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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의 국제정치와 한국
윤영관 尹永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저서로 『전환기 국제정치경제와 한국』 『21세기 한국정치경제모델』 등이 있음. ykyoon@plaza.snu.ac.kr
1. 테러 이후의 세계경제
9·11테러는 세계정치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정치적으로는 냉전종결 이후에도 심심찮게 부딪치던 미국과 러시아, 미국과 중국 관계를 변화시켰고 국제정치의 미국 주도 경향을 강화시켰다. 경제적으로는 반(反)테러전쟁이 세계화의 흐름에 제동을 걸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왔으나, 오히려 미국·유럽·일본의 동반침체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정책결정자들로 하여금 도하개발아젠다(도하라운드)의 출범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특히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중국은 WTO에 가입함으로써 세계자본주의의 흐름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었다.
아프간전쟁의 조기 종결로 세계화의 진행은 크게 느려지지는 않았으나 경제적 세계화의 진전에 대한 안팎의 도전은 지속될 것이다. 사실 9·11테러도 세계화의 진행과정에서 탈락한 저발전상태의 아랍국가 내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었기에, 90년대 말부터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인간적 자본주의를 요구하는 반세계화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이미 반세기 전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19세기 후반 자기완결적 시장(市場)기능에 대한 유럽인들의 맹신이 사회적 통합의 해체와 함께 1차대전과 같은 대사건을 초래했다고 경고한 바 있다.1 그러나 이러한 서구문명의 경험에 대한 성찰적 경고는 도도한 세계화의 대세 앞에서 주목받지 못해왔다.
한편 세계화 현상이 전세계 차원에서 확산·심화되어가는 와중에서 역설적으로 지역주의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 오늘날 세계경제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에서는 2002년 1월 1일부터 유로화의 일상적인 통용이 시작되었다. 이는 물론 10년 전 마스트리히트(Maastricht)조약 체결에서 이미 내려진 결정이었고 3년 전부터는 정부·기업간 전자결제 등을 통해 유로화가 부분적으로 통용되어왔다. 유럽은 지역경제협력의 최고 단계인 통화통합을 거쳐 이제 명실공히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세계화의 원심력이 커지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주의의 구심력이 강해지는 세계경제의 동학(dynamics) 뒤에는 정치와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중립적’이라는 외형을 한 경제현상의 뒤에서 움직이는 정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세계경제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경제는 어떤 위상을 차지하며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의 역학관계는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는가? 그러한 와중에서 21세기의 분단 한국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2. 지역협력질서의 심화와 동아시아
유럽과 북미의 경우
유로화의 출범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마도 그동안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 실현을 방해해온 각 국가들간의 통화장벽을 해소한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로부터 출발해서 유럽연합의 모든 국가들을 거쳐 북쪽의 아일랜드까지 가면 통화교환 때마다 지불하는 수수료 때문에 원래의 돈 가치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이제 이러한 거래비용을 제거하고 시장의 범위를 확대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이나 일본 경제에 대항하여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 유럽 정치지도자들의 생각이다.
유로화 출범의 또다른 중요한 의미는 이제 앞으로 세계경제를 미국과 유럽이 공동으로 경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주로 세계경제를 운영해왔다면 이제는 유럽연합이 주도권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미국의 프레드 버그스텐(C. Fred Bergsten) 같은 경제학자들도 이 점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바꾸어 말해 동아시아권이 그들 경제의 활발한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의 주도적 운영에서 여전히 소외될 것임을 의미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유로화 출범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었다. 중국정부는 이를 적극 환영한다고 표명하였다. 중국은 유로화 출범을 그동안 경제적·정치적으로 패권적 지위를 누려온 미국에 대한 견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유럽과의 협력증진으로 미국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유럽과의 거래에서 환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일일이 유럽국가들의 통화로 결제하지 않고 미국 달러화로 해왔으나 이제 달러 대신 유로화로 결제를 할 수 있게 되어 달러에 대한 의존도도 낮출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지역경제협력 현상의 배후에 교차하는 정치적 고려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지역경제통합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유럽과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북미지역에 비해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다. 유럽의 지역경제통합 노력은 내부적으로 2차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 간의 평화정착의 한 방안으로 제안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형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냉전 세계전략에 힘입었다. 미국은 냉전이 시작되자 사회주의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경제적인 부흥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경제통합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마샬 플랜(Marshall Plan)과 같은 대규모 지원을 실시한 것이다.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의 형성에도 외부적인 요인이 컸다. 원래 미국은 다자주의 무역질서를 고수해왔으나, 1982년 새로운 무역라운드를 개시하는 데 다른 나라들이 협조하지 않자 지역주의 전략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1993년에는 멕시코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2001년 4월에는 캐나다 퀘벡에서 미주지역 34개국 정상들이 모여 2005년까지 미주자유무역지대(Free Trade Area of the Americas)를 출범시키자는 퀘벡선언문을 합의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자유무역지대 확산의 배경에는 이른바 일본식 자본주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국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식 자본주의는 서구 자본주의와는 다른 모습으로, 국가가 인위적으로 비교우위를 창출하며 여러 장벽을 통해 수입을 제한하고 수출을 장려하는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모습을 띠고 있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러한 ‘불공정한’ 일본식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 여러 자유무역지대 제안의 배경을 이루어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
동아시아: 구조적 어려움과 관심 고조의 배경
2차대전 이후 동아시아지역은 오히려 상호의존도가 낮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이 해체되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제 역내국가 상호관계에 의존하기보다는 역외국가들을 대상으로 무역 및 투자관계를 심화하는 경제발전 전략을 채택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한국·타이완 등은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형 모델을 채택하여 수출주도 산업을 발전시켰다. 이로써 동아시아국가들의 산업들간에는 상호보완성보다는 경쟁적 성격이 강화되었고 이것이 지역경제협력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게 만들었다. 그 결과 상당기간 동안 일본과 같은 역내국가들보다는 미국과 같은 나라가 이 지역의 수출상품을 흡수해주는 수요흡수자(demand absorber)의 역할을 해왔다. 정치적으로도 동남아지역을 제외하고는 주변국과의 다자간 안보협력관계를 형성해서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려 하기보다는 미국과의 쌍무적 협력관계에 의존하여왔고, 이 때문에 유럽과는 달리 지역 차원의 다자간 협력기구 모색을 위한 동기가 약했다.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 경험도 지역협력이 늦어지게 된 원인이다. 어떤 형태의 지역경제협력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피하게 경제강대국인 일본의 주도적인 역할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곧 과거 대동아공영권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이 과거사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아 다른 나라들이 일본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외에도 동아시아지역의 경제협력이 늦어진 데는 몇가지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채택한 발전모델 자체의 특이성이다.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한국·타이완 등은 언급했다시피 국가주도형 발전모델을 채택했다.3 그런데 기업에 대한 국가의 규제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지역간 경제통합을 가속화하는 초국가적 기업들이 충분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1986년 유럽단일화법안(Single European Act)이 채택되어 유럽의 통합이 가속화된 배경을 살펴보면 1980년대 전반 유럽대륙을 휩쓴 탈규제의 물결이 큰 작용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아직도 국가규제의 정도가 심하고 탈규제의 바람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WTO 가입은 이러한 탈규제의 과정에 긍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둘째로 유럽이나 북미지역과는 달리 동아시아지역에는 수요흡수자의 역할을 해주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독일, 북미지역에서는 미국이 역내 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수출상품과 써비스를 흡수해주는 수요흡수자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여러가지 형태로 주변국과의 협력을 위해 자국의 단기적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공공재(公共財)를 제공하는 리더국가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1994〜95년 멕시코 경제위기 당시 미국이 발벗고 나선 모습과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일본의 소극적인 모습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일본이 동아시아지역 역내국가들의 어려움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지원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위기가 한 단계 지나간 다음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정부나 국민의 의사와는 별도로 어떤 형태의 지역경제협력체를 주도해나갈 만한 객관적인 역량이 일본에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일본식 자본주의의 중상주의적 성격에서 비롯된 바 크다.
이처럼 지역경제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인 변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지역 국가들간의 경제적 상호의존도는 1985년 플라자협정(Plaza Agreement) 이후 심화되었다. 엔화 가치의 상승은 일본의 기업가들로 하여금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하게 했다. 1980년대 말에 가까워가면서 한국·타이완 등 신흥공업국가들의 통화가 강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이들도 일본의 뒤를 따라 동남아지역에 상당한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즈음 일본의 자본가들은 중국대륙에 눈을 돌려 투자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5년 이후 동아시아지역 내의 경제적 상호의존도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지역경제협력 심화에 대한 각국 정책결정자들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러한 관심이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냉전종식 이후였다. 국제관계에서 이념대립이 끝나자 이제 이념보다는 경제적 이익추구가 국가목표의 우선 순위로 자리잡게 되었고 경제적 차원에서의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지역 정치지도자들도 유럽이나 북미지역의 통합 경향에 대해 좀더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지역의 경제협력에 대한 관심 고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 사건은 무엇보다 1997〜98년의 동아시아 경제위기였다. 1994〜95년 멕시코 경제위기 당시에 발벗고 나섰던 미국은 1997년 여름 태국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은 채 소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는 이 지역 정치지도자들이 미국에 대해 실망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동아시아인들간의 협력에 대해 좀더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특히 동아시아 위기국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현존하는 미국주도의 국제금융씨스템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급격한 경제구조 조정과정에서 고통에 처한 나라는 오로지 채무국뿐이었고 책임을 나눠가져야 할 서구 채권은행들은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IMF는 이러한 국제금융씨스템의 불완전성과 불공정성을 대변하는 기구로 투영되었고, 이에 따라 아시아국가들간의 제도적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1997년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 아이디어나 최근 합의한 통화스와프(currency swap) 제안이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경제협력의 심화에 대한 관심이 이처럼 고조되고 최근 여러가지 자유무역지대 협정이 각국 정부들에 의해 체결되고 또한 제안되고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일본과 중국 간의 주도권 경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동아시아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변수들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중·일 간의 경쟁 양상은 향후 동아시아 지역경제 질서를 특징짓는 추가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 최근 1〜2년 사이에 진행된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전개와 논의 양상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3. 동아시아 지역협력 논의와 현황
AFTA와 중국-아세안 자유무역지대 합의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다자간 지역협력을 시도한 지역은 바로 동남아였다. 1967년 창설된 아세안(ASEAN)은 동남아국가들간의 경제적 이익과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지역경제협력체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냉전상황에서 이웃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거대세력의 위협에 대해 공동 대응하고자 하는 정치적 동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아세안의 6개 원가입국들─브루나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타일랜드─은 1992년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냉전종결 이후의 변화하는 상황을 반영하여 아세안 자유무역지대(AFTA)를 15년 이내에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러한 계획은 1993년부터 추진되었는데 원래는 2008년까지 완성하기로 했으나 1995년에 2003년까지 앞당겨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9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발생한 이후 1998년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다시 2002년 1월로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이 계획에 따라 아세안지역 무역의 96%를 차지하는 6개국은 공산품 및 농산품의 관세율을 0〜5%까지 낮추기로 했고, 뒤에 가입한 나머지 4개국은 2006년까지 관세를 5% 수준까지 낮추기로 했다.4 결국 2010년까지 6개 원가입국, 그리고 2015년까지 4개 신가입국들이 이 지역의 모든 수입관세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지역경제협력에 힘을 쏟아온 아세안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1997년 경제위기의 여파를 헤쳐나가기 위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고 특히 중요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위기로 흔들려왔다. 게다가 그동안 동남아로 향하던 해외직접투자들이 이들보다 임금이 낮은 중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한 예로 중국에서의 상품 생산비용은 인도네시아의 경우보다 30〜40% 저렴하다고 한다. 그 결과 2000년에는 아세안으로의 해외직접투자 유입이 전년보다 60% 이상 감소한 반면,5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해외투자의 70%에 해당하는 450억 달러가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세안국가들은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미국이 이 지역에 대한 개입을 지속해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이 더욱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을 해줌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정치적 발언권 상승과 WTO 가입으로 인한 새로운 상황에 어떤 형태로든 적응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특히 그들이 역점을 두어온 AFTA만으로는 경제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었다. 동남아국가들은 일본·미국·유럽으로부터 자본을 들여와서 전자, 기계 및 장비 산업을 발전시키는 대체적으로 유사한 발전전략을 추진한 결과 산업구조의 상호보완성이 약하고 역내 무역의 증가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 결과 아세안지역의 무역은 주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신흥공업국에 치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996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타일랜드 4국의 수출구조를 보면 신흥공업국이 32.7%, 미국이 23.1%, 일본이 12.6%이었고, 수입은 각각 22.3%, 16%, 31%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비중은 수출이 1.5%, 수입이 1.9%밖에 되지 않았다.6 게다가 최근 미국·일본·동아시아 경제의 침체로 이들에 대한 수출 증대는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남은 것은 WTO에 가입하여 시장개방이 진전될 중국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중국과의 자유무역지대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최근 대미수출이 감소추세였고 일본과는 무역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 통상분쟁의 조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중국은 앞으로 이 두 지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자유무역지대 합의에는 무엇보다도 아세안지역을 일본이나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이탈시켜 자국의 영향권 안으로 품어안고, 동아시아 경제질서 형성의 주도권을 선점하고자 하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판단된다. 중국과 아세안이 결합하면 17억 인구의 시장이 형성되어 유럽연합이나 NAFTA보다도 큰 규모의 경제협력체가 될 것이다.
중국은 2001년 11월 아세안+3회의에서 아세안과 향후 10년 내에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할 것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협상과정에서 중국은 아세안국가들에게 한국·일본과는 농업문제 때문에 언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수 있을지 모르니 자신과 먼저 협정을 체결하자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합의 발표 이후 지금은 한국과 일본을 향해서 문호는 개방되어 있으니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어오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물론 자신들이 이미 결정해놓은 조건들을 수용하라는 요구를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이고 그들의 정치적인 의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한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은 쿤밍(昆明)과 동남아지역을 철도로 연결하여 수송비를 절감하고 아세안 경제와의 본격적인 통합을 시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남중국철도네트워크 건설계획이 그것인데 이는 중국 쿤밍으로부터 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타일랜드·말레이시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철도로 연결하려는 것이다. 이로써 아세안에서 중국으로 완제품을 수출하는 경우 10%의 수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들이 실현되면 중국과 아세안의 경제적 통합과 정치적인 관계는 더욱 진전될 것이고 일본-아세안 관계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대응전략
한편 다자주의 세계화 질서 속에서 이득을 보아왔다고 생각하여 지역주의에 소극적 자세를 보여온 일본은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동아시아 지역과의 협력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특히 중국이 아세안과의 자유무역지대 합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자 일본의 언론들은 17억 인구의 중국-아세안 자유무역지대가 동아시아의 주도적인 경제권으로 성장하려 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무능력한 정치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비난했다. 중국이 아세안을 설득하는 동안 일본의 비전 없는 정치지도자들은 농민들의 보호주의 압력에 눌려 개방을 반대해서 선수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그냥 앉아만 있은 것은 아니다. 그동안 다자주의를 통상외교의 기본으로 삼아온 일본은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무역흑자가 갈수록 줄어들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NAFTA·EU·아세안 등에 둘러싸여 고립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이것을 쌍무적인 자유무역지대 체결전략으로 타개하려 노력해왔다. 그래서 2001년 10월에는 싱가포르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이제 멕시코·호주·캐나다·칠레·타이완 등과도 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과 아세안 간의 자유무역협정 합의에 대응하여 코이즈미(小泉) 총리는 싱가포르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에서 채택한 ‘포괄적 경제연대’(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의 모델을 아세안 전체에 적용하는 확대공동체 제안을 2002년 1월 14일 내놓았다. 기존의 아세안+3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그리고 중국까지 아울러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안보까지 포괄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framework)로서 서태평양공동체를 세워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정부의 대응책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주어야 할 아세안국가들은 1997년 금융위기의 여파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일본정부가 공적 개발 원조(ODA)를 더 늘려주기를 희망하고 있으나, 일본은 주지하다시피 10여년간의 장기적인 경제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이 지역에 대한 공적 개발 원조를 2002년부터 삭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게다가 산업구조상으로 상호보완성이 강한 싱가포르와 달리 인도네시아·필리핀·타일랜드는 농업부문이 상당히 크고 이들과의 자유무역지대 추진을 위해 관세를 낮출 경우 일본 농민들의 강한 저항이 우려되고 있다. 아직도 농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일본에서 코이즈미정부가 과연 대외적인 비전의 실천을 위해 이러한 저항을 물리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일본 엔화 가치의 급격한 하락과, 이에 대해 위안화의 평가절하를 고려할 수도 있다는 중국측으로부터의 비판도 일본의 대외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일본정부는 대의명분을 외치기에 앞서 엔화 하락으로 주변국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나 막으라는 중국측의 힐난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한 미국의 태도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1990년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Mahathir) 수상이 동아시아국가들로만 구성되는 경제협력체(East Asian Economic Caucus)를 제안했을 때, 미국은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2001년 중국과 아세안 간의 자유무역지대 합의안이 발표되었을 때 어찌 보면 과거 마하티르 제안과 비슷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침묵을 지켰다. 그 대신 일본이 동아시아만이 아닌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까지도 포함하자는 새로운 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뒤로 빠지고 일본이 중국에 대응하여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4. 한국의 전략적 선택
남북경협을 통해 북으로
이와같이 새로운 동아시아 경제협력질서의 형성을 놓고 중국과 일본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가운데 이들 양국은 아세안을 향해 협력을 호소하면서 구애를 하고 있다. 물론 한국은 그러한 경쟁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2001년 아세안+3 회의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그가 제안해 만든 동아시아비전그룹의 연구결과에 의거해 아세안+3 국가들간의 동아시아 자유무역지대 형성을 제안했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곧바로 아세안과의 자유무역지대 합의안을 발표하여 이러한 제안을 무색케 만들었다. 그리고 그후 국제정세의 흐름은 한국정부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아세안을 둘러싼 중·일 간의 경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처럼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지금 사방으로부터 포위되고 소외되어 있는 셈이다. 한국은 제쳐진 채 동의 일본과 서의 중국이 남의 아세안과 연결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인가?
당분간 한국의 대외전략 핵심은 남북경협을 통해 북으로 활로를 개척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인해 최근 2〜3년간 남북한간에는 해빙과 소통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남북한 경제협력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 이를 심화시켜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통일전략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역경제협력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경협 추진에 있어서 우리가 참고해야 될 역사적 선례가 있다. 그것은 2차대전 이후 적대관계에 있던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통해 경제통합의 길로 나섰고 이것이 양국간의 평화뿐만 아니라 결국 유럽 전체의 통합과 평화증진으로까지 확대된 경험이다. 1945년 이전 1세기 동안 세 번에 걸친 대(大)전쟁을 치렀던 프랑스와 독일은 분쟁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석탄·철강과 같은 전략물자의 공동생산 및 관리체제를 추진했다. 경제통합으로 정치·군사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베네룩스 삼국 등 다른 나라들이 포함되고 농업과 같은 경제부문에까지 확대됨으로써, 결국 오늘날의 유럽연합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남북한 경제통합을 통한 민족경제공동체의 형성은 남북한간의 평화구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에도 중요한 정치경제적 이득을 제공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위한 유리한 국제적 여건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경의선과 경원선이 남북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중국과 시베리아 철도로 연결될 경우 이는 단순히 남북한 경제의 통합만이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 중심의 대륙경제권과 일본, 동남아 및 미국 중심의 해양경제권이 한반도에서 접목·통합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한 경제통합을 통해 주변 강대국, 즉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에 경제적 이득이 돌아갈 수 있고, 한반도는 이를 계기로 과거의 분쟁지역에서 동북아의 중요한 국제적 상업지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대륙경제권과 해양경제권이 한반도에서 통합될 수 있다면 마치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에 훌륭한 어장이 형성되듯이 한반도에 활발한 상업지대가 형성되어 우리 민족의 새로운 활로가 뚫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부는 현재 칠레와의 지역경제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인 지역경제협력체의 추진에는 대단한 정치적 어려움이 뒤따른다. 특히 자유무역지대 수립의 경우 그로 인해 타격을 받는 집단들의 강력한 반발이 우려되고 있다. 비교적 산업구조가 상호보완적이어서 정치적 반발이 적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한국·칠레 간의 자유무역협정마저도 포도농가 등 농민들의 반발로 지연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어려움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대외경제전략 차원에서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협력, 예를 들어 자유무역지대를 통한 제도적 협력을 추구하기보다는 그에 앞서 비공식적이면서 실질적인 경제적 이득이 크고 정치적 반발이 비교적 작은 남북경협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 경제통합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도 일부 여론의 반대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민족통일이라는 대의명분이 있고 국민적 합의도 웬만큼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남북경협의 심화를 통해 비공식적이면서도 실질적인 한반도경제권의 형성을 추진하는 것이 좀더 합리적인 전략적 선택이 될 것이다.
이처럼 남북한 경제의 통합은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의 지역주의화 및 블록화 경향에 대처하는 가장 우선적인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북아 국가들과의 공식적인 경제협력에 앞서 남북한 경제의 통합을 이룸으로써 향후 이들과의 지역주의 협상에 있어서도 좀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철의 씰크로드
이와같은 한국의 대외전략은 이른바 ‘철의 씰크로드’로 불리는 철도연결을 통해 더욱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에 대해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고 한국과 북한도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는 최근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전 구간에 걸쳐 광케이블을 깔고 열차와 컨테이너의 위치를 자동 확인하는 정보씨스템을 구축하여 좀더 안전한 화물수송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낙후된 극동지역과 시베리아를 개발하여 러시아 경제발전을 자극하고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유라시아국가가 되려 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 인구유출 문제를 해결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동북아지역에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증대하려 하고 있다. 철도연결을 통해 일본·중국·남북한 경제협력관계를 심화하고 동아시아지역 내에서의 역할과 위상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경의선을 통해 중국대륙을 거쳐 이르꾸쯔끄 등 중앙시베리아와 연결되는 중국경유철도(TCR)와의 경쟁관계를 의식하여 한반도종단철도와의 연결에 더욱 관심이 높다.7 중국은 중국 경유 철도를 통한 동북3성의 지하자원 수출과 서부 내륙지역의 개발을 기대하고 있다.
북한은 원래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의 연결에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유엔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가 아시아횡단철도(TAR)구상을 추진하자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아시아·태평양지역 개발사업의 하나로 아시아횡단철도 사업을 추진해온 ESCAP은 그동안 시베리아횡단철도 위주로 사업검토를 해왔지만 이제 경의선을 통한 중국횡단철도·몽골횡단철도·만주횡단철도 등의 연결도 함께 고려하여 각국의 써비스경쟁과 표준화 협의를 통해 더 나은 수송체계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한다.8
북한의 입장에서는 시급한 인프라구축 문제를 국제적 협력의 형태를 빌려 비교적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고 자국영토를 통과하는 수송화물에 대해 상당한 통과수수료 수익을 거둘 수 있겠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철도가 연결될 경우 북한은 2005년부터 연간 1억 5천만 달러의 통과수수료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9
북한과 러시아는 이와같은 상호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2001년 8월 6일 러시아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의 연결에 합의하였다. 아직 서로 다른 철도궤도 문제의 해소 등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재원조달 문제가 앞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남북한 및 러시아, 그리고 국제금융기구 등 간의 협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도 철도연결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한·러문제연구원의 평가에 따르면 한반도종단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연결될 경우 부산에서 유럽의 중부지역까지 20피트 컨테이너당 운송비를 해상수송비보다 300달러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10 부산에서 유럽까지 배로 40일 걸리던 수송시간도 철도를 통할 경우 15일로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철도연결을 통해 한국은 동북아 물류와 수송의 중심국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고 남북한 경제의 통합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냉전분단시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한반도가 이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상업 진출로로의 변화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이처럼 남북한간의 경제적 통합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극동에 한반도 중심의 새로운 상업지대 형성과 주변 국제정세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한민족 비전 실현의 첫걸음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유럽대륙의 열강들 사이에서 네덜란드가 상업과 물류의 중심지로 오랜 동안 평화를 누려왔던 것과 마찬가지다. 남북한 경제의 통합은 이처럼 안보적·국제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득을 가져오게 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조급하게 그리고 대결지향적으로 바라보는 대북정책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하루아침에 북한의 모든 전략과 태도가 뒤바뀌기를 요구하면서 경제협력을 위한 선행투자를 ‘퍼주기’라고 비난하기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경제통합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정치적 효과를 주목하며 인내해야 된다.
또한 네덜란드와 같은 개방적이고 상업중심의 평화국가를 우리가 꿈꾼다면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폐쇄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열린 민족주의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나 걸맞을 폐쇄적이고 감정적인 민족주의는 21세기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민족의 융성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의 활로를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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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Boston: Beacon Press 1957) 참조.↩
- C. Fred Bergsten, “Commentary: The Move toward Free Trade Zones,” in A Symposium sponsored by the Federal Reserve Bank of Kansas City, ‘Policy Implications of Trade and Currency Zones’(1991.8.22-24) 48〜52면.↩
- Chalmers Johnson,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2) 참조.↩
- 오늘날 아세안국가들간의 평균 상품관세는 1993년 처음 AFTA계획이 시작될 때의 12.76%에서 3.5%로 감소했다.↩
- Joshua Kurlantzick, “Is East Asia Integrating?” The Washington Quarterly (Autumn 2001) 26면.↩
- Lim Hua Sing, “Point of View: Advancing Regional Economic Integration Is Key,” Asahi Shimbun, 2002.1.11.↩
- 이재영 「한·러 운송협력의 의미와 전망: ‘철의 실크로드’ 구상을 중심으로」, 『中蘇硏究』 통권 89호 (2001) 96면.↩
- ESCAP의 김학수 사무총장의 말, 『동아일보』 2001.2.7.↩
- 『중앙일보』 2001.2.12.↩
- Ten Yuri·권영갑 『유라시아 대륙횡단철도 발전방향』(한·러문제연구원 1999.9) 17면; 이재영, 앞의 글 97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