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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아! 아프간, 아프가니스탄

도돌이표 역사 30년

 

 

이옥순 李玉順

한국아세아학연구소 부소장, 인도근대사. 저서로 『여성적인 동양의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등이 있음.

 

 

테러리즘은 손에 든 폭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 있다.

─오쇼 라즈니스

 

 

코끼리 사격, 테러 사격

 

드디어(!) 2001년 10월 7일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뉴욕의 세계무역쎈터를 쓰레기더미로 만든 9월 11일의 테러에 대한 보복이었다. 내 어머니가 갑자기 발병하여 의식불명이다가 돌아가신 길지 않은 그 20여일 동안, 세상의 많은 이들이 ‘21세기의 첫 전쟁’ ‘악에 대한 투쟁’을 기다렸다. 무역쎈터처럼 주저앉은 미국의 자존심을 되살려 하루빨리 초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라고 노골적으로 보복을 부추기는 사람도 있고, ‘언제 공격할 것인지 관심이 증폭된다’ ‘공격목표가 초미의 관심사’라는 표제를 달고 ‘군사작전 씨나리오’를 흘리며 미국정부에 은근하게 강공(强攻)을 주문하는 언론도 있었다. 라디오방송이 반복하여 들려주는 국가(國歌), 불티나게 팔리는 성조기로 상징되는 미국의 애국주의도 군사공격을 압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부시 대통령은 취임 초에 언명한 ‘힘에 의한 대외정책’을 실천했다.

상중(喪中)이라 한층 죽음에 민감한 나는 그러한 수사(修辭)와 그 결과인 불꽃놀이 같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장면을 지켜보면서 죠지 오웰(George Orwell)의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를 떠올렸다. 죽어 넘어진 잿빛 코끼리의 모습이 무너진 무역쎈터의 잔해와 겹쳐져 어른거렸다. 1936년에 발표된 「코끼리를 쏘다」는 식민지에서 남성다운 힘과 위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강한 지배자로 남아야 하는 백인의 곤혹을 담은 단편소설이다. 미얀마에서 경찰관으로 일하는 영국인 주인공은 발광한 코끼리가 시장을 휘젓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소총을 들고 출동한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집에서 기르는 코끼리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깨닫지만, 모여든 수천명 군중은 백인 경찰관이 코끼리를 쏘길 기대한다. 그 집단적 의지의 압력에 굴복한 경찰관은 구경꾼들에게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무해한 코끼리에게 총을 겨눈다.

나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파괴하는 오웰의 그 경찰관 너머로 지난 50년 동안 연마한 강대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강자로 행동해야 하는 미국의 딜레머를 본다. 수십년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이 ‘성난 코끼리’가 아님을 미국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사일과 식량을 동시에 투하하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통해 중세적 타자 ‘악’을 사격하는 ‘정의의 사도’라는 걸 만방에 증명해야 하는 완력의 포로였다. 백인은 가면(mask)을 쓰고 있고, 그들의 얼굴은 거기에 맞게 자란다고 대영제국의 공동(空洞)을 간파한 죠지 오웰의 통찰은 오늘날의 제국인 미국에도 유효하다.

그랬다. 아프가니스탄은 미사일공격에 딱 맞는 ‘성난 코끼리’가 아니었다. 미국정부가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알 카에다(Al-Qaeda) 조직이 있는 곳을 향해 ‘무한한 정의’를 외칠 때, 그 땅에는 인구의 절반인 아동과 또다른 절반인 여성, 원조에 의지하는 700여만명의 인구가 1천만개의 지뢰와 동거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아프간인은 빈 라덴이나 그를 비호하는 탈레반(Taleban)을 지지하거나 지도자로 뽑지 않았지만, 그 ‘무죄’는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 변경지대의 삶은 고달프다. 매일 영원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늘 위험이 감돌고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19세기 한 영국인의 기록은 21세기 아프간인들의 생생한 하소연으로 변했다.

베트남에서 ‘베트콩’으로부터 마을을 구하려고 마을 전체를 불태운 미군의 방식은 이번에도 애용되었다. 소수의 ‘악’을 위해 희생되는 다수는 무고한 아프간 민중이지만, 누구도 공습의 결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과 피해자에 대한 억압의 상동성은 상상의 영역에 넘겨지고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 분노의 존재론적 현실은 묻혀졌다. TV를 보는 사람들은 악을 징벌하는 ‘선한’ 미국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타자와는 멀어졌다. 아프간전쟁에 아프간인은 없다! 그러나 방어능력이 없는 대상을 두고 미국식의 정의를 주장하는 그 힘의 행사는 승리처럼 보이는 패배를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승리했으나 패배한 자들의 기록인 아프가니스탄의 최근 30년 역사를 돌아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왕’이 되려는 자들

 

19세기의 ‘미국’인 대영제국을 찬송하며 ‘백인의 짐’을 설파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왕이 되려고 하는 자」(The Man Who Would be King)라는 소설에서 서로 싸우는 아프간인으로부터 왕국을 뺏으려는 백인을 그렸다. 아프간인들은 군사기술을 전해주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인을 신처럼 받들지만 근대화가 정도를 넘자 왕이 되려는 백인을 살해한다. 동시대 영국인이 쓴 다른 작품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늘 불안정하고 통치하기 어려운 땅으로 묘사된다. 그곳에 사는 아프간인은 “담요를 짜거나 논밭을 경작하며 자식을 걱정하는” 지루한 일상보다 전쟁을 선호하고 ‘소총을 훔치는 전문가’이지만, ‘유부녀의 애인’으로 모험과 아슬아슬한 생활을 즐기는 전사다운 부족으로 등장한다.

러시아의 남하를 의식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삼으려던 19세기 영국의 상상력을 자극한 ‘남자다운 남자들’의 땅 아프가니스탄에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왕’이 되길 소망하는 수많은 자들이 등장했다. 20세기의 그들은 ‘전지전능한 서구!’라는 키플링 아류의 슬로건을 신봉하는 영국·러시아·미국 등의 서구인이거나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 사는 ‘단순하지만 호전적인’ 이른바 루쏘(J.J. Rousseau)의 고상한 야만인이었다. 최근에는 파키스탄을 선두로 이란과 싸우디아라비아 등 인접국들도 ‘킹 메이커’의 야망을 드러냈고, 1989년 소련이 철수한 뒤 10여년은 내전이라는 이름 아래 ‘왕권’을 넘보는 군벌의 싸움이 한층 심해졌다. 그리고 지난 12월, 미국의 공습으로 쫓겨난 탈레반을 이어서 카르자이(Hamid Karzai) 임시정부가 새 ‘왕’이 되었다.

우리는 흔히 과거를 잊어서 역사가 반복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왕’이 되려는 자들의 명멸(明滅)을 반복한 아프가니스탄에는 역사가 실종되었는가. 이러한 논의가 가지는 필연적 함정은 ‘왕’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민중을 간과하는 ‘위로부터’의 시각이다. 인도의 고대 금언은 ‘통치하는 자가 없으면 통치를 받는 자가 없고, 통치를 받는 자가 없으면 통치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전한다. 수많은 사람을 배제하는 역사는 반쪽의 진실에 불과하다. 나는 아수라와 같은 시공을 견디는 아프간 민중의 존재나 지지를 전제하지 않은 ‘왕’들의 오만함이 유성처럼 빠른 소멸을 자초했다고 믿는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나라에서 다른 사람의 존재나 그 바람〔願〕을 포용하지 못하는 자는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Mohammad Daud)는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 자히르 샤(Zahir Shah)와 왕정을 축출하고 공화국을 세우며 ‘왕’의 교체로 점철된 최근 30년의 역사를 열었다. 다우드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스스로 대통령에 올랐지만 독재정치로 일관하다가 78년에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이어 공산당정부를 이끈 타라키(Taraki)도 이듬해에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부수상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아프가니스탄의 새로운 실력자가 된 아민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면서 위성국의 상실을 두려워한 소련과 갈등을 빚었고, 79년 아민은 피살되고 친소 카르말(Karmal)정권이 들어섰다. 카르말을 지지하기 위해 같은해 12월 훈련을 핑계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은 카르말이 아프간의 지지를 끌어내지도, 세력을 확대하지도 못하자 86년에 비밀경찰책임자를 역임한 나지불라(Najibullah)를 불러들였다. 87년에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Mujahedeen)과 투쟁하면서 92년까지 겨우 자리를 보존했다.

70년대말 이후의 좌익정부들은 무력으로 사회를 빨리 변화시키려다가 실패했다. 봉건문화와 이슬람의 권위와 구조의 전위(轉位)와 해체를 염두에 둔 급진적 정책이 이슬람단체, 부족지도자, 지주, 전통적 엘리뜨, 지식인의 대량 탄압을 수반하면서 아래로부터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고전적인 맑스·레닌주의의 수사에 부합하는 고리대의 폐지, 남녀평등, 토지개혁도 보수적인 이슬람 사제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농촌사회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다. 민중의 참여와 대표성이 없는 소수가 총칼로 강제하는 급진적 변혁은 테러의 반복을 낳았고, 공산정부에 반대하는 폭동과 반란이 심해지면서 국가구조가 무너졌다. 79년에는 헤라트와 카불 등 여러 곳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때를 틈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냉전체제의 초강대국 소련은 참담한 결과를 맛보았다. 소련이 세운 카르말정권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뿐더러 세력판도가 카불의 외곽을 넘지 못했다. 헤라트와 칸다하르 농촌지역의 80%는 소련군 12만명의 지원을 받는 카르말정권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대다수 아프간 민중은 비(非)이슬람이며 외세가 후원하는 공산정부와 그 정권을 지지하는 소련을 반대했다. 카불대학생이 데모를 벌이는 등 반소운동이 거세지면서 체포와 구금이 일상사가 되었다. 정부가 기능을 못하자 너도나도 무기를 들었다.

1980년부터 농촌에서 성전(聖戰)을 내걸고 무자헤딘이 반소항전을 시작했다. 카르말의 세력이 전국으로 미치지 못한 한 이유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인 무자헤딘의 저항이었다. 소련은 아랍권의 무슬림이 합류한 무자헤딘의 영향력이 도시로 확산되지 않도록 폭탄을 투하하고 시민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강수를 두었다. 이 기간에 아프간 민중의 선택범위는 강제로 이주되거나 수용소로 가는 것, 아니면 국외로 도망가거나 죽는 것뿐이었다.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6백만여명이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떠났고, 국내에서도 수많은 인구가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싸우다가 죽고, 학살되거나 굶어죽은 아프간인은 1백만명이나 되었다. 이런 와중에 전통적인 사회와 문화는 파괴되고 아프간의 인적 자원, 특히 교육받은 계층은 고갈되었다

아프간의 협력을 얻는 데 실패한 소련은 무자헤딘과 직접 싸웠다. 카르말에게서 정권을 인수받은 나지불라는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소련에만 의존할 뿐 무능하긴 마찬가지였다. 아프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나지불라의 통치권은 늘 제자리를 맴돌았다. 이는 그만큼 아프간의 반소항전이 강했다는 반증이었다. 나지불라가 아프가니스탄의 전역을 지배하는 걸 저지한 동시에 소련에 큰 타격을 준 무자헤딘의 가장 유명한 전투는 1982년 판지시르(Panjshir) 전투였다. 전설적인 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Ahmad Shah Massoud)가 지휘한 따지끄 의용군은 180명을 희생하여 탱크와 미그기로 무장한 소련군 1만 2천명을 섬멸하였다.

무자헤딘은 전투경험이 부족하고 조잡한 무기를 가진 오합지졸이었지만, 1984년부터 미국 CIA와 ISI(파기스탄 정보국)의 엄청난 지원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전투태세를 갖추고 큰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85년에는 카불의 인근까지 밀고 들어가 수도를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이 파키스탄을 통해 극단적인 무자헤딘을 지원한 것은 이슬람교가 반(反)공산주의라는 믿음에 기초했다. 무자헤딘은 풍부한 군사지원과 지형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소련군을 무덤으로 보냈다. 1만 5천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목숨을 잃은 후 싸울 의지를 상실한 소련은 88년부터 철수를 개시하였고, 이듬해 2월에는 마지막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났다.

나지불라를 상대로 전투를 계속한 무자헤딘은 92년 카불에 입성하여 공산정권의 장막을 걷어냈다. 그것이 전쟁의 끝은 아니었으니, ‘왕’이 되려는 무자헤딘의 다툼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내전으로 치달았다. 공동의 적이 사라진 그들은 종족, 종파, 지역과 성향이 다른 군벌의 갈등으로 분열되고, 서로 카불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같은해 5월 수만명을 살상하고 카불을 장악한, 마수드가 이끄는 따지끄계(系) 무자헤딘은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를 수반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따지끄계를 반대하는 파슈툰 군벌은 카불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계속했다.

이후 군벌들은 10여년간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반복하면서 유혈투쟁을 벌였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적의 적은 나의 동지가 되었다. “영원한 우방은 없다. 영원한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라는 말은 옳았다. 나지불라정부에서 대통령경호실장을 지냈고, ‘공화국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무자헤딘과 싸운 우즈베끄계 압둘 라시드 도스툼(Abdul Rashid Dostum)은 1992년에 마수드에게 매수되어 나지불라를 배반하고 일부 공산세력을 끌고 카불의 랍바니정부와 손을 잡았다. 배반의 ‘왕’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는 94년에 다시 헤크마티아르(Hekmatyar)와 연합하여 카불을 공격했으나 곧 마수드에게 패퇴하여 우즈베끼스딴 접경 마자르-이-샤리프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카불을 두고 마수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군벌은 남부를 장악한 파슈툰 출신의 헤크마티아르였다. 그런 그도 95년에 연대한 도스툼을 저버리고 마수드와 타협하여 랍바니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았다.

카불을 장악하려는 군벌간의 치열한 싸움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난장판이 되었다. 희생자는 아프간 민중이었다. ‘왕권’에 눈먼 군벌은 민중을 의식하지 않았고 책임감도 없었다. 경제와 사회 인프라는 초토화되고 약탈과 방화, 살인과 폭력이 만연하였다. 수송차량을 터는 마피아와 아편의 밀매가 극성을 부렸다. 소련이 철수하고 냉전의 대리전을 끝낸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손을 떼고 내전의 참상에 눈을 감았다. 그 잔인하고 혼란스런 군벌의 상쟁(相爭)에서 탈레반이라는 사생아가 태어났다.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고 전쟁에 지친 민중을 동정하던 청교도적인 초기의 탈레반 운동은 점점 ‘왕’이 되려는 정치적 운동으로 유전(流轉)하였다.

 

 

탈레반의 법, 정글의 법

 

나지불라정권을 축출하려고 싸운 무자헤딘 중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1994년에 물라 오마르(Mullah Omar)를 중심으로 이슬람학교 학생을 모아서 탈레반을 조직했다. ‘이슬람의 제자’ 또는 ‘학생’이라는 의미의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아프간난민촌에서 자라며 이슬람을 공부한 반(半)문맹의 학생들로 파키스탄에서 전투훈련을 받은 뒤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코란에서 권위를 끌어내고 파슈툰계의 오마르가 전권을 행사하는 탈레반은 따지끄·우즈베끄·하자라계의 아프간인을 철저하게 배제했고, 탈레반의 반군이 된 그들 군벌과 격렬하게 싸웠다.

초기의 탈레반은 권력을 잡는 것보다 부패의 척결 등 아프간사회의 정화에 관심을 두었다. 어떤 군장교가 여성을 납치하여 욕보였다는 소식을 들은 오마르가 탈레반을 대동하고 그 기지를 습격하여 장교를 사살한 일이나 행인을 괴롭히는 노상강도를 제거한 경우 등이 그런 예이다. 통행세를 뜯고 재산을 약탈하며 민간인을 학살하는 다른 군벌과 달리 탈레반은 댓가를 바라지 않았고 온건해 보였다. 그 소식을 들은 옛 무자헤딘과 이슬람학생들이 칸다하르에 몰려들었고, 94년 12월에만 1만 2천명이 가입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또한 탈레반이 분열된 아프가니스탄을 통일시킬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탈레반은 우방정부를 카불에 세우려는 이슬람국가 파키스탄과 싸우디아라비아의 우수한 무기와 엄청난 자금을 받으면서 곧 제2도시 칸다하르와 헤라트를 점령하였고, 도로를 개방하고 민간인의 무장해제를 단행하며 승승장구했다. 96년 9월에는 마수드가 국방장관으로 재임하는 랍바니정부를 무너뜨리고 카불을 차지했으며, 98년에는 북부지방의 전략 요충지이며 도스툼의 근거지인 마자르-이-샤리프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다. 9·11테러가 있기 전까지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0% 이상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동정하고 지지를 끌어내던 초기와 달리 ‘과거’로 돌아갔다. 카불을 점령하자마자 92년 무자헤딘에 정권을 뺏긴 뒤 카불의 UN영내에 숨어 있던 나지불라와 그의 동생을 붙잡아서 자동차 뒤에 매달아 대통령관저를 몇바퀴 돈 다음에 나지불라를 총으로 쏘아죽였다. 나지불라의 동생도 목을 졸라서 죽였고, 나지불라의 측근들도 살해했다. 그러고 나서 나지불라 형제의 시체를 카불 시민이 볼 수 있도록 전봇대에 높이 매달았다. 탈레반이 이슬람의 관습을 거스르며 공정한 재판 없이 나지불라를 처형하고 시신을 공개한 것은 힘을 과시하여 아프간 민중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카불의 시민은 공포보다 분노를 느꼈다.

이어서 순수한 이슬람국가를 아프가니스탄에 실현하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코란은 배웠지만 이슬람의 역사나 아프간의 역사를 모르는 젊은 탈레반(대개 30세 이하)이 강제한 법과 명령은 점점 오웰이 그려낸 전체주의적 통제제도를 닮아갔다. 모든 여학교는 폐쇄되고 여자가 교육받거나 밖에서 일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여성은 꽃처럼 다뤄야 한다. 물을 주고, 집에서 혼자 보며 향기를 맡는 꽃처럼”이 그 논리였다. 또한 TV와 라디오, 인터넷 등 ‘바깥’을 알려주는 모든 정보원(情報源)을 불법화하고, 체육과 연날리기와 같은 오락활동도 금했다. 남성들은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며, 여성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부르카’(burqa)를 쓰도록 명령했다.

탈레반이 급진화된 데는 계속되는 전투와 그로 인한 민심 이탈이라는 원인 외에도 이번 공습을 초래한 빈 라덴의 영향이 있었다. 싸우디아라비아 태생의 빈 라덴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무자헤딘으로 자원하여 싸우면서 아랍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소련을 견제하려고 무자헤딘을 지원한 미국이 오늘의 그를 키웠으니, 말하자면 빈 라덴은 미국이 행사한 힘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간 빈 라덴은 90년 걸프전 당시 미국이 싸우디를 전쟁 거점으로 이용하자 ‘미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수단으로 건너갔다가 96년 아프가니스탄으로 근거를 옮겼다. 그러면서 상속받은 재산으로 알 카에다를 세계적 테러조직으로 양성했다.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곧 북부동맹으로 알려진 반(反)탈레반 연합세력이 구성되었다. 가장 강력한 조직은 랍바니 전 대통령(92〜96)과 마수드가 이끈 따지끄계였다. 주로 동북부와 서부에 거주하며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아프간 제2의 종족인 따지끄는 파슈툰이 주축인 탈레반에 가장 박해를 받았다. 카불을 뺏기고 고향에 근거를 마련한 마수드는 98년 말까지 탈레반이 점령한 동북부의 많은 영토를 탈환하며 탈레반을 괴롭혔다. 9·11테러 직전에 테러를 당한 마수드가 9월 15일 사망하자 조직을 물려받은 모하마드 파힘(Mohammad Fahim)은 92년에 마수드가 그랬듯이 북부동맹을 이끌고 카불에 들어가 정권을 접수했다. 탈레반의 오마르는 북부동맹을 결성한 도스툼·랍바니·마수드에게 사형을 선고한 바 있었다.

다음 세력은 우즈베끄계로 1992년 나지불라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분기(分岐)한 공산정권의 군인들과 구체제의 행정가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옛 무자헤딘들이 모였다. 이 조직을 이끈 변화무쌍한 도스툼 장군은 97년에 근거지인 마자르-이-샤리프에서 3천명의 탈레반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다음해에 그곳을 뺏기고 우즈베끼스딴으로 도주하였다. 작년 초에 귀환한 그는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마수드와 화해하며 북부동맹에 합류했다. 또다른 조직은 인구의 19%를 이루는 칭기즈칸의 후손인 하자라계이다. 수니파인 파슈툰과 따지끄로부터 극심한 종교적·인종적 탄압을 받은 시아파의 하자라계는 98년 마자르-이-샤리프를 점령하려는 탈레반을 저지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수천명이 학살되었다.

지난 5년간 탈레반과 투쟁한 북부동맹은 미국이 첨단무기를 동원하여 탈레반의 기지를 맹폭하는 데 힘입어 재빨리 마자르-이-샤리프, 헤라트 등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11월 13일에는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 탈레반이 수도를 포기하고 퇴각한 뒤에 이뤄진 북부동맹의 카불 입성은 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할 당시의 거울이미지였다. 카불에 들어간 북부동맹은 곧바로 탈레반이 금지한 여성의 교육과 근로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민심을 잃어서 더 빨리 패퇴한 탈레반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의도에서였다. 남자들은 수염을 깎고 터번을 벗었고 여자들도 옷을 ‘골라 입는’ 자유를 누렸다. TV와 라디오를 보고 듣거나 음악과 오락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그후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다.” 동화와 달리 전쟁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승리는 단순한 물리적 정복이 아니라 민중이 그 승리를 수용하는 데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22년 연속으로 가장 많은 난민을 배출하는 대기록(?)을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발언’하고 대응했다. 미래를 위해 과거로 돌아간 탈레반이나 소수가 살기 위해 다수를 핍박해온 군벌은 ‘왕’도 승리자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폭력을 반대하는 이유는 폭력이 선으로 보여도 그것이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수반하는 악은 영원하다”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말은 마치 예언과 같다. 어쩌면 미국이나 북부동맹의 승리는 아직 시작단계인지도 모른다.

임시정부가 전쟁 개시 1개월 만에 몰락한 탈레반의 자리에 들어섰다. 옛날의 적과 동지가 동거한 임시정부는 출발이 불안했다. 대통령은 랍바니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파슈툰 출신의 하미드 카르자이가 맡았지만, 국방(북부동맹의 사령관 파힘)·내무(유누스 카누니Younus Qanouni)·외무장관(북부동맹의 대변인 압둘라 압둘라Abdullah Abdullah) 등 요직은 탈레반과 가장 치열하게 싸운 따지끄계가 독차지했다. 이에 불만을 표시한 우즈베끄계 도스툼은 국방부 부장관직을 얻었다. 그러나 갈등의 소지는 여전하다. 임시정부는 6개월간만 통치하고, 그 안에 열릴 부족회의 ‘로야 지르가’(loya jirga)가 1년 반 동안 존재할 과도정부를 결정하지만, 각 세력과 정파는 로야 지르가의 구성과 운영방식 그리고 참여자의 배분을 결정할 특별위원회의 구성을 두고 상당한 갈등을 벌일 전망이다.

다양한 인종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반목과 대립이 내전의 원인임을 상기하면 미래를 낙관할 순 없다. 동남부에 사는 가장 많은 인구의 파슈툰계는 두라니·길자이·포풀자이 등 수많은 부족으로 세분되어 통일성이 부족하다. 탈레반의 지도층은 길자이족이고 카르자이와 자히르 샤는 포풀자이족으로 정치성향도 다르다. 아프간 난민의 85%를 차지하는 파슈툰은 ‘화약냄새를 좋아하는 보복의 전문가’라는 별명에 걸맞게 외세의 간섭이나 지배를 거부하는 전통이 강하다. 그 파슈툰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중앙정부에서 소외된 따지끄, 우즈베끄, 하자라 등 소수민족은 다수인 파슈툰에 불만이 높다. 그러나 도시중산층을 형성하며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따지끄, 중부지방에 모여 살며 자치권의 획득이 목표인 카림 칼리니가 이끄는 하자라, 1920년대 소련의 이슬람 탄압을 피해 정착한 우즈베끄는 동상이몽의 동맹관계이다.

서로 달라도 대다수 아프간 민중은 정치적 타결로 내전이 끝나길 원했지만, 외세가 개입하여 각 군벌을 지원하면서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반소 무자헤딘을 지원한 미국은 초기에 탈레반을 반(反)이란 세력으로 간주하고 우호적으로 대해 오늘을 자초했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을 비롯하여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을 적극 지원했고, 싸우디아라비아도 같은 집단의 막강한 ‘돈줄’이었다. 시아파 하자라의 든든한 배경인 이란, 따지끄계를 지원한 따지끼스딴, 우즈베끄계에게 도움을 준 우즈베끼스딴은 물론, 북부동맹을 지지한 인도와 러시아도 아프간 권력의 등식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전략적·경제적인 손익계산에 분주하다. 강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는 사라져야만 하는가?

 

 

역사는 움직이는 것!

 

사랑만 움직이는 건 아니다. 가뭄과 기아, 전쟁의 나락에 빠진 아프가니스탄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인도의 한 시사주간지가 선정한 지난 천년간 인도가 경험한 최대(최악?)의 전투 5개 중 4개가 아프간과의 전쟁이었고, 패배는 전부 인도의 몫이었다. 무려 17차례나 인도를 원정하고 엄청난 부를 약탈한 가즈니(Ghazni)의 모하마드는 오랫동안 공포의 대명사였다. “군주는 모름지기 정복을 시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군대를 데리고 끊임없이 전장을 누빈 악바르(Akbar). 카불을 장악하고 인도에 건설한 대제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악바르 황제의 그 무굴은 지금 없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19세기의 대영제국도 사라졌다. 시간은 차이와 위계를 수평화한다. 오늘의 미국은 명분과 지배의 방식은 달라도 어제의 영국과 비슷하다. 승전고를 울리는 미국이 내일의 아프가니스탄, 영국이 될지 누가 아는가. 좀더 길게 승리와 패배를 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만적인’ 탈레반과 라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과연 문명국다웠는가. 전쟁은 정녕 역사의 상수(常數)인가.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정의를 외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은 정의롭지 않았다. 보편적 서구문명의 타자로 간주된 아프간인들은 어리석거나 몽매하지 않으며 ‘왕’이 되려는 자들이 알지 못하는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거대한 동질화의 불도저를 모는 미국은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그 차이를 포용하는 진정한 승리를 도모해야 한다. 한국에서 어머니를 멀리 보낸 나와 뉴욕의 세계무역쎈터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슬픔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외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두 같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응징할 수 있어도 자제하는 것이 진정한 힘이고 용기이다. 무력을 쓰는 건 두려움의 소산이다. 자, 간디의 일화로 결말을 짓자. 어느날 간디는 힌두교인과 싸우는 파슈툰 무슬림을 만나러 산악지대로 갔다. 사람들은 호전적이라고 알려진 그들을 만나는 걸 만류했지만 간디는 듣지 않았다. 키와 덩치가 큰 파슈툰 남자들이 총을 들고 키와 몸집이 작은 간디를 막아섰다. 간디는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무섭소?” “무섭다고요?” 코웃음을 치는 남자들에게 간디가 말했다. “내가 무섭지 않다면 왜 총을 가지고 있지요? 나는 여러분이 두렵지 않기에 무기를 들지 않고 빈손으로 왔소이다.” 전쟁은 지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