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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절반의 성공, 그리고 새로운 성공을 위해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
박인하 朴仁河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어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비밀과 지나온 길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 같지만 사실은 단조롭다. 단조로움에 대한 불안을 감수하고라도 먼저 「마리이야기」의 연대기를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연대기는 한국 애니메이션 문화와 산업의 (다소 불투명하고 확인되지 않은) 지도에서 나침반 역할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핵은 감독 이성강(李成疆)이다. 그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민중미술패 ‘가는패’에 들어가 미술을 시작했다. 1994년 이성강 감독은 조각도와 페인트, 아크릴 물감이나 커다란 광목천 대신 컴퓨터를 잡았다. 컴퓨터를 통해 정지된 이미지를 움직이기 시작한 이성강 감독은 컴퓨터디자인 대전이나 쏘프트웨어 공모전 등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넋」(1995) 「연인」(1996) 「우산」(1997) 등의 작품에서 그는 캔버스에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컴퓨터 모니터로 옮겨놓는 데 성공했다.
2002년 현재,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6만 5331달러(문화관광부 「2001 문화산업백서」)를 한해 동안 생산, 수출하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산업그룹이다. 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를 구성하고 있는 제작자들과 애니메이션예술인협회를 구성하고 있는 애니메이터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둘은 90년대 상업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경험을 보유한 창작그룹이다. TV씨리즈 「하얀 마음 백구」를 제작한 뒤 현재 「오세암」을 제작중인 ‘마고21’이나, 「고인돌」과 「박재동의 TV만평」을 제작한 ‘오돌또기’,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기획실을 운영한 ‘서울무비’가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은 90년대 중반 DIY(아니면 헝그리) 정신으로 단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그룹이 있다. 이용배 감독의 「와불」 「빌보드사인」과 홍대 동아리 ‘네모라미’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배드맨」에서 시작된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은 SICAF(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공모전과 같은 데뷔의 공간을 통해 대중들과 만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공정별로 표준화된 쎌 애니메이션(cells animation)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애니메이션 테크닉을 배울 곳도 배울 사람도 없었던 젊은 작가들은 비디오테이프에 복사된 메이킹 필름을 보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들에게 컴퓨터라는 도구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체계적인 교육도, 안정적인 지원도 없이 컴퓨터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고 그것을 움직이게 해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킨 이성강 감독은 1999년 안씨(Annecy)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경쟁부문에 「덤불 속의 재」를 노미네이트시키며 일약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덤불 속의 재」를 만든 1998년, 이성강 감독은 3편의 옴니버스 연작 씨리즈(「하늘을 나는 원숭이」 「꽃」 「날개의 꿈」)를 묶은 장편 「마리이야기」를 기획했으며, 1999년 3월 첫 작품발표회 후 제작사 씨즈엔터테인먼트를 만나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 1999년 8월 SICAF의 신작기획공모전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한 「마리이야기」는 단편애니메이션 감독의 첫 장편으로 주목을 받으며 3년의 시간 동안 숙성되어갔다. 1999년 원안에 주인공으로 등장한 탐험가는 소년 남우가 되었고 숲이라는 공간은 어촌과 환상의 숲으로 변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리이야기」는 ‘환상’과 ‘현실’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갈매기가 한강을 날아 빌딩으로 들어오는 오프닝 씨퀀스 이후 어른이 된 남우는 친구 준호에게서 추억의 선물을 받는다. 그 순간 이야기는 남우와 준호의 어린시절로 돌아간다. 한적한 어촌에서 할머니, 엄마와 함께 사는 남우는 어느날 벽을 긁는다고 할머니에게 구박받는 고양이 요와 함께 낡은 등대 주위에서 놀다가 우연히 등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우는 등대 안에서 학교 앞 문방구의 구슬더미에서 보았던 신기한 구슬을 발견했는데, 구슬 속으로 빛이 스며들자 갑자기 등대 안은 새로운 세계로 변화한다. 물고기 새를 타고 낯선 숲으로 들어선 남우는 이상한 나무와 풀 들이 자라는 세상에서 구슬 속을 유영하던 소녀 마리를 만난다. 이때부터 남우는 마치 접신하듯 마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남우는 마리의 힘으로 낡은 등대에 불을 밝혀 경민 아저씨가 탄 배를 위험에서 구하게 된다.
「마리이야기」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온 여러 숙제를 해결했다. 이성강 감독의 단편에서 빛을 발한 풍부한 색감은 일본식도 미국식도 아닌 「마리이야기」 식의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러한 그래픽의 독자성은 배경과 캐릭터에서도 드러난다. 캐릭터들은 일률적인 ‘살색’을 피해 우리의 피부색에 근접해 있으며, 우리의 눈에 익숙해져 있는 검은 외곽선이 지워진 캐릭터들은 상품성이나 개성이 강조된 캐릭터가 아닌 평범하고 현실적인 ‘인물’들이다. 이야기에 따라서 변화하는 색은 마치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의 색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오프닝의 우울한 잿빛이나 마리가 등장하는 세계의 환상적인 색조, 깊은 바닷속의 짙푸른 색들은 우리가 본 바로 그 색처럼 자연스럽다. 차갑고 이질적인 느낌의 3D의 입체감에 다시 2D로 리터치(retouch)를 해 의도적으로 회화적 이미지를 강조한 테크닉 역시 현실적이다. 거대한 개 ‘몽’의 폭신한 질감이나 하늘을 날고 있는 물고기의 유영 장면도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작품의 주된 배경인 항구와 바닷가의 전경은 경주 근처 감포 바닷가에서 찾아낸 것이고 마을의 풍경은 서울 백련사 근처의 주택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교실의 모습이나 문방구의 모습, 작은 어촌 식당의 모습도 역시 현실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다.
「마리이야기」에서는 이처럼 풍부하고도 세밀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현실의 모습과 바다와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재생의 숲에 들어가는 환상의 모습이 교차한다. 많은 사람들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시절을 유년시절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유년시절에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와의 미묘한 소모전이 있고, 전학 때문에 친구와 이별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 혼자된 어머니를 좋아하는 아저씨에 대한 서운함이 있고, 말 못할 고민을 함께 나누는 고양이가 있다. 그런데 「마리이야기」에서는 유년의 기억과, 그 기억에서 자라는 성장과 환상이 섞이지 않는다. 「마리이야기」의 환상, ‘마리의 세계’는 유년(어린 남우)의 꿈이 아니라 성장한 어른(이성강 감독과 그리고 우리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이라면 공유하고 있는 꿈을 그린 「마리이야기」는 보는 사람들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드라마의 부재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마리이야기」는 기획 초기부터 드라마보다는 이미지, 플롯을 통한 써스펜스보다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려 한 작품이다. 「마리이야기」를 보아야 할 관객들은 자신들의 꿈을 스크린에서 확인해야 할 어른들인데 글쎄, 참 어려운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