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

 

혜강 최한기의 시간관과 일통사상

 

 

임형택 林熒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사의 시각』 『실사구시의 한국학』 등이 있음.

✽ 일전에 「개항기 유교 지식인의 ‘근대’ 대응논리: 惠岡 崔漢綺의 氣學을 중심으로」(『大東文化硏究』 제38집, 2001)라는 논문을 작성하고 끝은 “기학적 논리는 인간과 우주와 자연,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일통사상에 도달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는바, 이에 관해서는 후일의 과제로 남겨둔다”고 맺었다. 이 과제의 해결로서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본고는 이론이나 개념을 위 논문과의 중복을 피하느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간 곳이 더러 있다. 관심을 가진 독자들은 위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필자

 

 

1. 머리말

 

나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21세기의 인류적 과제는 일통(一統), 즉 하나로 화합하는 일이다. 남북통일이 지난 세기의 미해결 과제로 이월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화’가 피하기 어려운 대세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둘러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일통’을 성취하는 대업이 전지구적 과제로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생태환경의 오염·파손이 벌써 위험수위를 넘어선 상황을 둘러볼 때 인간과 대자연의 일통이 실로 요망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통일이란 민족문제 또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식으로 당위성을 부르짖는다 해서 해결될 사안이 아니요, 신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사고의 패러다임으로 접근, 실천해야 할 단계에 당도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일통사상의 정신전통은 없었을까? 분열과 통일의 역사가 있으니 사회적 통합을 위한 사상이 어떤 형태로든 없지 않았을 듯싶다. 신라의 통일과정에서는 불교가 그 기능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주 황룡사의 9층탑은 ‘삼한일통’의 표상이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황룡사 9층탑을 세운 이후 태평성대가 열리고 삼한이 하나로 되었다고 예찬하는 말을 남기고 있다.1 다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옛날 신라는 9층탑을 조성하여 마침내 일통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되새기면서 “지금 개경(開京)에는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는 9층탑을 세워 그 공덕을 빌려 복속하지 않은 무리들을 없애고 삼한을 합해서 하나로 만들겠다”(『高麗史』 「列傳」 崔凝傳)고 다짐했던 것이다.

저 하늘에 우뚝 솟은 9층탑은 과연 기존의 국경 너머까지 공덕의 그늘을 드리웠을까? 지금 나로서 확인할 도리는 없지만, 아마도 망국의 한을 달래주는 효과는 없지 않았을 터요, 항시 고달픈 백성들의 육신에 마음의 위안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실적 의미가 있었을까? 당초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비판의 칼날을 세운 것은 유학의 지식인들이다. 『표해록(漂海錄)』으로 알려진 학자 최보(崔溥, 1454〜1504)는 왕건의 이 정치적 태도를 식견이 좁은 것으로 보고, 난세를 바로잡아 대업을 이루는 도리는 어디까지나 응천순인(應天順人,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인심이 돌아오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역설하였다.2 ‘응천순인’은 합리적으로 진일보한 길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역시 따지고 보면 ‘응천’은 중국중심적 세계질서에 순종하는 자세요, ‘순인’ 또한 뜻은 좋으나 실상은 애매하다. 우리의 역사상에 일통의 사상적 진폭은 대단치 못했던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최한기(崔漢綺, 1803〜77)라는 인물이 비상하게 떠오른다.

한국의 19세기가 배출한 대학자 혜강(惠岡) 최한기는 일찍이 “중국을 배우는 자 서법(西法)을 배우려 하지 않고 서법을 배우는 자 중국을 배우려 하지 않는데, 이 모두 치우치고 막혀서 두루 통하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人政』 권12)고 설파하였다. 그는 지구가 하나로 통하는 시대를 전망하면서 동서의 학문적 회통을 제창한 것이다. 나아가 자신이 몸소 그 방향으로 강구하여 거대한 학문체계를 수립한다. 그것을 일컬어 혜강학이라고 부르는바 곧 기학(氣學)이다. 다시 말하면 최한기는 기학으로 동서의 학문적 회통을 이룩한 것이다.

최한기는 학문연구를 통한 저술이 세상에 끼칠 공덕을, 태양이 떠올라 사해를 밝게 비추고 단비가 대지를 골고루 적셔 만물이 소생하는 데 비유하고 있다. 인간 주체를 고도로 각성한 자세로서, 계몽이성의 무한한 자신감이 표명된 듯 보인다. 학문이 기대하는 극대치를 그는 ‘만국일통 우내녕정(宇內寧靖, 온누리의 안녕)’으로 설정한다. 즉, 기학의 목적점을 일통에 둔 것이다. 요컨대 최한기는 동서의 문명적 만남의 시대에서 일통에 착안하였다고 보겠다.

혜강학—기학은 세계사적 시야에서 이루어진 유교 지식인의 근대기획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간관에서 근대성이 선명하다. 최한기의 일통사상을 주목한 이 글은 먼저 기학적 시간관으로 들어간다.

 

 

2. 기학적 시간관

 

1. 「중국과 서구에서의 시간과 역사」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소개된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의 글(민두기 편 『중국의 역사인식』 상, 창작과비평사 1985 수록)이 있다. 과학문명이 서구에서 발생하고 동양세계에서는 왜 발생하지 않았는가를 시간관의 시각에서 물은 내용이다. 인간이란 됨됨이 자체가 지상에서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존재이므로, 시간관이 그 삶의 양식에 지대한 관련이 있으리라는 데 얼른 수긍이 가진다. 중국과학사에서 세계 독보로 인정받은 니덤의 발언은 이러하다.

“유대-기독교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공간보다 우선한다. 시간의 움직임은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흐르며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과 악마 사이의 기나긴 전투가 벌어지고(…)그중에서 선이 악에 대해 승리할 것이기 때문에 현세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선한 것이 된다.(…)세계는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이며(…)이러한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것이다.”(31면) 반면에 인도-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공간이 시간보다 우선하며 시간은 순환적이고 영원한 것이어서, 현재의 세계는 시간을 초월한 세계보다 덜 현실적이며 궁극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윤회의 고리에 얽매인 인간은 오직 초시간적 해탈만을 환상하게 되므로, 그 시간관은 근본적으로 비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서구인의 ‘직선적인 시간관’이 과학문명의 배경을 이룬 것으로 보기에 순환론으로 현실적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관념이 지배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과학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직선의 서구적 시간관과 ‘영원한 순환의 고리’인 인도적 시간관, 이 양극 사이 어디에 중국인의 시간관은 놓여 있을까? 니덤은 “중국문명에 양자의 요소가 다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전제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내 생각으로는 직선적인 시간관 쪽이 주류였던 것 같다”(35면)고 자기 견해를 밝혔다. 중국과학사를 풍부한 내용으로 구성한 니덤의 경험론적인 답변이다. 이는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의 원인을 그들의 시간관에서 찾는 통설에 대한 반론이었다. 니덤의 이 문제제기는 사계의 관심을 끌긴 하였지만 지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고(故) 민두기(閔斗基) 교수는 『중국의 역사인식』이란 책을 편집하며 위의 글을 서두에 올리면서도 “중국의 역사의식에 직선적 사고가 분명 있었음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중국 역사의식의 전체상인가? 직선과 순환의 복합관계라고 볼 수는 없는가?”(상권 11면)라고 다분히 회의적인 단서를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인식』에 실린 편자 자신의 「중국에서의 역사의식의 전개」라는 논문에서는 “금(今)에서 미래 건설의 활력을 찾는 역사관”(상권 56면)의 결여로 중국인의 역사의식은 고질적인 상고주의(尙古主義)의 늪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한 것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방금 거론한 두 논조를 통해서도 대략 짐작이 가듯, 중국인의 시간관은 착잡(錯雜)하여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있었다. 종교가 귀일(歸一)하지 않았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고 할까. 노장(老莊)사상의 원시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회귀적 관념이 뿌리깊게 작용했는가 하면 인도에서 유입된 윤회사상이 또 만만찮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 가운데서 유교적 시간관은 대체로 사고의 중심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두 우리 한국인들도 역사적으로 공유한 부분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진 않으나 인간과 함께 현재하고 있다. 인간은 ‘금(今)’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가. 한비자(韓非子)는 당대를 ‘근세’로 설정한 다음, 과거를 ‘상고(上古)’와 ‘중세’로 구분하였다. 이 시대구분법은 고정적이 아니어서 ‘상고’ ‘중고(中古)’ ‘근고(近古)’ ‘당금(當今)’으로 나누어 인류사를 논하기도 한다. 한비자에 있어 ‘중세’와 ‘중고’는 같은 개념이니 시간관으로 보면 4분법의 시대구분을 한 셈이다.3 한비자는 중국사상사의 좌표에서 맨 왼쪽에 속한다. 그런만큼 그의 시간관은 직선적이어서 진보적 성격이 선명하다. 따라서 유교가 정통으로 자리잡자 그의 사상은 반역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한비자는 성인에게 모반을 감행한 것이다. 옛날의 정치를 지금에 부활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한비자는 단호해서 요·순(堯舜)이건 탕·무(湯武)건 아무리 성인의 거룩한 정치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사일 뿐이다. 그는 이 주장을 세우기 위해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우리들 귀에도 익숙한 고사를 쓰고 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정치로 당대의 인민을 다스리려 드는 자들은 하나같이 토끼가 다시 걸리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는 부류이다.”(『韓非子』 五蠹) 유교의 관점은 이와 다름이 있다. 선왕=성인은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주고 도덕적 삶을 열어준 존재라고 보는 점에 있어서는 유교나 한비자나 다 같이 생각한다. 다만 유교는 성인의 현재적 부활을 항시 희구하며, 그들의 고뇌는 궁극적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계사의 전개과정은 단 하나의 무대 위에서 재상연됨이 없이 한번만 공연되는 신의 연극이었다.”(니덤, 앞의 글 27면) 서구인의 역사관에 대한 니덤의 수사적 표현이다. ‘연극의 총감독’, 즉 세계사의 주재자인 ‘신’에 괄호를 치면 이 말은 유교적 관념에도 적용될 듯싶다. 신에 상응하는 존재를 유교에서 들어보라면 성인이다.

원시의 인류에게 농사짓기를 가르쳤다는 신농씨(神農氏), 불의 사용을 가르쳤다는 수인씨(燧人氏), 문자를 창조했다는 복희씨(伏羲氏) 등이 상고시대의 성인 아닌가.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는 프로메테우스의 역할을 수인씨가 맡은 셈이다. 만약 불의 의미를 문명의 시원으로 해석한다면 수인씨가 크게 부각되었겠으나 문자에 기반한 동양적 문명 개념에서 그 개창자로는 복희씨가 부상할밖에 없다. 그렇기에, 다음 단계에서 인류를 정치와 도덕으로 지도한 요·순으로부터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거쳐 공자(孔子)에서 종합되는 위대한 성인의 계보가 성립한 것이다. ‘신화의 역사화’를 중국적 현상으로 지적하는 것은 일리가 없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인들 자체의 역사적 공헌을 평가하는 점에서는 한비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금’이다. 한비자는 현체제를 옹호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이다.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그에게 덕치(德治)는 그야말로 흘러간 물이었다. 성인이 부활하여 덕치를 펴기를 지금 기대하는 것은 ‘토끼가 다시 와서 부딪혀 죽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라고 한비자는 비웃었다.

반면, 유교적 관점에서 ‘금’은 잘못된 상태이다. 그 오도되고 타락한 현실은 바로잡아야 옳다. 그런데 지향하는 경지는 언제고 성인이 기획했던 그곳이었다. 태도가 분명히 과거 회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하고 말 것인가? 조선왕조 연산군 때의 어무적(魚無迹)이란 시인은 책력을 바라보며 자연의 3만 6천 날이 인간에서 24시간으로 단축되기를 기원한다. 시간의 진행이 한없이 정체하여 100년의 세월이 1일로 되었으면 하는 공상이다. 그렇게 되면 “요·순은 지금도 얼굴이 젊으시고 주공은 아직 머리가 검으시리”(「新曆歎」)라고 하여, 성인의 태평성대를 우리들 앞에 펼쳐놓고 있다.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여행을 꾸며내지 못한 대신 가상적 시간변조를 통해 유토피아를 현재화한 형태이다. 어무적은 천인의 신분을 타고 나서 시인이 된 인물이다. 자신과 백성들이 함께 겪는 고통과 질곡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한 나머지 그는 복고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르네쌍스가 문자 그대로 과거 회귀가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고문(古文)운동을 선도한 한유(韓愈)의 경우에도 ‘복고’의 구호는 “8대에 걸쳐서 쇠퇴한 문을 다시 일으킨다〔文起八代之衰〕”는 혁신을 의미하지 않았던가. 정약용(丁若鏞)이 필생의 사업으로 경학(經學)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오직 성인의 정치를 ‘오늘’ ‘이땅’에 부활시키고자 하는 뜻이었다. 정치·사회 및 문화의 개조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경학으로 마련한 것이다. ‘구원’의 경지를 지상의 인간 자체의 능력 내에 설정한 점에서 기독교 신학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듯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개혁적·진보적인 기획을 한 것이다.

“천하대세 분열이 오래가면 필히 통합되며 통합이 오래가면 필히 분열된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거대한 역사 드라마를 펼쳐낸 『삼국지연의』의 모두이다. 이렇듯 분열과 통합의 반복으로 점철된 흥망의 과정이 곧 인류역사 아닌가.

 

은나라 주나라에 한·당·송          

商周漢唐宋

바람 앞의 촛불처럼 스쳐갔으니          

忽忽如風燭

인간세상의 흥망은 엎치락뒤치락          

人世幾興亡

천지는 바둑 한판일런가.          

乾坤爲一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독사(讀史)」(『淸虛堂集』 권1)란 제목의 시구이다. 어무적의 백년을 1일로 붙잡아두고 싶어하는 태도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인간적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관점인데, 생에 집착하여 아등바등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극(相剋)·상살(相殺)이 이어지는 인간현실에 깨우침을 준다는 점에서 나는 이러한 역사독법을 옷깃을 여며 접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데 이 관점에 서면 역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경학과 함께 역사를 중시하는 것이 유교적 입장이다. 유교에서 인간의 시간은 본질적으로 유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본디 성인의 바탕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바, 인간의 세상은 성인정치의 재현이 가능한 곳으로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정말 실현된 일은 있지 않았다. 인간세상은 오히려 불교의 설법에서 위안을 찾는 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성인의 정치를 갈구하며, 경전의 해석을 통해 개혁을 모색하곤 하였다. 이것이 곧 진정한 유자의 자세이다. 성인을 끊임없이 희구한 나머지 그 현실화를 위해 진력하여 죽어서야 그만두는 저 자세는, 태양을 향해 한없이 쫓아가다가 마침내 목이 타서 쓰러졌다는 신화 속의 인물 과보(夸父)를 연상케 한다.

 

2. 그렇지만 성인 지향성이 아무리 개혁적 자세라 해도 역시 상고적이다. ‘금에서 미래 건설의 활력을 찾는 역사관의 결여’라는 민두기 교수의 지적은 일리가 없지 않다. 하지만 미래의 상(像)이 전혀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금’의 확신은 과연 어디서 나올 것인가. 있다면 권력에 대한 아첨 내지 순응이다. 개혁의지가 상승할수록 상고로 경사하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성립하는 것은 부득이한 형세였다. 그런데 최한기에 이르러는 마침내 ‘금’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과거에서 현재의 시간상에 무한한 변천, 상하사방의 공간상에 다함 없는 순환을 전제하고 나서 이렇게 천명했다.

 

만약 오늘의 귀와 눈으로 보고 기억한 바와, 행동으로 직접 실천한 바로서 기초와 표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부딪히는 곳마다 들뜨고 학문에 있어서도 몽매하게 될 것이다. (『氣學』 권1, 강조는 인용자)

 

인간으로서의 행동, 학자로서의 학문을 수행함에 있어 요망되는 기초와 표준, 그것은 모름지기 자신의 현재성에서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상고주의를 겨냥한 발언임은 물론이다. 주체의 자각이 현재성의 확신으로 이어져서 드디어 고질적인 상고의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하겠다. 이에 최한기의 학문체계, 즉 혜강학은 더이상 성인의 권위에 기댈 필요가 없어졌다. 탈(脫)경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반면에 정약용의 다산학(茶山學)은 경학의 기초 위에 세워졌던바, 이 경우 탈성리학을 위한 전략적인 면이 있었다. 혜강학에서는 경전을 상대화해 탈상고주의로 나아갔다. 최한기는 어떻게 상고의 늪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금’에 대한 확신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다른 어디가 아니고 바야흐로 동서교류가 발전하는 그 시대에서 터득된 것이다.

19세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서세동점(西勢東漸)이란 세계사적 운동이 동아시아지역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싯점이다. 최한기는 동서의 문명적 만남과 통상교역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긍정적·적극적인 방향으로 인식하여 인류적 행운, 나아가서 우주적 행운으로 추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세의 진출은 중국이나 조선에 어떤 상황을 초래했던가? 긴 눈으로 보면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도 있겠으나 국가와 인민에 엄청난 재난이었고, 당장에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행운이라기보다는 횡액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최한기도 서양제국의 무력적 침공, 종교적 침투에 무지했거나 용인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런 실태를 적시하면서 “이는 교통하는 초기의 현상이며 미구에는 점차 종식될 것”으로 보았다. 이 얼마나 황당한 오판이고 낙관인가? 하지만 거기에는 그 나름으로 사고의 논리가 있었다.

 

마침 학문·물리(천지만물의 이치—인용자)가 열리고 밝아지는 시운을 당해서 옛날 못 보던 서적을 얻어 볼 수 있고 우주에 통하는 물리를 해득할 수 있게 되었다. (『明南樓隨錄』 當此學問條, 강조는 인용자)

 

‘학문·물리가 열리고 밝아지는 시운’이란 서세의 진출로 인해 전지구적인 교통이 개시된 시대를 말한 것이다. 야만적인 폭력과 불합리한 종교가 일시 기승을 부리더라도 머잖아 이성에 의해 종식될 것으로 전망한 때문이다. 이성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다. 최한기 홀로 이렇게 감지한 것이다. 아직은 ‘반쯤 열리고 반쯤 닫힌〔半開半閉〕’ 상황이어서 ‘전환을 하려는데 미처 못한〔欲轉未轉〕’ 고비로 현재를 판단한다.4 말하자면 계몽시대로서 바야흐로 변화가 일어나는 전환기라고 현실인식을 한 것이다. 이 고비를 맞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새로움으로 옛날을 바꾸자〔以新革古〕’는 탈상고의 변혁론을 제기하는데, ‘옛날을 이어 지금을 바꾸자〔紹古革今〕’고도 하였으니 ‘금’의 혁신이 ‘고’와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5 변혁론의 기준이 현재에 확고함으로 해서 과거는 부정적 계승이 되고 미래는 ‘혁금’의 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혜강학은 서두에서 언급했듯 동서의 학문을 기학으로 회통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옛날 못 보던 서적”이란 다름아닌 서양의 과학기술을 담은 책이다. ‘회매(晦昧)세계’에서 ‘광명세계’로 이행하는 선도자가 서적이라는 생각이 그의 소신이었다. 이때 동서의 서적을 매개로 한 지적 교류는 취사선택하는 분별과정이 요망됨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동양국가가 서양국가의 서적을 취할 때 비루한 습속이나 황탄(荒誕)한 교문(敎文) 따위는 배제되어야 할 부분이다. 서양국가 역시 이 점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를 분별하는 방법론이 측험(測驗)이다. ‘측험’은 기학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천하인들이 취사하는 언문(言文, 서적의 내용을 가리킴—인용자)은 만고에 통하고 원근에 달해서, 오직 그것을 측험할 수 있으면 믿고 측험할 수 없으면 믿지 않는다. (『運化測驗』 序)

 

만고와 원근에 통달할 수 있는, 즉 우주보편의 진리와 원칙을 의도한 발언으로 이해된다. “우주에 통하는 물리”란 바로 이를 의미하겠거니와, 기초와 표준을 현재의 나에게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논지와도 그대로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논리를 축약한 말이 있다. “응당 현재의 기로써 근거와 기준을 삼아야 한다.”(『氣學』 권1)

하늘과 땅 사이에서 기의 운화(運化)는 대개 고금의 차이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5천년 전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과 얼마나 다를까? 다만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에서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최한기는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기학인데, 기학의 발전이 “시간으로 헤아리면 만시지탄이 있으나 측험으로 보면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氣學』 권2)고 그는 자신있게 말하였다. 자연적 시간과 인식적 시간을 구별하여, 변화 발전하는 것은 인식적 시간 쪽임을 분명히한 것이다. 최한기에 있어서 탈상고의 진보적 시간관은 기학적 시간관이라 하겠다.

 

3. 최한기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인식적 시간을 일단 ‘고’와 ‘금’으로 양분한 다음, 고는 상고·중고·근고로 다시 삼분하고 있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4,5천년 동안에 대기운화는 조금도 차이가 없으되 인간의 식견은 여러 곱으로 차등이 있다. 상고에는 단지 천도(天道)의 변화만을 알아서 귀신에 의혹되었으며, 중고에는 지도(地道)가 천을 좇아 승순(承順)할 줄만 알아서 끌어다 붙이는 식으로 매몰되었고, 근고의 사람들은 경험이 자못 넓어져서 비로소 기가 천지운화의 형질(形質)이 됨을 알았지만 아직 재제(裁制)·수용(須用)에는 미치지 못했다. 방금(方今)에 이르러는 기계를 설치하여 형질의 기를 시험하고 수리(數理)에 의거해서 활동운화를 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運化測驗』 古今人言氣, 강조는 인용자)

 

한비자의 시간관을 회복한 형태이다. 현재 진행형의 시간대인 ‘방금’은 기구를 이용한 기의 측험이 가능하고 활동운화를 수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 특징이다. 최한기가 기학의 발전으로 규정한 내용이다. 현재의 기학을 기준으로 삼아서 ‘고’를 단계적으로 파악한 것이 위의 삼분법이다. 그런데 왜 꼭 4,5천년일까? 자연적 시간의 영원한 흐름에서 일정한 기간을 끊어 잡았을 때는 무언가 까닭이 있었을 터이다. 그는 다른 자리에서 “서계(書契, 인류 초유의 문자—인용자)가 만들어지고 4,5천년이 지나 비로소 기학의 개념이 드러났다”(『氣學』 권1)고 분명히 말하였다. 서계는, 신화적인 사실이지만 복희씨가 창제한 것이라 한다. 동양적 문명은 문자에 기초하고 있는바, 인식적 시간으로 끊어낸 4,5천년은 문명사적 시간이기도 하다.

 

상고의 천년은 서적이 전하지 않아 증험할 것이 없고, 그다음 천년은 서적이 전해오긴 하지만 초창기의 것이라서 각기 처한 나라의 질박한 일상에 매인 수준이며, 그다음 천년은 견문이 자못 확대되었으나 허실이 뒤섞여서 증험할 만한 것은 적고 측험에 방해되는 것이 많다. 다음 천년에는 사해가 두루 통하고 서적이 교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運化測驗』 序)

 

인식적 시간, 즉 문명사적 시간을 이 경우 서적에 중점을 두어 구별한 것이다. 곧 지식진보의 역사라 하겠다. 천년을 단위로 획선(劃線)한 것이 위와 달라 보이긴 하지만, 시대구분의 전체 구도는 서로 같은 방식이다. 양자의 각 시대에 대한 설명 역시 차이를 보이면서도 주지(主旨)는 상통한다. 상고는 귀신에 현혹된 시대 혹은 문자로 접근 불가능한 고고학적 시대로 의식된 셈이다. 그것은 인류가 회복하여야 할 이상시대가 아니라, 직선의 시간표에서 출발선에 놓인 미개시대일 뿐이다. 중고는 근대 역사학의 고대에 해당하는데 인간이 신의 굴레에 매인 시대로 보고 있으며, 다음 근고의 시간대는 역사학에서 흔히 중세로 일컬어지는 시기에 해당한다. 이 근고의 시대상을 앞의 인용문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기를 인식하게 되었으나 그것을 실용화하는 단계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뒤의 인용문에서는 ‘경험’을 ‘견문’으로 표현을 바꾼 뒤 “허실이 뒤섞여서 증험할 만한 것은 적고 측험에 방해되는 것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허실의 뒤섞임’이란 주로 이기론을 염두에 둔 말이어서, 성리학의 측험에 방해된 역기능을 비판한 것이다. 최한기가 ‘허리(虛理)’와 함께 배격한 것은 ‘무형(無形)’이었다. ‘무형의 신천(神天)’을 숭배하는 것은 ‘공허학’이라 질타하고 있었다. 이는 기독교로 향한 비판이다. 요컨대, 근고시대에 대한 최한기의 인식은 탈성리학·탈종교의 관점이었다.

“사해가 두루 통하고 서적이 교류할 수 있게 된” 마지막의 천년은 앞서의 ‘방금’에 해당하는 시간대이다. 최한기의 ‘인식적 시간’의 기준이 된 현재인데, 그 시대상을 그는 전지구적 시대로 보고 지식의 국제적 교류에 비상히 주목한 것이다. 이 시간대에는 오늘이 놓여 있으니 그의 시간관은 한마디로 ‘현대적’이다. 이 마지막 천년의 기점을 최한기는 언제로 잡고 있는가?

그는 기학의 발전은 대략 3백년 이래의 현상으로 보고 있다. 기학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려 든다면 “이는 3백년 이래 우내(宇內) 현지(賢知)들의 실측·경험의 축적으로 민생일용(民生日用)에 도움을 주는 일체를 폐기하는 짓이라”(『明南樓隨錄』 今以後條)고 지식의 진보에 역행하려는 태도에 쐐기를 박는 논지를 편 것이다. 최한기 시대로부터 3백년 전이라면 대략 16세기 후반이 되는데, 아마도 동서의 문명적 만남이 가능하게 된 싯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특히 서적을 중시하는 그의 담론을 다시 들어보자.

 

3백년 전의 저서들은 초창기가 되어서 역상(曆象)·지구·기계 등 서적들은 겨우 2,3분 모양을 갖춘 정도이지만 개창의 공적이 크다. 2백년 전의 서적들은 자못 구래의 공허한 부분은 줄어들고 후에 개발된 편리한 내용이 증가되었다. 1백년 전의 서적들은 대체로 기계 가운데서 변통 가감이 많이 되었는데 도리상에서 정교(政敎)로 확장된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明南樓隨錄』 開來當務條)

 

‘금’의 시대를 전지구적 시대로 인식한 최한기는 학문 또한 전지구적 차원에서 강구·실천되어야 하는 것으로 사고하였다. 학문의 성과를 반영하는 서적은 일시에 쏟아지는 물건이 아니고 점진적 축적으로 진전되는 것으로 보아, 진전상황을 3단계로 파악하고 있다. 첫 단계에서는 개창의 공적을 평가하였고, 다음 단계에서는 공허한 논리가 축소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지식이 확대된 것으로 판단했는데, ‘금’과 가까운 단계에서 ‘정교로 확장된 면모’는 가시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어떤 의미를 담은 비판일까?

위의 인용문에서는 시간을 백년 단위로 구분한 점이 먼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시간의 큰 구도를 천년으로 구분하고 ‘금’이 속한 천년은 다시 백년 단위로 구분한 모양이다. 우리는 최근에 21세기 새 천년이 시작된다고 하여 요란하고 굉장했던 것을 목도한 바 있다. 현대인은 백년과 천년이란 시간단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동양의 사고전통에서는 그런 관념이 별로 있었던 같지 않다. 최한기의 머릿속에 기독교적 세기 개념이 입력되어 있지 않았을 터이므로 그의 천년, 백년은 그 특유의 시간감각이 표출된 것이다. 인간의 시간을 천년으로 획선하며, 당대는 백년으로 단계를 지은 구분법은, 물론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편의적이고 무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특유의 기학적 시간관의 구분법은 현대적 감각에 맞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에서 어떻게 내일을 열어갈 것인가에 있다. 개래(開來)란 바로 이 뜻을 함축한 개념이다. 최한기는 위에 인용한 그 글을 시작하면서 “개래를 위해 응당 힘써야 할 사무는 오직 신기형질(神氣形質)이 정교에 통달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천명한다. 정교란 정치·교화의 줄임말이지만 최한기에 있어서는 만민을 위한 (正)의 정치학, 즉 인류적 차원의 정치를 뜻한다. 기학에 의해 인류적 차원의 정도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최한기의 지론이었다. ‘정교로 확장된 면모’가 가시적이지 못하다는 그의 당대에 대한 비판은 바로 ‘정의 정치’를 희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이에 그는 ‘일통’을 착안하게 된 것이다.

 

 

3. 중국중심적 일통론과 기학의 일통론

 

1. 일통이라 할 때 ‘통’의 의미를 명말 청초의 대학자 왕부지(王夫之, 1619〜92)는 “통합되어 분리되지 않고 연속되어 끊이지 않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하나로 통합을 이루어 연계되는 상태 그것이 일통이다. 혜강학의 일통 또한 바로 이 개념을 수용한 것이다. 그런데 최한기는 다음과 같이 일통의 단위를 4등급으로 파악한다.

 

일통의 뜻은, ① 우내(宇內)로 일통을 삼아 만세에 이르도록 통(統)을 이루는 것이 있고, ② 일국으로 일통을 삼아 이웃나라들과 먼 지역을 얕잡아보는 것이 있으며, ③ 존왕(尊王)의 명분으로 일통을 삼아 역사기술의 포폄(褒貶)을 엄정하게 할 뿐 형질(形質) 조처(措處)에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있고, ④일가(一家)를 일통으로 삼아 친척 종족들과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 있다.

(『明南樓隨錄』 一統之義條, 번호는 인용자)

 

①이 전지구적 일통이라면 ②는 일국적 일통이고, ③은 역사학의 정통론에 해당하며, ④는 종족적 일통이다. ①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에 대해서는 일통이란 개념을 적용하고는 있지만 한계점을 분명히 두고 있다. 최한기는 일국적·종족적 차원의 일통을 넘어서, 정통론과도 구별되는 ‘우내일통’—전지구적 차원의 일통—을 모색한 것이다.

‘우내일통’을 사고한 논리구조는 공간적으로 하늘과 땅을, 시간적으로 만고(萬古)를 아우르는, 문자 그대로의 우주적 차원이다. 이렇듯 거시적이면서도 그 사고의 중심에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생령이 놓여 있다. 그럼으로써 “편소(5小)한 규모는 천지로 확충이 되고 고루한 견문은 운화(運化)로 변통을 기하여 세상에는 이통(異統)의 명칭이 없고 천하 억조 생령의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다”(같은 글)는 주장을 개진하였다.

이렇듯 일통을 구성한 논리는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데, 더구나 현실화의 가능성에 다다르면 아득하게만 여겨진다. 일통론에 대해서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해명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진다. 어쨌건 19세기 조선의 처지에서 착안한 ‘우내일통’은 대단히 특이하고 독창성이 돋보인다. 이 일통론은 동서가 만난 시대의 세계관으로, 기존의 중화주의적 대일통을 수정하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2. “하늘에는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있을 수 없고, 집에는 두 어른이 있을 수 없다.”(『禮記』 坊記) 하늘에 태양이 한 개뿐이라는 자연현상에다 지상에는 오직 하나의 왕이 있어야 한다는 주관적 이념을 갖다붙인 것은 분명히 논리적 비약이다. 통치자의 독존적 지위를 굳히려는 논리인데, 여기서 ‘일왕(一王)’은 모름지기 일사분란한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대일통’이라는 개념이 성립한 것이다. 일찍이 공자의 『춘추(春秋)』에서 제기되어 『공양전(公羊專)』의 해석으로 확고하게 된 ‘춘추 대일통’이다.6 유학이론과 현실정치를 결합한 한대의 학자 동중서(董仲舒)는 특히 대일통을 중요시하여 “춘추 대일통은 천지의 항구적인 도리요 고금을 관통하는 의리”(「對策三」)라는 주장을 편다. 마침내 유교에 의한 학술사상의 대일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7

역사현실은 항시 대일통으로 올곧게 나갔던 것이 아니었다. 중국사를 회고해보면 분열과 통합이 반복되었던데다 외입(外入)의 왕조가 거의 절반에 이르지 않는가. 정히 실상이 그러했기에 도리어 일통을 바로 세우기 위한 명분이 강조되었다. 이에 정통변통의 구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정통론을 역사기술의 방법론으로 도입, 중국사의 체계를 위대하게 완수한 것은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이다. 이 『통감강목』에 대해 명대의 학자 방효유(方孝儒, 1357〜1402)는 「석통(釋統)」이란 글에서 “주자의 강목이 저작됨으로써 폭력이 처단을 당하고 혼란이 저지되니 만세의 법이 세워졌다”고 그 효과를 극구 찬양하고 있다.8 ‘존왕 명분의 일통’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대일통에 기초한 정통론은 기실 역사현실 앞에서 한족의 민족적 번뇌를 대변한 형식이다. 주자의 『통감강목』은 중화문명의 본거지를 여진족의 금(金)에 내주고 주변부로 밀려난 남송의 입장에서 편찬된 책이며, 방효유의 「석통」은 중국이 몽골족인 원(元)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직후에 씌어졌다. 곧 시대상황이 중화의 정통성 회복을 절실히 요망한 것이다. 따라서 정통론은 중국민족의 입장으로 보면 당연시될 뿐 아니라, 중국사를 통관하는 체계를 세운 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고유한 성격에는 이런저런 문제점이 개재되어 있다. “이적(夷狄)으로서 중국을 찬탈하고 여후(女后)로서 천위(天位)를 차지한 경우 아무리 치적이 부견(苻堅, 중국 남북조 시대 전진前秦의 영명한 군주—인용자)과 같고 재능이 측천무후(則天武后)와 같더라도 정통의 계승으로 될 수 없다.” 방효유의 「석통」에 나오는 말인데, 주자 『강목』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명분이 정통론의 골격이다. 오직 명분에 의해 여자는 제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남권주의가 성립하고, 또 화이(華夷)로 구별하는 중화주의가 엄정하게 된 것이다. 중국 주변의 사이팔만(四夷八蠻)으로 일컬어진 여러 민족국가들은 중국에 복속·순응해야 한다. 현실의 민족 국가들 사이의 질서이기 이전에 이미 정해진 당위의 대의명분이라는 데 문제점이 있다.

역사현실과 대의명분 사이의 모순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17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상황이 곧 그러했다. 당시 조선의 집권세력이 존명(尊明)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여러모로 질곡·장애가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일통의 의미를 통합이 이루어져 끊기지 않는 상태로 규정했던 왕부지는 “분열이 되고 단절이 된 역사에는 애당초 통이 있을 수 없거늘 어디서 정이다 정이 아니다를 논하겠느냐”(「通鑑論」)고 회의적 발언을 하였다. 정통론 자체를 관념적 허구로 돌린 것이다. 최한기는 존왕의 명분으로 일통을 삼는 경우 역사의 포폄을 엄정히하는 데 그칠 뿐 형질 조처에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형질 조처’란 어떤 의미인지 뜻이 얼른 잡히지 않는데 지상의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생존현상을 가리키는 듯하다. 기학은 그 일체를 기의 운화로 설명하고 있는바 존왕 명분은 만물의 생존현상과 유리된 관념임을 일깨운 것이다. 왕부지와 최한기의 비판적 논거는 서로 다르지만 정통론이 현실적 의미를 결여했다고 보는 결론에서는 일치를 본다. 최한기의 경우는 일통의 차원을 전지구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중화주의적 정통론을 탈각했을 뿐 아니라 정통론의 문제의식 자체를 해소시킨 셈이다.

 

3. 혜강학은 천하를 경리한다는 취지로 ‘치천하(治天下)’란 개념을 쓰고 있다. 종래 유학적 실천의 높은 단계인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평천하’와 ‘치천하’는 다른 말이 아니다. 다만 천하의 내포의미가 같지는 않다. 혜강학에서 천하는 중국중심의 천하가 아니고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천하이다. 그리하여 천하 경리의 방향을, “천하가 다 함께하는 근원에 의거하여 천하가 다 함께하는 가르침을 펴고 천하가 다 함께하는 교화를 행해야만 바야흐로 ‘치천하’라 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천하인이 공유하고 동감하는 근본에 의거해서 정교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동문(書同文)·행동륜(行同倫)이란 대일통(중국중심)적 원칙과는 분명히 다른 세계 보편적 원칙을 상정하고 있다. 그런 원칙이 어떻게 세워질 수 있을까 궁금한 사안이지만 뒤로 미뤄두고 왜 굳이 천하 공통을 생각하였는지 먼저 보자.

 

만약 천하가 공통으로 하는 바를 제기하지 않고 일국 일가의 기왕에 시행한 규례나 한두 가지 물사(物事)를 혼자 추측해 얻은 것을 가지고는 천하에 시행할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위력으로 강행한다 하더라도 반(半)천하에도 미치기 어렵겠거늘 어떻게 실효를 기대할 수 있으랴! (『明南樓隨錄』 治天下條)

 

천하 공통의 원칙과 제도를 먼저 제기한 데는 천하 경리─우내일통을 구상함에 있어 폭력적 지배, 병탄의 방식을 처음부터 배제하려는 깊은 뜻이 엿보이는 것이다.

 

일국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의당 온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도모해야 할 것이지만 천하를 경리함에 있어서는 의당 천하 사람들과 더불어 일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明南樓隨錄』 各國生靈條, 강조는 인용자)

 

일국적 차원을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고의 틀은 벌써 일국중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천하를 포괄하고 있다. 최한기가 처했던 19세기 역사의 진로는 민족국가의 독립이었다. 그런데 혜강학에서는 중국중심적 세계의 해체 방향이 민족국가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로 나간 것이다. 일국적 일통의 경우 “이웃나라들과 먼 지역을 얕잡아보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던 터였다. 일통사상은 사상사적 비약이 아닐지? 그런 사고의 논리는 어디서 도출이 되었을까? 일차적으로 박애에 대한 인식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최한기는 정치학의 저작인 『인정(人政)』에서 “사람이 자기 부류를 사랑하는 데 대소 광협이 있는바, 천하인민에 일통하는 사랑이 가장 광대한 것이요, 타국 사람들을 얕잡아보면서 자국의 인민만을 사랑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사랑이란 한 고을 또는 한 가문에 그치는 경우에도 등급이 있어 한 사람만을 편애하는 자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들어가서 사랑〔愛〕과 인(仁)의 관계를 논한다.

 

무릇 사랑이란 인을 베푸는 것이다. 천하의 생령들을 한결같이 보아 인도(人道)가 성립되니 교접(交接)을 제외하고선 인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닌즉, 인(人)과 물(物)을 박애하는 것이야말로 참 사랑이다. (『人政』 「用人」 愛有大小)

 

요컨대 최한기는 박애를 지고의 윤리적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박애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학사의 한 쟁점사안이다. 일찍이 한유(韓愈)는 “박애하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애를 인으로 규정한 한유의 설은 친친(親親)9이란 유교 윤리의 기본에 위배된다 하여 정통 유자들에게 여지없이 매도를 당했던 터였다. 한데 최한기는 박애를 긍정한 한유로부터 무제한으로 나아가서 천하 인민을 한결같이 생각하고 ‘물’에 미치는 광활한 사랑의 장을 열고 있다. 최한기가 말한 ‘교접’이란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교류하는 일체를 가리킨다. 혜강학은 일통을 이루는 단계로서 교접운화를 설정하고 있는바 여기에 박애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일통사상은 박애정신에 기반하고 있음이 역력하거니와, 그 자신 학문의 소산임이며 학문자세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일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려니와 말을 하면 천하인이 취해 쓸 수 있고 발표하면 우내인이 감복할 수 있어야 한다.”(『氣學』 序) 이것이 그가 생각한 학문하는 자세였다. 학문의 효용성 및 이론의 타당성을 전지구적 차원에서 검증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저서로서 『우주책(宇宙策)』이 제목만 전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저서목록에서 가장 자부한 책인데 지금 전하질 않으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우주책』이란 제목으로 미루어 천문에 관련한 내용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그렇지 않다. 『지구전요(地球典要)』라는 지리·천문에 관련한 저서의 범례에서 『우주책』 12권과 『지구전요』는 안과 밖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덧붙인 말이 있다.

 

혹은 안에서 얻은 바로 밖에 실시하고 혹은 밖에서 얻은 바로 자기 안을 가다듬는다. (『地球典要』 凡例)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논리인데 밖이 『지구전요』임에 대해서 안은 『우주책』에 해당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즉, 양자는 세계인식과 주체확립으로 관계가 지어지는 것이다. 우주란 개념을 남송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을 비롯하여 조선의 성호(星湖) 이익(李瀷) 같은 학자들은 상하사방과 왕고래금(往古來今)으로 해석하여, 시공간을 통일체로 사고하였다. 『우주책』의 우주는 곧 이 개념이니 상하사방의 공간과 왕고래금의 시간 그 가운데 주체로서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학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 주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혜는 만물의 변화를 종관(縱貫)하되 거짓이 없고, 재능은 생민(生民)의 액운을 구제하되 자랑하지 않는다”(『明南樓隨錄』 智可綜條)고 명시한 다음, 무슨 방도로 그렇게 할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 자문에 자답하여 “아무리 천품이 특이하다 할지라도 필시 정교(政敎) 학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체의 가능성은, 혜강학에 있어 다른 어디가 아니고 학문을 통해, 그리고 정치적 실천으로 열리는 것이다.

『우주책』의 구체적 내용은 지금으로선 알아볼 길이 없다. 본고에서 자주 거론한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에서 특히 『우주책』에 대해 종종 언급하고 있는바 그 전체를 개괄한 문장이 보인다.

 

생각건대 이 『우주책』은 곧 여러 천년 동안의 사해 서적들을 한 실내에 취합해, 문견의 축적이며 증험의 성과로서 이루어진 것이다. 4등 운화의 신기형질은 전대에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고 후세에 응당 열어야 할 것을 열었다 하겠다. 늙음이 이미 닥쳤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오직 날이 부족할 따름이로다. 계왕(繼往)은 대략 갖추었다 하겠으니 개래(開來)는 무궁할 것으로 생각한다. (『明南樓隨錄』 語踐階級條)

 

노학자로서 오직 남은 날이 부족함을 걱정하며 저술에 매진하는 그 자세는 거룩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우주책』이 인류적 학술지식의 양질을 섭취했다는 의미에서 ‘계왕’이란 말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 자신 창조적인 것으로 자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개래’의 효과를 기대한 내용은 다름아닌 ‘4등 운화’이다.

 

일신의 신기운화로부터 시작, 근원에서 지류까지 다 궁구해 밝히고, 나아가 교접운화로서 원근에 모두 통달하며, 또 나아가 통민(統民)운화로서 우내에 통달하게 된다. (같은 곳)

 

‘일신의 신기운화’란 주체의 작용에 속하는 기학적 개념이다. 전통적 논리로는 ‘수기’의 측면이다. 일신운화에서 교접운화로, 다시 통민운화로 밀고 가면 우내일통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논법이다. 앞의 4등 운화는 바로 이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인정』의 범례를 보면 일련의 과정이 한결같이 대기운화를 본받고 따르는 것으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일통운화는 천인(天人)의 합치인데 그것을 인정(人政)의 요체로 보았다. “하늘에 있어서 대기운화와 인간에 있어서 정교운화는 다함께 승순(承順)을 좇아 성취된다.”(『承順事務』의 별지) 기학의 핵심적 논리이다. ‘승순’ 역시 기학적 용어로서 “천기를 이어받고〔承天氣〕 인사를 순조롭게 한다〔順人事〕”는 뜻이다. 이것이 다름아닌 ‘정(正)의 정치’이다. ‘정의 정치’는 ‘승순’에 달려 있으니 곧 일통이 구현되는 지점이다.10

 

4. 이상 살펴본 일통론은 낙관주의적 이상론이란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야말로 거대담론이어서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다섯 섬들을 바가지처럼 호수에 띄워놓고 두둥실 타고 놀기에나 알맞은, 그런 지적 유희의 거리에 지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물론 최한기는 스스로 자부했던 만큼 응당 실현되어야 하고 또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의 이론적 신념에는 인간관의 바탕이 있었다.

 

우주사도(宇宙師道)는 모든 국가들의 인민이 살아가는 그 가운데 잠재해 있다. 그럼에도 아직 천명되지 못한 것은 여러 국가들의 정교가 각기 경계로 국한되어 있어 회통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明南樓隨錄』 宇宙師道條, 강조는 인용자)

 

‘우주사도’는 『우주책』을 지은 최한기다운 개념이라 하겠다. 만국이 귀일되는 학술교육의 길을 이름한 것이다. 이 우주사도의 길에 장애물은 국경선이라고 감히 지적하였다. 역시 우내일통을 염원한 최한기다운 초시대적 발상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주사도는 “인민이 살아가는 그 가운데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국가 단위에 묶이지 않는 인간의 보편성에 주의하고 있다. “각국의 생령들이 원근에 흩어져 천도(天道)를 받들어 저마다 생업에 종사하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현상이다.” 천지 사이 왕고래금에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형태를 이같이 묘사한 다음 자기 견해를 편다.

 

서민들은 항시 걱정이 많아 작게는 해침을 받을까, 크게는 침략을 당할까 한다. 필시 생령 중에는 재주와 국량을 지닌 자들이 있어 일통도평(一統圖平)의 구상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해마다 진보한다. (『明南樓隨錄』 各國生靈條)

 

이리하여 제기되는 ‘일통도평의 구상’이란 그야말로 필부의 세상 걱정에 지나지 못하나 그것을 한데 취합하면 ‘우내대동(宇內大同)’의 막기 어려운 형세를 이룬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재형태 자체가 본원적으로 안녕과 평화를 희구하므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일통의 기획을 궁리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내대동’의 인류적 공동보조는 막기 어려운 형세로 출현한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앞서 논의했던 바 “천하를 경리함에 있어서는 의당 천하 사람과 더불어 일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는 주장은 바로 이에 근거해서 나온 발언이다. 천하의 동지·동도(同道)의 사람들과 뭉치는 일이 참으로 어렵긴 하지만, 천하치평(治平)의 훌륭한 구상들을 결집, 각국 제도의 장단점을 절충하고 생민을 바른 길로 인도하면 일통치평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11 그는 일통의 실현가능성을 이렇게 내다보았다. 일종의 시민운동적 차원으로서 계몽이성의 국제적 연대를 떠올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또 상기해야 할 점이 있다. 최한기는 동서교류의 현재와 미래를 낙관하였다. 그가 진보적 시간관을 갖게 된 주요인이거니와, 일통론의 낙관적 전망은 바로 이 시간관에 직통하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최한기는 『우주책』을 두고 ‘계왕개래’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자부하면서 “나의 생애에서 종결될 일이 아니니 오직 후세의 현지(賢知)들에게 소망을 붙이노라”(『明南樓隨錄』 語踐階級條)고 하였다. 과거에서 현재·미래로 연속된 시간을 계승과 창조의 과정으로 사고한 그는 ‘우내일통’이란 인류적 대업에 스스로 확신을 가지면서도 단기적 과제로 생각지 않고 천하의 세대로 이어지는 현자·지식인 들의 연대적 노력 여하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일통의 대업은 최한기 사후에 과연 성취되었던가? 지난 역사를 회고하건대 긍정적 답변은 아무래도 나오기 어렵겠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세계는 국가주의적 부국강병론이 판을 치고 전지구가 제국주의의 식민화로 분할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사 이래 없었던 세계대전이 거듭 일어나더니 이후로도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혜강학의 일통론은 역사 현실에서 철저히 외면을 당한 꼴이다.

그런데도 바로 이 기간에 일통을 향한 움직임이 전무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일찍이 만국공법이 제정되었던 터이거니와, 2차대전 이후 UN이 결성되어 그런대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유럽공동체는 국경을 넘어선 지역공동체로서 근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해냈다. 그리고 더욱 주목할 사실인데 인류적 대의와 인간주체의 자기비판·자정능력의 표현으로서 운동 차원의 국제적 연대가 일어나는 추세다. 세계사는 일통을 향해 가고 있다. 이것이 나의 기본시각이지만, 서구 주도의 근대 선상에서는 진정한 일통을 전망할 수 없다고 본다. 서구근대의 주류 논리는 상생이 아닌 상극이요, 화합이 아닌 대립이며, 자연과의 조화를 원칙적으로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전론이 근대를 선도한바 과학기술의 급진에 제어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서구 특유의 사고의 논리를 최한기는 간파하지 못했던 듯싶다. 아니, 기학을 중심으로 동서 학문을 회통시킴에 따른 맹점으로 볼 수 있겠다. 오히려 그 맹점을 21세기에는 장점으로 돌려볼 수 없을까.

본고는 혜강학을 일통사상에 촛점을 맞추어 살펴보았지만 겨우 첫발을 들여놓은 데 불과하다. 일통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인지 생각해보자면 혜강학의 총체에서 그 논리가 더욱 심도있게 해명되어야 하고 또 ‘지금’ 안과 밖의 정세와 대국에 대해 투철한 안목을 가져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우선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두 가지 점만을 들어둔다.

첫째,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문제다. 한반도의 통일과업은 민족문제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녕·평화가 달린 세계적 현안이다. 2차대전 이후 지구상에 분단국가가 몇몇 등장하였는데, 베트남은 민족해방투쟁의 방식으로, 독일은 냉전체제의 해체에 따른 흡수통일의 방식으로 각기 해결을 보았다. 한반도는 베트남식으로도, 독일식으로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판명되었다. 제3의 통일의 길을 찾아갈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분단의 ‘불구 국가’는 국민국가의 수립과정에서 발생한 차질인데, 그 불구상태가 치유 불능에 이른 셈이다. 남북을 국민국가의 틀에 집어넣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국가 해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제화의 경향이 자본에서, 문화에서 현저하다. 계속 민족주의에 사로잡히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으며, 국가주의는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문제이다. 남북을 연계하는 제3의 제도와 함께, 동아시아 연합, 나아가서 전지구를 화합하는 ‘우내일통’의 문명과 제도를 이상의 차원이 아닌 21세기 인류의 대업으로서 기획해봄직하다. 최한기의 일통사상의 논리는 여기에 참작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이다.

둘째, 인간과 자연의 화해·균형을 추구한 점이다. “인사(人事)는 천도로 말미암아 질서가 잡혀 어지럽지 않으며, 천도는 인사를 좇아 모든 생명체를 보각(普覺)한다”(『氣學』 권1)는 천과 인의 상호 유기적 관계가 혜강학의 핵심이다. 일통은 자연과의 일통을 떠나서는 당초에 성립할 수 없다. 이 사고의 논리는 동양 전래의 ‘천인일치’와 똑같아 보이지만, ‘기’ 개념을 중심에 놓고 서구 근대과학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역사 현실에서 혜강학이 외면을 당한 주요인이 이 점에 있었던 셈이다. 만약 혜강학을 기초로 ‘근대’가 실현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적어도 생태환경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학의 논리가 ‘자본주의적 근대’의 대체논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차 자연생태의 문제를 중시해서 문명의 틀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것을 전환의 계기로 삼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와 관련하여 기학적 개념들─고금의 시간을 인류의 생명적 연속성으로 파악하는 ‘인도(人道)’, 그 전체를 하나의 생생(生生)으로 인식하는 ‘일생(一生)’ 등은 신사고의 이론으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근래 최한기의 친필 수고들을 직접 대할 기회가 있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들을 모아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를 간행한 바 있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이 30년이 지나 다시 증보작업을 하는 데 접수된 것이다. 나는 그 감회를 한시 형식을 이용해서 “學通氣測合天人, 一統環球同四隣. 千卷著書今上梓, 名傳不朽鎭風塵”이라고 표현해보았다. 이 글을 끝맺는 자리에서 그의 유고가 완간되는 사실을 밝히고 감회를 나타낸 시를 풀이해둔다.

 

학문은 신기 측험으로 통해 천인을 화합하니

우내일통 이루어 사방이 동포처럼

천권의 남긴 저서 이제야 다 공간되는구나

그 이름 불후로 전하고 지상에는 평화가 깃들이리.

 

 

--

  1. 『三國遺事』 卷3 「興法」 黃龍寺九層塔.
  2. 『錦南集』 卷1 「東國通鑑論」 麗王嘗謂崔凝條.
  3. 『韓非子』 五蠹(『韓非子翼毳』 第19, 漢文大系本).
  4. 『明南樓隨錄』 試欲宇內條.
  5. 『明南樓隨錄』 在神氣運化條.
  6. 공자의 『춘추』는 “춘왕정월(春王正月)”로 시작이 된다. 『춘추공양전』은 “왜 왕정월(王正月)이라 했느냐? 대일통(大一統)이다”라고 해석을 한 것이다. 공자는 주(周)왕조의 통치가 정당하고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왕정월로 썼다는 생각이다. 후한의 경학가인 하휴(何休)는 ‘대일통’의 의미를 해석하여 “통이란 비롯이니 모든 것이 매여 있다는 말이다. 무릇 왕이란 처음 명을 받아 정교(政敎)를 천하에 펼침에 있어 공후(公候)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산천으로부터 초목·곤충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정월(正月)에 매여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정교의 비롯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7. 중국사에서 유교에 의한 문화 대일통이 이루어진 것은 한 무제(武帝)의 “백가를 축출하고 오로지 유학민을 높인다”는 정책에 의해서였다. 이에 대해 중국의 근대학자 후 스(胡適)는 흑백논리로 하나만 높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진시황의 분서(焚書)에 비견한 바 있다.
  8. 「석통」은 상·중·하와 「후정통론(後正統論)」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방효유의 문집인 『손지재집(遜之齋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방효유는 대의명분으로 황제의 불의에 맞서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한 비극적 인물이다. 조선조에서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사건과 흡사한 일이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에 의해 자행되었다. 영락제는 방효유를 불러 제위가 바뀐 사실을 천하에 공표하는 조서(詔書)를 짓도록 강압하니 그는 ‘연적찬위(燕賊簒位)’(영락제가 연왕燕王으로 있었음)라 쓰고 붓을 던졌다 한다. 정통론을 다시 확립한 그의 입장으로서는 황제권력의 불의에 무릎을 꿇을 수 없었던 것이다.
  9. ‘親親’은 어버이를 가장 가까이 한다는 의미로, 맹자는 “親親, 仁也; 敬長, 義也”(『孟子』 盡心章)라고 말한 바 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자기의 친부모에 대한 태도를 같이 할 수 없다는 뜻에서 유교의 사랑은 등차적인 것이다.
  10. 이 대목은 추상도가 높고 용어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다. 참고로 국공(國工)·국상(國商)을 소개해본다. 『人政』 「用人」 工商通運化에서 “상공업은 운화의 통하고 불통함과 민용(民用)의 이롭고 불리함으로 귀천 우열을 삼는다”고 그 특성을 지적한 다음, 상공인들을 필요에 따라 기용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국공과 국상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국상에 대한 설명을 보자. “상인이 물화의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해서 민용을 풍부하게 하면 ‘사업’이 되지만 이득을 탐내 취하기만 하면 수치가 된다”고 전제한다. “풍흉을 살펴서 상평(常平)을 유지토록 하고 토의(土宜)를 헤아려서 운수가 편하도록 조절하며, 나라에 조달할 물자가 있으면 성심으로 이바지하는 것이 곧 국상이다”라고 규정하고서 국상의 조처하는 바 또한 ‘승순운화의 기(承順運化之氣)’에서 나온다 하였다. 이용후생의 방향에서 상공인을 옹호하고 있는데, 그 사고의 논리는 ‘승순운화의 기’라는 인사와 천도(자연의 이법)의 균형을 취하려는 것이다.
  11. 『明南樓隨錄』 各國生靈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