난폭의 세월 뒤에 이국땅에서 갑자기 찾아온 평온과 질서가 안겨준 것은 한동안의 무기력증이었습니다. 비유컨대 폭풍의 바다가 느닷없이 고요해지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심해의 온갖 열대어와 산호초의 경이로운 세상이 거대한 인공수족관 속의 풍경인 것만 같아 현실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의 현실과는 절대로 무관한 것만 같았습니다. 허공 위를 허정허정 디디며 무기력하게 떠도는 이 경이로운 현실이 별유천지 비인간계가 아니라 바로 내가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가는 삶의 실제 현장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분명 사건이었습니다.

토론토 서북 교외 끝없이 펼쳐진 사과 과수원 지대를 지나 어느 가을날 한 수도원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담한 성당문을 밀치고 들어서던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는가 싶은 순간, 무엇인가가 제 머리를 강타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아찔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힌 것은 중앙제대 뒷벽에 걸려 있는 거대한 십자가의 기이한 형상이었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가시관을 쓰고 피흘리는 젊은 초록별 지구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훼손되기 이전의 아름다운 창조질서를 지금 이 순간에도 엄연하게 보여주는 심해 풍경의 현실성과,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는 지구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겹쳐지는 이 사건 이후, 신기하게도 시가 저를 찾아오는 전례없는 경험을 자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남들 같으면 하던 일도 그만둘 50살 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첫시집 『색동단풍숲을 노래하라』를 1993년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진짜 늦깎이 시인입니다. 늙은 신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의 시는 아직도 처녀작입니다. 늘 그러기를 바랍니다. 첫시집에서 제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차별적 생명력의 짙푸른 풀밭에서는 어쩔 수 없이 추상화되어 원경으로밖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구체적인 풀꽃과 들꽃들 개별 존재의 눈부신 디테일을 그림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노력과 더불어 두번째 시집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1998)에서 역점을 두었던 것은, 신기한 것을 매순간 새롭게 만들어내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기본원리를 늘 새롭게 되풀이함으로써 오히려 그 창조성이 더욱 경이로운 민중언어의 전위적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해보는 일이었습니다. 홀로 있어서가 아니라 삼라만상과 함께 더불어 있어 비로소 상극상생하는 개별존재들의 눈부신 공생의 신비를,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더욱 호방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품어보려 애쓴 것이 세번째 시집 『가상현실』(2001)인데, 이런 노력을 대견하게 보아서 백석의 시적 성취를 기리는 귀한 상의 수상작품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기쁨의 취흥이 도도하다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저에게 있어 백석은 무엇보다도 진정성의 시인입니다. 사람살이와 역사와 자연에 대한 그의 시세계에는 티끌만큼의 천박함도 없습니다. 지극히 슬픈가 하면 한없는 기쁨이 넘치고, 침묵과 고요 자체인가 하면 시끌벅적한 인생의 온갖 소리로 가득 차 있고, 청빈낙도의 담백함 뒤에는 온갖 나물냄새·젓갈냄새·국냄새가 질펀하고, 향토색 짙은 낭만적 향수를 단호하게 제어하는 엄격성이 있으며 어린이의 천진성과 어른의 덕스러움이 한몸을 이루는가 하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따뜻함이 잔잔히 배어 있는 것이 제가 만나는 그의 시세계입니다. “별 많은 밤/하누바람이 불어서/푸른 감이 떨어지고/개가 짓는”(「靑1」) 그의 나라에서는 지금도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어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夏畓」)

 

이런 시세계에 근원적 친화력으로 이끌리고 있는 저에게 오늘도 백석은 ‘오래된 미래’입니다. 그리고 이 오래된 미래가 또하나의 가상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