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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국의 반일담론과 일본의 국수주의
박유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사회평론 2000
사나다 히로꼬 眞田博子
인하대 국문과 박사과정
그간 한국에서 떠들썩하게 벌어진 일본이 없다느니 뭐니 하는 다분히 감정적인 담론에 나는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한국의 반일감정보다는 일본의 우익담론이라, 쇠말뚝이든 뭐든 확실한 근거만 있다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증거를 들고 일본 역사학회에 나가서 당당하게 설명도 하고 또 일본 국수주의자들을 찾아가 직접 대결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굴뚝같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주로 한국 내에서만 높고, 어쩌다 일본에서 번역되어 읽힌다 하더라도 그들의 글이 한국의 학문수준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만 심어주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지금까지 한국의 그런 반일담론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일본에서 천황제가 그런 장치로 기능했던 것처럼, 대개의 경우 그것이 책임의 소실점(消失點)으로서의 ‘일본’ 또는 ‘일제’ 비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쁜 일의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 한국 내에서는 아무도 상처입지 않으며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된다.
한국 지식인의 반일담론에 대한 비판은 기본적으로 한국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뜻에서 박유하(朴裕河) 교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는 당연히 나와야 할 책이었다. 이 책은 주로 90년대에 나온 반일론자들의 담론을 총망라하고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논파하였다. 각각의 담론의 모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었지만, 쟁쟁한 인사들을 정면으로 규탄하는 저자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 성실함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내가 이 책에 대해 제기할 이의는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먼저 밝히면서, 그래도 내 의견과 약간씩 다른 점을 몇가지 이야기해보겠다.
첫째, “이런 식(『일본은 없다』의 기술에 대하여─인용자)의 무지와 편견과 분노와 질시가 깔린 감정적 ‘일본 성토’물들이 일본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실처럼 읽혀지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이 한국의 90년대였다”(71면)는 저자의 견해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정말 『일본은 없다』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저자는 “광고(『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신문광고─인용자)에 게재된 독자의 목소리라는 것을 신뢰한다면, 독자들의 반응이 앞서의 광고가 요구하던 것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83면)고 했지만, 광고란 원래 그대로 신뢰할 것이 못 된다. 설령 독자가 반대의견을 보내온다 하더라도 광고에 그런 편지를 활용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읽은 이의 상당수는 그 내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잠깐 동안의 우월감과 싸구려 무협소설에서 느끼는 것 같은 카타르씨스를 즐긴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들 담론이 ‘일본사람들은 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일본사회는 신분이동이 어렵다’ 등 일본인인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정착시킨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액면 그대로 수용된 것은 아닐 것이다.
둘째, 저자는 영화 「철도원」이 공적인 부분을 가족보다 중요시했던 지난 시대의 슬픈 이야기(196면)라고 했는데, 그것이 꼭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철도원」의 역장이 ‘공’적인 것을 위해 ‘사’적인 것을 희생시켰다 해도 그 ‘공’이라는 게 그대로 국가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의 행동양식을 결정한 것은 자신의 직업, 즉 정확하고 안전한 기차에 손님을 태운다는 철도원의 직분에 대한 긍지이며 이는 철도회사가 아니라 이용객에 대해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직업의식은 큰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코미디언은 사람을 웃기기 위해 생활의 모든 것을 건다. ‘예(藝)’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태도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미덕이며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중에 부모가 돌아가시는 경우 임종을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범속한 아저씨들은 그렇게까지 할 용기가 없으므로, 스크린 속의 멋있는 역장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정도로 만족한다(참고로 말하면, 역장 역할을 한 타까꾸라 켄(高倉健)이라는 배우는 오랫동안 일본 아저씨들의 우상으로 군림해왔다).
셋째, ‘교활’한 일본인의 이미지를 거론할 때 저자는 100년 전 일본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교활’이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데(166면), 메이지시대에 중국인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은 뭐니뭐니해도 청일전쟁 전후에 메이지정부가 의도적으로 왜곡된 중국인의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유포한 영향이 클 것이다. 청나라의 중심은 한족이 아닌 만주족 즉 ‘오랑캐’였기 때문에 중국은 이제 존경할 필요가 없는 야만의 나라가 되었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교활하고 욕심 많은 변발의 중국인을 그린 만화가 신문을 장식했다(그리고 그런 중국인의 이미지는 한국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한국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열등민족처럼 왜곡했던 것이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해방 후에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해방감에서 얼마간의 폭력을 행사”(166면)한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이미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일본인들 머릿속에 박혀 있었을 것이다. 전후 한국의 반일교육이라는 것도 어쩌면 일본의 그러한 식민지교육의 방법을 활용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배달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한국 국수주의자들의 어조와 야마또(大和)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논리에는 적지 않은 유사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덧붙인다면, 이 책에서 ‘민족주의’라는 말을 배타적 국수주의와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다. 아무튼 한국 지식인이 한국의 반일담론을 비판할 때는 반드시 일본에 대한 비판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이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가장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