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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
개방화 속의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국제학부 교수, 경제학. 저서로 『중국의 농촌개혁과 경제발전』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산업과 정책』(공저)이 있음. ilee@hanshin.ac.kr
1. 시작의 실마리
<장면 1> WTO 농업협정에 따라 한국도 매년 국내보조금 감축 의무를 이행하고 의무수입물량(MMA)을 확대해왔다. 국내 쌀생산이 증대되는데 쌀소비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쌀 재고물량 감축을 위해 북한에 쌀 보내기가 시도되었으나, 주요 언론의 비판에 직면하여 무산되었다. 농림부장관 자문기관인 양곡유통위원회는 추곡수매가를 전년보다 4〜5% 인하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농민단체들은 강력히 반발했고, 마침내 정부는 2001년 12월 4일 추곡수매가를 동결하기로 했다. 이에 양곡유통위원회의 소비자 및 학계의 일부 대표들은 위원직을 사퇴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19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직접적 생산자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진보를 위한 것이자 경제학의 임무”라는 가르침에 가슴 두근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그때 초심을 되살려 ‘하강분해’중인 농민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노동자·시민·기업가를 설득해야 하는가?
주어진 조건·환경 등을 감안하면서 실행가능한(feasible) 대안, 새로운 ‘생각의 집’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 ‘민족경제론’은 그 일국경제·축소균형의 지향이 수정된다면 매우 의미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 경제학사에서 ‘민족경제론’만큼 ‘단계론’(경제정책론)의 방법론적 문제의식을 지닌 경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국민국가적 시장이 전지구적 시장으로 이행하면서 자본이 국민국가를 공격하고 노동과 직접 상대하려고 하는 싯점에서, 민족경제론의 합리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경제’의 의미는 새롭게 규정될 수 있다.1
이 글에서 논의하는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는 아직 현존하지는 않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국민경제를 정의한다면 18세기 이래의 국민경제나 1945년 이후의 국민경제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시장과 교통하는 국민경제·민족경제로 외연을 확대하려 하면서 지역경제의 내포를 충실히하려는 경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상하는 국민경제는 ‘국민경제·민족경제·지역경제’이다.
이제 세계시장, 국내시장, 국제경제기구, 국민국가, 동아시아, 민족분단, 계급·계층, 지역사회 등 미궁처럼 얽힌 경제문제들에 새로이 접근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식량과 에너지를 스스로 공급할 수 없는 작은 나라라는 것, 또 내수시장만으로는 안정된 소득과 고용이 보장될 수 없어서 수출시장이 필수적이라는 것, 따라서 세계화 또는 개방의 문제가 주어진 여건이라는 것.
둘째, 경제위기 이후 일본을 필두로 하는 ‘기러기행렬’ 형태의 동아시아 분업구조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다는 것, 세계 각국 제조업의 중국 진출 열기가 뜨거우며 한국의 기업들에도 중국 붐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 한국 제조업의 중국 진출로 한국경제에서 제조업은 사라지고 써비스업만 남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는 것.
셋째, 보수진영에도 진보진영에도 남북간 분단문제를 무시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종국에는 이의 해결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 국제관계 또는 남북관계의 환경 악화가 북한의 개방정책 지연, 경제실적 악화, 북한의 체제 경색으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관계 악화를 가져오는, 이른바 ‘분단의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
2. 드높은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장면 2>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확신하며 로마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다. 로마제국은 명장 베스파시안을 파견하여 유대의 도시들을 장악해갔으며 그의 아들 티투스는 서기 70년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그 과정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대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최후의 항전은 3년 뒤 마사다 요새에서 이루어졌다. 마지막 남은 960명의 남자·여자·아이 들은 로마군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전원 옥쇄하였다.
개방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개방화의 압력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매우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종래의 국민경제의 역할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다. 혹은 그 성장의 자연적 결과로(성장동기이론), 혹은 그 독과점적 성격 때문에(산업조직이론), 그리고 연구개발·마케팅·지식 등을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불완전한 경우 이들 거래를 기업 내부화하기 위해(내부화이론), 직접투자를 늘리고 전략적 제휴를 추진한다. 이제 초국적기업은 전세계에 입지를 두고 생산을 하며 세계시장을 대상으로 마케팅활동을 벌인다. 또 1980년대의 ‘금융혁신’을 통해 국민국가 단위의 금융규제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그리고 신기원을 이룬 정보기술의 혁신에 기초하여 정보라는 ‘필수품’이 세계 각지로부터 공급되었다.
이러한 세계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 한편에서는 포트폴리오(분산투자)의 국제적 다변화를 통하여 위험이 분산될 수 있고, 개발도상국에 유입된 자본이 성장을 위해 투자될 것으로 기대한다. 각국 정부의 방만한 정책이 제어될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투자가 증가하여 생활수준이 향상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빈번하게 이동하는 금융자본이 돌연한 열광이나 공포에 의해 몰려다니게 됨으로써(herding) 오히려 위험이 증대될 수 있으며, 세계시장의 왜곡으로 부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기 어려워지는만큼, 세계화가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경상수지 악화와 거품 형성으로 귀결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사전에 위기를 억제하기보다는 사후적 처방으로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정책자율성의 제약 때문에 분배구조가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2
이러한 두 가지 관점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경제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범세계적인 조절양식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계시장의 실패를 교정하고 불공정한 거래 행태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차원의 조절양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정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국민국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자율성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는 영원히 오지 않을 ‘대동(大同)’세계의 꿈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WTO로 대표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는 후진국들을 더 확실히 세계체제에 편입시키는 한편, 자신들 이외에 강력한 국민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선진국, 특히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과두체제를 제도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데는 힘의 논리가 크게 작동한다.
그러나 국제경제질서가 단순히 미국의 이익만을 관철시키는 일원적인 구조로 편성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우선, 국제기구들의 입장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특히 WTO는 1국 1표의 원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볼 때는 전례없이 민주적인 국제조직이다. 물론 WTO가 실제로는 강대국들 위주로 운영되지만, 형식상의 제도가 강대국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측면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3
또 미국의 입장도 현실적으로 하나로 확정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방주의, 다자간 무역라운드에 적극 참여하는 포용주의, EU에 대응하는 지역주의가 중첩되어 있다. 따라서 뉴라운드가 표류하여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일방주의·지역주의가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발전단계의 격차가 크고 뚜렷한 정치적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주의의 흐름이 형성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미국·EU의 지역주의, 미국·중국 등 대국의 일방주의에 대응할 방책이 필요하다. 대체로 이는 국민국가의 역할을 개선하는 것, 이를 토대로 확대된 조절양식으로서의 민족경제 및 세계경제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세계를 향한 농성체제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롭지도 않을 것 같다.
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하다
1997년 말 발발한 경제위기 이전까지 한국경제는 다른 개발도상국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극적인 성과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지속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면서 급속하게 공업화를 달성하고 산업구조를 고도화했다. 또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정성을 수반한 성장(shared growth)을 이룩했다. 세계은행은 이를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칭송한 바 있는데,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동아시아 모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변하였다. ‘기적’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는 합리적 경제정책, 정부의 시장에 대한 선택적 개입, 경제발전과 공업화를 촉진한 제도·조직 등 여러 요인은 ‘재고’(rethinking)되어야 했다.4
‘기적’에서 ‘붕괴’로 이르게 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인이 거론되었다. 첫째, 국제단기자금설 내지 유동성위기설(liquidity crisis), 둘째 국내 금융제도의 취약성과 금융시장의 미발달, 셋째 가족에 의해 지배되는 대기업의 기업지배구조의 취약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은행은 당초 단기적인 자금수급의 불일치에 주목했으나, 후에 금융제도와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좀더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기업활동에 관한 법률과 회계·감사제도를 포함한 금융제도 개혁을 강조하게 되었다.5
위기의 원인으로 동아시아의 제도적 후진성을 제시하는 논의에 대해, 이는 선진국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경제학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 대내적인 기업개혁·금융개혁의 불필요성에 대한 근거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또 위기의 원인을 외국자본 또는 국내재벌의 어떤 ‘의도’와 연결시키거나, 대내적 개혁이 외국자본 및 국내재벌의 이해관계에 모두 부합한다고 보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기업개혁과 금융개혁은 한국경제를 운용하는 핵심주체들에게 책임성과 상호감시 및 규율을 민주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개방이 전제될 경우, 시장의 제도와 계약과 규칙에 의한 강제가 민주적 책임성이 발휘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가예산 사용시 관료들의 책임과 규율이 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정책들이 세밀하게 추진되기 위해서는 정책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사회적 하부구조가 구축되어야 한다. 또 국가정책의 수립과 효과적 실행을 위해서는 관련정보씨스템을 구축하여 활용하고 대민써비스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업무의 우선순위 조정을 위한 인쎈티브씨스템을 도입하고 평가 및 승진씨스템을 바꿀 필요가 있다.
물론 기업이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행하고 관료—금융—기업 등의 상호감시체계가 적절하게 작동한다고 해도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실물경제와 무관하게 발생한 위기가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범세계적인 자금이동을 차단할 수단이 강구되지 않는 한 위기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효과적인 국내 씨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금융세계화에 의해 발생하는 위기의 강도를 약화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소국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이로써 국가의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만든 후 새로운 환경에 유효한 산업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국민국가 차원에 제도와 규칙을 정비하는 자유주의적 개혁의 ‘과소’는 신자유주의의 ‘과잉’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경제에 참여하는 영역도 축소시킨다.6
3. 가파른 동아시아의 골짜기에서
<장면 3> 태공망(太公望)이 영구(營丘)에 봉해졌을 때, 그곳의 땅은 소금기가 많고 주민은 적었다. 이에 태공이 방직 등 부녀자들의 일을 장려하고 공예의 기술을 높이 끌어올리며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키니, 물자와 사람들이 마치 엽전 꾸러미가 꿰진 듯 수레바퀴 살이 중심으로 모여들듯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제(齊)나라는 천하에 관과 띠, 옷과 신을 공급하게 되었고, 동해와 태산 부근의 제후들은 옷깃을 여미며 찾아와 제나라에 경의를 표했다. (『史記』 貨殖列傳)
동아시아는 급변하고 있다
아까마쯔 카나메(赤松要)가 주장한 ‘기러기행렬 형태론’(wild-geese-flying pattern)은 원래 후진국의 무역정책과 공업의 단계적 발전의 상호관계를 제시한 것이다. 즉 세계경제는 국가를 기본단위로 하여 이질화(기술혁신)와 동질화(기술도입)가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후발국 내부에서는 특정 산업의 ‘수입→국내생산→수출→역수입’의 무역·생산 싸이클이 나타난다는 것이다.7
그러나 아까마쯔의 논의는 점차 아시아 역내 경제의 분업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인용되었다. 즉 아시아경제는 앞서가는 일본이 첨단·고부가가치 분야를 담당하고, 이어 NIES, ASEAN, 중국의 순서로 기술이전과 공업화가 이루어지는, 마치 기러기가 순서를 지켜서 비행하는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업구조와 발전패턴은 중국경제의 부상과 일본경제의 약화로 이제는 무너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지난 10년 동안 ‘디플레이션→기업실적 악화→실업증가→소득감소→소비침체’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장기불황 속에서 각 부문이 연쇄적으로 ‘축소재생산’되고 있다. 구조조정을 지연시킨 채 경기부양에 주력한 결과 정부 재정은 선진국 중 최악이다. 금리도 제로(0) 수준이어서 통화·금융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 없는 ‘유동성함정’에 빠진 셈이다. 이제 단기적으로 유효한 정책수단은 엔화가치의 평가절하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경제의 부진과 함께 막강한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 제조업의 위치도 조금씩 위협받고 있다.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부문이 늘어남에 따라, 중저가제품의 생산라인·마케팅조직뿐만 아니라 첨단산업의 연구개발 분야까지 중국 등으로 대거 이전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마쯔시따(松下)와 후지쯔(富士通)는 뻬이징에, 혼다(本多)는 꽝져우(廣州)에 연구쎈터를 발족시켰다. 또 소니는 우시(無錫)에 리튬2차전지 공장을, 세이코엡슨은 쑤져우(蘇州)에 액정표시장치 공장을 건립했으며, NEC는 샹하이의 반도체 공장을 확장했다.
한편 중국은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면서 일본과 NIES 제조업체들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의하면, 중국은 이미 일부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였다. 백색가전, 섬유, 신발, 발전설비, 플랜트 건설 부문에서는 이미 일본 등 선진국을 추월했다고 한다. 또 한국과는 철강 등 중화학공업이 5년 내에, 정보통신·자동차·석유화학·조선 등이 10년 내에 대등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10년 후 한국이 중국에 비교우위를 가질 품목은 반도체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8
미래에 대한 전망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간 중국의 고도성장은 매우 극적인 것이었다. 개혁·개방 이래 20년간 연평균 10%에 이르는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며,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후에도 7〜8%대에 이르는 성장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이로써 중국경제는 전체 규모 면에서 2001년 말 기준으로 이딸리아를 제치고 세계 6위가 되었으며, 2002년에는 프랑스를 추월하여 세계 5위가 될 전망이다. 게다가 2008년 하계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하고 143번째 회원국으로 WTO에 가입함으로써, 새로운 ‘기적’과 ‘신화’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일본·한국·중국 사이의 발전단계의 격차가 점차 줄어들자 동아시아에서는 특정 부문에 대하여 자금투입이 집중되면서 각국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종래의 수직적인 산업간 분업체계도 흔들리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경제는 그간 미국시장에 상당한 정도를 의존해왔다. 일본은 그간 수평적 분업체제 구축을 기피함으로써 대부분의 역내 국가의 대(對)일본 무역역조가 심화되어왔다. 하지만 수출선으로서의 미국의 역할, 수입선으로서의 일본의 역할이 앞으로도 유지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동아시아지역 내에서 완결적이고 협력적인 분업구조가 쉽게 형성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며, 따라서 세계적인 과잉생산의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은 현재 산업경쟁력을 제고하여 국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있다.
국가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간 동아시아에서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용인하는 경제씨스템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후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경제의 자유화와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강력한 국가의 존립근거와 경제개입의 수단은 약화되었다. 또 정부 주도 산업정책의 문제점이 부각되기도 하고, 신기술혁명에 따라 기술·기능과 경험축적의 중요성이 감소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와 기업의 관계, 기업지배구조, 기술형성체계, 노동시장 등을 미국형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제안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 자유주의적 개혁을 위해 국민국가와 민족의 이해를 우선하고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발전지향 국가(developmental state)의 목표까지 포기되어야 하는가. 기업개혁·금융개혁·정부개혁과 산업정책의 추진은 양립될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아직까지는 따라잡기(catch-up) 발전의 여지가 남아 있으며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9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용과 소득분배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한국은 경공업 발전을 통해 농촌에서 유출된 청년 및 여성 인력을 흡수한 다음, 중화학공업 발전을 통해 대중교육을 받은 남성 가장노동력을 흡수했다. 이들이 중산층에 편입되면서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발전을 포기하는 경우, 고용구조는 ‘사무직—생산직’ 중심에서 ‘전문직—써비스직’ 중심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제조업 발전은 여타 써비스업 발전의 동력이며 전문직과 써비스업의 고용을 창출하는 기초가 된다. 또 전문직—써비스직의 ‘좋은 일자리’는 양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둘째, 수출 문제이다. 한국의 경우 수출의존도가 높아서 세계경제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일정한 성장률을 유지하면서 수출의존도를 낮추려면 수출산업 이외의 부문이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성장 가능한 내수부문으로는 써비스·금융을 들 수 있는데, 이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제조업의 써비스업으로의 대체가 경제의 안정성에 기여하는가도 검토해야 한다. 세계경제의 불안정 속에서도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제조업의 고부가가치 부문에서 수출경쟁력을 지녀야 한다.
셋째, 기술 개발 또는 혁신(innovation)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기존의 자동차·철강·조선·가전 등 전통 제조업의 비중을 축소하고, 신기술 부문으로의 전환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로서는 한국경제 내부에서 발명(invention)과 혁신의 연쇄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한국경제가 비선형적 발전을 계속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직은 수입기술의 도입과 개량, 경험을 통한 학습, 누적적인 개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기업·종업원의 ‘능력’ 강화를 위한 활동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산업정책의 틀을 새롭게 짜야 한다
앞서 우리가 자유주의 자체를 위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개혁은 국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산업정책 개발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경제의 자유화·세계화 추세 속에서 국내기업을 업계단체로 조직화하고 정책금융 등으로 특정산업을 지원하던 종래의 방식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한국의 경우, 적어도 1997년 경제위기 이전에는 금융개방을 포함한 써비스·농산물 시장의 개방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취했고, 외국인 직접투자의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자본흑자국인 일본의 경우에도 미국의 압력을 단계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개방에 대처했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외국인투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고 서부 대개발 등으로 인해 외자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이 크지만, 과잉생산의 가능성이 있는 부문에 외자를 규제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10
때로는 상반될 수 있는 개방정책과 산업정책은 서로 적절한 수준에서 잘 조합될 경우, 개방이 산업정책의 효율성을 보장하고 산업정책이 개방의 폐해를 보완하는 선순환(善循環)을 가져올 수 있다. 단, 금융세계화라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개방과 산업정책이 국민국가의 생산력 발전을 담보하면서 결합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여전히 그 국민국가의 정책능력에 달려 있다. 이때 국민국가의 정책능력은 단순히 특정 전략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기업 내의 기술력과 경영능력, 기업간 전략적 제휴능력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산업간 구조변화를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보다는 ‘산업 내 구조변화를 통한 고도화 전략’이 중요해졌다. 전통 제조업이 그저 중국으로 이전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제조업 가운데서도 고부가가치 사업영역을 개발하고 그 입지를 국내에 두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산업영역을 혁신적으로 개척하는 전략(대기업과 벤처기업 사이의 역할분담)과, 숙련도 높은 근로자와 혁신된 신기술을 결합하여 기존의 제조업을 한 단계 더 진보시키는 전략(대기업과 중소부품기업 간의 역할분담)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경제의 전체적 관리·조정 능력, 즉 정부의 정책능력이 향상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의 핵심은, 민간기업이 주체적 능력(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각종 사회적 하부구조를 구축하는 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적 틀을 확립하고 정착시키는 일, 기술·환경·식량 등에 관한 국가적 아젠다를 만들어내는 일 등이 될 것이다.
4. 막히고 부서진 국토와 지역에서
<장면 4>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꾀어 소아시아에 있는 트로이로 데리고 갔다. 이를 징벌하기 위하여 그리스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그 유명한 트로이전쟁이 발발했다. 지루한 전투 끝에 연합군은 거대한 목마를 이용하여 트로이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싸움에서 승리하더라도 끝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연합군의 장군 아킬레우스, 아가멤논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오디세우스도 10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야 초라하고 늙은 거지의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민족경제 형성이 시급하다
북한은 종래 강제축적에 의한 막대한 투자를 통해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했으나, 1970년대부터는 내적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는 심각한 축적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써 남북한간 체제경쟁은 일단락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향후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일본·중국 모두 북한경제가 연착륙에 실패할 경우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그럴 경우 한국경제에도 치명적인 교란요인이 될 수 있다.
한편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경제의 규모 문제가 커다란 제약조건이다. 그간 북한은 자립적 민족경제를 강조하면서, 민족국가 단위로 재생산이 실현되는 경제구조, 자체의 현대적 기술, 자체의 견고한 연료·원료 기지, 자체로 육성되는 유능한 기술간부의 확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렀다. 그러나 자원과 국내시장의 제약 때문에 북한과 같은 소국 모형에서 자력갱생이란 목표는 당초부터 실현되기 어려운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은 석유·원자재·식량의 주요한 공급원과 경공업제품의 수출시장을 일거에 상실했고, 국가 전체가 ‘고난의 행군’ 대열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북한경제는 재생산구조를 회복하기 위해 축적의 원천을 새로이 외부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우선 북한경제가 국제분업구조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기 위한 외부여건이 그다지 좋지 않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마감되고 냉전체제가 해체되었으며, 다양한 발전단계가 혼재된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제 세계체계 속에서 집단적 상향이동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해졌으며, 수출을 통한 개별적 상향이동을 이루기에도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11
다음으로는 내부의 능력과 의사 문제이다. 새로운 축적의 원천, 즉 외자는 자금제공자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이 국가 차원에서 외자의 유입요인을 제공해야 한다.12 하지만, 현재 변화의 양상은 ‘제한적’이다. 아직까지는 집권적 계획씨스템 하에서 IT산업을 집중 육성하려 하고 농업에서 토지정리·종자개량을 강조한다든지, 종전과 같이 정신적 자극을 위하여 여러가지 캠페인을 벌인다든지 하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북한의 능력과 의사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북한 스스로의 제도개혁이 지연되는 가운데, 남한에서는 북한에 대한 ‘퍼주기’를 비난·방해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분단이 개혁·개방을 지연하고 개혁·개방의 지체가 분단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향후 남북한 양측이 부담할 기회비용은 누적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경제는 남북한 경제의 공존과 분업이 이루어짐으로써 발전의 안정성과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는 경제이다.13 이러한 민족경제 형성을 위해서는 그 한 축을 담당해야 할 북한경제가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이 용어에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어 오해되는 일이 없기를!─개선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종래 북한의 경제씨스템은 그 구성요소들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나름대로 견고한 체계였다. 그러나 축적의 위기는 전략 변경의 필요성, 제도·조직의 부분적 이완을 가져왔다. 이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압력이며, 그 영향이 전략, 기술, 제도·조직, 가치 등 씨스템 전반에 조금씩 쌓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경제씨스템은 복합적이고 점진적인 ‘적응적 진화’(adaptive evolution)의 도정에 들어섰다고 판단된다.
여기에서 ‘도미노 쓰러뜨리기’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는, 외부로부터의 자금·기술·식량의 유입과 농민시장의 확대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금 유입은 축적메커니즘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이는 농업부문의 가격결정 메커니즘, 자원배분방식, 경영조직 등의 재편을 촉진할 것이다. 또 외부로부터의 기술 유입은 종래의 동원에 의한 집약적 기술체계를 혁신하는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기술혁신에 따른 생산증대는 잉여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시장화를 촉진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편 시장의 확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 북한의 제도·조직은 정보처리능력에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댓가를 치르지 않고 편익만을 취하는 무임승차자(free rider)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농장의 경우, 특성상 쉽게 인쎈티브를 제공할 수 있고 모니터링 비용(monitoring cost)이 거의 들지 않는 가족농장을 도입하는 것이 중요한 대안이다. 사회화 또는 조직화의 수준이 높은 일부 집단농장의 경우 모니터링과 차등임금을 도입하여 기업조직으로 전환하는 방안도 모색할 수 있다. 기업의 개혁방향은, 첫째 모니터링과 차등임금 제도를 강화해 위계제(hierarchy)의 장점을 확대하는 것, 둘째 결정의 책임과 권한을 분산함으로써 기업구조의 합리성을 제고하는 것이다.14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경험한 바이지만, 민족경제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경제가 불안정해지면 민중의 일상적 생활도 파괴된다. 민족적 생활양식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구매력을 갖춘 인구 1억 정도의 경제권이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정체하고 있는 동안 중국이 크게 약진했기 때문에 환(環)황해경제권으로 북한이 편입되기에는 격차가 너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결사업이 순조로이 추진되고, 또 러시아 극동, 중국 동북지방이 북한과 함께 개발되기를 기대해본다. 이렇게 되면 북한의 지리적 위치가 더욱 중요해지면서 북한이 대륙경제권의 한 축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중국의 개방 초기에 외자도입과 관련해 화교네트워크의 역할이 컸던 것처럼, 북한도 한국 자본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제조업이 중국·베트남으로 이전되고 있는데, 그 방향을 북한지역으로 일부 돌리는 노력이 시급하다. 향후 몇년의 시간을 놓치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지 모른다. 남북한 모두 보이지 않는 시간과 경쟁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강화해야 한다
‘압축화된 공업화’(compressed industrialization) 과정은 ‘기적’이라고까지 불린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수많은 부작용을 구조화했다. 공동체적 기반의 지역사회가 붕괴되고 모든 다양한 가치는 성장지상주의로 일원화되었다. 국민국가와 기업 수준에서의 ‘관리’와 ‘경쟁’이 강화됨으로써 개인간에 지위 상승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가 40대 남자 사망률 세계 1위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극(一極) 집중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패배자가 되고 승리자도 안도하기 어렵게 되었다.
개발의 성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지만, 이러한 부작용을 해소할 씨스템은 아직 정착되지 않고 있다. 국민소득 1만 달러의 사회는 1천 달러 미만의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씨스템을 요구하지만, 그 씨스템은 3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과는 여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성공’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은 서유럽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후발국의 처지이며 발전의 단계도 낮은 편이다. 사회 전반의 ‘신뢰’ 수준이 낮기 때문에, 시장경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국가복지의 ‘전달’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분간 국가의 재정력 확대와 기업의 경쟁력 강화는 상반(trade-off)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한 점에서 시장경제의 사회적·제도적 하부구조를 갖추는 데 막대한 국가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더욱이 교육예산을 GDP(국민총생산) 대비 5% 이상으로 올리는 것, 사회복지예산을 정부예산의 20% 이상으로 올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과제이다. 현재 국가재정의 급속한 확대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국가경쟁력과 기업의 역동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경제개입을 좀더 규율화(regularization)하고 지역 차원의 자활적 복지를 강화하는, 종래의 동아시아 모델과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5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국민국가보다 좁은 범위의 ‘지역’ 즉 커뮤니티(community)이다. 지금까지 경제력은 계속 세계시장·국민국가·기업에 집중되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개인의 생활을 유지시키고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경제위기를 통해 여실히 폭로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력 집중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주민의 생활기반 일부를 분담하는, 공공성이 강하고 소규모로 분산된 부문이 새롭게 능력을 갖출(empowerment) 필요가 있다.
‘지역’은 지역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은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이며, 지역 스스로 저소득층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능력을 보유하여야 한다. 지역은 나름대로의 교육·훈련 체계를 확보해야 하고 자기 지역의 문화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16
나아가 ‘지역’은 따라잡기(catch-up)형 발전과는 다른 ‘또하나의 발전’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리라고 본다.17 ‘지역’은 공간적 범위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민을 기본으로 한 사회의 경제적 구성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역경제는 협동형 경제라고도 할 수 있다. 협동형 경제에서는 기본적으로 경제를 구성하는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 평등한 입장에 서고 서로의 이익을 존중한다. 이는 시장메커니즘을 배제하지 않지만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고에 입각해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오로지 비즈니스만을 추구하는 사람만으로 가득 찬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5. 개방화 속의 한국경제를 위한 구상
층층으로 쌓인 공간을 지나오고 보니 그 모습이 마치 3층 집을 닮았다. 마치 브로델이 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와는 반대 순서로 3층 집 비유를 전개해보자. 각 층에는 천장과 바닥으로 구분되는 공간이 있다. 맨 꼭대기 3층은 세계시장의 공간이고, 그 아래 2층은 국민국가·국민경제의 공간이다. 맨 아래 1층은 기업이라는 공간인데, 그것을 구성하는 자재는 자본과 노동이며, 대기업이라는 방도 있고 중소기업이라는 방도 있다.
먼저 3층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세계시장의 확대 또는 개방에는 필시 두 개의 얼굴이 있다. 세계화의 효과는 단일한 방향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므로 개방을 무조건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기러기행렬은 흩어지고 있다. 이제 산업간의 안정적이고 단계적인 분업구조가 해체되고 있으며, 한국·일본·중국이 거의 동일선상에서 경쟁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인데, 3층의 구조변화에 맞춰 어떻게 2층과 1층을 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제 2층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식의 과격한 논의도 있지만, 경제위기 후에도 경제회복과 수출경쟁력 향상을 위한 국가의 새로운 역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각 경제주체들이 ‘민주적 책임성’의 원칙을 구현하도록 제도와 규칙을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개방화 속에서 시장의 제도와 계약과 규칙에 의한 강제는 민주적 책임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가는 산업구조 전환의 비전을 제시하고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물론 국가부문의 책임과 규율도 강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3층구조의 골격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3층 집이 과연 안정적인가. 아무래도 맨 위층의 압력은 강하고 그것을 받치고 있는 2층과 1층은 힘이 부족하지 않은가. 3층에서 내리누르는 압력을 완화하고 분산하는 새로운 기둥들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2층과 3층 사이에는 민족경제와 동아시아 지역협력이라는 기둥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한의 분단은 한국경제가 국민경제로서 존재하는 데 매우 위협적인 교란요소로, 그에 따른 기회비용은 누적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또 남북한 모두 안정적인 내수시장을 확보하기에는 경제규모가 작다. 따라서 민족경제의 형성은 시장교란 요인의 제거와 내수시장 확대라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향후에는 국가간·기업간 전략적 제휴능력이 매우 중요해진다는 점에서 지역협력을 위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2층과 1층 사이에는 지역사회라는 기둥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의 경우 기업은 물론 국가도 개인의 복지를 보장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국가재정을 쉽게 확대할 수도 없고 또 확대의 효과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민의 생활기반 일부를 분담하는 지역사회가 강화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집의 모습은 2층과 1층을 수리하고 각 층 사이에 단단한 기둥을 세운 것이다. 그 집은 지붕과 위층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는, 비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러면서 양지바르고 바람이 잘 드나드는 튼튼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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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 대하여 이병천은 ‘국민경제와 민주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 박순성·김균은 ‘대안적 근대화 프로젝트 또는 민중적 민족주의’로 재평가한 바 있다.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편 『동향과전망』 2001년 봄호(통권 48호)의 특집 ‘박현채와 민족경제론’ 참조.↩
-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소개는 박복영 『자본자유화론에 대한 재고』, SIES Working Paper Series No.110, 서울사회경제연구소 2001 참조.↩
- Ha-Joon Chang and Peter Evans, “The Role of Institutions in Economic Change,” 성공회대사회문화연구소 콜로키움, 2001.4.↩
- World Bank, The East Asian Miracle: Economic Growth and Public Policy, 1993; World Bank, Rethinking the East Asian Miracle, 2000.↩
- World Bank, East Asia: The Road To Recovery, 1998; IMF, IMF-supported Programs in Indonesia, Korea, and Thailand: A Preliminary Assessment, 1999.↩
- 이는 동아시아와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동료들과 한국사회과학연구소에서 토론하는 과정에서 얻은 잠정적 결론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전병유 「외환위기 이후 국가-자본관계의 변화: 발전국가의 잔재와 새로운 시스템 모색」, 『동아시아 신흥공업국 경제의 변화와 국가의 역할 전환』, 민주사회정책연구원·성공회대사회문화연구소 2001 참조. ↩
- Kaname Akamatsu, “A Historical Pattern of Economic Growth in Developing Countries,” The Developing Economies, Preliminary Issue, No.1, March-August, Institute of Asian Economic Affairs 1962; 赤松要 「世界經濟の異質化と同質化」, 小島淸 外 編 『世界經濟と貿易政策』, ダイヤモンド社 1972.↩
- 유진석·박번순 「중국이 몰려온다」, CEO Information 제302호, 삼성경제연구소(http://seriecon. seri.org) 2001.6.27.↩
- 경제위기 이후에도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에는 ‘따라잡기(catch-up)형 공업화’ 이외에 선택의 길이 없다는 주장은 末廣昭 『キャッチアップ型工業化論: アジア經濟の軌跡と展望』, 名古屋大學出版會 2000에 상세히 전개되고 있다. 이의 기본논지에 대해서는 필자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 동아시아 산업정책의 여러가지 유형과 개방화 속에서의 새로운 재편방향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일영·전병유 외 『개방화 속의 동아시아: 산업과 정책』, 한울 2001 참조.↩
- 한국의 ‘성공’이 가능했던 국제적 조건에 대해서는 이제민 「전후 세계체제와 한국의 수출지향적 산업화」, 『한국경제: 쟁점과 전망』, 지식산업사 1995 참조.↩
- 새로운 축적의 원천, 즉 외자는 외국인 직접투자,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자금지원(공적 차관), 외국으로부터의 현물·현금 지원(사실상 무상원조)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이일영·양문수 「6·15 이후의 북한경제, 어디로?: 축적전략 변경 및 시스템 개혁에 대한 전망과 평가」, 『동북아경제연구』 제12권 제2호, 한국동북아경제학회 2001 참조.↩
- 재생산권의 범위를 한반도만으로 제한함으로써 발전의 안정성과 가능성을 축소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덧붙인다면, 우리는 민족경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서술에 동의할 수 있다. “남북간의 비교우위에 기초하여 경제교류를 점차 확대하고 이것을 구조화하면서 상호의존관계를 심화시켜 남북경제의 민족공동체 안에서의 수렴으로 한반도 범위에서 자립적 민족경제의 확립을 추구해야 한다.”(박현채 『민족경제이론의 기초이론』, 돌베개 1989, 384면)↩
- 북한 제도개혁의 다양한 방향에 관해서는 O.E. Williamson, Markets and Hierarchies, Free Press 1975에 기초하여 추론했다.↩
- 국가의 강제에 의해 목표를 실현하려는 사회보장 모델에는 지역사회와 다양한 기능집단의 활동에 대한 관심은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상호주의적 복지제도’(communitarian welfare regime)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모형의 특성은 나눔과 공용에 있으며, 복지 제공은 비강제적·상호적으로 이루어진다. A. Wagner, “Reassessing Welfare Capitalism: Community-Based Approaches to Social Policy in Switzerland and the United States,” Journal of Community Practice 2(3), 1995 참조.↩
- Claudia J. Coulton, “Poverty, Work, and Community: A Research Agenda for an Era of Diminishing Federal Responsibility,” Social Work 41(5), September 1996.↩
- 협동형 경제를 중심으로 한 ‘또하나의 발전’에 대한 문제제기는 白井厚 外 『現代の經濟と消費生活—協同組合の視覺から』, コ-ブ出版 199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