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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테러 이후의 세계와 한반도
동북아시아의 화해와 일본
와다 하루끼 和田春樹
일본 토오꾜오대 명예교수. 많은 저서 중 『한국전쟁』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등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음. 이 글의 원제는 「東北アジアの和解と日本」임.
ⓒ和田春樹 2002 / 한국어판ⓒ창작과비평사 2002
1. 소위 포스트 9·11사태와 우리
9·11 테러사건은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일파인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조직이 미국의 정책과 체제에 가한 공격이었다. 그 바탕에는 미국이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세계에 관해서 취해온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과, 거기에 기인하는 미국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무차별 살육이라 할 만한 규모로 행해진 테러에 대해 미국 대통령은 ‘테러는 미국적 가치, 즉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면서 미국 국민의 단결과 세계 여러 국가의 지지를 요청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에 대한 보복과 테러리스트를 돕는 국가에 대한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기술의 정수를 모은 미국의 군사력 앞에서 탈레반군이 분쇄되고 아프가니스탄을 유효지배(有效支配)했던 정권은 괴멸했지만, 빈 라덴을 위시한 테러리스트들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세계로 흩어진 것처럼 보인다. 뉴욕의 테러로 3천 수백명이 죽었지만 미국의 아프간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일반시민만 해도 벌써 그 수효를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 바 있다. 난민이 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같은 시기 이스라엘은 자폭테러를 되풀이하는 하마스(HAMAS)를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아라파트정권을 테러리스트를 비호하는 탈레반정권으로 보는 논리를 펴며 미국의 작전을 본뜨려고 했다. 미국의 보복은 오래된 증오심을 북돋우면서 새로운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국가는 괴멸시킬 수 있어도 테러리스트는 군사행동으로 괴멸시킬 수 없다. 오히려 군사행동이야말로 테러리스트 예비군을 낳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프간에 있었던 알 카에다(Al-Qaeda)의 기지에서는 유격대 전투원이 양성되었지만, 미국의 비행학교에서는 테러리스트가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증오가 광신과 결부되면 테러리스트가 보통사회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증오의 세계화를 두려워해야 한다. 테러리즘의 기반인 증오감을 해소하지 못하면 테러리즘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타개와, 미국과 이슬람세계의 관계개선이 우선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 각 지역에서 그 지역 내에 존재하는 증오의 구조를 해소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미국은 반테러리즘 전쟁을 세계화하고 아프리카에서부터 동남아시아로까지 확대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어떤 역사를 열게 될지 그 결과는 미지수다. 최악의 씨나리오는 인류의 멸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슬람세계와의 관계를 변화시키도록 미국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가 속한 지역인 동북아시아에 존재하는 증오에도 눈을 돌리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증오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것이 남북한과 일본의 모순, 일본에 대한 남북한의 증오, 그리고 남한과 북한 사이의 모순과 상호간의 증오이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57%는 일본을 싫어하고 일본인의 56%는 북한이 싫다고 한다. 35년간의 식민지지배, 52년간의 내전·정전체제─남북한과 일본은 증오의 삼각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것을 해소하는 일이 1953년 이후 이 지역의 과제였는데, 월드컵 한·일공동개최를 눈앞에 둔 이 싯점에서 그것은 더욱 긴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글은 이 구조에 가장 책임이 있는 일본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또는 변화하지 않았는지, 현재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본이 1965년 이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요즘은 오히려 그전보다 나빠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만큼, 상세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2. 일본과 남북한의 관계─1980년대까지
일본은 1951년 쌘프란씨스코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패전국의 상태를 벗어났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방 여러 나라와의 강화(講和)로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전후 처리는 포함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타이완으로 도망친 국민당정부와 맺은 일화평화조약(日華平和條約, 1952)이었지만, 이 조약의 내용은 쌘프란씨스코조약만도 못했다. 보수본류(保守本流)에 속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정부는, 쌘프란씨스코조약에서 연합국에 대해 인정한 일본의 배상(賠償)지불 의무는 물론이고 그 조약에서 부과한 역무(役務)배상도 국민당정부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끼친 중국에 대해서 본래 자기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전후 일본을 만든 사람들의 최초의 얼굴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역사의 청산을 문제삼게 된 것은 1965년의 조약에 이르는 일·한교섭과정에서였다. 한국측은 일·한교섭을 시작할 즈음 식민지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한국병합(倂合)조약은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주장하며 청구권에 따른 지불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병합조약이 유효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청구권에 의거한 지불은 청구근거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립의 세월이 계속된 끝에 한국이 청구권 요구를 하지 않는 대신 일본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구(舊)조약의 무효에 관한 조약 제2조는, 합의된 영문텍스트를 양쪽이 자기들의 주장에 맞게 적당히 해석함으로써 매듭지어졌다. 한국 국민들이 이 조약에 저항했지만 박정희(朴正熙)정권은 반대를 누르고 조약체결로 나아갔다.
그러나 한국 국민의 비판의 목소리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시이나(椎名) 외상은 가(假)조인차 방한했을 때 공항에서 “양국의 오랜 역사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고, 또 가조인 후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과 함께 발표한 공동성명서에, 이장관이 “불행한 관계”에서 비롯된 “한국 국민의 대일감정에 대해서 설명”한 것에 대해 시이나 외상이 “(그런 점에) 유의할 것이며, 과거의 이런 관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유감’이라는 말은 아쉽다는 뜻으로 사죄의 뜻은 없다. 또 무엇이 유감스럽고 무엇을 반성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실제로는, 병합이 조약에 따라 합의해 이루어진 것인만큼 사죄도 반성도 보상(補償)도 필요없다는 것이 일본정부의 정식입장이었으니 시이나의 발언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 조약에 반대하는 혁신계의 대중운동이 일어났지만, 노동단체의 주장은 이 조약이 일·미·한의 군사동맹으로 발전해서 일본이 한반도의 전쟁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면 당시 일부 역사가들 중에는, 이 조약이 예전의 식민지지배를 합법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다시 초래하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소수파의 의견은 뒤이어 일어난 베트남반전운동과 함께 퍼져나갔다. 미국의 전쟁에 가담하는 일본의 입장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돼서, 일본의 현재와 과거의 가해책임을 묻게 된 것이다. 1968년에 고조된 전공투(全共鬪)운동과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으로 대표되는 베트남반전시민운동, 그리고 신좌익 당파의 운동은 이런 점에서 공통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절정기에는 일본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들이 대학당국을 비판하는 스트라이크를 하고 있었는데, 선량한 청년과 시민은 다 베트남전쟁 반대시위에 참가한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전공투운동은 대학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국주의 대학의 해체’를 외치다가 옥쇄했다. 신좌익운동은 1969년 초를 정점으로 해서 하강하기 시작했고 부분적으로 위험한 공전(空轉)을 시작했다. 70년에는 적군파(赤軍派)가 JAL 요도호를 공중납치해 북한으로 망명했고, 전공투운동의 참가자들은 급속히 사회와 화해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타나까(田中) 수상, 오오히라(大平) 외상의 이색적인 보수본류 콤비가 1972년 닉슨(R.M. Nixon)의 중국방문을 기회로 삼아 일·중 국교수립을 추진했다. 뻬이징정부는 일화평화조약의 파기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배상청구를 부득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통해서 중국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쳤던 것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깊이 반성한다”고 역사에 대한 반성을 처음으로 공식 표명했다. 전쟁이 끝나고 27년 만의 일이다. 중국혁명의 박력이 일본정부에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68년 이후의 운동이 일본사회를 흔든 결과도 여기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중 화해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북한이었다. 김일성(金日成)은 “닉슨이 백기를 들고 뻬이징으로 간다”고 표현하고 1972년에 7·4남북공동성명을 냈다. 한국전쟁 이래 적대해온 남북관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남북특사의 상호방문은, 북측에는 남한의 경제달성에 대한 초조감을 안겼고, 남한에는 유일사상체계가 헌법화된 북의 정치체제에 대한 대항의식을 낳아 유신쿠데타로 향하게 만들었다. 이때 한국에서는 야당지도자 김대중(金大中)씨가 망명을 결심해서 저항의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고 1973년 8월 김대중씨는 KCIA에 의해 토오꾜오에 있는 호텔에서 대낮에 납치되었다. 일본 국민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김대중씨의 모습, 탄압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한국인의 모습을 처음 봤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운동은 베트남반전시민운동 관계자가 다수 참가했고, 74년의 민청학련(民靑學連)사건 이후에는 시인 김지하(金芝河) 등의 구원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대중적 운동이 되었다. 일한연대연락회의와 ‘김지하 등을 구하는 모임’의 아오찌 신(靑地晨), 오다 마꼬또(小田實), 와다 하루끼 등이 사회당·공산당·공명당 3당의 수뇌와 의논해서 9월 19일 3만명의 대집회와 시위를 실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밖에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나까지마 마사아끼中嶋正昭, 쇼오지 쯔또무東海林勤)의 활동도 지속적이고 활발한 것이었고, 잡지 『세까이(世界)』(야스에 료오스께安江良介)의 캠페인도 강력했다.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 쯔루미 슌스께(鶴見俊輔), 히다까 로꾸로오(日高六郞) 등 작가·지식인, 그리고 김달수(金達壽)·김석범(金石範)·이회성(李恢成) 등 재일조선인 지식인도 열심히 활동했다.
이런 운동 속에서 1975년 일한조약 10년에 즈음해서 일한연대회의는 일본과 조선의 역사를 다시 보고 일한조약의 문제점을 지적하려는 움직임을 명확히 보였다. 사할린에 연행되어 노동을 강요당하고, 전후 거기에 남겨진 조선인의 문제를 제기해서 보상을 요구하는 첫 재판도 타까기 켄이찌(高木健一) 변호사에 의해 이때 시작됐다.
같은 1975년에 베트남전쟁이 끝났다. 한국에서는 베트남 패전의 충격이 인민혁명당 관계자 8명의 처형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극에 달한 탄압정치에 대한 반발이 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저항으로 나타났고, 마침내 김재규(金載圭) KCIA부장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80년 5월 전두환(全斗煥)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나 광주시민의 저항이 탄압되고 김대중씨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대한 구원운동은 한국문제와 관련해 일본에서 일어난 운동 중 최고로 고조되었다. 일한연대위원회,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 ‘가톨릭 정의와 평화 협의회’는 긴밀히 제휴하면서 운동을 펼쳤고, 새로 태어난 시민서명운동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 마라’에는 다수의 젊은이가 참가했다. 기타 노동단체, 각지의 시민운동그룹 등도 전국적으로 열성적인 운동을 펼쳤다. 김대중씨의 운명에 대한 일본 국민의 동정이 높아졌고 오오에 켄자부로오,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郞), 마쯔모또 세이)오(松本淸張) 등의 작가도 적극적으로 일했으며, 이런 목소리가 스즈끼(鈴木) 수상이나 이또오(伊東) 외상 등에게도 감명을 주었다. 일본에는 박정희를 대신하는 정권을 옹립하고 싶어하는 세력도 있었고 김대중씨가 죽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인—『산께이신문(産經新聞)』의 시바따 미노루(柴田穗)—도 있었지만, 매스컴의 논조, 정부의 중추, 그리고 사회의 여론은 ‘김대중을 죽이지 마라’는 운동의 영향하에 있었다.
1982년 일본의 왜곡된 교과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중국과 한국에서 일어났는데, 그 전제가 되었던 것은 베트남전쟁이 끝나 동북아시아가 겨우 평화를 되찾았다는 사실이다. 두 나라에서 비판을 받자 스즈끼 내각의 사꾸라우찌(櫻內) 외상은 정부방침에 변함이 없으며, ‘일한공동선언’과 ‘일중공동성명’에 담긴 정신을 가지고 대처하겠다고 변명했다.
이에 대해서 일·한연대운동을 추진해온 아오찌 신, 쯔루미 슌스께, 히다까 로꾸로오, 와다 하루끼 등 8명은 8월 14일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일중공동성명에서는 전쟁을 통해 끼친 손해에 대한 반성이 표명된 데 비해 일한조약에서 특징적인 것은 반성의 결여이며 병합조약이 대등·평등의 입장에서 조인되었다는 인식을 일본정부가 바꾸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조선통치가 가혹한 제국주의적 지배였음을 인정하고 한국·조선인에게 깊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취지의 정부선언을 발표하라고 촉구했다. 성명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38번째의 8·15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저 태평양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은 ‘일억일심(一億一心)’이라면서 한국·조선인 2500만명에게 황국신민화를 강요하고 그들을 천황의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적자(赤子)’라 부르면서 전쟁에 동원했다. 학도병으로 대륙의 전장에서 사망한 사람, 군속(軍屬)으로 포로수용소 요원이 되어 후에 전범으로서 처형당한 사람, 여자정신대원이란 이름 아래 위안부로서 남방에 끌려가서 사망한 사람, 강제연행돼서 중노동을 하다 사망한 사람, 히로시마·나가사끼에서 일본인과 함께 피폭해서 죽은 사람—2중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 이런 사람들을 상기하자.(…)죄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정부의 자세를 자신들의 힘으로 고치지 못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이번의 한국·중국인들의 비판은 하늘의 목소리라 할 만한 것이다.”
8월 26일 미야자와(宮澤) 관방장관은 담화를 발표해서, 일본이 “과거에” 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고통과 손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두번 다시 이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 아래 “평화국가의 길”을 걸어온 일본의 입장은 일한공동선언·일중공동성명에 서술되어 있는데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고 이 두 문서의 “정신은(…)교과서 검정에 즈음해서도 존중되어야 하며”, 비판받은 점은 “정부가 책임지고 시정하겠다”고 표명했다. 일한조약과 일중공동성명을 동렬로 간주하는 픽션이 유지되어 있는 점은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그때 새로이 획득된 인식이 있었다. 미야자와 담화의 취지는 뒤에 오가와(小川) 문부대신에 의한 ‘근린제국조항’ 제정(11월 24일)으로 살아나게 된다.
이런 진전은 80년대의 ‘김대중씨 등을 죽이지 마라’ 운동의 고조 속에서 일본사회에 나타난 인식에 밀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할린 잔류 조선인 문제와 씨름하는 타까기 켄이찌, 오오누마 야스아끼(大沼保昭), 카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 타나까 히로시(田中宏), 우쯔미 아이꼬(內海愛子) 등은 83년 ‘아시아에 대한 전후책임을 생각하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전후책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다음 라운드는 1982년 나까소네(中曾根)정권 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찾아왔다. 나까소네 수상은 보수방류(傍流)에 속하는 인물로 아시아에 대한 적극적 외교를 추진했다. 83년 1월 그는 최초의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고 40억 달러의 원조를 결정해 전두환체제를 전면적으로 지지함을 명확히 내세웠다. 이어서 방미한 나까소네 수상은 일본과 미국은 ‘운명공동체’이며 일본은 미국의 ‘불침항모(不沈航母)’라고 말하면서 일·미·한의 군사협력을 모색해야 한다고 시사했다. 이 발언이 북한을 자극했다. 10월 양곤에서 전두환 대통령 일행에 대한 폭탄테러가 발생했을 때, 미얀마정부는 그것이 북한의 범행이라고 단정했고 일본은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84년 1월 북한은 그때까지 부정했던 3자회담을 제안함으로써 의견교환을 통한 긴장완화를 모색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나까소네 수상의 초청으로 19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방문이 실현되었다. 국빈이 방문하면 초청연회의 자리에서 천황이 ‘말씀’을 하게 된다. 거기서는 일본과 한국의 역사에 관한 인식이 제시되어야 한다. 나까소네 수상은 일·한 군사협력을 시야에 넣고, 한국인의 마음을 잡으려면 과거에 대한 반성을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것에 관해서 비판세력은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7월 4일, 아오찌 신, 와다 하루끼, 나까지마 마사아끼, 천주교의 소오마 노부오(相馬信夫), 후까미 마사까쯔(深水正勝), 오오에 켄자부로오, 스미야 미끼오(隅谷三喜男), 쯔루미 슌스께, 히다까 로꾸로오 등이 발기인이 되어 136명의 인사가 서명한 의견서 「조선문제와 일본의 책임」이 발표되었다. 이 의견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역사가 부과하는 민족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오늘날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외교에 직결된다”는 사고방식이었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제안되었다. “1. ‘일본 국민은 일한병합이 조선민족의 뜻에 반해서 강행된 것임을 인정하며, 일본이 식민지 통치시대를 통해서 이 민족에 헤아릴 수 없는 큰 고통을 주었음을 반성하고 깊이 사죄한다’는 취지의 국회결의를 초당파로 낸다. 2. 정부는 이 결의를 대한민국 정부에 전달하고 일한조약 제2조의 해석을 수정한다. 3. 정부는 이 결의를 전달하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접촉해서 식민지관계 청산을 위한 교섭을 개시한다.”
이 제안은 국회 각당 당수에게 보내졌다. 자민당·공명당·공산당·신자유클럽은 무회답이었고, 민사당은 혼란을 일으킨다고 해서 결의에 반대했다. 찬성한 것은 사회당과 사민연(社民連)뿐이었지만, 사회당의 이시바시(石橋) 위원장은 이런 결의가 채택될 날이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9월 6일 토오꾜오에 도착해서 궁중만찬회에 임석했다. 그 자리에서 쇼오와(昭和)천황은 고대에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큰 문화적 은혜를 입었다고 지적한 다음에 “그런 사이였는데도 불구하고 금세기의 한 시기 두 나라 사이에 불행한 과거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1965년 일한조약 조인 때 시이나 외상이 말한 내용을 되풀이한 것일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 나까소네 수상은 다음날 오찬회에서 “유감스럽게도 금세기의 한 시기 우리나라가 귀국 및 귀국 국민에 대해 큰 고난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정부 및 우리 국민이 이 과오에 대해서 깊은 유감을 느낌과 동시에 앞날을 굳게 다잡으려고 결의했음을 표명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해서 약간의 진전을 보였다. 하지만 이 발언도 일본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유감’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나까소네 수상은 다음해 1985년 8월 15일 야스꾸니(靖國)신사에 공식참배했다. 한국의 국민감정을 배려하는 것과 야스꾸니신사를 합법화하는 것은 하나의 전략 속에 있는 다른 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야스꾸니신사 참배는 중국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아 다시 이루어질 수가 없게 되었다. 나까소네 수상에게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단념하도록 설득한 사람은 고또오다(後藤田) 관방장관이었는데 그는 86년 우익세력이 작성한 고교 역사교과서 『신편 일본사』에 철저한 수정을 가해서 무해한 것으로 만들었다.
8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 정치적 문제와 관련한 대중운동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식민지지배에 대해서 사죄하는 국회결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기는 했어도, 그것은 지식인의 문제제기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변화는 80년대 말에 일어났다. 우선 소련에 고르바초프(M. Gorbachev)가 등장하고 뻬레스뜨로이까가 시작됐다. 이것은 소련 변경의 군사거점인 사할린에 묶여 있던 조선인의 출국을 가능케 했다. 새로운 조건을 얻어 1987년 타까기, 오오누마의 노력으로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문제 의원간담회’가 탄생하고 자민당의 하라 분베에(原文兵衛), 사회당의 이가라시 코오조오(五十嵐廣三)가 회장 및 사무국장으로 취임했다. 88년 이후 일본정부는 사할린 잔류자의 일시귀국에 대한 원조를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뻬레스뜨로이까와 함께 1987년 6월에 이루어진 한국의 민주화도 상황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활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의 전야인 88년 7월 7일에 선언을 내고 소련·중국과의 국교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것,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승인한다는 것 등의 내용을 발표했다.
와다 하루끼는, 7·7선언 직전에, 식민지지배 반성 국회결의 채택, 일한조약 제2조에 관한 한국측 해석의 채택, 일·조(日朝) 정부간 교섭 개시를 다시 제안한 바 있다. 7·7선언이 나오자 일본정부는 곧바로 성명을 내서 일·조관계 개선의 의욕을 보이고 제10후지산호(富士山丸) 사건의 해결을 요구했다. 『로동신문』은 이례적으로 이 일본정부 성명에 응답해서 “일본 지배층은 역사적으로 우리 인민에 대해서 행해진 일본의 침략적 범죄행위가 아직 청산되지 않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주목할 만한 표명을 했다.
8월 15일 사회당 도이 타까꼬(土井たか子) 위원장은 두 개의 조선국가 창건 40주년에 즈음한 성명을 낼 때 시민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 식민지지배 청산 국회결의를 요구했다. 『한겨레신문』은 8월 20일자 신문을 통해, 새로운 인식이 일본의 소수 지식인의 것에서 제1야당 당수의 견해가 되었다고 해서 환영하고 또 격려해주었다. 이어서 야스에 료오스께, 사까모또 요시까즈(坂本義和), 와다 하루끼 등 지식인과 우쯔노미야 토꾸마(宇都宮德馬) 등 정치가 총 35명이 타께시따(竹下) 수상에게 「조선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요망서」를 제출해서, 정부가 “북한과 정부간 교섭을 가져서 식민지지배 청산을 하겠다는 성명을 속히 내고, 가능한 일부터 구체적 행동에 옮길 것”을 요청했다.
1989년 쇼오와천황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역사─옮긴이〕 청산을 이루지 못한 채 쇼오와시대가 끝나버렸다는 사실에 심한 아픔을 느끼면서 조선 식민지지배 반성 국회결의를 요구하는 국민운동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 해 3월 1일을 기해서 서명운동이 시작되어 일부 노동조합도 참가했지만, 충분한 확장이 이루어지지 못해 이듬해 90년 5월까지 1년 2개월 사이에 12만명의 서명을 모은 것에 그쳤다.
그러나 1988년부터 90년에 걸쳐 식민지지배를 반성한다는 자세로 북한의 문을 두드리는 흐름이 일본사회에 분명히 나타났다. 뻬레스뜨로이까 속에서 한국과 소련, 한국과 중국의 접근 움직임이 가속화되면서 북한측에서도 대응책을 필요하게 되었다. 90년 9월 카네마루 신(金丸信)과 타나베 마꼬또(田邊誠)를 중심으로 한 자민·사회 양당 대표단이 타께시따 수상의 서한을 가지고 북한을 방문했는데, 자민당 부총재였던 카네마루 단장이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사죄의 뜻을 밝혔고 김일성 주석은 이 표명을 계기로 삼아 일·조 국교교섭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1990년부터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의 일시귀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할린의 벽이 드디어 무너진 것이다.
80년대 운동의 중심적 목표는 일본국가와 국민이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가 끼친 고통에 대해서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일·조교섭의 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조관계에 대해서는 그 표명에 입각해서 무슨 새로운 조치를 취한다는 생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일본과 한국·북한정책의 변화—1990년대
90년대는 80년대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첫째, 민주화된 한국에서 일본에 보상(補償)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여러가지 형태로 분출했다. 그중 가장 큰 불기둥이 된 것은 위안부문제다. 페미니즘운동이 한국과 일본에서 활발해지면서 그것이 전쟁 때의 성폭력에 대한 규탄과 결부된 것이다. 둘째로 1991년 소련 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했다. 이것의 영향은 자민당의 영구정권을 만년야당인 사회당이 통제한다는 ‘55년 체제’가 냉전체제의 종언 속에서 붕괴했다는 사실로도 나타났다. 일본국가와 사회가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큰 기회가 도래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큰 위기라고 생각되었다. 또 좌익운동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사회주의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무력감과 향수 속을 방황하게 되었다. 좌익이 퇴장하자 우익적 대중운동이 등장했다.
먼저 90년대에 들어 시작된 것이 일·조교섭이다. 1990년 말의 예비회담을 거쳐 91년 1월 평양에서 일·조교섭이 시작되었다. 제1·2차 회담 자리에서 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였다고 말하는 북한측과, 병합조약은 합법적으로 맺어졌다고 말하는 일본측의 주장이 격돌했다. 이것에 한해서 보면 일본측 태도는 일한조약 체결 때와 변화가 없었다. 5월 뻬이징에서 열린 제3차 회담 때 일본측은 KAL기사건의 김현희(金賢姬)가 말한 일본인 교육담당자 이은혜(李恩惠)의 문제를 제기해서 북한측과 충돌하고, 또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제기했다. 92년 11월, 제8차에서 일·조교섭은 결렬된다.
과거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정치가가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외교교섭의 자리에서 내세우는 정부의 기본방침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정부의 입장에 가해진 새로운 압력이 위안부문제다. 위안부의 존재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일본에서는 1964년 일본조선연구소가 간행한 『일·조·중 삼국인민연대의 역사와 이론』에 ‘위안부부대’가 명확히 서술되어 있다. 70년대에는 센다 카꼬오(千田夏光), 김일면(金一勉) 등의 책도 간행되었다. 그래서 82년 지식인 여덟 명의 성명에서도 위안부문제가 언급된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일본을 고발하고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윤정옥(尹貞玉)씨의 정신대 취재기가 『한겨레신문』에 발표된 것은 90년 1월의 일이다. 이 동향이 일본에 전해지고 일본의 국회에서 질문이 나온 것은 그해 6월 6일이었다.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정부위원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종군위안부에 대해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도 종합해서 들어봤는데, 역시 민간업자가 그런 분들을 군과 함께 데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 실태에 대해서 저희가 조사해서 결과를 제출하기는(…)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답변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일본 군과 국가의 관여를 부정한 것이라고 해서 강한 비판이 일어났다. 1990년 10월 17일 한국의 7개 여성단체가 정신대연구회와 함께 성명을 발표해서 일본정부위원의 답변을 비판하고, 위안부가 강제로 연행된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비롯한 6개 항목의 요구를 일본정부에 제시했다. 공식사죄, 진상규명과 발표,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건립, 생존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 역사교육에서의 취급 등이다.
결정적인 것은 1991년 여름 희생자의 한 사람인 김학순(金學順) 할머니가 서울에서 자기 이름을 밝히고 일본의 책임을 고발한 것이다. 그녀는 그해 12월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요구소송의, 실명을 밝힌 단 한명의 원고가 됐다.
충격을 받은 일본에서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 활발해졌다. 1992년 1월 11일 요시미 요시아끼(吉見義明) 쥬우오(中央)대학 교수가 군의 관여를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해서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궁지에 몰린 미야자와 내각이 마침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고 92년 7월 6일과 93년 8월 4일에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93년 8월 4일에는 코오노(河野) 관방장관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設營)되었으며, 위안소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했지만, 그 경우에도 감언·강압 등 본인들의 의지에 반해서 모집한 사례가 적지 않게 있었으며, 게다가 관헌 등이 직접 여기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삶은 강제적 상황 속에 이루어진 비참한 것이었다.”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 그 출신지를 막론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숱한 고통을 경험하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충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아뢴다.(…)우리는 역사연구·역사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고 같은 과오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의를 다시 표명하는 바이다.”
이것이 우익을 포함한 자유민주당 정부가 전후 48년 만에 가까스로 도달한 새로운 역사인식이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까지의 노력의 축적, 피해자 할머니의 고발, 여성들의 분노, 한국정부에 의한 새로운 역사인식의 촉구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담화에서도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관한 답은 내지 못했다.
코오노 담화가 나온 4일 후 미야자와 내각이 무너지면서 자민당 정권이 끝났다. 자민당을 제외한 여러 당이 연립해 정권을 획득했으며 호소까와 내각이 탄생했다. 예전에 자민당원이었던 호소까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수상은 1993년 8월 10일 취임기자회견에서 그전의 전쟁은 ‘잘못한 전쟁’이며 ‘침략전쟁’이었다고 발언했다. 소신표명 연설에서는 “과거 우리나라의 침략행위나 식민지지배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과 슬픔을 준 것에 대하여 다시 깊은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고 잘라 말했다. 11월에는 한국을 방문해서 ‘식민지지배’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슬픔과 괴로움을 맛보게 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충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것은 호소까와 수상의 개인플레이였지만 우익은 오싹해졌다. 자민당 내부의 우익세력이 궐기했다. 당내 야스꾸니신사 관련 의원단체인 ‘영령에 보답하는 의원협의회’(회장 하라다 켄原田憲), 유가족 의원협의회(회장 무또오 카분武藤嘉文), ‘다같이 야스꾸니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회장 사이또오 쥬우로오齋藤十朗)은 “자학적 역사관의 횡행”을 허용해서는 안되며 “일본인 자신의 역사관의 확립”이 급선무라고 해서 “대동아전쟁의 총괄”을 목표로 한 ‘역사·검토위원회’(위원장 야마나까 사다노리山中貞則, 사무국장 이따가끼 타다시板垣正, 고문 오꾸노 세이스께奧野誠亮, 하시모또 류우따로오橋本龍太郞 등)를 8월 23일에 발족시켰다. 참의원 의원 이따가끼 타다시는 A급 전범으로서 처형된 이따가끼 세이시로오(板垣征四郞)의 아들이다. 9월 9일자 『산께이신문』에는 오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 하따 이꾸히꼬(秦郁彦), 사또오 카쯔미(佐藤勝巳), 와따나베 쇼오이찌(渡部昇一) 등이 ‘일본은 침략국이 아니다 국민위원회’의 의견광고에 등장했다. 신또오(神道)정치연맹은 일본유족회, ‘영령에 보답하는 모임’과 함께 호소까와 발언의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우익의 위기의식은 1994년 6월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끼가께의 3당 연립정권인 무라야마(村山) 내각이 성립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연립의 합의에는 전후 50년의 국회결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94년 12월, 자민당 내 우익은 ‘전후 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꾸노 세이스께, 간사장 무라까미 마사꾸니村上正邦, 사무국장 이따가끼 타다시, 사무국차장 아베 신조오安倍晉三)을 발족시켰고, 일본유족회회장 하시모또 류우따로오가 고문이 되었다. ‘쇼오와의 국난(國難)’에 즈음해서 “일본의 자존자위(自存自衛)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죽은 자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으며 사죄의 국회결의에 반대해야 한다는 게 이 의원연맹의 주장이었다. 심각한 것은 우익세력의 압력 아래 마지막에는 자민당 국회의원의 3분의 2가 이 의원연맹에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조직이 신진당(新進黨) 내에도 생겼는데 그 조직의 간부는 대표 오자와 타쯔오(小澤辰男), 간사장 나가노 시게또(永野茂門), 사무국장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였다.
원외에서는 ‘종전 50주년 국민위원회’가 25개 단체의 연합조직으로 탄생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들이 모은 서명은 1995년 2월 450만명에 달했다. 이 조직은 자민당 의원연맹과 제휴해서 95년 2월 22일에는 ‘부전(不戰)·사죄 결의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격려하는 국민집회’를, 3월 16일에는 ‘국회의 사죄·부전 결의를 저지하는 긴급집회’를, 5월 29일에는 ‘추도·감사·우호·아시아공생의 제전’을 개최했다.
무라야마 내각은 이런 압력을 받으면서도 국회결의를 추진하는 한편, 전후 50년을 계기로 종전 이후 방치되어온 문제의 해결에 도전했다. 그것을 위해 자민·사회·사끼가께 3당 위원으로 구성된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가 설치되었다.
먼저 국회결의에 관해서는 사회당이 조선 식민지지배 반성의 국회결의를 요구하는 서명운동그룹이 준비한 결의안을 자신들의 안으로서 3당이 회담하는 자리에 제출했지만, 그것이 거부된 이후에는 상당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민당 내 우익의 반대는 강한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6월 9일 가결된 결의는 무척 격조 낮은 글이 되었다. 그래도 일본이 “식민지지배나 침략적 행위”를 해서 “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깊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명기했다. 자민당 내 우익은 필사적으로 참의원에서의 결의를 저지했는데, 그들은 이 결의가 중의원에서 채택된 것을 패배로 받아들이고 결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집회를 열었다. 니시무라 신고는 “초분굴기(草奔T起)의 정신”으로 분투하고 “국체를 명징(明徵)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미해결 문제의 중심이 된 것은 위안부문제였다. 위안부문제는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 중의 소위원회에서 검토되었다. 국가 보상(補償)을 요구하는 사회당 위원과 그것에 반대하는 자민당 위원이 대립했고, 외무성·대장성은 전후처리가 이미 끝났으니 법적 보상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사회당에서 나온 이가라시 코오조오 관방장관이 의견을 수렴해서, 정부가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고 국민적인 보상사업을 추진하는 것, 또 보상금(償い金)은 국민으로부터 모은 모금을 본기금으로 하는 것,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정부자금으로 의료복지 지원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타협이 성립되었다. 이것을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고 민간에서 18명이 설립추진자로 참가했는데, 그 속에 오오누마 야스아끼, 와다 하루끼의 이름이 있었다. 이사장에는 참의원의장을 그만둔 하라 분베에가 취임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운동단체가 극심하게 반대하고 이런 기금을 만드는 것은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해서 사죄와 보상을 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책략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아쉬운 귀결이었지만, 이것이 전후 50년 만에 무라야마 내각이 간신히 취할 수 있었던 조치였으며 한걸음의 전진이었다.
한편 앞의 국회결의에 불만을 가진 무라야마 수상과 이가라시 관방장관은 외무관료와 협력해서 총리담화를 냄으로써 결의의 인상을 뛰어넘으려고 애를 썼다. 1995년 8월 15일 각의의 결정을 바탕으로 한 무라야마 총리담화가 나왔다. 이 담화는 하시모또 류우따로오 후생대신도 지지했다. 이 담화는 사회당과 자민당의 합의에 의한 일본정부의 새로운 역사인식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우리나라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가정책의 잘못으로 전쟁의 길을 걸어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심대한 손해와 고통을 끼쳤습니다. 저는(…)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 역사의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충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하겠습니다.”
이 입장은 80년대부터 있어온 긴 노력 끝에 드디어 나오게 된 것으로, 일본 국민의 일치된 의견이 돼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한의 화해협력을 위해 필요한 사죄의 최소치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위안부문제에 관한 운동을 벌여온 한국과 일본의 운동단체들은 5년간의 운동으로 일본정부를 이만큼 움직일 수가 있었으니 좀더 국제적으로 몰아붙이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일본정부에 대해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자의 처벌까지 하라는 식으로 요구가 강화되었으며, 또 유엔 인권위원회에 문제를 제출해서 국제적인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 1996년 1월 쿠마라스와미(R. Coomaraswamy) 여사가 ‘위안부’문제에 관한 보고서를 인권위원회에 내는 보고서의 부록으로 제출했다. 그 속에서 ‘위안부’문제를 “군사적 성노예 제도”의 사례였다고 인정하고, 아시아여성기금은 “‘위안부’의 운명에 대한 일본정부의 도의적 배려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일본정부는 국제인도법 위반에 따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1996년 8월 아시아여성기금은 필리핀에서 보상사업을 시작했다. 피해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시모또 수상의 사과편지가 전달되고 또 보상금도 지불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의료복지 지원사업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와서 역류가 생겼다. 96년 6월 검정을 끝낸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발표되었는데, 전년의 일본정부의 태도를 반영해서 모든 교과서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기술이 들어갔다. 이것에 대해서 오꾸노, 이따가끼 등은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을 결성해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패배한 그들은 곧 활동을 멈추었다. 대신에 ‘자유주의사관 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좌익학자가 집필한 역사교과서를 비판해온 옛 좌익 후지오까 노부까쯔(藤岡信勝) 토오꾜오대학 교수가 전면에 나서서 위안부문제를 교과서에 싣는 것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만화가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는 잡지 『사피오(SAPIO)』에 「전쟁론」을 연재해서 비슷한 논의를 펼쳤다. 이에 가담한 사람이 사까모또 타까오(坂本多加雄)라고 하는 새로운 국가주의 역사가였다. 여기에 오래된 우익평론가 니시오 칸지(西尾幹二)가 참가해서, 97년 1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설립했다. 이 모임의 첫번째 활동은 ‘종군위안부’ 기술 삭제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자민당의 문부대신 코스기 타까시(小杉隆)로부터 거부당했지만, 보수적 재계인사들은 이 조직을 응원했다. 의원으로는 오꾸노, 이따가끼 같은 노인들이 물러나고, 97년 2월에는 중의원·참의원 87명의 의원이 참가해서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 탄생했다. 나까가와 쇼오이찌(中川昭一)가 대표가 되고 간사장으로 에또오 세이이찌(衛藤晟一), 부간사장으로 타까이찌 사나에(高市早苗), 사무국장으로 아베 신조오를 세운 그들은 코오노 담화를 공격하고 위안부 기술을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패배한 구(舊)우익을 대신해서 등장한 신우익은 한편으로는 자기 나라를 긍정하고 싶은 젊은이의 내셔널리즘을 발판으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우익의 조직력과 결부되었다. 우익적인 종합잡지나 신문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활동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바로 같은 시기, 또하나 같은 경향의 주목할 만한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1997년 2월 요꼬따 메구미(橫田めぐみ)양이 북한에 납치되었다는 사건이 거의 사실로서 매스컴에 등장하고 부모인 요꼬따 내외는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를 문제삼아 97년 3월 26일에는 요꼬따 시게루(橫田滋)씨를 회장으로 한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연락회’가 발족했다. 그리고 10월에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모임’이 토오꾜오에서 결성되고 회장으로 현대코리아연구소 소장 사또오 카쯔미가 취임했다. 사또오는 북한정권은 타도되어야 한다는 의견의 소유자였다. 98년 4월에는 각지의 단체를 모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는 전국협의회’가 생겼는데 회장은 사또오 카쯔미, 사무국장은 현대코리아연구소 연구부장 아라끼 카즈히로(荒木和博)였다. 인권침해는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와, 북한을 싫어하는 대북강경론의 구우익이 모인 이 운동은, 실질적으로 일·조 국교수립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이런 가운데, 1998년 한국에 김대중정권이 탄생한 것은 그야말로 동북아시아 전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김대중정권이 등장해서 맨 처음 한 것은 한국 운동단체의 희망을 받아들여서 아시아여성기금에서 보상을 받지 않는 피해자에게 생활지원금 3150만원(약 3백만엔)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97년 1월 한국에서 첫 사업을 펼친 후 오래도록 활동을 중단했다가 98년 1월 신문광고를 내면서 재개했다. 이 사업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사표시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있었다. 반면 김대중정권은 위안부문제로 더이상의 조치를 일본정부에 요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시아여성기금은 한편으로는 국내 신우익의 위안부문제 부인 캠페인에 밀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타이완으로부터 거부를 당해서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이 해에 북한이 대포동미사일을 발사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제재조치를 취했고 일본 국내에서 북한의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졌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연말에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오부찌(小淵) 수상과 함께 일한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무라야마의 담화내용이 담겼고,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지배가 끼친 손해와 고통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표명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반성과 사죄를 받아들여서 미래지향적인 파트너십으로 나아가자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이것은 필요한 사죄의 최소치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했음을 의미한다. 일·한관계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모두가 환영했다. 90년대에는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일·한관계는 깊어져갔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문화에 대해 한국을 개방하는 방침을 취했다. 하지만 역사인식문제는 해결됐다손 치더라도 위안부문제는 최소한의 이해조차 제시되지 않고 있었다.
1999년 일본에서는 대립의 분위기가 강해졌다. 9월에 노또(能登)반도 앞바다의 영해 내에서 벌어진 두 척의 괴선박(북한 공작선) 추적극도 이를 더욱 부추겼다. 안보 재(再)정의에 바탕을 둔 가이드라인법안이 성립했다. 그것은 ‘주변사태’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서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군사행동에 협력할 수 있게 하는 법률이었다. 설령 이것 자체에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정비를 하는 것 자체가 북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잘못된 메씨지가 되지 않도록 배려해서, 일·조 국교 수립을 위한 새로운 노력을 하는 등 별개의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 배려 없이 이런 법률을 제정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자위대로서 존재하는 군사력을 헌법을 개정해서 정규의 전력으로 인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헌법조사회를 설치한 것은 헌법옹호파를 긴장시켰지만, 헌법과 현실이 안 맞는다는 의견에 근거가 있는 이상 그런 논의가 나오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다. 헌법 9조에 근거해 자위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설득력 있는 설명논리를 부여하지 못하면, 헌법을 현실에 맞게 하라는 의견이 강해지는 추세는 더욱 가속화된다. 또, 이 해에는 ‘키미가요’와 ‘히노마루’가 그대로 국가·국기로 제정된 것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비상한 공포를 느끼게 했지만, 국기와 국가가 필요하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반론하기가 어려웠다. 냉전시대, 55년 체제 아래서 보류해온 문제의 매듭짓기를 요구하는 역학이 작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같은해 말에, 국기·국가법을 추진한 노나까 히로무(野中廣務)씨가 무라야마 토미이찌(村山富市) 전 수상과 함께 초당파의 북한방문단을 조직해서 일·조교섭 재개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2000년에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응하고, 6월에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이것은 남북이 화해의 길을 찾고 있음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남북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일·조교섭이 재개되었다. 7월 무라야마 전 수상을 회장으로 하는 ‘일·조국교촉진 국민협회’가 발족하고, 9월에는 무라야마씨가 번민 끝에 아시아여성기금의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95년의 성과를 기초로 해서 거기서 후퇴하지 않고 일·조교섭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입장이 밝혀졌다.
그러나 일·조교섭은 세 번의 회담을 한 뒤 2000년 가을 암초에 부딪혀 중단되었다. 북한은, 일본은 사죄와 보상에 응하라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미국과의 화해를 서둘렀다. 두 나라의 제2인자가 워싱턴과 평양을 서로 방문했지만,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고어가 공화당의 부시에 아깝게 패배해 클린턴 대통령의 북한방문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실의에 빠진 북한 지도부는 2001년 1월 1일 세 개 신문 공동사설에서 “현대적 기술에 의한 경제 개건(改建)”과 “대담한 신(新)사고방식”을 제안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같은달에 중국을 방문하고 이어서 소련을 공식방문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한 설날의 제안을 살리는 조건은 생기지 않았고, 소련 공식방문에서 얻은 성과도 분명치 않다.
그동안 일본은 경제의 하락이 심했고, 외무성·은행·경찰·재판관·교사 등의 직업적·인간적 윤리의 저하가 씨스템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을 심화했고 자신감을 크게 상실하게 했다. 자민당의 중도를 지탱해온 하시모또파가 힘을 잃어서 자민당 내 우익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경향이며, 아베 신조오는 2대의 내각에서 관방차관의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00년 가을부터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가 검정에 제출되고 그 백표지본(白表紙本)의 가공할 만한 내용이 전해져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집필자들은 코오노 담화에 대한 공격부터 무라야마 담화의 취소까지를 공공연히 주장했다. 2001년 봄, 과연 상당히 많은 수정이 가해졌지만 그것은 검정에 떨어지지는 않고 어쨌든 합격이 되었다. 여기에는 마찌무라(町村) 문부대신의 의향이 반영되었는데, 그것을 억제해야 할 외무성이 무력화되어 있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후소오샤(扶桑社)는 교과서를 시판해서 50만부나 팔았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한국과 중국에서의 비판과 국내의 시민운동이었다. 후소오샤판 교과서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패배했다. 이것은 1995년에 이은 우익의 패배였다.
그 사이에 개혁단행의 구호를 내걸어서 국민의 강한 지지를 받은 코이즈미(小泉) 내각이 탄생했다. 코이즈미 수상이 8월 15일에 야스꾸니신사에 참배한다는 자민당 총재 선거시의 공약을 실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실제로는 15일의 참배를 피해서 무라야마 담화를 견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13일에 참배했지만, 한국·중국의 불신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코이즈미 수상은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
9월의 뉴욕테러사건 이후 코이즈미 수상은 미국을 무조건 지지한다는 태도를 밝혔고, 특별법을 제정해서 자위대의 함선을 인도양으로 파견했다. 또 12월 해상보안청은 공해상에서 북한 공작선으로 보이는 ‘괴선박’을 추적하면서 세 번에 걸쳐 발포하고,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서 선체에 화재를 일으키고 접현(接舷)·나포하려다가 로켓포의 반격을 받자, 상대를 공격해서 대파하고 자침(自沈)하도록 했다. 승무원 15명은 수중 자결한 것으로 보인다. 극히 위험한 대립이 노출되었다. 비판적 의견이 잠잠해지고 언론은 이전보다 훨씬 기성사실 추인의 논조로 보도했다. 지금 일본 국민들이 북한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는 최악이다.
4. 21세기를 맞이하여 출구를 찾을 수 있는가
돌이켜보면 과거 30년간 한국과 일본의 동향은 상호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북한이 가담해서 삼자의 움직임이 엉키면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변화라는 점에서 우리가 얻은 성과는 무라야마 담화다. 무라야마 내각 이후의 자민당 내각도 이를 계승해서 공식입장으로 삼고 있다. 이는 일본정부의 국제공약이다. 이는 일한공동선언 속에서, 앞으로 미래지향적인 협력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표명으로 한국대통령에게 인정되었다. 이 사실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문제는 “그것은 말뿐인 약속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의문과 불신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것이 진실한 반성과 사죄라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역사교육에서 확실하게 살려야 된다. 하지만 후소오샤판 교과서는 검정에 합격했고 코이즈미 수상의 야스꾸니 참배도 실행되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무라야마 담화가 방패막이가 아님을 증명하고 그것을 살릴 노력을 보임으로써 한국의 불신을 해소해야 한다. 코이즈미 수상이 약속한 교과서문제 공동연구조직 만들기가 과연 성의의 증거였는지, 그 여부가 문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반성과 사죄가 진실의 것인지의 여부를 가리는 또하나의 판단기준은, 가장 심각한 피해자에게 보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는 것이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일본정부가 설치한 아시아여성기금에는 당초부터 사죄도 보상도 없으며,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것 자체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장치라고 주장해왔다. 만일 그렇다면 무라야마 담화도 역시 말뿐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것은 괴로운 일이다.
만일 무라야마 담화가 말뿐인 속임수라면, 일본정부가 북한에 대해 무라야마 담화를 꺼내면서 식민지지배가 끼친 손해와 고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겠다고 말해도 북한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남한에서 평가하지 않는 것을 북한이 평가할 리가 없다. 북한은 남한이 일한조약에서 획득하지 못한 것을 일본으로부터 얻어내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의 일본은 1965년의 일한조약을 넘어서 북한에 대해 무엇인가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한 단계 비약해야 한다. 무라야마 담화를 인정한다면, 즉 식민지지배로 피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인식한다면, 여태까지 백지상태로 남아 있는 북한에 대해서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사람들 사이에 무라야마 담화의 정신을 보급함으로써, 과거를 반성하고 고통과 손해에 대해서 사죄해야 한다는 것과 그 고통과 손해를 보상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너무나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북한에 대해서 보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책임이 일본인에게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 국내에서 그것을 알고 있는 자가 더욱 노력해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 3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반성과 사죄를 통한 화해로 일본인을 이끌어온 것은 한국인과 한국의 목소리다.
아시아여성기금은 도의적 책임을 인정한 정부가 국민과 협력해서 진행하는 보상사업인데,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니까 반드시 전쟁범죄로서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그것에 입각한 조치를 취하라고 계속 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는 아무런 전진적 계기도 없다고 부정해버린다면, 일본정부를 움직여서 2002년의 동북아시아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실마리의 하나를 놓치는 결과가 된다.
증오의 삼각관계는 속히 해소해야 한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에 사는 우리의 급선무다. 50년 전의 전쟁 때의 범죄를 판가름하는 일은, “새로운 전쟁을 막기 위해”라는 전제 아래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眞田博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