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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초, 또는 ‘최후의 시작’을 위한 진리

G. 포이어스타인 외 『최초의 문명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사군자 2000

 

 

이옥순 李玉順

숭실대 강사, 인도사

 

 

어느날 명상하는 성자의 눈앞에 내세가 섬광처럼 지나갔다. 성자는 곧 제자를 불렀다. “난 곧 죽어서 돼지로 환생한다네. 저기 마당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암퇘지의 네번째 새끼로 태어날 거야. 이마에 표시가 있어서 금세 알아볼 걸세. 내가 나오면 날카로운 칼로 죽여주게나. 돼지로 살고 싶진 않네.” 제자는 슬펐지만 그러마고 대답했다. 곧 성자는 죽고 돼지는 새끼를 낳았다. 과연 네번째로 나온 새끼돼지의 이마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며칠 후 제자가 새끼돼지를 죽이려는 찰나에 갑자기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날 죽이지 말게!” 새끼돼지는 깜짝 놀란 제자에게 말을 이었다. “날 내버려두게. 자네에게 부탁할 때는 돼지의  삶을 몰랐어. 막상 돼지가 되어보니 아주 좋네. 그냥 돼지로 살 테야.”

이 이야기의 배경인 인도는 선입견을 가진 백인 ‘성자’, 곧 근대 서양인의 시선에 한동안 묶여지냈다. 그래서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인도, 서양인이 이해한 인도가 인도의 참모습인 줄 알았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끈 ‘진리의 투쟁(싸띠아그라하)’으로 독립을 일궈낸 인도는 ‘성자’의 시선 너머로 ‘인도의 진리’를 밝히는 과제도 부여받았다. 그래서인지 인도정부는 “진리는 항상 승리한다”는 정치구호를 즐겨 쓴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 하나의 문화’를 거부하는 인도에서 하나의 진리는 곧바로 또다른 진리에 의해 부정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진리 중에서 누구의 진리, 어떤 진리가 승리하는 걸까?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에 나오는 진리부(眞理部)는 당(黨)이 언제나 옳다는 사실을 보이려고 과거를 자꾸 개정한다. 그리하여 ‘과거’와 ‘진리’는 당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버전으로 바뀌고 재구성된다. 오웰이 은유한, 독일의 히틀러 시대에 자행된 과거의 ‘발명’과 ‘발견’은, 이른바 진리를 증명할 만한 역사자료가 불충분하고 인간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고대사 분야에서 일어난다. 최근 인도에서 일단의 학자들이 벌이는 ‘찬란한 인도 고대사 만들기’도 구비전통과 상대적 진리가 공존하는 인도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옛날과 오늘의 경쟁국 영국과 파키스탄에 ‘인도의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권력에의 의지에 다름아니다.

110-437『최초의 문명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In Search of the Cradle of Civilization, 정광식 옮김)는 ‘밖’에서 인도를 바라보는 서양과 ‘안’에서 자신을 비추는 인도의 중간지점에 자리잡고, 고대 인도가 세계문명의 요람이라는 진리를 상상력으로 발견한 새로운 고대사이다. 책은 합리적이며 진보를 거듭한 근대 서양의 타자인 ‘종교적 고대 인도’라는 외부의 시각에, 물질주의적 근대 서양의 대안인 ‘옛날의 황금시대’라는 내부의 시각을 교묘하게 연결한다. 우리 현대인이 고대 인도의 영성(靈性)을 배우면 세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다소 순진한 결론으로 손을 잡은 저자들이 요가, 싼스크리트, 베다를 전공한 서양인 두 명과 한 명의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이질적인 결합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게오르그 포이어스타인 등은 서양문명의 뿌리인 고대 인도의 정신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리그 베다의 원문을 인용하고 기존의 해석을 반박하면서 현재 기원전 1300〜1000년경으로 간주되는 베다 시대를 기원전 3천년대 이전으로 대폭 상향조정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베다 시대보다 먼저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인더스강 유역의 하랍파를 비롯한 도시문명은 리그 베다를 저술한, 곧 인도-유럽어를 사용한 아리안의 문명으로 바뀌고, 그 아리안은 외부에서 ‘침입’하지 않고 원래부터 인도에서 살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자의적인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고도(高度)의 고대 문명을 조명한 역사의 딜레땅뜨인 저자들은 사료가 부족해서 고대의 진리를 밝히지 못하는 역사가에게 소리친다. “여기에 베다가 있다!”

저자들은 어림짐작만 가능한 고고학적 유물보다 충실하게 구전되어 기록된 리그 베다가 고대사에 훨씬 많은 단서를 제공한다고 역설한다. 그렇지만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모두 혼자서 했을까?”라는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시처럼, 소수 사제계층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베다에 근거하여 구성된 역사는 다수인의 삶과 문화를 배제하고 역사의 일부 상황을 전체화하는 문제점이 있다. 또 저자들이 찬미하는 리그 베다는 고대 엘리뜨의 정신세계를 알려주기는 하지만 ‘장삼이사’의 물질주의적 삶은 시사하지 않는다. 다양한 계층의 다채로운 삶을 그대로 노출하는 고고학적 유물과의 비교검토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의 제1부 ‘과거로의 여행’은 인도 고대문명이 세계 최고(最古)라는 가설과 그 논증으로 짜여진 역사서이다. 리그 베다를 선대(先代)로 한껏 끌어올린 저자들의 주장이 최근에 발굴된 여러 유적의 연대추정과 근접하여 흥미롭다. 힌두 애국자들이 파키스탄의 인더스 문명에 대항하여 ‘발견’한, 싸라스바띠 문명과 연계하여 추적한 인더스-싸라스바띠 문명도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저자들의 말대로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이 ‘진리’가 되기에는 시간의 집적이 필요해 보인다. 제2부 ‘고대 인도의 영광’은 세계 최고(最高)의 유산인 베다에 대한 찬가이자, ‘신자’인 저자들의 독실한 믿음이 담긴 ‘베다교’ 해설서이다. 책의 행간에 위치한 베다와 인도의 영성에 대한 감탄의 이정표는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독자에게 주의를 일깨운다.

그러나 저자들이 ‘빛’과 ‘지혜’의 보고(寶庫)인 과거의 인도를 찬양할수록 헤겔이 말한 ‘불변(不變)의 인도’와 ‘볼 것’이 없는 서글픈 현재의 인도가 두드러진다. 베다 시대를 후대로 늦춘 고대사 서술을 식민사관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오늘을 부정하고 ‘옛날의 금잔디 동산’만 강조하는 이 책도 종속적인 운명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들이 영적 유산을 통해 인도에게 보내는 사랑은 눈부시다. 그러나 사랑은 역사처럼 부분에 대한 애증(愛憎)이 아니라 총체적 이해와 껴안기가 아닌가. 그리고 역사는 사랑처럼 “신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는 우파니샤드의 말씀과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