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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송기원 宋基元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소설집 『다시 월문리에서』 『인도로 간 예수』 등이 있음. ssong712@hanmail.net

 

 

바보 막둥이

 

 

지지난해의 초가을 무렵 문단의 선배 되는 작가 P선생과 우연하게 동해안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훌쩍 떠난 1박 2일의 짧은 시간에다가 무슨 기억에 남을 유별난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어서, 어쩌면 선생은 여행한 사실마저 아예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때 동행으로는 동료작가 L씨와 평론가 H씨가 있었는데, 몇해 전부터 고향인 양양에 허름한 작업실을 마련한 L씨가 여행을 주선한 셈이었다.

마침 설악산 정수리로부터는 해맑은 색감으로 첫 단풍이 비롯되는데다가 양양 읍내에서는 전국에서도 그 맛을 으뜸으로 쳐준다는 송이버섯 축제마저 열리는 동안이어서, 무작정 떠난 여행치고는 보는 것이며 먹는 것에 제법 속이 알차게 되었다. 그렇게 아침 일찍 H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서울을 떠나 설악산이며 양양 앞바다를 에돌며 늦장을 부린 끝에 L씨의 작업실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한 무렵이었다. 작업실이라지만 버려져 있다시피 한 농가를 안팎으로 별달리 손도 보지 않은 채 방안의 벽지며 문의 창호지만 새로 바른 것이 고작이었는데, 대신에 강원도 지방 특유의 기역자형 가옥 형태가 온전히 보존된데다가 집안의 어디에서건 누대를 살아왔을 옛 주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가라앉아 있는 듯 깊은 운치가 풍겨나는 집이었다.  

이튿날 돌아오는 길에는 동해안을 내달리지 않고 굳이 다시 설악산을 넘게 되었는데, 칠순 나이답지 않게 아직도 소녀적인 섬세한 감성이 넘치는 P선생이 어제 건듯 보아넘긴 정수리 부근의 첫 단풍을 못내 아쉬워해서였다. 다시 설악산을 넘게 되자 이곳 지리에 밝은 L씨가 한계령 정상 못 미쳐 왼쪽으로 빠지는 새로운 길을 안내했고, 거의 차량통행이 없다시피 한적한 길을 천천히 내려오며 일행은 노랗고 붉은 첫 단풍의 해맑은 색감을 한껏 만끽할 수가 있었다.

설악산을 다 내려와 내린천 어귀에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길가에 작은 구멍가게가 눈에 뜨이자마자 내가 얼결에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H씨에게 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P선생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아침술을 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어떠세요?”

그때 나는 3년 남짓 끊고 지내다가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무렵이었다. 더군다나 아침술이라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햇수마저 아리송할 정도였다. 나는 방금 지나쳐온 길을 턱짓해 보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저것들을…… 도무지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요.”

나의 말에 P선생은 곱게 눈을 흘기며 빙긋 웃어 보였다.

“뭘 나한테 물어요? 벌써 차를 세워놓구선.”

나는 P선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멍가게로 달려가 소주 세 병을 사왔다. 내가 P선생에 대한 무례를 무릅쓰고 차를 세우면서까지 아침술에 대해 운을 뗀 것은, 흡사 홀리기라도 하듯 첫 단풍에 열중하는 선생의 섬세한 감성이 그만 애달프게 여겨진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와 함께 한편으로는 지난밤 L씨의 작업실 부엌에서 벌인 고즈넉한 술자리에서, 어딘지 가녀리게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당당하게 버텨내던 선생의 술 실력에 대한 믿음도 없지 않았다.  

내가 술을 사오는 동안에 P선생은 벌써 차에서 내려 내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가가자 불쑥 송이버섯 한 송이를 내밀었다.

“이걸로 안주합시다.”

체질적으로 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L씨와 운전 때문에 차마 못 본 척 술을 외면하는 H씨를 제쳐둔 채, P선생과 나는 다리에 걸터앉아 주거니 받거니 종이컵으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리 아래 내린천에는 물밑의 조약돌이며 조약돌 사이를 에돌아다니는 물고기떼까지 다 드러나 보이도록 투명한 냇물이 잔잔한 물살을 이루며 쉼없이 흘러왔다가 흘러가고, 그런 물살 위로는 역시 냇물만큼이나 투명한 가을 햇살이 금은의 가루가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송이버섯 두어 송이로 안주 시늉만 내며 한잔, 한잔, 더 하는 사이에 금방 소주 세 병이 비워지고 말았다. 목구멍을 타고 저 아래 빈속으로 내려가는 첫잔의 쏘는 맛이 채 가시지도 않은 기분인데 벌써 술이 동난 것이었다. 아침술의 너무 빠른 속도에 나도 놀랐지만 P선생 역시 놀란 모양이었다.

“어마, 우리가 벌써 세 병을 다 마신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P선생의 말꼬리를 잡았다.

“괜찮으면, 몇병 더 사올까요?”

나의 물음에 P선생이 다시 한번 곱게 눈을 흘겼다.

“괜찮지 않아도 사올 것 같은 눈친데요?”

내가 다시 사온 소주 두 병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온몸의 혈관을 타고 우루루, 우루루 몰려다니기 시작한 알코올 기운을 느끼며 차츰 명정(酩酊)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의 시야에서는 자칫 회전목마라도 탄 듯이 사방의 풍경들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어지럽게 쏠리는 것이었다. 아아, 이런 아침술이라니! 그런 나와는 달리 P선생은 몸가짐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한 모습인 채 잠자코 다리 아래 냇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선생에게 말을 걸었다.

“졌어요, 선생님. 설마하니 선생님이 이렇게 술이 세신 줄은 몰랐어요.”

P선생은 여전히 다리 아래 냇물에 눈길을 둔 채 나의 말을 받았다.

“나, 사흘 동안 내리 소주만 마신 적이 있어요.”

“……?”

“사흘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어, 언제요?”

농담인가 진담인가를 쉽게 헤아릴 수가 없어 당황한 내가 자칫 말까지 더듬었고, P선생이 비로소 냇물에서 눈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선생은 조금 전처럼 곱게 나를 흘겨보는 눈길이었다.

“내 아들이 죽었을 때.”

P선생은 아예 천연덕스러운 표정인 채 여전히 곱게 나를 흘겨보는 눈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더이상 선생의 눈길을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비록 겉모습은 여전히 몸가짐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한 자세이지만, 속으로는 선생 또한 취한 것일까. 아직까지 선생에게 무슨 칼날 같을지도 모를 한마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 꺼내다니. 그 한마디에 선생 대신에 오히려 내 쪽에서 가슴이 먹먹해져오는가 싶자, 이내 예의 칼날에라도 찔린 것처럼 명치께에 선명한 통증이 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10년 언저리 저쪽의 일일 터이지만, 그 젊은이가 아직도 선생의 눈에 얼마나 생생하게 밟히는가는 언젠가 선생의 글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 선생은 죽을 때는 반드시 먼저 간 아드님의 인도를 받고 싶다고 했던가. 그렇지 않다면 선생의 죽음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했던가. 그러면서 그 아드님이 여전히, 가슴을, 아리게 한다,라고 했던가.  

나는 P선생의 눈길을 피해 내린천의 냇물로 눈길을 돌렸다. 잔잔한 물살 위에는 가을 햇살이 여전히 금은의 가루가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내 등뒤로 또다시 흘리듯 무심한 어투로, 선생의 말이 들려왔다.

“늙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을 몰랐어요.”

나는 차마 P선생의 말을 등뒤로 흘려들을 수가 없어서, 저 냇물이며 가을 햇살에서 고개를 돌려 선생을 향했다. 선생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하마터면 어억, 하고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놀랄 뻔했다. 선생의 조그만 얼굴이, 평소에는 그렇게도 음전하던 얼굴이 온통 주름으로 덮이다시피 하며 얼굴 전체로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눈은 아예 감긴 채 입꼬리가 거의 귀밑에 달라붙도록 전체가 아예 웃음 그 자체인 얼굴, 그 얼굴 위로 흡사 무슨 금은의 분칠이라도 하듯이 가을 햇살이 가득히 덮이고 있었다. 나는 선생의 그런 얼굴을 바라보며, 자칫 어떤 혼란마저 느꼈다. 앞서 세상을 떠난 자식을 보낸 일에 대한 선생의 한마디가 아직도 내 명치께에 선명하게 걸려 있는데, 이번에는 저렇듯 얼굴 전체에 넘쳐나는 밝고 커다란 웃음이라니.  

아침술을 마시고 다시 승용차에 올라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P선생의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속에 선생의 삶은 물론 심지어는 자식의 못다 살아낸 삶까지도 한꺼번에 녹아서 스며드는 듯 커다란 웃음. 그 웃음과 함께 선생의 흘리듯 무심한 어투도 간단없이 들려왔다. 늙는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을 몰랐어요.

그런 나에게 언제부터인가 P선생의 웃음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왔다. 선생말고도 누구에게선가 분명히 저런 웃음을 본 적이 있다. 어디서 보았더라. 처음에 나는 얼핏 ‘백제의 미소’라고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삼존불(西山磨崖三尊佛)의 웃음인가 하고 생각했다. 흔히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관광엽서며 관광안내서마다 무슨 감초처럼 등장하기 마련인 마애삼존불은 특히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았을 때의 웃음이 너무 신비로워 ‘보살의 미소’라거나 ‘자연의 미소’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나 역시, 우연찮은 기회에 실물로 보았던 마애삼존불의 신비스러우면서도 따스한 미소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선생과 닮은 웃음은 그렇듯 뛰어난 장인의 손길에 의해 갈고 다듬어져 마침내 예술적 아름다움에 다다른 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얼결에 탄성을 지르고야 말았다.

“아아, 막둥이!”

그랬다. P선생의 웃음과 흡사 쌍둥이처럼 닮은 웃음은 바로 막둥이의 것이었다. 눈은 아예 감긴 채 입꼬리가 귀밑에 달라붙도록 얼굴 전체에 가득한 웃음이며, 그 속에 자신의 삶은 물론 다른 이들의 못다 살아낸 삶까지도 한꺼번에 녹아 스며드는 듯한 커다란 웃음이며, 그 웃음 위로 무슨 축복처럼 금은의 가루가 되어 덮이던 햇살까지, 영락없이 닮아 있었다.

서너 해 전인가, 나는 한 잡지사의 취재팀에 곁들여 충청도에 있는 양로원 비슷한 복지시설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그 무렵 소위 사상범 출신으로 흔히 미전향 장기수로 불리며 3,40년이 넘게 기약없는 감옥살이를 해오다가 마지막으로 풀려난 이들이 있었는데, 그이들 중에서 딱히 갈 데가 없는 한두 명이 이 복지시설에 수용되었고, 잡지사에서는 바로 그이들을 취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이들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수용된 이들은 복지시설 입구의 자연석에 적힌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표어처럼 저마다 너나없이 가정이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지체부자유자나 정신박약자 같은 행려병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로 그 복지시설에서 나는 다름아닌 P선생과 쌍둥이처럼 닮은 막둥이의 웃음을 만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에 앞서 내가 웃음의 주인공 막둥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려 30년도 훨씬 넘는 세월의 저편에서였다.

 

어린시절부터 장돌뱅이 악동들 사이에서 막둥이는 으레 이름 앞에 바보를 넣어 ‘바보 막둥이’로 불리었다. 그중에는 막둥이라는 이름도 없이 그저 ‘야, 바보야’라고만 부르며 아예 놀림감으로 삼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정작 막둥이 본인은 자신이 놀림감이 되든 말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막둥이의 어머니 해창댁만은 두 눈을 뒤집다시피 기겁을 하며 길길이 날뛰곤 했다.

“우리 막둥이가 우째서 바보여. 이 화냥년 씹구녕에서 나온 새끼덜아. 한번만 더 우리 막둥이를 바보라고 했다가는 모다 입구녕을 똥뎅이로 처발르고 말 테여.”

해방이 된 무렵부터 좌익 물이 든 남편이 산사람이 되었다가 끝내 여순반란사건을 못 넘기자 달랑 핏덩이 하나만 껴안은 청상과부가 된 채 어물전 머리에서 옹기를 팔던 해창댁으로서는 막둥이에 대한 집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해창댁은 장사도 아예 팽개친 채 장돌뱅이 악동들을 뒤쫓을 때가 없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거의 난쟁이에 가까우리만큼 작은 키로 흡사 땅에 달라붙은 것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해창댁의 걸음걸이 또한 막둥이 못지않은 놀림감이 되었다. 악동들은 복잡한 어물전을 이리저리 에돌며 느린 걸음의 해창댁을 놀려댔다.

“바본께 바보제, 우째서 바보여. 헤에, 막둥이 바아보오. 막둥이 엄니도 바아보오.”    

우리 같은 아이들이 보기에도 정신이 한참 모자란 것이 분명한 막둥이는, 요즈음의 의학상식으로 보자면, 태어날 때부터 일종의 정신박약이나 정신지체를 지닌 저능아인 셈이었다. 그러나 막둥이는 정신이 모자란 대신에 허우대만은 남달리 우람해서 해창댁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또래인 우리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클 정도였는데, 우람한 허우대만큼 힘 또한 장사여서 일고여덟살의 어린 나이에도 어른들이 겨워하는 커다란 옹기들을 번쩍번쩍 들어올리고는 하였다.

막둥이의 우람한 허우대며 장사 같은 괴력을 아쉬워한 것은 비단 해창댁뿐만이 아니라 장터의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어쩌다 막둥이가 힘을 쓰는 것을 보면 쯧쯧, 드러내놓고 혀를 차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허어, 정신만 멀쩡했다먼, 나라에서도 알어주는 역발산 한나 나올 뻔 했는디, 보먼 볼수록 심이 아깝구먼 그랴.”

해창댁은 해창댁대로 막둥이의 정신이 그리 된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한탄을 해대고는 했다.

“에레서 열벵을 앓었는디, 아이고오, 이 무식헌 년이 그걸 몰르고 한약을 잘못 믹에갖고, 무담시 멀쩡한 아그를 망체불었단 말이요오.”

막둥이의 최종학력은 국민학교 1학년 중퇴였다. 말이 좋아 1학년 중퇴라지만, 입학한 지 미처 두 달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는데,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것이었다. 나와 같은 반이던 막둥이는 입학 첫날부터 학교 전체에서 대뜸 유명짜한 명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막둥이의 남달리 우람한 허우대며 그 허우대에 걸맞지 않게 모자란 지능에 있었다. 1학년 신입생들뿐만이 아니라 전교생들 중에서도 막둥이의 허우대를 넘어서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우리반 학생들의 맨 꽁무니에서 붙어서서 운동장을 행진하며 담임선생이,

“하나둘.”

하면, 막둥이의 허우대만큼 우람한 목소리가 우리반 전체의 목소리를 뚫고 유독 운동장 가득히 울려퍼졌다.

“넷넷.”

그러면 담임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막둥이를 지적했다.

“정막동! 넷넷이 아니고 셋넷!”

막둥이가 여전히 우람한 목소리로 재빨리 담임선생의 말을 받았다.

“넷넷!”

제 이름을 쓰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 둘 셋 넷, 숫자마저 헤아리기 어려웠던 막둥이가 간신히 흉내낸 것이 넷넷이었다.

우리반 담임선생은 사범학교를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 부임해온 여선생이었다. 일요일이었던가, 그 여선생이 마침 장구경을 나왔던지 역전통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여선생을 놀려먹기로 작정한 장터의 건달들이 돈을 보여주며 막둥이를 부추겼다.

“막둥아, 이거이 백환짜리란 것은 알겄제야?”

“씨이, 나도 알어, 백환짜리.”

“저그 저 여선상 치마만 홀라당 위로 뒤집에뿌러라. 그라먼 이 돈은 니거이 된단 말다아. 막둥이 니는 심도 세고 용감항께 할 수 있겄제?”

“씨이, 나가 그란 것도 못할 줄 알고?”

장터 건달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막둥이는 대뜸 여선생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먼저 꾸벅 인사부터 했다.

“선상님, 안녕, 하세요오?”

막둥이의 인사에 여선생이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오오, 우리 정막동이구나. 그래, 잘 놀았니?”

“예에.”

막둥이는 대답과 함께 얼른 여선생의 주름치마 자락을 움켜잡고서는 훌쩍, 위로 젖혀올렸다. 그렇게 여전히 주름치마 자락을 잡은 채 길가에 서 있는 건달들을 돌아보았다.

“봐, 내가 했제?”

장터의 건달들뿐만이 아니라, 마침 장날을 맞아 모여든 숱한 장꾼들에게 치마를 걷어올려 팬티 구경을 시켜준 꼴이 된 여선생은 그만 스르르 땅바닥에 쓰러져내리고 말았다. 스승이 갓 되어 아직도 세상에 부끄러움이 많던 이 처녀 여선생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고, 막둥이 또한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막둥이와 내가 서로 남다른 사이가 된 것은 바로 그해 겨울일 것이다. 해산물 도매상을 하며 장터에서도 제법 번듯한 기와집과 가게를 지니고 살던 우리집이 하루아침에 집은커녕 방 한칸조차 없는 쪽박 신세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아버렸다. 평소에 엉뚱한 구석이 없지 않던 의부가 어머니 몰래 밀수에 손을 대었는데, 그만 물건을 싣고 도착한 장성포 바닷가 현장에서 형사들에게 잡혀버린 것이었다. 의부가 붙들려가고 덩달아 의부와 동업관계에 있던 어머니마저 자금을 대준 공범으로 몰려 감옥에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집이며 땅이며 전재산을 팔아서 바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지만, 대신에 당장 갈 데가 없어진 우리 식구는 우선 뿔뿔이 흩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이웃집으로 가고, 누나는 누나대로 동무네로 가고, 나는 나대로 외가 쪽의 먼 친척이 되는 집으로 갔다.

내가 간 집에는 마침 풍을 맞아 왼쪽 팔이며 다리를 잘 쓰지 못한 채 거동이 불편한 바깥노인네가 있었다. 노인네와 나는 서로 촌수도 잘 헤아려지지 않는 먼 거리의 외숙질간인 셈이어서 부르기 쉽게 어머니가 하는 대로 용반아제라고 호칭했다. 그렇게 노인네의 방에서 곁붙이로 한겨울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방에는 나말고도 막둥이가 먼저 곁붙이로 와 있었다.  옹기 수요가 별로 없는 겨울철이면 해창댁은 장터에서 삼사십리 떨어진 바닷가 친정 마을로 가서 해산물을 구해 구례나 곡성 근방의 산간지방을 돌며 곡물로 바꾸는 봇짐장수로 나섰는데, 막둥이는 그동안에 바로 작은할아버지뻘이 되는 노인네한테 맡겨진 것이었다.

노인네의 양쪽에서 곁붙이 노릇을 하게 된 막둥이와 나도, 굳이 촌수를 따져 어렵게 셈을 한다면, 서로 보일 둥 말 둥 아득한 거리에서 한방울쯤 피가 섞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노인네를 용반아제라고 부르자 막둥이 또한 덩달아서 용반아제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거동이 불편하여 매사에 신경질적인 노인네의 심기를 한껏 사납게 만들었다.

“이눔, 이 짐생 같은 눔. 용반아제가 뭐여? 나는 니 작은할애비여, 이 불학무식헌 눔아아.”

노인네의 심기가 사나워지건 말건 막둥이는 태평스러운 표정으로 코방귀까지 뀌었다.

“히잉, 대운이도 용반아제라고 불르는디?”

기어코 심통이 터진 노인네는 머리맡에 둔 회초리를 들어 사정없이 막둥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 이, 금수만도 못헌 놈. 대운이는 대운이고, 니는 니여. 아무리 바보천치라고 허제만, 둘이는 촌수가 아조 달른 남남이란 것도 몰른단 말여? 어이구우, 니눔만 보먼 조상님들이 지하에서도 눈을 못 감고 통곡을 허시겄다아.”

노인네가 사정을 두지 않고 휘두르는 사나운 손속의 회초리가 등짝을 후려치는 데도 불구하고 막둥이는 아주 무덤덤한 표정인 채, 흡사 무슨 날파리 한마리라도 쫓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쓰윽, 등짝을 훑고는 그만이었다.

“씨이, 성가시게 왜 자꼬 때리는 거여?”

막둥이의 그런 태도가 노인네의 심기를 머리끝까지 치솟게 만들어 기어이 막말을 하게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어이구우. 우리 집안에 무신 액운이 끼여 말귀도 못 알어듣고 매도 몰르는 저런 인간 말종 같은 것이 튀어나왔을끄나아.”

조손간의 티격태격을 지켜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에 밀려오는 막둥이에 대한 어떤 경외(敬畏) 때문에 거의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노인네의 매질에 대해 일말의 고통조차 느끼는 않는 듯한 막둥이가 숫제 무슨 동화 속의 영웅이나 왕자님들처럼 그다지도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린 나로서는 정작 막둥이가 매에 둔감한 것은 일종의 정신지체나 정신박약의 영향일 수도 있다는 사실 따위는 아예 염두에조차 둘 수가 없던 터이었다.

아아, 노인네가 휘두르는 회초리의 사나운 손속이라니. 노인네에 곁붙이로 사는 내내 나는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시간만 되면, 노인네가 휘두를 회초리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잠이 들 때까지 몇번이고 내복에 오줌까지 지리며 전전긍긍해야 했다. 노인네가 기거하는 사랑방은 방이 넉넉하게 넓은 대신에 외풍이 만만치 않았는데, 방안의 온기가 아랫목에만 몰려 있는 새벽녘이면 추위를 느껴 나도 모르게 노인의 품으로 기어들고는 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노인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초리로 나의 정강이며 발목을 후려치고는 하였다.

“발목댕이 저리 안 치워? 어이구우. 에린 놈이 도대체 웬 발길질이 이리도 독하다냐아.”

불행하게도 막둥이 같은 무신경을 지니지 못한 나는 노인네의 사나운 손속에 자다 말고 깨어나 낑낑거리며 울 수밖에 없었는데, 노인네는 그런 나에게 윗목에서 아무렇게나 퍼져 자고 있는 막둥이를 가리키고는 하였다.

“저그 막둥이 잠 봐라. 초저닉에 잠자리에 든 그대로 엄마나 얌전하게 자고 있냐아. 근디 니는 잠만 들었다 하먼 나한티 기들어와서는 허구헌 날 독한 발길질이니 나가 어디 내 멩대로 살다 죽겄냐.”

잠자리에서 말고도 나는 이따금씩 아침 밥상머리에서 노인네의 회초리 세례를 받을 때가 있었다. 비록 같은 밥상이지만 대식가인 막둥이에게는 아예 나의 두 배는 되는 밥이며 반찬이 따로 나왔고, 막둥이는 그런 구별에 만족한 듯이 노인네의 밥이며 반찬에 별 미련을 갖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노인네와 반찬을 함께 먹어야 하는 내 쪽이었는데, 그때까지 먹고 자는 데 별 어려운 고비가 없이 지내온 나로서는 아무래도 반찬을 고르는 데 조심성이 없기 마련이었다. 장조림이나 갈치자반 등 평소에 못 본 색다른 반찬이 올랐다 싶어 내 젓가락이 건너가면 노인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회초리를 들어 내 손등을 후려쳤다.

“손 저리 치워. 그건 니 같은 아그들이 묵을 거이 아녀.”

내가 젓가락을 뻗쳤다가 노인네로부터 회초리를 얻어맞은 반찬 중에는, 어른들 젓갈질로 겨우 한입 될까 말까 한 무슨 김치가 조그만 종지에 담겨 나온 것도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것으로, 분명히 김치 같기는 한데 예사 김치와는 달리 참깨며 마늘 같은 양념 범벅에다가 토막낸 낙지까지 고명으로 섞여 있어, 보기에도 여간만 군침을 돌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인네에서 달포 가량을 지낸 무렵 어머니가 어렵사리 방 한칸을 마련하게 되어, 마침내 마지막 아침밥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그날도 예의 예사롭지 않은 김치가 종지에 담겨 상에 올랐는데, 무슨 생각이 돌았는지 노인네가 불쑥 내 앞으로 종지를 밀었다.

“아나, 이거, 대운이 니 다 묵어라.”

종지에 담긴 김치를 입으로 넣는 순간, 뜻밖에도 나의 두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내리고 말았다. 내가 얼굴이 온통 눈물투성이가 되어서도 한입 가득히 우적우적 김치를 씹고 있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막둥이가 끼여들었다.

“씨이, 나도 줘.”

훗날 나는 그 김치가 바로 고들빼기 김치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로도, 나는 그때처럼 맛있는 고들빼기 김치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연찮게 막둥이와 달포를 함께 지낸 뒤로,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 막둥이 바보, 하며 놀려대기에는 한번 나의 머릿속에 박힌 그에 대한 경외가 너무 강했을 것이었다. 그런 경외는 어린 나로 하여금 어쩌면 막동이는 동화책의 왕자처럼 못된 마귀할멈의 마술에 걸려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며, 언젠가 마술이 풀리는 날 누구보다도 늠름하고 훌륭한 제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른다고, 나름대로 한껏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했다.

막둥이 또한 내가 그를 대하는 것이 남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모양이었다. 어쩌다 장터에서 서로 마주치면, 그는 다짜고짜 나를 덥석 껴안아올리고는 온몸을 흔들어대며, 사뭇 요란하게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고는 했다.

“대운아, 으히히히.”              

어디서든 나만 보았다 하면 부리나케 달려와 덥석 나를 껴안아올려 일단 온몸을 흔들어대야 직성이 풀리는 막둥이 나름대로의 반가운 기색은, 훗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장터로 내려와 건달들의 똘마니 노릇을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스스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기꺼이 건달들의 똘마니가 된 무렵, 나는 사생아에다가 시골장터의 가난한 장돌뱅이 출신이라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 정도 이상으로 추악하고 음습하게 여기던 터이었다. 당시 내가 치를 떨다시피 싫어했던 말들은 내일이니, 희망이니, 은총이니, 장미니, 영혼이니, 박하향기니, 5월의 아침이니 하는 따위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똘마니가 된 내가 자신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일이란 한껏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밖에 없었다. 그랬다. 나는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리듯이 건달들의 싸움판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내가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어느 무죄한 시골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어쩌다 막둥이가 본 모양이었다. 한주먹에 쓰러져 발 아래 뒹구는 시골사람에게 찌익, 침을 뱉고 돌아서는 나를 막둥이가 막아섰다. 어느 때처럼 나를 덥석 껴안아올리는 대신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나를 향해 부르르 온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나, 나쁜 놈.”

그렇게 온몸을 떨어대는 막둥이의 커다란 두 눈에는 나를 향한 것이 분명할 어떤 의아심과 배신감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그의 눈빛을 받는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막둥이에 대해서 저 동화책의 왕자와 같은 상상은 이미 버렸듯이, 그에 대해 가졌던 어떤 경외 또한 희미하게 색이 바랜 지 오래었다. 또한 노인네의 사나운 손속마저 무위로 돌려버리던 막둥이의 무신경은 고작해야 정신지체나 정신박약이 그 원인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둥이의 눈빛을 받는 순간 나는 또다시 그에 대한 어떤 경외에 빠져들고 말았다. 저 의아심과 배신감으로 가득한 눈빛은 결코 바보의 눈빛이 아니다. 아니 바보의 둔감한 신경 따위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렇다. 평소에 나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결코 저런 눈빛은 생기지 않는다. 아아, 도대체 어쩌자고 막둥이는 기껏해야 자기혐오에 빠져 주먹이나 휘두르는 나에게 저런 눈빛을 보내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저런 눈빛을 받을 자격이나 있는 자인가. 나는 막둥이의 눈빛이 경외스러운 만큼 그의 눈빛을 받고 있은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모르기는 해도 내가 좀더 일찍 건달들의 똘마니 노릇에서 벗어나고, 그리하여 자신의 출신성분과 나름대로 화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막둥이에 대한 경외가 동기가 된 면도 없지 않을 터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에 막둥이는 결혼을 했다. 마침 겨울방학을 해서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였는데, 사모관대를 하고 초례청에 서서 신부의 술잔을 받는 신랑 막둥이는 평소와는 달리 의젓한 모습이었다. 그런 막둥이는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소 닭 보듯 데면데면한 눈길이었다.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의 눈길을 받아들였다. 저 의아심과 배신감이 담긴  눈길 이후, 나는 막둥이에게서 덥석 나를 껴안아올려 흔들어대는 식의 반가운 인사는 두번 다시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막둥이로서는 결혼을 하여 첫아이를 낳기까지의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 그의 생애 중에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신부는 해창댁이 친정마을 부근에서 돈을 주고 사다시피 구한 처녀였는데, 해창댁과 서로 견줄 만큼 작은 키에 왼쪽 눈에 눈알이 없이 숫제 무슨 구멍처럼 움푹 파인 애꾸눈이었다. 남다른 억척빼기로 옹기전과 함께 일수놀이도 벌여 이제 장터에다가 어엿한 기와집도 장만한 채 더이상 남부러울 것이 없는 해창댁은, 신부를 데려오자마자 당장에 병원으로 데려가 큰돈을 들여 눈에 개눈을 박아주어 적어도 겉으로만은 사대육신이 멀쩡한 며느리로 만들어냈다. 이제 20대에 접어든 막둥이도 기골이 장대한 청년으로 힘을 쓰는 데는 장터의 누구도 자리를 넘볼 수 없는 막일꾼이 되어, 장날 아침이나 파장 무렵이면 벌교나 보성 같은 인근에서 온 장꾼들이 무거운 짐들을 트럭에 부리고 싣느라 여기저기서 막둥이를 애타게 소리쳐 불러댔다.

막둥이는 첫아이를 밴 신부가 어쩌다 장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쏜살같이 달려와 두 팔로 껴안아올려 팽이를 돌리고는 하였다.

“으히히히히, 색시야아.”

막둥이가 귀가 찢어져라 웃으며 좋아하면,

“오메, 왜 이란다요. 사람을 이르코롬 어지롭게 맹글어뿔먼 나는 우짜라고 그란다요오.”

허공으로 번쩍 치켜올려진 신부는 남보다 많이 짧은 팔다리를 허둥대고는 하였다. 그러면 옆에 있던 장꾼들이 이 갓된 부부를 향해 너나없이 한 마디씩 부조로 던졌다.

“오메, 막둥이는 좋겄는 거. 저르코롬 이쁜 새악시를 얻어서.”

“어디 막둥이만 좋당가. 새악시밖에 몰르고 저르크롬 낮밤도 없이 끼안고 산단디이.”

막둥이의 첫아이는 아들이었는데, 그러나 세상에 태어난 지 미처 사흘을 넘기지 못한 채 딸각, 숨이 멎고 말았다. 그런데 해창댁에서 비롯하여 장터에 퍼진 소문으로는 아이가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해괴하게도 마치 뱀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온몸을 비비 꼬더니 죽을 때까지 여전히 온몸을 비비 꼬더란 것이었다. 목숨보다 귀한 손주를 놓친 해창댁은 대뜸 입에 거품을 물었다.

“오메, 알토란 같은 내 손주. 내 손주는 기냥 죽은 거이 아녀. 구렝이, 구렝이 땜시여. 하문, 저 웬수녀르 당골레 새끼가 쥑인 거여. 오냐, 어디 두고 보자아. 내가 기냥 멜갑시 당허고만 있을 중 아냐아.”

‘당골레 새끼’란 해창댁 작은방에 세들어 사는 당골레의 큰아들 춘근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그는 나와 함께 장터 건달들의 똘마니 노릇도 한 사이였다. 막둥이의 신부가 배가 보름달만큼이나 불러온 만삭 무렵에 춘근이는 부주의하게도 어디서 잡은 구렁이를 집으로 가져와 뒤뜰에서 산 채로 껍질을 벗겼는데, 어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신부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혼절을 한 채 벌러덩 뒤로 나자빠져버린 모양이었다. 해창댁이 구렝이 운운하며 손주의 죽음을 춘근이 탓으로 돌린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손주를 잃은 해창댁의 깊은 원한에도 불구하고 춘근이의 일은 결국 당골레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한번 불어닥친 불행은 그 뒤로도 해창댁을 결코 그대로 피해가지 않았다. 첫아이를 날려버린 며느리 또한 해산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반년 남짓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아이의 뒤를 따라가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두 식구만 달랑 남겨진 해창댁은 만정이 떨어진 장터를 더이상 견뎌내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정리하여 친정마을로 돌아갔다.

막둥이와 나 사이에도 바로 그 길로 소식이 끊겨버린 셈이었다. 아니, 그 사이에 막둥이에 대한 소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구태여 찾아볼 가까운 일가붙이라고는 없는 고향이란 그만큼 멀게 여겨지지 마련이어서, 나 또한 4,5년에 한번씩 그야말로 징검다리 건너뛰는 식으로 고향을 찾아가고는 했는데, 그런 귀향길에서 무심코 막둥이의 소식을 흘려들은 것이었다. 소식으로는, 친정마을로 돌아간 지 몇해 지나지 않아서 해창댁 또한 병이 들어 세상을 뜨자, 홀로 남겨진 막둥이는 어디 한군데 정착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비렁뱅이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비렁뱅이로 변한 막둥이가 어느 해인가 불쑥 고향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기골이 장대하던 막일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이미 온몸에 병색이 완연한 행려병자가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30년도 훨씬 넘어 다시 만난 막둥이는 내가 이제 막 지나치는 건물의 벽 아래에서 초겨울의 햇살을 받으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복지시설에서 곁눈으로 훔쳐본 수용자들은 대부분이 누가 보아도 금방 행려병자나 비렁뱅이 출신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특유의 어딘가 짓눌린 듯 어눌하면서도 얼뜬 표정과 함께 부자유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었는데, 건물 벽에 붙어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어눌하고 부자유스러운 대여섯 명이 한 무리가 되어 서로 체온이라도 나누려는 듯이 엉켜 있었는데, 그들 중 우연하게 나와 눈이 마주친 한 명이 바로 막둥이였다.

아니, 어쩌면 눈이 마주치기 전에, 나는 그들 중에서도 어쩐지 남달라 보이는 누군가의 기이한 자세에 먼저 눈길이 갔을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아예 땅바닥에 질펀하게 퍼질러앉아 내지르듯 두 발을 뻗고 있는 자세였는데, 함께 해바라기하는 이들 중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신발도 양말도 없는 맨발이었다. 그의 그런 자세가, 기이하게도 나에게는 전혀 엉뚱한 의미로 반전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의 자세는 자신의 안으로 내려간 누군가가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밑바닥에 다다라 마침내 이루어낸 평화 그 자체로 여겨진 것이었다. 내가 평화의 주인공을 찾아 눈길을 위로 더듬어 올렸을 때, 거기에는 결코 낯설지 않은 눈이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누군가의 앞에서 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

“니, 니, 막둥이지야?”

그러자 막둥이가 불현듯 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눈은 아예 감긴 채 입꼬리가 귀밑에 달라붙도록 얼굴 전체에 가득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웃음 위로는 무슨 축복처럼 초겨울의 햇살이 금은의 가루가 되어 내려쌓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득한 웃음 속에 이제껏 그가 살아낸 삶이며, 또한 해창댁이며, 그의 신부며, 심지어는 그의 첫아이까지, 그들이 못다 살아낸 삶까지도 모두 한꺼번에 녹아 있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