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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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새로운 문명사관의 정립을 꿈꾸며

정수일 『씰크로드학』, 창작과비평사 2001

 

 

박원길 朴元吉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인류의 흘러간 역사를 살펴보면 지구상의 각 지역에서 특정의 역사·문화공동체(문명권)들이 수많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하늘의 유성처럼 반짝이다 사라져간 것도 있고 또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것도 있다.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문명들을 유심히 바라보면 거기에는 무언가 생존의 비밀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다른 문명과의 만남과 교류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란 어느 면에서 만남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스피드에 가속이 붙어 결국 어느 순간부터 운명적으로 문명과 문명 간의 대규모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늘날까지 존속되고 있는 동서양의 대표적인 문명권에는 이역의 문명권에 관한 여행기들이 그들의 자랑스런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 소중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변 문명을 과감히 흡수하여 자신들이 커가는 자양분으로 삼았다는 생존비밀의 메씨지일지도 모른다.

이질적인 문명권과의 만남은 확실히 충격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관념을 수정하지 않고는 상대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격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만남이 반드시 모두에게 유쾌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소위 세계사에 기록된 수많은 전쟁과 침략, 그로 인한 비극을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정수일(鄭守一) 선생의 인생역정을 살펴보면 매우 극적인 면이 있다. 그가 겪은 이질적인 문화와 문명의 연속적인 만남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아마 그가 꿈꾼 새로운 문명사관과 ‘문명의 속성은 충돌이 아닌 공존’이라는 그것의 명제도 그 과정에서 싹트고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문명간의 교류사를 다루는 ‘씰크로드학’은 아직 낯설고 생소한 분야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 학계가 여전히 비(非)전문화의 단계에 있고 또 세계를 바라보는 큰 시각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바다와 육지를 이은 제국, 즉 제1차 지구촌 제국인 대몽골제국사를 전공하는 필자는 정수일 선생이 제시한 미래의 역사학 연구방향(문명교류사)에 큰 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시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학문인 문명교류사를 ‘씰크로드학’이라는 명칭으로 체계화한 이 책의 내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은 서장, 전개사, 물질·정신문명 및 인적 교류, 교류의 문헌적·유물적 전거 등 모두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장에서는 씰크로드학이 한 학문분야로서 자리잡아야 하는 이유가 조목조목 설명되어 있는데,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시대에 포괄성·상대성·실용성을 갖춘 학문분야란 사실 씰크로드학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동서남북의 육로와 해로를 잇는 각종 루트들, 비단과 옥, 종교를 비롯한 각종 교류의 사례와 그를 가능케 한 역사적 배경 및 문헌적·유물적 전거를 소개하고 있다.

확실히 저자의 입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각종의 예시는 종래의 관점인 ‘동서문화교류사’를 ‘동서문명교류사’로 한단계 격상시키기에 족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저자가 이같은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그 바탕에 그동안 쌓여온 동서양 선학들의 연구업적과 함께 나름대로 이룩한 관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이 책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신라·서역교류사』(단국대학교출판부 1992)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2001)에서 조그맣게 제기된 내용들이 연구의 심화에 따라 눈덩이가 불어나듯 체계화되고 구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여기서 일일이 적시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남북 문명로 가운데 라마로·불타로·메소포타미아로를 새롭게 추가하고 그 의미를 조명한 것은 종래에 볼 수 없는 새로운 성과라 할 수 있다.

115-428분명 저자는 아랍 및 그와 연관된 주변문명, 또 그들간에 행해진 교류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러나 초원의 역사, 즉 칭기즈칸의 꿈과 길을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이 책을 읽을 때 동서문명 교류의 주요한 핵심멤버 혹은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북방민족들이 무대에서 사라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몽골고원의 중앙부에서 준가르고원과 타림분지 동편을 거쳐 티베트의 라싸와 북인도를 잇는 루트는 16세기 티베트불교(라마교)가 전파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루트이다. 이 루트는 한대(漢代) 이전부터 확인되고 있다. 이 루트를 거쳐 세계수(世界樹)나 용(龍, naga)과 같은 고대 인도의 사상이 북방으로 전입된 것이다. 또 저자가 새롭게 명명한 남북로 중 16세기 티베트불교의 북방 전입로를 나타내는 ‘라마로’라는 이름은 보는 각도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티베트의 불교를 받아들인 몽골인들은 ‘라마교’라는 용어로 자신들의 종교(불교)를 표현하지 않는다. ‘라마’란 ‘스승·현자·선생’을 뜻하는 말일 뿐이다. 따라서 ‘라마로’란 이름보다 ‘티베트불교로’라는 명칭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사실 한 사람이 방대한 동서문명 교류의 길을 정리하고 또 동서양의 수많은 자료를 섭렵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을 학문의 한 분야로 체계화하려는 과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기록자의 시각에 따라 특정지역의 문명이나 역할이 왜곡되고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학문분야로서의 씰크로드학이 첫 고고성(呱呱聲)을 울린만큼 문명교류나 이해에 관한 불협화음이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만 저자도 지적했듯이, 역사를 보는 눈에 일대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좀더 냉철한 관점에서 각 지역의 문명과 그들이 문명교류에서 행했던 역할을 바라보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키워드는 문명의 공존과 교류이다. 또 그것을 통해 오늘날 세계화라는 네트워크 속에 살아 숨쉬는 다민족·다문명공동체의 이론을 구현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가 제시한 씰크로드학이란 단지 흘러간 문명교류의 역사에 대한 정리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미래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저자가 바라는 다원화의 사회에 필수적인 지구촌 공동체이론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종래의 폐쇄적·정착적·수직적 사고방식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상과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 열린 지구촌사회, 다민족공동체의 이념이 구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대저(大著)를 집필한 노학자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면서, 그가 제시한 새로운 문명사관, 즉 ‘씰크로드학’이 세계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