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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대흠 李大欽
1968년 전남 장흥 출생.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상처가 나를 살린다』가 있음.
바람에 날리는 물고기들
이정우 기자를 기다리는 오후 물고기 한마리가 창에 빗금을 그으며 쌩─날아갔다 이기자는 오지 않고 나는 소주를 마신다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젖을 먹이지 않고 발로 찼다 짐승을 보는 나를 짐승으로 보는 소
송아지는 아버지가 주는 우유로 살아남았다 이기자는 오지 않고 비가 많이 내려 운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깜깜한 오후에 이기자를 기다린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다섯살이 더 많다 아이가 둘인 그는 어디서건 자동차 문을 잠그지 않는다 차문을 잠그지 않으면 불안한 나 내가 불안한 것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
캄캄한 어둠 사이로 어둠의 주름처럼 그가 온다 게으른 그는 빗속에서도 뛰지 않는다 나뭇잎에 빗방울 닿는 소리 들으며 술을 마신다 몸속 젖은 나무 이파리 몸밖까지 젖는다 다당다당 장고소리 잎새가죽 두드리는 물고기 비늘
이기자는 내게 술이 과하다고 말한다 새벽 세시 저수지 옆 정자에서 소주를 마신다 비가 내린다 저수지는 추억의 구리거울 흐린 거울 속에는 별이 없다 인간의 비극은 명징하게 자신을 볼 수 있는 수은 거울이 있고부터인지도 모른다 저수지에 연꽃을 심어볼 생각을 한다
연꽃 오면 흐려지리라 뿌리 아래 늪을 기르는 연꽃 나는 저수지의 애인이 아닌데 저수지 밖에서도 저수지만 보인다 바람에 날리며 물고기떼가 몰려온다
염소떼가 달려간다
나무가 나무이기까지는 계속해서 자라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전신주는 그래서 나무가 아니다 소나무숲으로 염소떼가 달려간다 염소들은 맨 앞의 염소를 믿는 버릇이 있다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편견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힘차게 달려가는 염소들 중 한놈을 고른다 그러나 저 놈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예측가능한 삶이란 이미 죽은 자의 것이다 살아 있는 염소떼가 달려간다 검은 몸의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무리 속에서 한마리를 잡는다 몸이 묶여 허공에 매달린 염소 일종의 휴거다 살아남은 자들은 뿔을 앞세우고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간다 우리 모두 절벽을 향해 달려가버릴까? 종말론 속에는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들어 있다 염소떼 지나간 뒤 꺾인 소나무 가지에 눈물 같은 수액이 맺힌다 생의 마디마디 눈물 아니더냐 상처에 대한 기억으로 저 나무 더 많은 솔방울을 달지도 모른다 염소떼가 달려간다 염소의 털에 묻은 풀씨들이 달려간다 바람이 불어간 쪽으로 댕댕히 꽃머리를 세운 개망초 쑥부쟁이 희게 날리는 억새의 꽃들은 뜨거우리라 바람은 한사코 잎사귀의 문장을 읽고 가고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염소떼가 달려간다
불온한 내력
맹감덩굴이 많은 숲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갈퀴나무를 하러 자주 왔던 곳 무덤만 즐비하다 자벌레 한마리 가던 길 끝에서 머뭇거린다 나는 여기서 끝났을까 몸을 구부리는 벌레의 물음표, 나는 물것의 사상을 모른다
계곡은 낮아지며 깊어진다 나는 송피를 먹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구루마를 타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나의 세계관 가을이여 기억의 힘으로 타오르는 붉은 잎새들이여 당대는 괴롭다 소나무 뿌리가 박힌 버려진 무덤에서 누군가가 나올 것만 같다 신화가 된 선조들 문득 낯선 사내 하나 말을 타고 나오면 아으 다롱디리 노래를 할까
해가 지더라도 저 석양의 이빨에 한 사흘 물렸으면
占으로 씨 내리는 가을 저문 숲에서
나는 너의 인생에 의무가 없다 아들아
고집불통의 조상들은 끝까지 절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